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예인 칠곡경찰서 점거 사건과 상이군인에 대한 인식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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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댓글 0건 조회 0회 작성일 24-06-29 0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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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이전에 제가 쓴 다음 두 글과 관련성이 있습니다

1950년대 한국전쟁의 상이군인들

왜 한국에서는 군인에 대한 취급이 부정적이게 되었을까?


하지만 딱히 두 글을 읽지 않아도 상관은 없습니다.




들어가며


한국전쟁 당시 상이군인들은 매우 열악한 현실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자신들의 대우와 처지를 개선하기 위하여 조직적인 활동을 벌이곤 하였는데,


그 중 하나가 1951년 대한상이군인회의 조직이었습니다.



또한 이 과정에서 무력, 폭력이 동원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건 중 하나가 1952년 칠곡경찰서 점거 사건입니다.




(주의) 이는 당시 언론보도를 재구성한 것이기에 '사실'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당시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시기인지라, 군 당국의 보도를 받아쓴 기사 외에는 관련 정보가 없습니다.


또한 해당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정부, 군 당국과 상이군인측의 합의에 따라 언론사 보도를 막거나 축소화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렇기에 이 글의 내용도 실제 '사실'과 다르게 축소, 왜곡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1. 사건의 경과


1) 상이군인을 향한 왜관읍장의 폭언



image.png 칠곡경찰서 점거 사건과 상이군인에 대한 인식

(1950년대 왜관읍 사진 - 2019년 왜관읍 옛사진 공모전 최우수상 이영주 씨의 사진)



이 사건은 1952년 8월 25일,


고향(칠곡군 왜관읍)으로 돌아온 상이군인 심 모씨가


가족의 생계가 막막하여 관공서에 구호미를 요청한 것에서 출발합니다.



image.png 칠곡경찰서 점거 사건과 상이군인에 대한 인식

(영화 <쌀>(1963)의 한 장면: 사진은 실제 사건과 관련이 없음)



당시 정부에서 피난민이나 공무원 및 군인 가족의 생계를 위하여


각지역 관공서별로 구호미를 제공하고 있었는데, 이를 요청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image.png 칠곡경찰서 점거 사건과 상이군인에 대한 인식
(영화 <쌀>(1963)의 한 장면: 사진은 실제 사건과 관련이 없음)


그리고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해당 관공서(왜관읍사무소)에서는 이를 거절합니다.

(구호미가 충분하지 않았던 터라 이로 인하여 항상 문제가 되기는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일련의 실랑이가 벌어지고 왜관읍장이 해당 상이군인을 향하여 폭언을 합니다.


당시 군 수사보도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발언을 했다고 합니다.

"전선에서 죽은 자도 허다한데, 다리 하나 절단됨이 행복임에도 식량까지 요구하냐?"

"너희 가족이 꿀꿀이죽을 먹든 개죽을 먹든 내가 상관할 바냐?"



2) 왜관읍장 집단폭행사건


image.png 칠곡경찰서 점거 사건과 상이군인에 대한 인식

(영화 <오발탄>(1961)의 한 장면: 사진은 실제 사건과 관련이 없음)



이에 분노한 심 씨는 부산으로 내려가 다른 상이군인들에게 이 사실을 공론화합니다.


그리곤 동료 상이군인들을 규합하여, 9월 13일 왜관읍장을 찾아가서는 그를 집단 폭행합니다.


(당시 수사에 따르면 상이군인들은 곤봉과 미제 단검을 소지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에 칠곡경찰서는 현행범으로 그들을 체포했고


구속 취조한 후에 15일 검찰로 송치합니다.





3) 칠곡경찰서 점거 사건


한편 부산의 상이군인들은 평소 상이군인에 대한 열악한 현실 및 그 사회적 인식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기에


관련 소식에 큰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image.png 칠곡경찰서 점거 사건과 상이군인에 대한 인식

(영화 <쌀>(1963)의 한 장면: 사진은 실제 사건과 관련이 없음)



정황상 대한상이군인회 차원에서 국방부에게 이를 선처해줄 것과 함께


상이군인을 위한 관련 대책을 공식적으로 요구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국방부에서는 이를 거부했던 것으로 보이구요.


또한 당시 이들이 경찰들에 대한 처벌을 요구했던 것을 볼 때,


체포나 조사 과정에서 무언가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추정됩니다.


(당시 10여 명이 왜관읍장을 집단폭행했다고 하지만


실제 체포 및 기소는 3명 남짓이고 그것도 공무집행방해 혐의로 기소된 터라 조금 이상하긴 합니다.


