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예인 아무것도 아닌 선수의 아무것도 아닌 기록. [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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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고기먹는스님 댓글 0건 조회 15회 작성일 24-06-25 0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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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s-15.jpeg 아무것도 아닌 선수의 아무것도 아닌 기록.
데릭 지터가 은퇴하는 날,
식당에서 밥을 먹으면서 TV를 보고 있었어요.
정말 멋지게 은퇴식을 하더라고요.
그걸 보는데 너무 부러웠어요.
나도 저 자리에 서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도 꼭 그렇게 멋지게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2014년 더그아웃 매거진과의 인터뷰 中.

2000년대 중반, 정현과 강승호가 당시 중학교 시절임에도 불구하고 큰 주목을 받고 있었으나, 그 둘보다 한수 위라는 평가를 받았던 한 소년이 있었다. 평촌중 야구부의 그 소년은 나름 빠른 발과 탄탄한 수비, 좋은 어깨와 준수한 타격 등 전천후 능력을 보여주며 큰 주목을 이끌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끊임없이 따라오던 꼬리표가 있었다. 멘탈 문제였다. 지워지지도 떨어지지도 않는 꼬리표에 소년은 결국 강호 야구부가 아니라, 당시 3년 차 신생, 소년이 중학교에 입학하던 해 창단했던 충훈고등학교 야구부로 진학하게 된다.

images-14.jpeg 아무것도 아닌 선수의 아무것도 아닌 기록.

하지만 충훈고 야구부에서도 소년의 앞길은 트이지 않았다. MBC 청룡의 전설적인 선수였던 김인식이 당시 충훈고 야구부 첫 감독으로 부임해 지도하고 있었지만, 무엇이 문제였는지 고교 내내 소년의 장점은 부각되지 않았다. 보여준 것이라곤 강한 어깨와 넓은 수비 범위가 전부, 3년 내내 돌파구를 찾지 못한 타격은 고등학교 3학년 때 .216의 타율을 보여주면서 그의 프로 지명을 방해했다. 지명을 받지는 못했지만 야구를 포기할 순 없었던 소년은 대학으로 향했다. 성균관대와 더불어 연습량이 가장 많기로 유명한 홍익대학교 야구부였다.

소년의 손을 잡고 이끌어 준 것은 해태 타이거즈의 전설적인 포수 장채근이었다. 홍익대 감독으로 있던 그는 2013년, 소년을 스카우트해 홍익대로 데려온 뒤 주전 유격수로 출장시켰다. 그러나 소년은 이미 지쳐 있었다. 그는 2013 시즌 대학 하계리그가 종료한 이후, 자퇴서를 제출하며 이렇게 말했다.

연습을 정말 많이 했어요.
밥 먹는 시간 빼고는 연습만 한 것 같아요.
동계 훈련 때는 스윙 1,000개를 하래요.
1,000개를 돌리면 스윙을 하는 건지 방망이가 저를 돌리는 건지 못 느낄 정도예요.
하지만 저는 20살이었잖아요.
머리도 기르고 싶고 놀고 싶고, 대학 생활의 로망을 느끼고 싶었어요.
그런데 그러지 못하고 4년 동안 이런 생활을 하려고 하니 정신적으로 정말 힘들었어요.
그래서 부모님과 상의도 없이 덜컥 자퇴해 버렸습니다.
-2014년 더그아웃 매거진과의 인터뷰 中.

그렇게 소년은 야구의 길에서 떠났다. 그러나 정처 없이 탈선한 그 누구도 그렇듯이, 그 역시 방황했다. 3개월이 지났을 때, 소년은 생각했다. 야구를 하는 시간이 제일 재미있었던 시간이었다고. 소년은 다시 야구가 하고 싶었다. 홍익대로 돌아가 장채근 감독님께 빌어볼까 생각도 했지만, 자퇴 이후 한 달간 기회를 주셨음에도 돌아가지 않은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며 미안한 마음에 그렇게 하지 못했다. 다시 야구를 하고 싶었던 그에게 손을 내밀어 준 것은 시카고 컵스였다. 소년은 연락이 온 즉시 테스트 영상을 찍어 보냈고, 일주일간의 기나긴 기다림 끝에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2013년의 끝자락이었다.

images-16.jpeg 아무것도 아닌 선수의 아무것도 아닌 기록.

시카고 컵스에서 다시 바라 마지않던 야구를 할 수 있게 되었지만, 마냥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루키(R) 리그에서 시작한 소년은 타격에서 .254의 타율과 .610의 OPS를 기록하면서 부진했고, 준수했던 수비 역시 좋지 않은 모습을 보였다. 이듬해에는 루키 리그를 떠나 쇼트 에이(A-) 리그로 승격했지만 이곳에서도 .218의 타율과 .568의 OPS. 주전 유격수임에도 좋지 않은 수비를 보이며 난조를 겪었다. 결국 그의 선택은 포지션 변경이었다.

