연예인 발해 멸망의 시발점, 폐왕 대원의의 정변 (完)[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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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푸히헤헤햏ㅎ 댓글 0건 조회 111회 작성일 24-03-15 2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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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 4편에 이은 마지막 편입니다. 사실 4편이 끝이지만, 너무 글이 길어져서 두개로 나눈 것입니다.

너무 길다고 느끼시는 분은 맨 아래의 결론만 보셔도 무방합니다.





해외에 나가는 말갈의 사신이 점점 줄어들기 시작하여 아예 사라짐.




-발해가 세워진 초창기에는 분명히 기록을 보면, 발해 사신이 있고, 말갈 사신이 따로 존재합니다. 무왕~문왕때에는

이들이 함께 해외에 방문하기도 하고, 서로 따로 가기도 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문왕 이후에 그러한 모습은 완전히 사라집니다. 이는 곧 처음에는 발해와 따로였으며, 처음에는 발해와 명확히 구분되고 따로 정체성을 가지던 말갈이 발해에 복속되고 합쳐지면서 발해의 사신만이 사서에 보이게 되면서, 발해라는 국가에 서서히 융합되고 있는 것을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문왕 이후로는 흑수를 제외하고 거의 보이지 않으며, 그 흑수조차도 815년 이후로 선왕 시기부터는 조공표에 보이지 않습니다. 흑수가 다시 중국에 조공을 단독으로 하는 때는 발해 말기인 924년으로, 이때 흑수는 발해의 통치권에서 다시 떨어져 나가 있던 것으로 보입니다.말갈의 첫 조공기록은 위에서 언급했던, 『책부원구』 971권 조공편에 나오는데, 그 최초는 714년입니다.




『책부원구』 971권 조공편 中


-2년(714년) 2월, 불열말갈 수령 실이몽, 월희 대수령 오시가몽, 철리부락 대수령 달허리 등이 내조했다.




이후로는 말갈 사신과 발해 사신이 번갈아 나오기도 하고 같이 나오기도 하다가, 문왕 중기인 752년 이후로는 다시

말갈 사신의 기사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문왕의 말년 가까이 된 792년에 말갈의 사신이 다시 표에 보입니다. 그러더니 802년에는 우루와 월희의 수령이 중국을 방문하고, 815년에,



위와 동일(책부원구 조공편)

-10년(815년) 2월 흑수추장 11명, 7월에 발해왕자 대정준 등 100여명이 와서 함께 조공했다



라는 기사를 끝으로 924년까지 말갈의 조공기록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지금 써놓은 이 시기가, 발해의 혼란기 때 말갈이 이탈하여 독자적으로 사신을 보내는 시기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외의 시간, 즉 문왕 초중기 이후부터 문왕의 말년까지, 그리고 강왕의 시대에는 1번만 기록이 되어 있고, 이후

선왕부터는 발해가 망하기 직전까지 말갈의 사신이 다시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이 시기가 말갈이 발해와 자의적으로 함께 살던, 타의적으로 복속하여 같이 살던, 어쨌거나 같이 살면서 융화되고 있던 시기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발해족의 형성과 발해족에 대해 이야기하는 학자분들은 이것을 발해의 이종족 통합이 가끔씩 말갈들, 특히 흑수가 이탈을 반복한것 외에는 그럭저럭 잘 되고 있었다는 의미로도 사용할 수 있습니다.

또한, 흑수 혹은 다른 말갈들이 사서에 보이는 때는, 그 말갈들이 발해에 종속되지 않았음을 나타내기 때문에,

말갈들이 단독으로 사서에 나타난다면 발해에 반드시 뭔 일이 났거나, 국력이 약화된 징조라고 보아도 될 정도입니다.



사서에 말갈이 안보인다=발해가 정상이거나 강건한 상태이다


사서에 말갈이 보인다=발해가 정상이 아니거나 약화된 상태이다




이렇게 해석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입니다.