잘못 보도된 것인지 사건 진상을 은폐, 왜곡한 것인지 관련 보도나 기록이 없어서 사실을 알 수 없습니다)




어찌되었든 그들은 검찰로 송치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직접적인 행동'을 하기로 결정합니다.



이에 9월 18일 새벽, 상이군인 정 모씨를 중심으로 하는 부산의 상이군인 130여 명이 칠곡으로 향합니다.



이들의 행동은 굉장히 조직적이었습니다.


이들은 칠곡경찰서로 향하는 주요 길목을 차단한 후


읍사무소와 칠곡경찰서를 습격하여 전선 및 통신선을 끊었습니다.


그리고 칠곡경찰서를 점거, 서장을 감금하고 무기고를 탈취합니다.


이 과정에서 이를 막던 칠곡경찰서 소속 순경 1명이 사망하고 최소 6명 이상의 중경상자가 발생합니다.



초유의 사태였기에 정부와 군 당국은 신중하게 접근하기 시작합니다.


100여 명의 경관 응원대를 칠곡경찰서 주변으로 급파하고


군 당국에서도 헌병대를 투입합니다.



image.png 칠곡경찰서 점거 사건과 상이군인에 대한 인식

(영화 <오발탄>(1961)의 한 장면: 사진은 실제 사건과 관련이 없음)



그렇게 대치를 하다가 결국 사건 당일 군 당국은 진압에 성공합니다.


관련 기사를 볼 때 경관 응원대와는 대치를 하다가,


헌병대가 도착하면서 사실상 항복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해당 사건에 가담한 상이군인 전원은 헌병대에 의하여 근처 국군 낙오자 수용소로 이송됩니다.


이후 단순 가담자는 풀려났고 주모자를 비롯한 주요 인사는 체포됩니다.





4) 초량역 사건 혹은 부산진역 사건


그런데 여기서 부산의 상이군인들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또 다시 조직적인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image.png 칠곡경찰서 점거 사건과 상이군인에 대한 인식

(1951년 한국전쟁 당시의 부산 - 국가기록원)



이들의 정확한 목적이나 행선지는 알 수 없지만,


9월 20일 새벽 6시 일련의 상이군인들이 경부선 초량역 및 부산진역 등에 집결하여


경부선 상행선 열차에 탑승하고자 시도합니다.



당연하지만 정부는 이를 막기 위하여 부산발 열차 운행을 전면 중단합니다.


그리고 현장에 정부 및 군 관계자들을 파견하여 상이군인들을 해산하기 위한 설득을 시도합니다.


그렇게 6시간 넘게 대치하다가 결국 일련의 협상 끝에 상이군인들이 자진해산하기에 이릅니다.



이 사건은 '제대 상이군인들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발생한 충돌' 정도로 축소 보도되곤 했기에,


언론 보도만으로는 이 이상의 자세한 진상은 알 수 없습니다.




5) 사건의 정리


일련의 사건이 있은 후 20일 오후부터 21일까지 대한상이군인회, 정부 간의 협상이 진행됩니다.




image.png 칠곡경찰서 점거 사건과 상이군인에 대한 인식

(9월 20~21일 상이군인들과 정부 간의 협상에 관한 보도 / 동아일보, 1952.9.22.)




그 결과 9월 22일, 사건의 "원만한 해결"을 위해서 해당 사건과 관련된 상이군인들을 모두 석방합니다.


아울러 해당 사건에 대한 언론 보도를 취소하거나 축소하는 것을 서로 합의하죠.


또한 정부와 군 당국이 상이군인 관련 대책을 강화하겠다는 방향으로 마무리됩니다.


하지만 실제로 그 대책은 유명무실한 형태에 가까웠습니다.

(한국전쟁기 상이군인들의 현실에 대해서는 다음 글을 참조하세요. 1950년대 한국전쟁의 상이군인들)




의외로(?) 당시 시대 상황이나 사건의 규모에 비하여 처벌이 경미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이는 전쟁이 지속중인 상황인 데다가


상이군인들끼리 뭉쳐서 조직화되어 있었고 지속적으로 집단행동을 해왔던 터라,


정부와 군 당국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었던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국가의 제대로 된 지원이 없는 상황에서 상이군인들이 믿을 것은


자신과 처지가 같은 상이군인들뿐이었고,


이들은 정부와 군 당국을 상대로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빈번하게 집단행동을 벌이곤 했습니다.


칠곡경찰서 점거 사건 이전에도 부산 '제3육군병원 사건'을 비롯한 여러 사건들이 있었습니다.


(당시 군 부대 혹은 군 병원 내의 사건들은 거의 언론에 보도되지 않았습니다.