2016년, 소년은 배터 박스가 아닌 마운드에 서서 경기에 참가했다. 내야수 시절 강견으로 이름을 날렸던 선수답게 최고 구속 92마일, 148.1km로 준수한 피칭을 보여줬지만, 문제가 발생했다. 2016년 말 공을 던지던 오른쪽 어깨에 통증이 발생한 것이다. 당해 기록 역시 4경기 3.1이닝 3실점 ERA 8.10으로 좋지 않았던 탓에 결국 그는 2017년 스프링캠프를 마친 뒤 시카고 컵스에서 방출 소식을 듣는다. 2017년 3월 22일, 그의 야구 심장이 두 번째로 멈춰버린 시간이었다.

images-17.jpeg 아무것도 아닌 선수의 아무것도 아닌 기록.

소년은 귀국했으나, 야구를 그만두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한 번 그만두었을 때 자신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포기하지 않았다. 귀국 직후 소년은 눈앞에 닥친 병역 문제부터 해결하기로 했다. 일반병으로 자원입대를 하며 복무를 시작한 그는, 부대에 야구선수임을 밝히고 배트 반입 허가를 받을 수 있었다. 일병 때까지는 스윙 연습과 웨이트 트레이닝을 하고, 상병 때부터는 야구선수 출신 후임이 들어와 캐치볼을 했다. 군 생활 내내 그의 야구 심장은 멈추지 않고 박동했다.

복무를 마친 소년은 다시금 거취를 고민했다. 그러던 와중 그에게 손을 내밀어 준 사람이 충훈고등학교 야구부 시절 은사, 김인식 감독이었다. 김인식 감독은 당시 독립리그 팀인 연천 미라클의 감독으로 있었고, 소년은 그를 따라 연천 미라클에 입단했다. 입단 후에는 다시 타자로 전향해 주전 타자로 활약하면서 프로 2군과 3군, 다른 독립리그 팀들과 끊임없이 맞붙었다. 그렇게 2019년 3월 21일, 해외파 선수 유예기간이 만료되면서 소년은 2020 KBO 신인드래프트 및 트라이아웃에 참가 신청서를 냈다. 사람들은 MILB 성적이 좋지도 않고, 부상 이력도 있어 하위 라운드에서나 지명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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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신인 드래프트 2차 3R
LG 트윈스 지명, 연천 미라클 손호영.

모두의 예상을 깨고 3라운드 전체 23번 지명을 받은 소년, 손호영은 고교 야구부 유니폼을 입고 있는 7살 동생들 사이에서 양복 차림으로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공수 양면에서 포텐셜을 인정받으면서, 당시 2루수가 무주공산이었던 LG 트윈스가 높게 평가해 지명한 것이다. 그렇게 그는 충훈고의 두 번째 프로야구 선수가 되어 서울로 향했다.

그러나 프로의 벽은 높았다. 입단 직후 2020 시즌 개막 엔트리에 들어가며 데뷔전을 치렀으나, 경쟁자였던 구본혁, 백승현, 이주형, 정근우, 정주현 등 사이에서 가장 좋지 않은 수비를 보여주었다. 그 반대로 타격면에서는 가장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결정적인 실책이 잦았다. 그럼에도 첫해 22경기 31타석 11안타 타율 .367 출루율 .387 장타율 .433 OPS .820으로 좋은 타격을 보여주며 얼리픽이라는 물음표에 대한 마침표는 찍을 수 있었다.

당시 LG의 상황도 좋지 않았다. 그 당시 감독 류중일은 수비를 중시하는 경기 운영을 했고, 이는 타격 위주의 활약을 펼치던 손호영이 자주 대수비로 교체되는 결과를 야기했다. 후임 감독인 류지현은 벤치에서 빠른 결단을 내렸다. 타석마다 선수가 바뀌는 경우가 잦았으며, 손호영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2군에 내려가고 싶지 않다는 간절함과 무언가 보어 주어야 한다는 조급함이 겹쳐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결국 간간이 콜업되기는 했으나, 주로 2군에서 2021년을 보냈다.

images-19.jpeg 아무것도 아닌 선수의 아무것도 아닌 기록.

