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예인 73년 전 오늘, 영국군이 서울을 구하다 (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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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댓글 0건 조회 90회 작성일 24-04-23 22:17본문
우리는 한국전쟁의 많은 부분을 서울의 주인이 바뀌었던 사건들과 연결지어 기억하곤 해
![8000494794_20100705.jpeg 73년 전 오늘, 영국군이 서울을 구하다 (1)](http://image.fmkorea.com/files/attach/new4/20240423/6949821931_486263_94b9ba0cef3fea7c2a56da56eb6dd0e9.jpeg)
예를 들어 북한군의 기습적인 남침은 3일만에 서울이 함락됐던 충격으로 이어지고
![IMG_20240423_130526_(300_x_381_픽셀).jpg 73년 전 오늘, 영국군이 서울을 구하다 (1)](http://image.fmkorea.com/files/attach/new4/20240423/6949821931_486263_c3713871176ff4ef6b8129541f7796b2.jpg)
인천상륙작전과 전세 역전을 생각할 때면 9.28 서울 수복을 함께 떠올리지
![21872a12-6523-43a9-b5ac-96226eeb4ff4.jpg 73년 전 오늘, 영국군이 서울을 구하다 (1)](http://image.fmkorea.com/files/attach/new4/20240423/6949821931_486263_55616e8c6268b0f0b7021d79cc2d3f40.jpg)
중공군의 개입은 1.4 후퇴라는 비극으로 끝맺어지고 말이야
얼마 지나지 않아 유엔군의 반격으로 서울을 재탈환하긴 했지만,
그 뒤로는 휴전 협상이 시작되어 지금의 휴전선 일대에서 일진일퇴의 고지쟁탈전을 벌이다 결국 휴전이 성립됐다는 정도로 말이지
하지만 사람들이 흔히 떠올리는 이런 줄거리에는 서울 재탈환과 휴전협상 개시 사이에 한 가지 정말로 중요한 사건이 빠져있어
중공군이 마지막으로 서울을 재점령하고, 한반도 전체의 적화통일을 달성하려고 한 시도가 있었거든.
바로1951년 중공군 춘계공세야.
그리고 이 글은 73년 전 오늘 그 중공군 춘계공세를 막아낸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야.
1951년 3월(유엔군 반격 진행 중)
마오쩌둥
(※ 몇달 전 아들이 맛있는 계란볶음밥이 됨):
야 덕회야 잘 하다가 왜 서울도 뺏기고 전선이 다시 북쪽으로 밀리냐
펑더화이
(※ 중공군 사령관. 이후 문혁 시기 숙청. 숙청 사유: 계란볶음밥 만드는 걸 못 막아서):
아 유엔군 놈들이 이제 약간 정신을 차렸나본데요; 그래도 저한테 생각이 다 있습니다
마오쩌둥:
생각?
우리가 청천강에서 여기 임진강까지 한 35만~40만 병력으로 밀어붙였죠?
마오쩌둥:
ㅇㅇ
펑더화이:
그러니까 지금 중국 본토에 대기중인 증원군 2개 병단(서방의 야전군에 해당)을 일찍 투입해서
4월부터 우리 중공군 95만에 북한군 35만, 도합 130만명으로 진짜 인해전술 공세를 펼치면 충분히 이길 수 있습니다 ㅋㅋㅋ
마오쩌둥
(※ 지난 몇달 좀 이겼다고 허파에 바람 들어감):
ㅋㅋㅋㅋ 그래 그 정도면 미군 3개 사단이랑 한국군 1개 사단, 영국군 1개 여단, 터키군 1개 여단은 섬멸할 수 있지?
펑더화이:
음 그건 좀 장담을 못하겠는데요;
마오쩌둥:
아... 역시 그건 좀 너무 많았나?
펑더화이
(※ 마오보다 더 허파에 바람 들어감):
아뇨 저는 이번에 미군 3개 사단에 한국군 3개 사단, 영국군 2개 여단, 터키군 1개 여단 정도는 섬멸할 생각이라서요 ㅋㅋㅋㅋㅋ
마오쩌둥:
ㅋㅋㅋㅋ 이래야 내 동향 후배답지 ㅇㅇ
그만큼 피해를 입으면 저 제국주의자 놈들도 한반도는 포기하고 일본으로 철수할 거야 너만 믿는다 ㅋㅋㅋㅋ
이렇게 130만명이라는 전례 없는 병력을 투입하기로 결정된 중공군 춘계공세의 작전 목표는 간단했어
바로 서울 북방을 담당하는 유엔군 주력 미 육군 제1군단의 포위섬멸이야
위에서 마오랑 펑더화이가 떠들어댄 미군 3개 사단이니 한국군 1개 사단이니 운운하는 섬멸 목표도 다 미 1군단 +α를 이야기하는 거였거든
미 1군단을 섬멸하고 서울을 점령하면 그 정도의 전력 공백을 감당할 수 없는 유엔군의 전선이 와르르 무너지면서
한반도를 포기할 수밖에 없다는 발상이었지
그리고 이를 위해서 3개 병단, 즉 9개 군(서방의 군단에 해당) + 북한군 1개 군단을 미 1군단 정면에 집중시켰어
이 지도를 보면 중공군의 작전 계획이 잘 나타나 있어
1) 4월 22일 일몰부터 연천-철원에서 중공군 제3병단(지도상 로마 숫자 III PLA)이 미 1군단의 정면으로 공격해서 군단 예하의 각 사단을 분단시킨다
2) 동시에 제9병단(지도상 로마 숫자 IX PLA)이 미 1군단과 미 9군단 사이의 가평청평천 방면으로 돌파한 뒤 서울 동측방까지 도달해 유엔군 서부전선과 동부전선의 연결을 절단한다
3) 그리고 결정타를 날릴 진짜 주공부대, 제19병단(지도상 로마 숫자 XIX PLA)은 파주에서 미 1군단의 서쪽 측면을 돌파해의정부로 우회, 미 1군단의 퇴로를 차단하고 북한군 1군단과서울을 점령한다
도로를 중심으로 위의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의정부를 빼앗길 경우 미 1군단의 퇴로는 거의 끊어지고 서울이 점령된다면 후방이 완전히 차단당하게 돼
게다가 2월 말부터 계속된 유엔군의 반격작전으로 미 1군단 주력이 철원 코앞까지 북상한 반면
군단 좌익은 임진강선을 유지했기 때문에얇고 길게 늘어선측방이 그대로 노출된 상태였지
금상첨화로 이 전선을 지키는 유엔군은 중공군이 언제나 만만하게 여기던 한국군 1개 사단과
넓은 정면을 틀어막기에는 너무 병력이 적었던 영국군 1개 여단이었고 말이야
1개 사단 + 1개 여단 방어정면에 중공군 19병단 + 북한군 1군단, 도합 4개 군단 병력을 쏟아붓는다?
병력 차이가 1:8에서 1:10인데, 누구나 쉽고 빠르게 돌파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즉 중공군의 춘계공세 작계는 꽤 그럴싸하게 구성된 설득력 있는 계획이었어
그리고 1951년 4월 말, 이 압도적인 중공군의 해일에 맞선 부대가 바로
국군 1사단과이번 이야기의 주인공,영국군 제29여단이야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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