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예인 4-4-2 : 사키 / 퍼거슨 / 벵거 / 시메오네 (상)[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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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고기먹는스님 댓글 0건 조회 123회 작성일 24-05-05 03:17본문
리누스 미헬스 / 엘레니오 에레라 / 아리고 사키 / 요한 크루이프 / 펩 과르디올라
제가 생각하는 역대 축구사 최상단에 위치하는 전술가들입니다. 놀랍게도 에레라를 제외하면 모두 '토탈 풋볼'의 족보에 위치하는 감독들이죠. 이 중 본인의 철학을 녹인 하나의 구조로 큰 반향을 일으킨 인물은 아리고 사키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가 성립한 4-4-2는 아직까지도 현대 축구의 명장들의 패에서 떨어지지 못했으니까요. 그러나 사키의 4-4-2 / 퍼거슨의 4-4-2 / 뱅가의 4-4-2 / 시메오네의 4-4-2 / 현재의 4-4-2 는 모두 각기 다른 매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은 사키 / 퍼거슨의 4-4-2까지 알아보고 (하)편에서는 벵거 / 시메오네 / 현재의 4-4-2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1-1. 공격 시에는 볼을, 수비 시에는 공간을 독점해라 - 사키이즘
사키의 전술 철학, 사키이즘의 발단을 간략하게 설명해 보겠습니다.
- 3명이기엔 너무 넓고 5명이기엔 너무 좁은 가로 68m를 수비하기 가장 적절한 숫자는 4명이다. (횡적 관점)
- 측면에 한 선수만 배치하기에는 너무 위험하고 세 선수를 배치하는 것은 낭비니 측면 세로 105m를 수비하기 가장 적절한 숫자는 2명이다. (종적 관점)
- 남은 두 선수는 공격수이자 1차 압박선으로 이렇게 10명을 배치한다면 가장 빈틈없이 균형 있게 필드를 지배할 수 있을 것이다.
위의 3가지를 합쳐 사키는 대인 방어가 아닌 지역 방어라는 새로운 발상을 해냈습니다. 대인 방어와 지역 방어의 가장 큰 차이는 '본인들의 구조를 능동적으로 가져갈 수 있는가?'로 4-4-2는 지역 방어를 시도하는데 가장 적절한 선택지였던 것이죠.
기본적으로 사키의 밀란은 라인이 굉장히 높은 편이었습니다. 이는 오늘날의 게겐프레싱과 유사한 이유로, 전방에서 끊임없는 압박을 실시하면서 상대의 공을 상대의 진영에서 뺏어내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반바스텐과 굴리트는 그 1차 압박선으로 상대 수비진을 끊임없이 압박하였고, 그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볼을 잘 다루는 센터백이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에 효과는 굉장했습니다.
사키의 4-4-2는 수비 시에만 유지된 것이 아닌 공격 시에도 유지되었던 대형입니다. 다만 도나도니는 안첼로티 - 레이카르트 라인과 반바스텐 - 굴리트 사이에 발생하는 Channel을 침투하기도 했으며 도나도니가 측면 깊숙이 가면 굴리트가 살짝 내려오기도 했습니다. 안첼로티 - 레이카르트는 과한 전진보다는 공격진과 수비진의 사이 간격 중 적절한 위치에 자리를 잡아 공간을 점유했고 (레이카르트는 가끔씩 침투하기도 했습니다) 말디니와 타소티는 에바니와 도나도니가 전진한 공간으로 들어가 측면의 공격 숫자를 늘려주었습니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수비는 중앙 지향적, 공격은 측면 지향적인 선수들의 동선입니다. 현대 축구의 Motto이기도 한 이 문장은 사키이즘에서부터 내려왔던 것입니다.
아리고 사키의 4-4-2에서 대부분의 4-4-2의 장단점이 존재합니다.