그 예를 들면, 위의 사료에 의거하여 714년부터 사서에 나온 말갈의 조공기록은 고왕을 지나 무왕대까지 이어지다가,

724년을 끝으로 당 현종 개원 13년, 즉 725년부터 한동안 보이지 않게 됩니다. 이후에 책부원구 조공항목에 나오는 말갈은 '발해말갈' 뿐입니다. 이 발해말갈이 당연히 발해를 가리킨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 때는, 무왕이 대문예를 시켜서 흑수말갈을 치라고 명했으나, 대문예가 달아난 다음 대일하가 말갈을 정황상 복속시키는 데에 성공한 시기입니다. 그래서 이후 한동안 말갈의 기사가 나오지 않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특이할 점은, 이후에 개원 23년, 즉 735년에 발해의 무왕이 아우 대번을 당에 보내는데, 이때 이전에 당에 사신을

보낸 적이 있는 철리말갈, 불열말갈, 월희말갈이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치는데, 이때는 '말갈'로 부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철리부락', '불열부락', '월희부락'으로 이르고 있습니다. 마치 이 셋의 말갈들이 더 큰 무언가 강대한 세력 아래에 있는 집단인것처럼 말입니다. 이들은 철리, 불열, 월희말갈의 일부 중 발해에 복속된 촌락들이 아닐까 하고 있습니다. 발해를 발해말갈로서

말갈들의 두목처럼 써넣은 전적이 있는 당서의 서술이기 때문에, 발해'말갈' 에 복속된 다른 말갈들이다. 라는 뉘앙스로

썼을 가능성도 농후합니다. 그리고 이 당서의 서술은 상황과 발해와의 관계에 따라 자꾸 명칭이 왔다갔다 합니다.



왜냐하면 개원 27년, 즉 739년, 문왕이 즉위한지 얼마 안되는 때에 '불열말갈'이 사신을 보내 조공을 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개원 28년, '월희말갈'과 '철리말갈'이 사신을 보내 조공했다는 기록이 함께 올라옵니다. 개원 29년, 741년에는 월희말갈과 불열말갈이 또 사신을 보냅니다.



이들의 이름이 왜 이런 식으로 부락에서 말갈로 왔다갔다 하는지 생각해보면, 아까 말한,


전자는 발해에게 복속한 철리,불열,월희말갈이 보낸 사신이며, 후자는 발해에게 복속하지 않은 철리,불열,월희말갈의

세력이 보낸 사신이다.


혹은,


전자의 시간인 개원 23년까지 이 셋의 말갈은 발해에 복속하고 있었으나, 그 사이 737년에 무왕이 죽으면서

일시적으로 발해에서 이탈하였으며, 그래서 독자적으로 사신을 보내었다.


둘 중 하나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후자를 지지합니다. 발해'말갈' 에서 벗어나서 독립을 했기 때문에,

다시 '부락'이 아니라 독립체로서 '말갈'이라고 부른 것이 아닐까 추측중입니다.



강력한 왕이 사망하고 다음 왕이 대를 이으면 죽은 왕에게 복속했던 이민족들과

복속국들이 이탈하는 경우가 꽤 생깁니다. 이 사례는 역사에서도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아버지 필리포스 2세가 사망한 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왕이 되자 그리스의 많은 도시가 이탈한 사례도 존재하며,

칭기즈칸의 아버지인 예수게이가 사망하자 그 밑에 있던 부족들이 이탈한 사례도 있듯이 비슷한 사례일 가능성도 보입니다.



그리고 이 말갈들의 향연은, 이후 747년에 다시 사서에 조공이 등장하는 흑수말갈을 제외하면 더이상 다른 말갈은 나오지 않는 것으로 보아, 747년 이전에 문왕이 다시 말갈들을 통합하는 데에 성공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이 때에 다시 당에 사신을 보내는 흑수말갈 역시 752년 이후 조공기록이 끊어지는 것을 보면 흑수말갈 역시 이 때 재복속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철리말갈이 딱 한번, 779년도에 발해 사신과 같이 와서는 발해 사신의 윗자리에 앉기를 다투었다는 사료가 존재합니다.



『속일본기』 35권 中,11월 을해일에 검교발해인사에게 내린 칙령 中


-병자일에 검교발해인사가 말하기를 철리국의 관인이 고설창(발해사신) 윗자리에 앉기를 다투고 업신여기고 있으니,

태정관이 처분해 주십시오.




다른 말갈의 기사도 보이지 않고, 그리고 이 철리말갈의 관원이 딱 한번 난리 친 것으로 헤프닝이 있는 이후 철리말갈

역시 딱히 별다른 문제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면, 이 779년의 다툼은 발해사신을 따라온 철리말갈 사신의 서로 다툼 혹은 철리말갈이 발해에 복속된지 얼마 안되어 생긴 트러블이 아닐까 합니다.


