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예인 12세기 콘스탄티노플에서 벌어진 끔찍한 학살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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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고기먹는스님 댓글 0건 조회 40회 작성일 24-07-06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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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73848660_486263_aa7080d305a4fdd17f92f04ffa4b9ff4.jpg 12세기 콘스탄티노플에서 벌어진 끔찍한 학살
1082년, 비잔티움 황제 알렉시오스는 시칠리아의 군주 로베르의 침략에 직면했다. 제국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알렉시오스는 베네치아의 힘을 빌리고자 했다. 알렉시오스는 베네치아에게 조계지 임대, 무역감세의 감세 등을 포함한 각종 특혜를 약속했고, 베네치아는 이에 응해 대규모의 함대와 기사를 파병했다.

하지만 사태가 종식되고 제국이 안정을 찾자 비잔티움의 생각은 바뀌었다. 비잔티움은 피사와 아말피, 제노바 등을 끌어들여 베네치아를 견제했다. 그다음 목표는 베네치아인들을 콘스탄티노플에서 쫓아내는 것이었다.

1118년, 비잔티움 황제 알렉시오스는 베네치아 도제 도미니코에게 특권의 무효화를 선언했다. 그러나 이는 그가 베네치아와의 전쟁에서 참패하며 무위로 돌아갔다. 알렉시오스의 아들 마누일 재위기에는 베네치아인에 의한 제노바 조계 파괴 사건이 일어났다. 베네치아가 사태의 복구를 거부하자 마누일은 강제로 베네치아인들을 콘스탄티노플에서 축출했다.그 과정에서 베네치아인 만여 명이 구금당하고 강간과 약탈, 방화가 동반되었다.

그렇게 콘스탄티노플에서 베네치아의 영향력은 일소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아직 완전히 해결된 게 아니었다. 비잔티움의 그리스인들은 베네치아인들의 빈자리를 차지한 라틴인들을 베네치아인들만큼 고깝게 보았기 때문이다. 라틴인 상인들의 진출로 현지 영세상인들은 몰락했고 수출업자들은 지주들과 결탁하여 부를 축적했다. 거기에 동서 대분열 이후 벌어진 양자 간의 종교관 차이는 추가적인 악감정을 발생시켰다.

1180년 당시 콘스탄티노플에는 이들 라틴인 6만 명이 그리스인들과 함께 거주하고 있었다.
7173848660_486263_640514a7f749d86b4740a3adb0f4e107.png 12세기 콘스탄티노플에서 벌어진 끔찍한 학살


1180년, 비잔티움 황제 마누일이 사망했다. 그 뒤를 이어 마누일의 아들인 알렉시오스가 즉위했으나, 그는 아직 10세에 불과한 소년이었기에 실제로 권력을 장악한 것은 모후인 마리아였다.

그러나 마리아는 친서방적인 행보로 인기가 없었다. 이듬해인 1181년에는 선제 마누일의 딸인 마리아 콤니니가 반란을 모의하다 발각되었고, 그 남편 레니에르는 섭정의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를 선동했다. 콘스탄티노플 시내에서는 마리아 지지파와 반대파의 시가전이 벌어져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양자는 결국 결판을 내지 못하고 화해했지만, 민중의 마리아와 서방인에 대한 적대감은 더욱 증폭되었다.

한편, 수도의 이러한 혼란은 폰토스 총독 안드로니코스 콤니노스의 시선을 끌었다. 불타는 야망으로 이전에도 여러 번 사건을 일으켰던 그는 이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