2022년 5월, 다시 손호영은 1군으로 복귀했다. 그간 갈고닦았던 타격 실력을 유감없이 뽐내면서, 나원탁에게 프로 데뷔 첫 홈런을 뽑아내기도 했다. 경쟁자 송찬의가 공수 양면에서 주춤하는 사이 주전 2루수 자리를 꿰차면서 마침내 날개를 펼쳤다. 그러나 그의 날개를 금세 찢어버린 것은 다름 아닌 부상이었다. 고질적인 햄스트링 부상으로 이탈하기를 여러 차례, 이번에 그를 찾아온 것은 중수골 골절이었다. 가지고 있는 운동 능력에 비해 근육과 뼈가 약했던 것일까. 이듬해 2023년 복귀한 손호영은 시범경기에서 또다시 햄스트링 부상을 당하고 말았다. 유리몸이라는 이름표가 그를 찾아오는 순간이었다.

6월 말에나 복귀한 손호영은 1군과 2군을 넘나들었으나 부상 여파로 최악의 모습을 보였다. 1할까지 곤두박질친 타율은 그를 확장 엔트리에도 포함되지 못하게 했고, 주전 문보경의 아시안게임 차출이 있고 나서야 1군을 밟을 수 있었다. 시즌 말 다시 감을 잡기 시작한 손호영은 점차 좋아지는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했고, 한국시리즈 엔트리에까지 합류할 수 있었다. 한국시리즈에서는 대주자로 활약하면서 마침내 꿈에 그리던 우승반지를 얻게 되었다. 독립리그 출신 최초 우승반지, 비록 벤치 멤버였지만 그 값은 덜하지 않았다.

우승 이후로 만사형통하면 좋으련만, 또다시 부상의 마수가 그를 덮쳤다. 2024년 봄 다시 부상을 당한 손호영은 애리조나 스프링캠프 명단에서도 제외되었다. 이립의 봄에 찾아온 악몽이었다. 김민성이 사인 앤 트레이드로 친정팀 롯데 자이언츠에 복귀하면서 내야 백업이 귀했던 LG에게도 악몽이었다.

images-21.jpeg 아무것도 아닌 선수의 아무것도 아닌 기록.

부상 치료에 전념하던 2개월이 지나고 3월 30일, 그의 삶을 또다시 뒤흔드는 사건이 발생한다. 롯데 자이언츠가 우완 사이드암 유망주 우강훈을 내어주고 LG 트윈스가 반대급부로 손호영을 내어주는 트레이드에 상호 동의한 것이었다. 롯데 팬들은 분개했고, LG 팬들은 의아했다. 간신히 모아두었던 어린 유망주들을 내어주고 나이 든 내야수를 받아왔다는 사실에 분개했고, 손호영이 떠나고 유망주가 온다는 사실 자체에 의아했다. 소년은 묵묵히 짐을 싸 부산으로 향했다. 그의 4번째 구단으로 가는 길이었다.

이적 직후 곧바로 1군에 등록된 그는 범상치 않은 출발을 했다. 4월 2일 박상원을 상대로 결승타를 때려내며 팀의 승리를 챙겼으며, 그 이후로도 꾸준히 안타를 기록했다. 5월에는 역전 쓰리런 홈런을 쳐내고, OPS의 앞자리를 7에서 8로 바꾸며 한동희의 이탈로 비어버린 롯데의 3루를 완벽하게 메꿨다. 롯데 팬들의 분노가 환호로 바뀌는 2개월이었다. 그러나 5월 3일, 언제나 그의 발목을 잡았던 햄스트링이 또다시 터지고 말았다. 4주가량 걸리는 부상 진단에도 손호영은 개념치 않고 빠르게 페이스를 끌어올렸다. 정확히 한 달 후 6월 2일, 그는 사직의 품으로 돌아왔다. 늘 있었던 부상 지연도 추가 부상도 없이 정확하게.

images-18.jpeg 아무것도 아닌 선수의 아무것도 아닌 기록.

복귀전에서는 4타수 2안타 2타점을 기록하며 부상 여파 따위는 없다는 듯 포효했다. 이후 KIA와의 시리즈에서는 두 경기에서 홈런을, SSG와의 시리즈에서는 내내 멀티히트를, 이어 키움과의 시리즈에서도 내내 안타를 기록했다. 한 발자국씩 걸어온 길이 어느새 길게 늘어져 있었다. 6월 14일, 친정팀과의 첫 경기에서 그는 안타를 쳐내며 25경기 연속 안타라는 기록을 완성한다. KBO 통산 11번째 기록이었다.

그다음 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손호영은 안타를 쳤다. 그다음 날에는 홈런을 쳤다. 25경기였던 기록이 28경기로 늘어났다. 25경기였던 LG 이병규, 롯데 박현승, 우리 이택근, 넥센 서건창, 두산 허경민의 기록을 넘었고, 1997년 쌍방울 레이더스 김기태의 26경기도 넘었다. 2008년 SK 박재홍과 2014년 SK 이명기의 28경기와 타이기록이었다.

