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예인 소련군의 일본인 대량 학살·강간 사건 - 갈근묘 학살 (혐오주의) [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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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댓글 0건 조회 0회 작성일 24-07-04 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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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cificwar.PNG 소련군의 일본인 대량 학살·강간 사건 - 갈근묘 학살 (혐오주의)


때는 태평양 전쟁이 막바지에 달하던 1945년 8월



img_d646c4150bbe57abf920757ad362e7f6307200.jpg 소련군의 일본인 대량 학살·강간 사건 - 갈근묘 학살 (혐오주의)



당시 만주에는 소련군이 대일 전선에 참가하고 곧 소련군이 만주에 진입한다는 소문이 그곳에 살고 있던 일본인 사이에서 파다하게 퍼졌다.


공포에 빠진 일본인들은 만주를 빠져나가 조선을 거친 뒤 본국 일본으로 돌아가기 위해 앞다투어 피난 행렬에 올랐다.


surrender.jpg 소련군의 일본인 대량 학살·강간 사건 - 갈근묘 학살 (혐오주의)

소련군에게 항복하는 관동군 병사들



일본인들의 염려대로 소련은 일본을 끝장내기 위해 대대적으로 만주를 침공했으며 관동군은 소련군의 압도적인 공세에 붕괴했고 만주에 고립된 일본인 거주민에게 소련군의 접근을 알리지도 않고 후퇴하기 바빴으며


심지어는 거주민으로부터 트럭과 수레 따위의 이동 수단을 소련군과의 전투에 필요하다는 이유로 징발하여 이들의 피난에 심각한 지장을 줬다.


*관동군은 사실상 일본인 거주민의 보호를 포기하고 장교 위주로 가장 먼저 기차에 올라 도망쳤으며 수많은 일본인 거주민이 무방비 상태로 걸어서 피난 행렬에 올랐다. (당시 기차에 오르던 관동군이 공포에 빠진 자국민 민간인들도 기차에 오르려고 하자 총칼로 막아 세우고 심지어는 사살까지 하며 추태를 부렸다는 증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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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를 떠나는 일본인들


참사관 아사노 료조가 이끄는 일본인 피난행렬은 소련군을 피하고자 갈근묘(葛根廟)라는 이름의 사원 쪽 방향으로 이동했으며 도중에 다른 일본인 피난민과 합류하여 이들의 인원은 자그마치 1,800명에 피난 행렬은 무려 2km에 달했다.


갈근묘 사원 근방에는 기차역이 있었기에 일본인 피난민은 그 기차역을 거쳐 바이청(白城市)으로 이동하여 관동군의 보호를 받고자 했다.


葛根廟.png 소련군의 일본인 대량 학살·강간 사건 - 갈근묘 학살 (혐오주의)
갈근묘 사원의 모습



기나긴 피난길과 비까지 내리는 날씨에 지칠 대로 지친 일본인 피난행렬은 8월 14일 오전 11시 40분 마침내 갈근묘 사원 근방에 도달하는 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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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들은 그곳에서 전차를 앞세워 진군하는 소련군 부대와 마주했고 일본인들은 그곳에는 소련군이 없을 것으로 생각했기에 충격에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이들은 제39군 병력으로 동부전선에서도 종군하여 독일군과 전투한 부대였다.


충격에 빠진 피난민을 뒤로하고 참사관 아사노 료조가 불의의 유혈사태를 막고자 침착하게 소련군 부대에 다가가며 자신들은 일본군이 아니며 피난민이라고 알리려고 했다.


그러나 소련군은 즉각 기관총 사격을 가해 아사노를 사살했고 뚜렷한 이유 없이 소련군 기관총과 전차포가 무차별적으로 피난민 행렬을 공격하면서 참혹한 학살극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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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근묘 학살을 묘사한 그림 (출처:赤星月人「葛根廟事件邦人遭難の」天恩山 五百羅漢寺所)


순식간에 갈근묘 사원은 1,800명 일본인의 비명과 울음소리로 가득 찼다.

일본인 피난민은 소련군의 포화에 일방적으로 살육당했으며 소련군 보병들이 전차와 트럭에서 내려 이들이 관동군이 아닌 피난민임을 확인했음에도 무차별적으로 총격을 가해 학살했고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쓰러져있는 일본인들을 총검으로 찔러 죽이고 시체들을 확인 사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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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학살사건을 묘사한 일본 드라마 "아내와 날았던 특공병" (妻と飛んだ特攻兵, 2015).이 드라마는 일본인을 일방적인 피해자로 설정하고 만주국과 가미카제를 미화하는 듯한 묘사가 있어 논란이 있었다.