이후에 'XX 사건' 정도로 지나가듯 언급되는 터라 그 규모나 진상은 알 수 없습니다.

칠곡경찰서 점거 사건은 군 외부에서 벌어진 일이라서 보도가 될 수 있었죠. 어쩌면 이 사건은 언론을 비롯해서 아무도 이런 사건을 주목하지 않았기에 계획적으로 벌였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렇기에 강경하게 대응하였다가


수 만명에 달하던 상이군인들이 모두 들고 일어나는 식의


돌이킬 수 없는 사태로 이어질 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2. 누구의 잘못인가?

이 사건에 대하여 당시 언론의 보도를 보면

이와 관련하여 상이군인에 대한 대우를 개선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만,

그 가운데에는 이러한 기사도 있습니다.


일선에서 불구의 몸까지 되도록 조국을 위하여 싸운 위훈에는 머리가 숙여 질 것이다.


그렇다고 피의 값을 요구한다면 전사한 전우들에게는 무엇으로 보답하랴?


서로 돕고 서로 이해하므로 동포의 피는 통할 것이 아닌가! (경향신문, 1952.9.21)




'너희 힘든 건 알겠는데, 전사자들도 있는데 왜 그러느냐?'라는 거죠.


이 내용은 앞서 언급한 왜관읍장의 폭언과 통하는 지점이 있습니다.

'죽지 않고 살아돌아 왔으면 다행인 거 아니냐?'라는 사고가 밑바탕에 깔려 잇죠.




이는 왜관읍장이나 해당 기사를 쓴 기자가

인성에 문제가 있거나 군인을 혐오하기 때문에 나온 발언은 아닙니다.



전쟁이 한창이던 시기였기에 그만큼 죽음이 만연했고 일상화되었습니다.


어떤 이유에서든 간에(혹은 그 이유도 모르고)


자신의 가족, 친척 혹은 친지들 가운데 죽거나 실종되는 경우가 빈번했죠.



그런데 그 죽음에 대한 제대로 된 의미화나 보상은커녕


그 유해를 수습할 수 있는 기회도 제한적이었습니다.



1951년 전사자 유족들에게 보상금 및 연금을 지급하는 법안이 제정되지만

관련 예산이 없기 때문에 제대로 지급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는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산부족, 관련 서류 미비 등으로 지지부진했죠)


또한 전사자 유해 수습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서

1953년 휴전 이후에도 '실종' 처리 된 상태로 사실상 방치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어느날 사라져서는 생사불명이 되는 경우도 있었더 터라


차라리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할 경우도 많았구요.




이 과정에서 정부가 추진한 상이군인에 대한 일련의 정책은

거의 형식적인 것에 가까웠지만

그 실상을 모르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일종의 '특혜'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상이군인이 아님에도 상이군인 행세를 하면서


관련 지원을 받거나 사람들로부터 금전을 갈취해서 체포되는 사건 또한 빈번하게 벌어졌죠.




물론 당시 사람들도 상이군인에 대한 대우나 보상이 충분하지 않다는 점을 알고는 있었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어려운 상황이기에


'상대적으로' 그러한 보상이 일종의 '특혜'처럼 느껴졌고

상이군인들의 요구가 정당하고 그들을 도와줘야 함에도 냉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한 과정에서 '(우리 집의 누구는 생사도 모르는데) 죽지 않고 살아돌아 왔으면 다행인 거 아니냐?'


'모두가 전쟁 때문에 어려운데 왜 자꾸 요구하느냐? 자기 욕심만 챙기는 것 아니냐?'는 식의 반응들이 나왔죠.


그 결과물이 왜관읍장의 발언과 위에서 소개한 경향신문 기사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image.png 칠곡경찰서 점거 사건과 상이군인에 대한 인식
(1952년 신태영 당시 국방장관 사진 - 국가기록원)



또한 당시 신태영 국방장관은 칠곡경찰서 점거사건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담화를 발표합니다.



존귀한 피와 땀을 조국에 바쳤으되 국가 재정의 곤란으로 물심양면에 있어서


충분한 원호를 실시하지 못하여 그대들의 불만과 고충에 동정을 금치 못하는 바이다.


그러나 요즘 각처에서 일부 몰지각한 상이군인 중에


숭고한 애국심과 찬란한 과거의 공적을 망각하고


전체 상이군인의 위신과 명예를 오손하는 행위를 하고 있음은 실로 유감이다.


(중략) 그대들은 끝까지 명예를 가장 존중히 여기는 고귀한 공로자이며


최고의 애국자임을 스스로 자각하고 전체 상이 군인의 명예를 손상시켜서는 안될 것이다.


