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예인 [스포][장문] <존 오브 인터레스트> 후기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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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댓글 0건 조회 5회 작성일 24-06-18 2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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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uvellevague-20240402-135634-005.jpg [스포][장문] <존 오브 인터레스트> 후기

그야말로 '존'으로 진입하는 인상을 주는 오프닝을 우선 살피자. 스탠리 큐브릭이 자주 쓰던 방식을 떠올리게 되는, 암전된 화면에 더해진 육중한 공간감의 음악이 관객을 한차례 압도하고 나면, 산과 물과 풀숲에서 뛰노는 어느 한 가족의 평화로운 순간이 등장한다. 평화 말고는 다른 것을 떠올리기 쉽지 않은 순간. 단란한 가족에 자식들도 많은 이 가정은 너무나 행복해 보인다. 그러나 잠시 후, 우리는 아버지 루돌프의 제복이 바로 그 악명 높은 나치의 근무복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루돌프의 직장은 자택과 한 울타리 건너에 있는 바로 '옆 공간'인데, 우리는 그곳이 어떤 곳인지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게 된다.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끔찍했던 공간이었을 곳이 바로 울타리 너머의 그곳 아우슈비츠 수용소이지만 장벽 너머 그들의 공간에선 그것은 완전히 남의 이야기다. 자크 타티의 미장센을 떠올리게 할 정도로 정갈하고 아름다운 그곳의 디자인. 장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공간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낙원이 있다.

집 바깥 정원의 모습과는 달리 묘하게 채도가 낮은 이들의 집 안으로는 어디서부터 온 것인지 모를 옷가지들이 잔뜩 들어온다. 그들은 한 벌씩 원하는 것을 골라가고, 집 안에 사람이 들어가자 그의 신발을 부리나케 닦는 사람과 눈길도 받지 못한 채 집 안에서 공기처럼 일하는 여성 등 이들의 집에 무언가 오묘한 외부인들이 존재한다. 집 내부 어딘가에선 건조한 톤으로 끔찍한 대화가 이어진다. "7시간이면 4~500명을 태울 수 있지"라는 말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 이후 저 멀리 장벽 너머의 "공장"에선 밤늦게까지 연기가 피어오른다.

강물에서 아이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던 루돌프는 어딘가에서 흘러들어온 회색빛 '오수'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아이들을 피신시킨다. 그리도 더러운 것이 닿았는지 아이들을 살갗이 벗겨질 정도로 깨끗이 씻기는 회스. "집에 유대인이 있어?" 라 묻는 회스의 어머니의 질문에, "유대인은 저 벽 반대편에 있어요"라 대답하는 회스. 상대방을 안심시키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말이었겠지만, 유대인은 분명 그들의 집에 있었다. 아니 그녀에게는 그들이 '인간'으로 느껴지지 않았기에 그리 뱉어낸 대답이었을 수도 있겠지.

nouvellevague-20240402-135634-031.jpg [스포][장문] <존 오브 인터레스트> 후기
nouvellevague-20240402-135634-049.jpg [스포][장문] <존 오브 인터레스트> 후기

영화에서 가장 소름끼치는 순간들은 영화의 카메라 앞에 어떠한 이미지를 가져다 놓을 때가 아니다. 지극히 평온하고 아름다운 이미지 너머로 들리는 누군가의 울부짖음, 무언가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확신할 수밖에 없는 소음들이 '들리는' 순간들이다. 탈출을 실행하다 실패한 듯한 누군가의 절규를 낙원 안에서 들으며 "다시는 그러지 마세요" 라며 "진심어린" 조언을 건네는 아이의 모습에서 우리는 절망을 느낄 수밖에. <존오인>은 화면의 중심보단 화면의 외곽이 중요하고 중심의 사운드보단 주변의 소음이 중요한 영화다. 그러나 중심과 주변은 그 위치를 바꾸진 않는다. <존오인>의 핵심은 그것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우리가 보기 쉽고 듣기 쉬운 것보다 그 너머 그 주변 주위에 있는 것에 귀 기울여야 누군가가 은폐하고 있는 진실을 비로소 마주할 수 있다는 것을. (음악 영화를 제외하고선) 영화에서 이미지보다 사운드가 중요하다 싶었던 경우가 있었을까?