이후 말갈의 사신은 보이지 않다가, 문왕의 재위 이후 발해가 대원의의 반란으로 인해 혼란스러워지고 쇠퇴한 이후,

강왕이 발해를 다시 되살리고 있는 와중인 802년에 우루말갈, 월희말갈이 조공했다고 딱 한번 나옵니다.

정황상 이때 문왕 사후 발해가 흔들리고 강왕이 그것을 수습하는 동안 말갈들이 이탈한 것이라고 보입니다.



이후 815년에 흑수 추장 11명이 당에 입조하여 조공한 기록을 끝으로, 말갈세력은 발해에 모두 통합되었는지 더이상 말갈의 기록은 보이지 않습니다. 이후 선왕때부터 말갈이 발해에 복속하여 발해의 밑에 들어갔음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이후 흑수말갈만이 924년에 당에 다시 조공을 한 것으로 보아, 나머지 말갈들은 발해가 멸망할 때까지 발해의 밑에 그대로 있는 상황이고, 흑수말갈만이 계속 이탈과 복속을 반복한 것으로 판단됩니다. 그 사이기간인 815년이후 920년대까지 나머지 말갈은 발해와 동화가 이루어져, 고구려인만의 나라와 다른, 고구려인에 다른 여러 종족이 합쳐진, 소위 말하는 발해족을 이루는 데에 동조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계루군왕으로 대표되는 고구려의 영향이 남아 있는 단어들이 이때 이후로 자취를 감춤.




우선 그 중에 확실히 고왕~문왕 시절까지는 보이는 고구려의 색채이지만, 이후에 나오지 않는 것을 따져본다면,

'계루군왕' 이라는 단어가 존재합니다.이 계루군왕이라는 단어는 우선 고왕 대조영의 사망때, 그리고 무왕때에 나옵니다.



『구당서』 발해말갈전 中


-대조영은 고구려와 말갈의 무리들을 연합하여 이해고에 항거했다..(중략) 대조영은 드디어 자기의 무리를 이끌고 동쪽으로 계루부의 옛땅을 차지한 후, 동모산에 웅거하여 성을 쌓고 살았다. 대조영이 굳세고 용맹스러우며 군사를 잘 지휘했으므로 말갈의 무리들과 고구려의 잔여들이 점점 그에게 귀부하였다.(중략) 풍속은 고구려와 거란과 같으며 자못 문자가 있고 전적이 있다.(중략)


개원 7년(719)에 대조영이 죽었다. 당현종이 사절을 파견하여 조문하고 이어 그의 적자인 계루군왕 대무예를 책립하여 아버지를 이어 좌효위대장군 발해군왕 홀한주도독으로 삼았다.





여기를 보면, 그 다음왕이자 적자인 무왕이 계루군왕 작위를 가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꽤 의미심장한

뜻으로서, 계루군왕의 '계루'가 무엇을 뜻하는지 생각해보면 더욱 고구려와 발해의 상관관계를 눈치챌 수 있습니다.


바로 이 계루는 눈치챈 분도 많으시겠지만, 고구려 5부 중 왕을 배출했던 곳입니다. 그리고 고구려의 왕권을 상징하는 단어로 쓰이기도 했습니다. 이 계루부의 군왕이라는 뜻을 가진 계루군왕을 발해의 태자, 즉 왕을 이를 장자가 가지고 있다는 것은, 발해가 고구려 그 자체이며 고구려의 후계국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장치이기도 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양상은 비슷한 시기를 다룬, 『책부원구』 의 964권 중에서도 등장합니다.


-개원 7년 3월, 홀한주도독 발해군왕 대조영이 죽자 사신을 보내 위로하고 그 적자인 계루군왕 대무예에게 좌효위대장군 발해군왕 홀한주도독을 이어받게 했다. 8년 8월에 발해군왕 좌효위대장군 대무예의 큰아들인 대도리행을 계루군왕으로 삼았다. 26년에 발해 계루군왕 대무예가 병으로 죽고 그 아들 대흠무가 왕위를 이었다.



계루군왕인 대무예, 즉 무왕에게 발해왕위를 이어받게 한 것이 나옵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년도에 무왕의 큰아들인

대도리행을 계루군왕으로 삼았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를 보면, 계루군왕이라는 작위는 발해 초반기에 발해왕의 뒤를 이를 태자를 계루군왕이라고 일컬은 것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계루군왕 작위는 마지막으로 계루군왕 작위를 받은 것으로 확인되는 대도리행이 728년에 사망한 이후 보이지 않습니다. 당현종 26년조에 실린, 발해 계루군왕 대무예 운운 한 것은 별 의미 없이 쓴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합니다. 그 계루군왕 작위를 아들인 대도리행이 가지고 있었는데 뜬금없이 그 아비인 무왕이 다시 가져갈 리는 없습니다.



