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예인 희대의 친일파 가문, 세계적인 아티스트를 만들다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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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댓글 0건 조회 11회 작성일 24-06-12 2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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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0년(태종 10년), 정치적 혼란에서 벗어난 조선 왕조는 한양의 유통망 필요성을 절감하고 시전(상설시장) 설치를 시작했다. 시전은 조선 상업의 중심지로 자리 잡았고, 시전 상인들은 판매하는 품목에 따라 도중(都中)이라는 조합을 결성했다. 도중에 등록되지 않은 가게는 난전(亂廛)이라고 불렸다.


147943160447_20161119.jpeg 희대의 친일파 가문, 세계적인 아티스트를 만들다

정조 15년(1791년)에는 나라에서 공인된 6개 필수 품목(명주, 종이, 어물, 모시, 비단, 무명) 외에는 금난전권을 폐지했다. 하지만 시전 상인들의 몰락은 개화의 흐름과 함께 시작되었다. 강화도 조약을 시작으로 외국의 물산이 손쉽게 들어왔고, 1905년 일본 재정 고문 메가타 다네타로에 의한 화폐개혁은 육의전에서 통용되던 어음을 무용지물로 만들었다.


이러한 시대적 변화 속에서 살아남은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백윤수란 인물이다.


그는 대대로 시전에서 면포전을 꾸렸는데, 시전이 망한 후 그 자리에 ‘백윤수 상점’을 차렸다. 그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대창무역’이라는 회사를 설립하여 포목을 직접 수입했다. 청나라와의 교역이 어려워지자 ‘대창직물’이라는 방직 회사까지 차려 직접 포목을 만들어 팔았다.


화면 캡처 2024-06-12 193125.jpg 희대의 친일파 가문, 세계적인 아티스트를 만들다

1924년 백윤수가 사망하자 그의 막내아들 백낙승이 경영권을 이어받았다. 백낙승은 일본 메이지대학과 니혼대학을 졸업한 인물로, 아버지의 사업을 확장하여 ‘태창직물’을 설립했다. 태창직물은 일본 군복을 생산하며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급기야 태창직물은 일본 굴지의 방직회사인 마루베니나 이토추상사 같은 대기업에도 물건을 납품할 정도로 성장했다.


일제의 폭압에 식민지 조선이 신음하고 있을 때, 백낙승은 사업을 키워나갔다. 그의 성공은 일제 강점기 막대한 정치 헌금과 무기 헌납으로 가능했다. 그는 화신백화점의 사장 친일파 박흥식이 만든 ‘조선비행기회사’에도 주주로 참여해 비행기까지 헌납했다.


이 일로 인해 백낙승은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에는 경제 부문에 포함되었으며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해방이 됐지만 백씨일가의 세상은 건재했다. 그것은 그들이 또다른 줄을 잘 잡았기 때문이다...바로...


화면 캡처 2024-06-12 192956.jpg 희대의 친일파 가문, 세계적인 아티스트를 만들다

1945년 10월 16일, 미국에서 무일푼으로 귀국한 이승만은 조선호텔에 머물렀지만 곧 조선타이어 사장 장진영의 도움으로 돈암동 돈암장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때 백낙승이 돈암장을 찾아 매달 50만 원을 생활비 명목으로 건넸다.


일제 관동군을 상대하던 백낙승의 로비 실력은 여전했다. 이승만은 거처를 옮길 때마다 정치적 목적의 생활비를 지원받았다.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돈이 필요했겠는가. 이승만은 마침내 경무대의 주인이 되었고, 백낙승에게 그동안의 신세를 갚을 때가 되었다.


이승만은 일본의 귀속 재산이던 고려방직 영등포 공장을 백낙승이 사도록 주선했다. 또 한국산업은행의 전신인 한국식산은행에 지시하여 500만 달러를 백낙승에게 사업자금으로 빌려주도록 했다. 백낙승의 탄탄대로가 시작된 것이다.


화면 캡처 2024-06-12 194941.jpg 희대의 친일파 가문, 세계적인 아티스트를 만들다


이외에도 이승만은 백낙승에게 홍삼 판매권의 특혜를 몰아주고 일본에서 방직기계를 대량으로 들여와 사업을 일구도록 도와주었다. 이후 백낙승은 기업의 세를 더 키워 우리나라최초의 재벌 태창그룹을 탄생시켰다.