공포에 빠진 일본인들은 사력을 다해 탈출하려고 했으나 이들 대부분이 여성, 어린이, 노인이었기에 멀리 도망치지 못하고 대부분 학살당했다.

몇몇 일본인 가족들은 소련군을 피해 참호 안에 숨기도 했으나 소련군 병사들도 그들을 참호까지 따라들어가 죽이고 강간했으며 일본인 여성들에게서 강제로 아이들을 빼앗아 납치했다.

전차 궤도와 트럭으로 기관총 사격을 피하기 위해 엎드린 피난민들을 산 채로 뭉개 버리는 등 갈근묘 사원은 지옥으로 변해버렸다.

극심한 공포에 빠진 몇몇 일본인들은 살해 직전 자살하기도 했으며 소련군이 일방적으로 피난민을 도륙하는 와중에도 관동군은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학살에 그치지 않고 소련군 병사들은 일본인 여성과 소녀들을 강간한 뒤 신체를 훼손하여 죽였고 몇몇 병사들은 일가족을 덮친 뒤 어머니와 딸을 한꺼번에 강간하기도 했고 이미 죽은 여성의 시체를 강간하는 병사들도 있었다.

Nemmersdorf_massacre.jpg 소련군의 일본인 대량 학살·강간 사건 - 갈근묘 학살 (혐오주의)
네메르스도르프(nemmersdorf)에서 소련군에게 강간당한 뒤 학살된 독일인들을 둘러보는 독일군 장교들

2시간 넘게 소련군은 1,000명이 넘는 일본인을 강간하고 학살하였으며 피난민 행렬이 완전히 붕괴한 뒤에야 떠났고 갈근묘 사원 주변의 초원은 훼손된 일본인의 시신과 피로 가득하였다.

이 학살극은 동프로이센 네메르스도르프에서 소련군이 독일 피난민에게 저지른 잔혹 행위와 소름 끼칠 정도로 닮아있었으며 마찬가지로 매우 잔혹했다.

그러나 적어도 독일인을 상대로 저지른 보복은 독일군이 먼저 소련인을 상대로 대량 학살·강간을 저질렀다는 보복의 '동기'라도 있었지만, (물론 그렇다고 한들 전쟁 범죄 행위를 정당화할 수는 없을 것이다.)일본군과 소련군은 소일 중립조약 체결 이후 서로에게 딱히 원한이랄 것이 없었기에이 갈근묘 학살에서는 왜 소련군이 이토록 잔혹한 학살을 일본인을 상대로 자행했는지 현재까지도 의문으로 남아있으며 갈근묘 학살 이외에도 소련군이 일본 민간인을 강간하고 학살한 사례는 더 존재한다.

Armed_training_of_Japanese_women_in_Manchuria.jpeg 소련군의 일본인 대량 학살·강간 사건 - 갈근묘 학살 (혐오주의)
사격 훈련을 받는 만주의 일본인 여성들

유력한 가설은 소련군이 갈근묘 사원의 피난민을 '자경단'으로 판단하고 보복을 가했다는 것이다.

당시 소련군의 만행과 관동군의 방치에 공포에 빠진 일본 민간인들이자기 자신과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자경단을 결성하고 무장하여 소련군에 저항하기도 했는데 당시 대부분의 일본인 남성은 전선에 있었기에이 자경단에는 여성들도 다수 포함되었다. 따라서 갈근묘 사원의 피난민 대부분이 여성과 노약자였음에도 소련군은 공격을 가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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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근묘 사원의 위치

소련군은 사라졌지만 일본 피난민의 시련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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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이 중국인을 상대로 저지른 잔혹 행위


소련군의 학살에서 살아남은 일본인들을 기다리고 있던 건 복수심에 불타는 지역 주민 중국인들이었다.수년간 일본의 압제와 일본군의 잔혹 행위 때문에 복수심으로 괴물이 된 지역 주민 중국인들은 무리를 지어 이들을 공격했다.

마치 그동안 일본군에게 당해온 잔혹 행위를 되갚아주려고 했던 듯 이들의 보복은 매우 잔혹했다.

중국인들은 학살에서 살아남은 수백 명의 일본인을 공격하여 강간하고 학살했으며 어린아이들을 납치했다. (이들은 이후에 시장에서 팔렸다고 한다.) 또한 일본인 여성을 붙잡아 가슴을 낫으로 도려내고 몽둥이로 도망치는 일본인들을 때려죽이고 시체에서 옷과 귀중품을 약탈했다. 몇몇 일본인들은 중국인들의 공격을 피해 강가로 달아나다가 익사하기도 했다.