무왕 이후 문왕이 왕위를 계승 할 때부터 이 계루군왕이라는 작위는 사서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는 문왕이 무왕의 장자가 아니어서일 가능성도 있고, 단순히 기록 누락일수도 있었겠지만, 관련 사료가 없기 때문에 정확히 알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 계루군왕이라는 칭호는 이후 발해가 멸망할 때까지 영영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후 발해에서의 태자의 호칭이 '부왕' 으로 변경된 것이 매우 많은 사서에서 입증되기 때문에, 계루군왕 칭호는 사실상 이 이후로는 쓰이지 않는다는 것이 입증되었습니다.


그 중 하나인 신당서 발해전에서 가져온 사료를 언급하면,


-풍속에 왕을 가독부, 성왕, 기하라고 했고, 왕의 명령을 교 라고 했다. 왕의 아버지를 노왕, 어머니를 태비, 아내를 귀비, 맏아들을 '부왕'이라 했으며 모든 아들을 왕자라고 했다.(이 내용은 많은 사서에 똑같은 내용으로 복붙해서 나오는 것을 보아, 하나의 내용으로 여러 사서에서 복붙한 것이 확실합니다.)



이라 되어 있습니다. 맏아들에게 주던 성격 역시 똑같은 것으로 보아서, 계루군왕은 부왕처럼 맏아들, 즉 왕위를 이어받을 아들에게 다른 왕자들과의 차별성을 위해 준 작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문왕은 어쩌면 맏이가 아니라서 계루군왕 작위를 받지 못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리고 777년에 죽은 정혜공주 묘비에 '동궁'의 누나 라는 표현이 들어가 있는 것을 보면,(이 동궁은 문왕의 맏아들로 인증이 된 대굉림을 뜻한다고 봅니다.)계루군왕 칭호는 확실히 이후 사라진 것으로 판단됩니다.


또한, 발해 초기에는 전조인 고구려의 제도와 지역명을 당의 제도와 함께 섞어 쓰다가, 문왕 중기 이후가 되야 비로소 발해의 독자적인 관직과 당을 본따 만든 관직이 나옵니다.


문왕 초기에 보이던 약홀주, 목저주, 현토주가 그것들에 속하며, 이 명칭들은 이때에만 나오고, 두 번 다시는 역사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후 문왕이 체제정비 이후 나라를 개편했으며, 훗날 대이진 시기에 5경 15부 62주가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문왕이 당의 제도를 받아들여 나라를 개편할 때에 이런 초기의 명칭들은 사라지고 정리된 명칭으로 통일되었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쩌면 맨 위에 써놓은 계루군왕 역시 이 때 사라져 부왕으로 바뀌었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 더 예를 들어보자면, 비교적 문왕 중반기인 777년에 죽은 정혜공주의 묘는 고구려식을 따르는데,

이후에 문왕 후반부인 792년에 죽은 정효공주는 당나라식의 묘를 사용한 것을 보고, 정혜공주의 몰년이

마침 문왕이 고려 칭호를 쓰고 국력과 왕권을 강화하려던 시기인 것을 생각하면 상당히 의미심장합니다.

이후 문왕이 고려 칭호를 폐지하고 왕권강화를 잠시 집어넣고 조화를 중시한 것을 보면 이 시기가 바로

문왕과 그 정부, 그리고 발해라는 나라가 고구려색을 강하게 띠던 시기가 아닐까 하고 생각합니다.




★갑작스러운 고려 국호의 소멸



일본에 보낸 사신이 발해가 아닌 고려 국호를 몇 번 쓴 것은 교과서에도 실려 있을 정도로 유명한 사실입니다.

발해가 일본에 보낸 사신측으로 고려 국호를 쓴 것은 759년이 그 최초입니다. 마침 759년은 문왕이 안사의 난 이후로

왕권 강화와 국내의 통치체제 정립을 위해 상경으로 천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입니다.


따라서 이 고려 국호를 쓴것도 왕권강화와 그를 위한 고구려계의 지지를 받고 힘을 끌어 모으는 이데올로기 확립으로 볼만한 여지가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고려 국호는 한동안 계속 사용됩니다.