<존오인>은 다큐멘터리의 접근법을 보여주고 있다. <존오인>은 평소보다 2배는 더, 사운드에 집중해야 하는 영화다. 본작에서 카메라를 통한 기교는 전무하다시피 하다. 대부분의 순간들에서 카메라는 얼어붙어 있다. 쇼트의 연쇄, 카메라의 움직임, 즉 내화면을 통해 영화의 레이어를 만드는 대신 <존오인>은 외화면에 집중해 영화의 레이어와 더 나아가 영화의 주제를 만들어내기에 이른다. 본작의 내화면은 (본작의 핵심인) 외화면에 역설적인 대비를 이루는 기능으로서 복무한다. 한 울타리만 지나면 되는 남편의 출근길을 배웅하고 자식들과 집 정원의 아름다운 꽃을 바라보는 회스의 모습이 내화면에 포착되는 동시에 외화면으로는 의미심장한 둔탁한 쇠철 소리가 무심한 듯 흐른다. 회스가 어딘가에서 도착한 옷을 입어볼 때 저 멀리선 누군가를 처형하는 소리가 들린다. 스크린 안 내화면의 루돌프 부자는 왜가리 소리를 귀에 담지만, 스크린 밖 관객은 저 멀리 외화면에서 들리는 (아마도 나치가 누군가를 쫓으며 내는) 고함소리가 귀에 담겼을 것이다. 관객의 눈앞에서 루돌프는 그저 유희로 담배를 태우지만, 한편 공간 너머 저편에선 누군가의 육신이 태워지고 있는 모습이 연기로 암시된다. 비슷한 구도가 하나 더 있다. 수많은 유대인들을 가둬놓은 지옥을 벽 하나 뒤에 둔 그곳에서, 주인공 부부의 아들 클라우스는 '장난으로' 동생을 하우스에 가두는 놀이를 한다. 그것이 얼마나 역설적이고 섬뜩한 일인지 아이는 알지 못할 것이다. 악은 이리도 평범한 얼굴을 한 채 일상에 녹아 있다.

<존오인>은 무채색에 가깝다. 채도가 사라진 화면은 체온이 느껴지지 않는 화면이다. 영화에서 온도는 인간성으로 읽힌다. 인간성을 상실한 <존오인>의 내화면에서는 차마 포착할 수 없는 것이 온도, 인간성일 것이다. 그렇기에 열 감지 카메라로 소녀를 포착한 문제의 그 씬들은 이와 대비되어 힘을 얻는다. 말하자면 시각과 청각에 더해 촉각이라는, 아직 영화가 지배하지 못한 감각을 건드리는 것이다. 열 감지 카메라에 잡힌 모습으로 우리는 그 속에서도 온기를 머금고 있는 자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동시에 한편 우리는 좌절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흑백의 실루엣 카메라로만 볼 수 있는 것이 이 영화의 인간성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방법을 통해서만 본작 안의 인간성을 확인할 수 있다. 존재하나 맨눈으론 포착할 수 없는. 나치들의 회의는 그저 일상적인 업무를 처리하는 여느 기업인들의 회의처럼 보인다. 그들의 비즈니스에서 어떤 위악성도 찾아볼 수 없다. 나치의 악마 같은 모습을 적어도 카메라의 이미지로는 담지 않는다. 파티장의 참석자들을 모두 죽일 방법을 계산해 봤다는 루돌프의 말이 역설적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화염과도 같은 죄악에 사로잡힌 악마의 모습이지만, 동시에 자신의 '업무'에 몰입하고 있는 '프로페셔널'의 모습이니.

nouvellevague-20240402-135634-012.jpg [스포][장문] <존 오브 인터레스트> 후기
nouvellevague-20240402-135634-013.jpg [스포][장문] <존 오브 인터레스트>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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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uvellevague-20240402-135634-042.jpg [스포][장문] <존 오브 인터레스트> 후기

<존오인>은 제목 그대로 '관심의 영역'을 확장하거나 축소하는 이야기다. 영화의 주제적인 측면에서도 그렇고 인물의 심리적인 측면에서도 그렇다. 아우슈비츠 내부 유대인들의 모습, 어쩌면 홀로코스트 영화에서 관객이 가장 관심 있어 할 장면은 이 영화의 '관심의 영역'이 아니다. 엔딩을 제외하고 아우슈비츠의 내부가 한 번 등장한다. 심지어 홀로코스트 소재를 자극으로 소비하는 어떤 영화들은 군침을 흘릴 '학살'의 순간이다. 그럼에도 <존오인>은 철저하게 그런 순간조차 카메라로 루돌프의 얼굴을 로우 앵글로 포착할 뿐이다. 그곳에서 들리는 어떤 끔찍한 '신음 소리들', 배경으로 피어오르는 거뭇한 연기의 존재로 우리는 현장의 끔찍함을 짐작할 뿐이다.