*모든 지역주민 중국인들이 보복에 가담한 것은 아니었고 일본인 생존자들에게 음식과 보호를 제공했던 선량한 중국인들도 있었으며 학살에서 부모를 잃은 일본인 고아들을 자신의 가정에 입양하여 키운 중국인 가정도 존재했다.


*갈근묘 학살에서 소련군은 직접 중국인들이 일본인들을 학살하는 걸 돕지는 않았으나 만주에 진입한 이래로 중국인-조선인들이 일본인을 상대로 보복을 가하는 것을 도왔다는 증언이 있으며 중국인들 역시 소련군에게 일본인의 위치와 거주지를 앞다투어 고발하였다. 소련군은 일본군 포로와 일본인 남성들을 강제로 모아둔 뒤 그들이 보는 앞에서 중국인들이 (또는 소련군 자신이) 일본인 여성들을 강간하게 하고 그걸 강제로 지켜보게 한 뒤 항의하거나 강간을 멈추라고 애원하는 일본인 남성은 즉각 총살했다는 증언도 있다.

sd.jpeg 소련군의 일본인 대량 학살·강간 사건 - 갈근묘 학살 (혐오주의)


중국인들의 공격에서 탈출한 소수 일본인 중 일부는 다시 소련군이나 중국 주민과 마주쳐 학살당하기도 했다.

학살에서 살아남은 당시 12세의 소녀였던 생존자의 증언으로는 8월 15일 일본의 공식적 항복 이후에도 소련군 병사들이 그녀와 다른 일본인 여성들이 숨어있던 가옥에 들이닥쳐 강간을 저지르고 증거를 없애기 위해 가옥에 불을 질러 일부 여성을 산채로 태워죽였다고 증언했다.

이 모든 학살에서 살아남아 일본으로 생환한 일본인은 1800명 중 겨우 백 명 가량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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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얼빈에 입성하는 소련군과 이를 환영하는 중국인 주민들


소련군 측에서는 만주 점령지 주민을 학대하지 말라는 군부의 공식 명령과 해당 학살이 보고서에 언급되지 않았음을 근거로 갈근묘 학살을 '실체 없는 사건'으로 치부하며 무시했고독일과 마찬가지로 패전국 신분이었던 일본은 이에 대해 어떤 항의도 할 수 없었다.

러시아 역사학자들도 갈근묘 학살을 포함해 만주 지역에서 일본인을 상대로 자행된 소련군의 여러 만행을 두고 '베를린 강간극과 더불어 2차 세계대전을 연합군의 승리로 이끈 소련의 위업을 더럽히려는 저열한 서방의 선전'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며 "강간범과 약탈범을 총살한 공식적인 기록이 있는 소련과는 다르게 독일군과 일본군은 그런 기록조차 없다."라며 강하게 반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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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일본인 거주민의 자식으로 만주에 살았던 1937년생의 일본인 작가 후지와라 사쿠야(藤原作)는 군무원이었던 아버지 덕에 이 학살에 휘말리지 않고 다른 이들보다 더 빠르게 기차를 타고 만주를 탈출할 수 있었다.

그는 이 갈근묘 학살을 두고 소련군의 잔혹함에 치를 떨며 "나는 어릴 때부터 (학살당한 교우들과는 다르게) 혼자만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에 시달렸고악마와 다를 바 없었던 소련군의 만행은 후대의 일본인에게 계속 전해 주어야 한다."라고 분노를 드러내며 만주에서 소련군이 일본 민간인을 상대로 저지른 만행을 책으로 펴내기도 했다.

갈근묘 학살은 중국인이 일본인의 학살에 가담했다는 점과 일본인이 일방적으로 학살당한 전쟁 범죄 성격이 뚜렷한 몇 안 되는 사건인 탓에 현대 일본 우익에 의해 일본의 피해자 행세나 양비론에 악용되기도 한다.

또한, 이 사건은 관동군이 자국민을 방치하고 사실상 소련군의 먹잇감으로 던져주었다는 점 때문에 "일본 자국민도 일본 군부의 피해자였다"라는 주장에 활용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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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방송에도 갈근묘 학살은 자주 등장하며 주로 생존자의 증언을 토대로 사건을 재구성한다. 이 사건을 다룬 일본 다큐멘터리로 '葛根廟事件の言'(갈근묘 사건의 증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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