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진코믹스

1923년, 일본 관동 일대에서 대지진이 일어나 천문학적인 피해가 발생했습니다.

타국보다 비교적 지진에 익숙했던 일본 사람들도 '이런 대지진이 또 일어나면 나라가 망할지도 모른다'라는 위기의식을 느낄 만큼 심각한 사태였고, 이에 육군 참모본부에서는 아예 수도를 도쿄에서 카코가와, 하치오지, 용산(!) 등으로 이전하려는 논의가 나오기도 했다고 합니다.

물론 여러 가지 이유로 수도 이전이 실현되지는 못했고, 회의 도중에 나왔던 이런저런 아이디어들 중 하나였던 모양.

(사족으로, 이런 기록을 남긴 이마무라 히토시 대장은 포로학대/학살을 금지하고 위안부 활동을 막는 등 인격자라는 평판을 듣던 장군입니다. 조선인들의 평가도 나쁘지 않았다고.)

그러나 관동대지진으로부터 10년쯤 시간이 흘러, 정말로 '경성 천도론'을 주장한 사람이 등장했으니....

오키나와 이시가키 섬 출신의 교육자, 도요카와 젠요(豊川善曄, 1888~1941)였습니다.

도요카와는 도쿄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인 오키나와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30년대 즈음 뜬금없이 조선으로 건너와 흥아학원(興亞學原), 흥아당서점(興亞堂書店)을 개업하고 여러 서적을 집필하기 시작합니다.

(1934년 출간된 경성 천도론)

(2010년대에 출간된 번역판)

내용을 간단하게 설명하면....

백인들이 주도하는 국제사회에서 아시아인들이 살아남으려면 가장 발전된 일본을 중심으로 온 아시아가 똘똘 뭉쳐야 하고, 일본-아시아 제국의 수도로 삼기에 도쿄는 너무 동쪽으로 치우쳐 있으니, 지정학적 요충지인 한반도로 수도를 이전해야 한다- 라는 이야기입니다.

원래 한반도 살던 조선인들은 만주로 이주시켜서 그쪽을 개발하게 하고, 그만큼 본토의 일본인들을 경성으로 이주시킨다는 괴상한 계획을 제시하기도 했죠.

그 외에 아시아의 평화라거나, 동양과 서양의 조화라거나 하는 내용들이 있습니다.

도요카와가 입버릇처럼 '흥아'라는 단어를 여기저기 가져다 썼던 모습을 보면, 당시 흥아론(아시아 국가들이 함께 부흥해서 연합해야 한다는 주장)이라 불리던 아시아주의에 꽤 심취했던 것 같습니다.

물론 한국인들이 보기에는 민족말살/수도 NTR이라는 말이 먼저 떠오르는 제국주의적 시각이죠. 한반도에서 잘 살고 있던 조선인들을 만주 개척단으로 보내버리자는 주장은 어처구니가 없기까지 합니다. 만주가 조선의 레벤스라움도 아니고...

위의 책 이외에도 도요카와는 '조선향토지리' 등을 집필하면서 조선의 지리를 연구하기도 했는데, 본인은 천도론을 나름대로 진지하게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당시에도 별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고, 현대에도 오키나와 향토사 정도를 제외하면 인지도 자체가 거의 전무하지만 말이죠.

이렇게 오래된 책이 2010년대 들어 새삼스럽게 번역된 것은, 그때쯤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각시탈에서 일제의 경성천도 계획이 소재로 등장했던 영향으로 보입니다.

드라마도 그렇고, 위의 번역본에서도 "한민족을 말살하고 수도를 강탈하려 했던 일본제국의 음모" 비스무리하게 묘사됩니다만....

도요카와에게 그만한 인지도와 명성은 예나 지금이나 없었던 듯합니다.

굳이 조선까지 직접 건너와서 집필했던 걸 보면 열정은 넘쳤던 것 같지만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