1181년 5월, 안드로니코스 콤니노스는 마리아 콤니니를 돕는다는 명분으로 군대를 일으켰다. 넘치는 지원자로 그의 군대는 콘스탄티노플에 가까워질수록 불어났다. 심지어는 그를 막기 위해 파견된 귀족들조차 그에게 가담했다. 칼케케돈 해협에 이르렀을 무렵 그의 병력은 수만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가 시민들의 호응을 얻어 수도에 입성한 순간, 전례 없는 규모의 학살이 시작되었다.
7173848660_486263_af1bb083925cc3f164fc0d02c773da46.png 12세기 콘스탄티노플에서 벌어진 끔찍한 학살
콘스탄티노플의 라틴인들 역시 그리스인들이 자신을 증오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일부의 그리스인들은 그들에게 위협이 임박했음을 알렸고 소수의 인원은 참극이 일어나기 전 배를 타고 탈출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라틴인들은 그렇지 못했다. 라틴인 거주구에 진입한 시민들은 보이는 모든 사람에게 닥치는 대로 칼을 휘둘렀다. 라틴인들은 절망적인 상황에도 자신들의 가족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분투했지만, 수적 열세를 극복할 수는 없었다.

그리스인들은 저항하는 모든 사람을 쳐죽이고 집에 불을 질렀다. 여자들과 아이들, 노인들과 병자들은 비명을 지르며 그 안에서 타죽었다. 겁에 질린 사람들은 교회로 도망쳤지만, 그리스인들은 그곳에도 불을 질렀다. 개중 살아서 잡힌 성직자들은 극심한 고문의 표적이 되었다. 교황의 명을 받아 콘스탄티노플 교회를 돕기 위해 파견된 요한 추기경은 참수된 뒤 머리가 개 꼬리에 매달리는 신세가 되었다.

성 요한 병원의 환자들 역시 분노한 그리스인들에게 무자비하게 살육당했다. 어떤 사람은 라틴인의 목에 현상금을 걸기도 했다. 그리스인들은 라틴인 거주구를 샅샅이 뒤져 숨은 라틴인들을 사형대로 넘겼고 그 광기는 콘스탄티노플 내의 제노바인 거주구와 피사인 거주구를 모두 파괴한 뒤에야 끝났다.

참극에서 살해당한 라틴인은 약 수만 명이었다. 운 좋은 4천 명의 생존자는 룸 술탄국에 노예로 팔렸다.

당대의 티레 대주교 기욤은 이 사건에 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독사 같이 악독한 그리스는 가슴 속의 뱀이나 장롱 속의 쥐처럼 손님들에게 악행을 저질렀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한 처사를 받을 이유가 없었고 그런 행위를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들은 그들의 딸과 조카와 누이를 아내로 삼은 사람들이었으며 그들과 오랫동안 어울리며 친구가 된 사람들이었다…….

7173848660_486263_051bcd133ff10152dcb2e39a1401322a.jpg 12세기 콘스탄티노플에서 벌어진 끔찍한 학살

이 사건은 일전의 베네치아 축출과 더불어 비잔티움의 외교적 상황을 크게 악화시켰다. 1185년 시칠리아 왕 굴리에모는 살해당한 라틴인들의 원한을 갚는다는 명목으로 제국 제2의 도시 테살로니카를 파괴했다. 불가리아와 세르비아의 군주들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에게 콘스탄티노플을 협공할 것을 제안했고, 프리드리히의 후계자인 하인리히는 적절한 비용을 제공하지 않으면 콘스탄티노플을 침공하겠다며 위협했다.

이같은 적대 관계는 비잔티움의 내분으로 촉발된 1204년의 콘스탄티노플 함락으로 정점에 이른다.4차 십자군의 참극은 너무나 자주 엔리코 단돌로의 탐욕 때문이라 단순화되지만, 콘스탄티노플에서 내쫓긴 베네치아인들과학살에서 목숨을 잃은 라틴인들은 거기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콘스탄티노플의) 약탈은 끔찍하고 변명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아무 이유 없이 일어난 일은 아니었다. 콘스탄티노플의 그리스인들은 그들이 취급받은 것처럼 라틴인을 취급했기 때문이다. …… 콘스탄티노플의 약탈에 분개하며 열변을 토하는 역사가들은 1182년의 서방인 학살에 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 워렌 H. 캐롤(Warren H. Carro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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