장점
- 적응하기가 쉬운 구조
- 공격과 수비의 밸런스가 아주 잘 맞는다는 점
- 다른 구조로 변형하기 용이한 구조
단점
- 그 당시 축구계를 지배하던 판타지스타를 둘 포지션이 애매하다는 점
- 볼을 점유하는데 불리한 구조
- 종적인 간격이 벌어지기 시작하면 치명적이라는 점
특히 단점의 1항, 판타지스타를 둘 포지션이 애매하다는 점이 사키가 감독직 생활을 다소 이른 시기에 마감하게 만들지 않았나 싶습니다. 굴리트와 도나도니는 충분히 트레콰르티스타로서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지만 사키이즘 아래에서 부품이 되었고 결과적으로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굴리트와 도나도니같이 사키의 말을 고분고분 듣지는 않았고 그 대표적인 예가 사키와 사이가 좋지 않은 로베르토 바조였죠.
그 당시 세리에A의 주된 구조는 3-5-2, 리베로와 조나 미스타를 활용한 포메이션이었습니다. 양 윙백은 깊은 지역까지 오버래핑하고 가운데 3명의 미드필더가 가로 68m를 구성하는, 그리고 전방의 강력한 공격수 2명을 활용해 3 vs 2의 수적 열세를 어떻게든 극복하려는 구단들의 생각이었죠. 사키는 조금 달랐습니다. 최대한의 공격 기회를 창출하기 위해선 1) 본인들이 공을 소유해야 하고 / 2) 슈팅까지 수월하게 할 수 있는 구조를 선택해야겠다는 것이었죠. 4-4-2는 그런 의미에서 카테나치오가 가져가던 이상주의와는 아주 반대되는 현실적인 구조였습니다.
4-4-2만의 Identity는 4개의 Channel (4레인)에서 종패스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 당시에는 5레인, 즉 하프 스페이스에 대한 구분을 크게 안 했었기 때문에 이 점은 상대 수비진에겐 상당히 위협적이었습니다.
조나 미스타, 3-5-2는 3개의 Channel (3레인)에서 종패스가 가능합니다.
토탈 풋볼의 상징, 4-3-3은 중원이 센터백에게 공을 받기 위해 내려오지 않는 이상 종패스가 사실상 불가능했습니다. (물론 이쪽은 수많은 삼각형이 장점이기 때문에 또 다른 장점이 있는 셈이죠)
종패스의 길이 많기 때문에 4-4-2는 수비에서 공격까지 패스만 이어진다면 슈팅까지 수월하게 할 수 있는 구조였습니다. 실제로 반바스텐과 굴리트가 많은 득점을 기록한 루트 중 하나가 수비진에서 한 단계를 뛰어넘고 찔러주는 종패스였죠.
다만 볼을 계속해서 점유하는데 4-4-2가 좋은 포지션은 아니었고 그걸 사키도 알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사키가 하기 어려운 역발상을 두 개 하는데 그중 하나가 아까 언급한 전방에서의 끊임없는 압박이었고 두 번째는 점유율을 굳이 계속 점유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무슨 뜻이냐면 한 번 공격할 때의 시간은 길게 가져가지 않되, 그 횟수를 상대보다 훨씬 많이 가져가면서 점유율도 가져가고 가둬놓고 패겠다는 발상이었죠. 가장 대표적인 경기가 88-89 유러피언 컵 결승전 슈테아우아와의 경기였습니다. 4:0으로 이긴 이 경기에서 로쏘네리는 정말 수도 없이 공격을 가져가면서 볼을 점유했고 마무리를 늦추지 않았습니다. (재밌게도 이 발상을 현대 축구에서 가져가는 감독 역시 클롭이죠. 도르트문트든, 리버풀이든 경기당 슈팅 숫자가 많은 편에 속합니다)
만들어가는 플레이, 혹은 개개인의 능력이 훨씬 중요했던 과거의 카테나치오, 조나 미스타는 이 사키이즘 하나 때문에 쓸쓸히 자취를 감췄습니다. 그리고 그 조나 미스타 안에 있었던 이탈리아만의 포지션, 리베로 역시 이에 해당했죠. 다만 사키는 이 리베로만의 장점은 살리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사키가 밀란에 오기 전까지 로쏘네리의 캡틴이었던 바레시 역시 원래는 걸출한 리베로였습니다. 그러나 사키가 부임한 이후 그는 완전한 리베로로 뛸 수는 없었습니다. 공격 시의 전진을 다소 자제해야 했고 최후방 수비수로서 자유로운 1인이 되지 못했죠. 아마 사키는 이를 현실적으로 보았을 땐 단점으로 인식했을 것입니다. 다만 그는 리베로만의 움직임을 장점으로 바꾸려고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프사이드 트랩이었죠. 리베로는 원래 자유로운 1인으로서 다른 수비수에 비해 후방에 위치했습니다. 사키는 이를 역이용해 바레시에게 이렇게 주문합니다.