8cf25306bd39b25cc0bffc6940d01c64.png 희대의 친일파 가문, 세계적인 아티스트를 만들다

그러나 열흘 붉은 꽃이 없고, 달도 차면 기우는 법...


백낙승 관련 뇌물 스캔들이 연이어 터지면서 국민들의 이목이 쏠렸고, 이승만도 여론을 의식할 수밖에 없었던지 백낙승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권력의 끈을 놓친 백낙승은 서서히 무너지는 가세에 절망하던 1956년 정릉 경국사에서 사망했다. 백낙승은 죽기 전 자신의 장남 백남일을 후계자로 지목하고 태창그룹을 다시 일으키려 했으나 대세를 돌이키지는 못했다.


1111.jpg 희대의 친일파 가문, 세계적인 아티스트를 만들다

1960년 4.19 혁명, 뒤이어 일어난 5.16 군사정변으로 인해 정국의 급격한 격랑이 일어났다. 당시 친일, 부패, 정경유착으로 얼룩진 태창그룹은 국민들에게 원성의 대상이었고, 민심 확보가 필요했던 군사정권이 이를 놓칠 리가 없었다.


결국 태창그룹은 부정 축재 처리과정에서 공중분해됐고, 후계자 백남일은 남은 가산을 꾸려 가족들과 함께 일본으로 귀화했다.


이후 그룹의 모체인 태창방직은 재일교포 사업가 서갑호에게 넘어갔고, 그룹 이름도 ‘방림’으로 변경되었다. (현재도 이 기업은 남아있다.)


화면 캡처 2024-06-12 193524.jpg 희대의 친일파 가문, 세계적인 아티스트를 만들다

한편 백낙승의 막내아들 백남준은 훗날 세계를 뒤흔든 비디오 아트의 창시자로 이름을 떨쳤다. 1932년 서울 창신동에서 태어난 백남준 자신의 회고에 따르자면 "당시 경성(서울)에 딱 2대 뿐 이라는 캐딜락 승용차”를 타고 학교를 오갔다. 1940년대 서울은 캐딜락은커녕 자동차 자체가 귀했다. 그런 어린 시절을 두고 백남준은 “혼자 차 타고 다니는 게 무안해서 학교 근처에 내려 걸어서 등교한 적도 있다”고도 털어놓았다.


이후 백남준은 '금수저'들이 다녔던 수송국민학교와 경기공립중학교를 졸업했다. 중학교 때 음악 선생님이 작곡가 이건우였다고 한다. 이건우는 '여명의 노래', 가곡집 '금잔디' 등을 작곡하는 등 일제 강점기 시절 당대 최고의 작곡가로 이름을 날렸다.


백남준은 1949년 아버지를 따라 홍콩에 갔다. (이승만의 부탁으로 무기구입을 위해 홍콩에 갔다는 설도 있다. )당시 중학생이었던 백남준은 홍콩에서 영어와 중국어를 배우며 넓은 세계와 만나게 되면서 국제적 감각을 키웠고 자신의 예술적 재능을 발견했다. (이때는 발급순서로 여권을 발행했고, 외화 반출 문제로 여권 발급이 까다로웠는데, 백남준의 여권번호는 7번이었다.)


심지어 1950년 한국전쟁으로 전국이 난리통이었지만 그의 집안에선 열대 과일인 파인애플을 먹을 정도로 윤택한 삶을 누렸다고 한다.


희대의 친일파 가문이었지만, 이런 가문에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아티스트가 나온 것은 역사의 장난이랄까... (물론 부자가문이라 유학도 자유로웠기에 국제적 감각을 타고난 아티스트가 나온 건 당연할 지도 모르지만)


화면 캡처 2024-06-12 193813.jpg 희대의 친일파 가문, 세계적인 아티스트를 만들다

여담의 여담)힙합그룹 지누션의 멤버 지누 역시 백 씨 가문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왜냐면 백남준 형의 외손녀가 지누의 어머니기 때문입니다. 즉 지누는 백남준에게 외조카손자가 되는 셈. 참 여기저기에 연이 깊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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