『속일본기』 35권 中


-12월 기축일(778년)에 정6위상 대망공광도를 송고려객사로 삼았다.



그리고 이 고려 국호 사용의 마지막으로 확인되는 것이, 778년 연간에 보낸 발해의 서신과 일본에서 발해사신에게

환송하는 과정에서 나온 일본측의 고려국호 사용례입니다. 이후로 고려국호는 보이지 않습니다. 일본 측에서도 발해 측이 자신들을 고려라고 부르자, 여기 화답해서 자신들도 발해를 고려라고 불러주었는데, 바로 뒤인 779년 정월에 써 있는 속일본기의 기사에는 고려는 간데 없고 발해가 다시 등장합니다.



위와 동일(속일본기 35권)


-10년(779년) 정월 임인 초하루에 발해국이 헌가대부 사빈소령 장선수 등을 보내 입조하고 새해를 축하했다.

병오일에 발해사신 장선수가 특산품을 바치고 아뢰기를..(후략)




불과 얼마 전까지 고려라고 불러주다 갑자기 발해로 롤백을 시킵니다. 따라서 발해의 고려국호 사용은

이 778년도가 마지막이며, 이후로는 폐지하고 다시 발해로 되돌린 것으로 보입니다. 역사에서 보력 연호를 중지한

때는 명확하게 정해지지 않고 있지만, 저는 778년 12월까지 발해가 고려로 불리우고 779년 정월부터는 다시 발해로

일본에서 불리우는 것을 보아서 보력 연호의 사용은 774년에서 778년까지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를 살펴보았을때, 756년 이후 문왕의 왕권강화, 고구려 계승 의지가 제일 타올랐던 것이 774년 이후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보력이라는 연호 자체가 왕권강화를 꾀하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774년에서 778년 사이,모종의 이유로 문왕은 왕권강화를 접어두게 되고, 고려 국호를 취소하여 고구려 계승의지를 철회하게 됩니다. 이 사이에 발해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제대로 기록된 것이 없지만, 왕권강화에만 신경 쓸 수 없고 고구려계만을 신경 쓸

수 없을 정도로 국내에서 반발이나 백성들의 불만표출, 반란이 있었을 가능성도 존재합니다.


확실한 것은 완전히 알 수 없지만, 문왕의 왕권강화 의지였던 보력 연호의 취소와, 고려 국호의 사용취소가 거의 동일한 시기에 이루어진 것은, 왕권 강화작업과 고구려 계승 의지가 여기서부터 중지되고 이후의 정쟁을 암시하는 장치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결론


폐왕 대원의는, 즉위 이후 나라를 정립하고 나라의 제도를 바로잡고, 왕권을 강화시키며 그와 맞는 이데올로기로

고구려 계승주의를 표방하던 문왕을 바로 옆에서 도운 중신이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문왕이 3성 6부제로 대표되는 당의 제도도입과, 5경의 설립, 지방체제 개편으로 인한 나라 정비에 들어가고, 본격적인 왕권강화작업과수도 이전, 수많은 축성과 궁궐 건설, 이후에 모종의 이유로 왕권강화정책과 고구려 계승의지를 접어둔 시기까지 문왕과 함께한 가까운 친척이자 동행자였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제 추측이 맞다면 대원의는 지금까지 문왕과 함께 해 왔는데, 국력을 갉아먹고 백성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면서까지

이뤄오던 것들을 하루아침에 몽땅 팽개친 문왕에게 적지 않은 배신감과 분노를 느꼈을 수도 있으며, 백성들의 마음과 고구려계 국민, 관료들을 통합하여 문왕에게 반기를 들었을 가능성이 꽤 존재합니다. (물론 다른 이유가 존재할 가능성도 높습니다.)



지금까지 그 정황과 추측, 나름의 이유를 적었지만, 아직 연구가 부족하고 이 부분에 대한 전설, 연구가 적어서 우선은 이렇게 추론 식으로 이야기를 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아쉽습니다.