모두가 주목하던 6월 19일, 손호영은 보란 듯이 첫 타석에서 1타점 적시타를 때려내며 박재홍과 이명기를 제쳤다. 29경기 연속 안타, 그의 위로 남은 선수는 세 명뿐이었다. 모르고 있었던 사람들조차 그의 기록에 주목하기 시작하자 입을 열었다.

몇 번 얘기했지만, 기록은 전혀 신경 쓰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제가 언제부터 대기록에 도전한다고 의식하겠어요. 정말 하나도 상관이 없습니다. 내일 깨져도 상관이 없습니다. 안타를 계속 치고 싶은 것은 팀의 승리를 위해서 치고 싶다는 생각뿐입니다.
-29경기 연속 안타를 기록한 6월 19일 손호영의 경기 후 인터뷰.

손호영은 연속 안타 기록보다, 당당하게 부모님께 야구장에 오셔도 된다고 했다는 사실에 더욱 기뻐했다. 고교 시절 이후 처음으로 부모님께 경기를 보러 오라고 한 손호영은, 그동안은 부모님이 오셔도 선발이라는 보장이 없어 볼 수 없을 것 같아 초대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실제로도 LG 시절 한 번 오셨으나 경기에 나오지 못했다고 했다. 그런 그가 이제는 선발로 나설 수 있다는 확신이 있어 부모님을 경기에 초대했다.

isp20240618000015.800x.0.jpg 아무것도 아닌 선수의 아무것도 아닌 기록.

아무것도 아닌 선수의 아무것도 아닌 기록은 30경기에서 끊겼다. 키움 히어로즈와의 경기에서 호수비에 번번이 막혔고, 마지막 타석에서는 느린 내야 땅볼을 김혜성이 정확하고 빠른 송구로 처리하며 헤드 퍼스트 슬라이딩으로 몸을 던진 손호영을 비디오 판독 접전 끝에 잡아냈다. 롯데의 심장 박정태의 기록까지 한 발짝 남은 순간이었다.

박정태에게도 1999년 당시 32경기 연속 안타에 도전하는 두산전에서 비슷한 상황이 있었다. 마지막 타구를 정타로 때려 안타에 가까운 타구를 만들었으나, 3루수 홍원기가 몸을 던져 안타를 지워내는 말도 안 되는 수비를 보여주었다. 당시 롯데는 0-6으로 지고 있었던 상황이었고, 패배가 99% 확정된 상황이었다. 따라서 홍원기가 그렇게까지 잡을 필요가 없었던 상황이었다. 이에 경기가 끝나고 기자들이 홍원기가 밉지 않냐고 질문했을 때, 박정태는 이렇게 답했다.

(홍원기에게) 너무 고맙습니다. 그 수비로 인해서 지금까지 쌓아 왔던 연속 안타 기록이 짜고 친 기록이 아니라, 모두가 최선을 다하는 혈투 속에서 힘겹게 쌓아 온 기록이라는 것이 증명되었기 때문입니다. 기록을 끊은 것이 아니라, 기록을 가치 있게 해 줬습니다.
-연속 안타 기록이 중단되었을 당시 박정태의 인터뷰.

당시 롯데의 후배들은 25경기 연속 안타에서 박정태가 안타를 기록하지 못하고 있자 덕아웃에서 이를 악물고 경기에 나섰다. 한 이닝 만에 8명의 타자가 출장하며 끊어질 뻔했던 마지막 타석을 박정태에게 이었다. 롯데 역시 KT전에서 손호영의 기록이 끊기기 직전 9회 마지막 타석을 이어주었고, 손호영은 동점 홈런으로 화답했다.

연속 안타, 어찌 보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기록이다. 안타를 수없이 많이 친 것도 아니고, 팀에 지대한 기여를 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 기록이 소중한 것은, 개인의 실력과 더불어 그 기록이라는 장대한 서사를 쌓아 올리는 과정에서 팀이 하나로 뭉쳤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자이언츠는 드높은 기세로 많은 승리를 따냈고, 하위권을 전전하던 상황에서 중위권을 노리고 있을 정도까지 올라왔다. 손호영의 기록은 롯데가 하나로 뭉쳐서 싸워왔다는 혈투의 역사이자, 야구를 그만두고 포기했던 소년의 심장이 아직까지 뛰고 있다는 고동소리이며, 모두가 자신의 자리에서 모든 플레이에 최선을 다했다는 KBO의 땀방울이다.

앞으로 청년은 유리몸이라는 이름표가 다시 나부낄 수도 있고, 잠깐 활약하고 사라질 수도 있다. 144경기에 모두 출장할 수도 있고, 3루수 골든글러브에 도전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어떠한 모습으로 우리의 곁을 떠나든 간에,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손호영, 야구를 사랑해 여기까지 달려온 당신은 그 누구보다 멋지게 우리의 곁을 떠날 것이라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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