(중략) 명예 있는 그대들은 그대들의 사명과 명예를 위하여


자성자계하여 본분을 지켜주기 바란다. (동아일보, 1952.9.23.)



상이군인의 어려움을 알고 있지만 애국심과 명예에 대한 강조하면서


이를 상이군인 스스로가 자각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너희들은 스스로 좀 반성하고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죠.


상이군인들이 현 상황에 불만을 품고 처우 개선을 요구하는 것을


국가의 어려움도 모르고 자기 욕심만 챙기는 행위로 만들어 버립니다.





3. 상이군인은 스스로 불쌍하게 보이도록 노력해야 한다?

image.png 칠곡경찰서 점거 사건과 상이군인에 대한 인식
(1953년 육군대학 졸업식에 참석하여 표창장을 수여하는 백선엽 당시 육군참모총장 - 국가기록원)



신태영 장관의 담화에 앞서


당시 백선엽 육군참모총장의 언론 담화에서도 이와 비슷한 맥락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상이군인이 작당하여 국내의 치안과 국가의 안전을 문란케 하는 것은


공산당의 모략에서 기인하는 것이라고 추측한다.


상이군인 자신이 스스로 일반 국민의 동정을 살 수 있는 언동을 취하지 아니하고


이러한 사고를 일으키는 것은 군의 위신을 손상케 하는 것이다. (조선일보, 1952.9.21.)



그런데 여기서 해당 사건을 "공산당의 모략"으로 취급하는 것보다는,


상이군인 스스로가 "일반 국민의 동정"을 사야 한다는 부분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상이군인 스스로가 자신을 불쌍하게 보여야 할 판국에 이러한 짓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죠.



그는 왜 이런 발언을 했을까요?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정부가 추진했던 상이군인 대책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정부와 군 당국은 절대적인 예산 자체가 부족했기에


상이군인 문제를 사실상 외부에 '위탁'합니다.


미국 등 외국이나 민간의 기부를 통하여 이를 해결하고자 하였죠.



image.png 칠곡경찰서 점거 사건과 상이군인에 대한 인식

(일선 장병과 상이군인들을 위한 민간 기부를 요청하는 이승만 대통령의 담화 보도 / 조선일보, 1951.12.29.)




물론 그 의도나 방식 자체는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그 기부의 효과를 높이기 위하여


이 과정에서 상이군인을 사실상 '(전쟁으로 불구가 된) 불쌍한 사람'으로 이미지화했다는 점입니다.


국가를 위하여 명예롭게 싸웠기에 '국가적 존경과 각종 대우를 받아 마땅한 사람'이 아니라 말이죠.


이 지점에서 사실상 '너희들(상이군인)은 불쌍한 사람처럼 보이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식의 발언이 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는 당시 상이군인에 대한 사회적 시선으로 고착화 되었고,


이후 군인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만들어내는 데에 한몫을 합니다.



또한 당시 상이군인 개개인들에게도 크나큰 마음의 상처를 만들죠.


국가를 위하여 헌신하였기에 존경 받아야 할 사람이 아니라, 그냥 불쌍한 사람이 되었으니깐요.



그렇기에 1950년대 정부에서 상이군인 연금제도를 시행하였을 때, 이를 사실상 거부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image.png 칠곡경찰서 점거 사건과 상이군인에 대한 인식

(박정석의 「상이군인 및 유가족들의 한국전쟁 경험」(2005) 중 인터뷰 내용)




물론 해당 상이군인 연금은 그 비용도 적었을 뿐만 아니라,


예산 부족 때문에 신청을 하더라도 제대로 지급되는 경우 자체가 극히 드물었습니다.



하지만 위의 인터뷰처럼, 연금을 알고 있음에도 신청하지 않았으며


상이군인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도 존재했습니다.



이는 당시 상이군인에 대한 사회적 시선과 그로 인한 상처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나가며


어쩌면 1952년 칠곡경찰서 점거 사건은


상이군인들의 체포에 대한 단순 보복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시기 상이군인들의 사회적 인식과 대우 때문에


상이군인들의 불만이 지속적으로 쌓여왔고,


특정한 사건을 계기로 그 불만이 폭발한 사건으로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 같습니다.



여기에는 (역설적이긴 하지만),


당시 국가가 상이군인 대책으로 추진하였던 관련 성금 모금/기부 행위 과정에서


상이군인들을 그저 불쌍한 사람으로 이미지화한 것도 한몫하기도 하였죠.



그리고 그 근원에는 '군인'에 대해서 '국방의 의무'와 함께


군인으로서의 정신력, 애국심만 강조할 뿐,


군인으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에 대해서는 무관심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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