현재 교과서에서도, 우리도 발해의 체제를 정립하고 발해의 기틀을 만들어 해동성국의 길을 닦은 군주라고 생각되는

문왕의 이면을 어쩌면 대원의와 문왕 당시의 발해 상황을 생각해 보면서 회의적으로 바라볼 여지가 있다는 것을

생각나게 해 준 시간이었습니다. 축성전설과 진짜로 연결 고증이 되는 상경, 동경, 구국, 중경지역의 수많은 성과 요새들, 그리고 수도를 옮길 때마다 지어야 했을 궁궐과 시설들. 백성들의 분노와 한탄이 없을 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문제들과 왕권강화, 고구려 계승의 흐지부지화가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사건들과 겹쳐서 결국 대원의가

문왕에게 반기를 들고 문왕을 시해한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을 요즘 강하게 하고 있습니다.


저 역시 이 글을 쓰면서 축성전설을 다시 보고, 고고학계에서 내놓은 발해 수도 주변 성과 요새 현황을 보니 어쩌면,

문왕은 우리에게 알려진 것 그대로 칭송받는 왕이었을 수도 있지만, 중후반부에 들어서서 원성과 불만, 국론분열을

야기한 왕이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도 함께 듭니다.


마치 우리에게 유명한 이스라엘의 솔로몬 왕이라던지, 역시말년이 상당히 좋지 않았던 당현종과 같이 말입니다.

문왕 시기가 어떻게 흘러갔던 간에, 문왕의 시기는 우리에게 알려진 좋은 모습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것과,

문왕의 후반부 재위기간은 많은 실패와 분열, 싸움과 혼돈이 있던 시기라는 것은 확실하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리고 대원의가 정확하게 반란을 일으킨 까닭을 아직까지는 완전히 파악할 수 없지만, 어쩌면 그에게도

확고한 명분이 있었을 지 모른다는 생각이 계속 들고 있습니다. 핑계없는 무덤은 없다지만 말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대원의가 발해사에 남긴 영향을 꼽자면,



고왕 대조영의 직계 핏줄을 거의 끊어버림으로서 대조영 직계가 강왕 직계만 남을 정도로 얼마 남지 않게 되었고,(조카인 대능신은 강왕이 왕위를 받은 이후 시점부터는 방계로 속하게 됩니다.) 그 아들 3형제도 얼마 재위를 하지 못하고 죽음으로서 이후 대인수로 대표되는 대야발계가 발해의 왕위를 가져가는 것을 간접적으로 도움으로서, 남은 대조영 방계와 대야발계의 대립과 다툼, 국가의 혼란을 본의아니게 야기시킨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이 계속된 대립이 882년의 정변으로 그대로 이어졌고, 이때 왕위에 오르는 대위해가 진짜로 대조영 방계라면, 폐왕 대원의는 발해 역사 그 자체를 바꾸고, 더 어지럽게 만들고, 휘저어 놓는 지대한 역할을 한 인물이 확실하다고 생각합니다.


이후 대위해와 대인선이 사실상 친위 독재정치를 펼치고 대야발계를 아예 배제해 버린 것 때문에, 이들이 900년대 이후 거란과의 파워게임으로 정신없을 925년에 반란 내지 내전이 터졌으며, 이 사건은 발해 멸망의 최대 원인이라고 저는 추측하고 있습니다. (이 내용 역시 다음에 글로 쓸겁니다.)


그래서 이 인물이 비록 1년 남짓 재위한 찬탈자이지만, 발해사 전체의 이후 방향을 완전히 뒤집어 바꾸어 버린 인물이라고 저는 판단합니다. 그리고 이게 다 사실이라면, 폐왕 대원의는 발해의 역사를 바꾸고, 동시에 발해의 내분, 다툼 원인을 제공했으며, 마지막으로 발해의 직접적인 멸망원인인 왕계의 분열과 다툼을 간접적으로 본의 아니게 제공한 인물이 아닐까 하고 평하고 싶습니다.



이상입니다.






지금까지 쓴 글들




5경 15부 62주에 대한 오류 가능성 검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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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 국호는 발해가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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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사 최대의 미스터리, 882년 정변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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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재서열사건'은 왜 일어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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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과 설화로 살펴본, 발해 문왕 시기의 어두운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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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 멸망의 시발점, 폐왕 대원의의 정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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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의 정변 2편

-https://www.fmkorea.com/index.php?document_srl=6817562512&s_comment_srl=6817568874#comment_6817568874


문왕과 강왕의 관계에 대한 미스터리

-https://www.fmkorea.com/6817851720


폐왕이 문왕의 가족을 몰살시켰을 가능성에 대해.

-https://www.fmkorea.com/6817911871


대원의 정변 3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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