"상대 공격수가 너를 의식하고 오프사이드에 걸리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 높이 위치할 거다. 그걸 넌 역이용해야 한다. 상대 공격수의 움직임이 앞쪽을 향할 때 재빠르게 다른 수비수들과 횡적인 간격을 맞춰라"
세계 최고의 리베로였던 바레시에게 이는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오프사이드 트랩의 귀재로서 그는 기가 막힐 정도로 상대의 흐름을 끊었고 본인들이 더 볼을 점유할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이 역시 사키가 현실주의적인 철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겠죠.
2-1. 사키식 4-4-2와 잉글랜드식 4-4-2의 합의점 - 퍼거슨
사실 4-4-2의 시초는 사키가 아닌 비센치 페올라였습니다. 그는 4-2-4 구조를 통해 삼바 군단 브라질이 1958년 월드컵에서 우승할 수 있게 만들었죠. 이 4-2-4는 잉글랜드에도 널리 퍼졌지만 초반에는 금방 묻혔습니다. 기본적으로 공격과 수비 사이의 넓은 Channel을 두 선수가 막기에는 역부족이었기 때문이었죠.
그러나 1966년 알프 램지 감독이 4-4-2로 잉글랜드를 세계 정상으로 이끌자 4-2-4와 비슷한 구조였던 4-4-2가 잉글랜드 전역을 휩쓸게 됩니다. 대표적인 인물들이 붉은 제국을 이끌었던 빌 샹클리와 밥 페이즐리였습니다. 다만 사키의 4-4-2와의 차이가 있다면 2선과 3선의 간격이 벌어져도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채 4명의 공격과 4명의 수비, 두 명의 하이브리드 선수를 배치했던 것이죠. 사키가 2명의 수비와 8명의 하이브리드 선수를 배치했던 것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퍼거슨은 이 사키의 철학, 토탈 풋볼과 직선적인 플레이를 잉글랜드식 4-4-2에 녹이고 싶었을 것입니다.
퍼거슨은 리빌딩이 끝난 92-93 시즌부터 4-4-2의 각 자리에 어린 스페셜리스트들을 앉혀놓기 시작했습니다. 클래식 윙어의 정점이었던 긱스 (1992년부터 주전) / 처진 스트라이커에서 점차 팀의 8번과 10번이 된 스콜스 (1995년부터 주전) / 약 9년 동안 오른쪽의 날카로움을 책임졌던 페어, 네빌 (1995년부터 주전)과 베컴 (1996년부터 주전)은 모두 퍼거슨의 걸작이었습니다. 이외에 브라이언 롭슨, 에릭 칸토나, 폴 인스, 마크 휴즈, 스티브 브루스, 야프 스탐, 드와이트 요크, 앤디 콜 등 수많은 기존의 선수들과 영입생들이 구조의 부품이 되어 팀의 톱니바퀴를 수월하게 돌려주었습니다. 그 결과 맨유는 완전히 암흑기에서 벗어나 전성기의 라인에 올라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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