잠자리에 들기 전 집요하게도 구석구석의 방문을 걸어잠그고 곳곳의 등불을 끄는 루돌프의 모습은 무엇을 의미할까. 루돌프는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장벽 너머에 있는 것들을 보고 싶지 않고, 듣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장벽 너머에서 이곳으로 넘어오는 것들을 가족에게 보이기 싫었을 것이다. 강박적일 정도로 공간을 축소하는 행위는 '관심의 영역'을 축소하는 것을 시각적으로 관객에게 보여주는 장면이다. 그러나 철두철미한 루돌프도 단 한하나의 문, 회스 어머니가 묵고 있는 2층의 창문은 통제하지 못했다. 말하자면 본작의 주인공은 세 명인 셈이다. 루돌프, 회스, 그리고 회스의 어머니. 회스의 어머니는 한밤중 2층의 창문을 통해 저편에서 피어오르는 화염을 목격했다. 그녀는 그곳 낙원에서 모두가 익숙해져 인지하지 못했던 '냄새'와 '소음'을 체감했으며 한밤중 창문으로 장벽 너머의 죄악을 자각했다. 그녀는 악을 차마 견디지 못해 스스로 그곳에서 떠났다. 회스는 이제 그 악이 익숙해 아무렇지 않아 이 "낙원"을 떠나지 않으려 한다.

그리고 루돌프가 있다. 얼마 있지도 않은 미약한 스토리가 하필 '루돌프의 전출'인 것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내내 집 주변에서 전개되던 영화는 한 번 제 3의 구역으로 인물을 이동시킨다. 그곳은 파티장이며, 유대인들의 울부짖음이 들리지 않는 곳이다. 루돌프는 파티 장소에서 가스실의 데자뷰를 느낀다. 이들을 어떻게 태워버릴까 생각했다는 그. 밀폐된 공간에 군중이 모였다는 것은 양측이 같지만, 한 편은 지옥이었고 한 편은 이곳 천국이었다. <액트 오브 킬링>이 연상되듯 바닥에 헛구역질을 하는 루돌프. 루돌프는 다른 악을 실현하기 위해 다른 곳으로 옮겨졌지만 여전히 과거의 악 혹은 죄책감이 몸속에 잔존해 있다. 그래서 헛구역질을 했을 것이다. 아직 몸속 어딘가에 남아있을 일말의 죄책감 때문에.


루돌프는 헛구역질을 하고 어둠을 바라본다. 2023년의 아우슈비츠는 이제까지의 이야기와는 달리 비로소 '관심의 영역'이 된 모습이다. 여러 직원들이 그곳을 청소하고 여러 직원들이 그곳을 관리한다. 이제 그 현장이 '존 오브 인터레스트'가 되었지만, 그것이 마냥 좋은 일인 것일까? "비극의 과거를 보존한 채 기억한다"라는 미명으로 시작했지만 실상은 그것으로 자본을 축적하려는 어떠한 이들의 타락으로 인해 구경거리로 소비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루돌프의 헛구역질은 아직 남아 있는 과거 그의 죄악의 영향 혹은 그의 일말의 죄책감일 것이고, 현재의 아우슈비츠 장면이 끝나자 루돌프의 헛구역질이 멈춘 까닭은, 수 십 년 후에도 누군가들이 자신의 '악행'을 되풀이하고 있음을 본 안도감에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시간을 넘나들어 미래의 아우슈비츠를 본 루돌프는 이제는 계단 아래의 어둠으로 망설임 없이 걸어간다. 루돌프는 '쉰들러 리스트'를 실행하려 내려가지 않았을 테다. 루돌프는 '회스 작전'을 실행하려 내려간 것일 테다. 루돌프는 그 순간 분명 수많은 망자들의 음성을 들었을 것이다. 셀 수도 없이 쌓인 버려진 신발과 목발과 옷가지의 주인들, 셀 수도 없이 걸려 있던 머그샷의 주인들의 목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미래를 보고 온 루돌프는 더는 망설이지 않고 내려간다. 물론 관객들은 보았듯이, 그가 내려가는 곳은 까마득한 어둠 속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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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uvellevague-20240402-135634-015.jpg [스포][장문] <존 오브 인터레스트> 후기
nouvellevague-20240402-135634-017.jpg [스포][장문] <존 오브 인터레스트> 후기


비극을 재현하고 비극을 가공하고 비극을 카메라 앞에 가져다 놓음으로써 죄악을 고발하는 영화는 많다. 그러나 그 참혹한 현장을 끝까지 카메라 앞에 이미지로 재현해 놓길 거부하면서도 '외화면'과 '대비'의 방식을 통해 현장의 비극이 분명 존재했음을 공고히 하는 놀라운 성취를 이뤄낸 영화는 흔하지 않다. 홀로코스트 영화에서 매 순간 등장하는 '재현의 윤리'의 차원에서, <존오인>은 '재현하지 않지만 다큐멘터리는 아닌', 홀로코스트 영화의 신기원이다. <존오인>은 분명 wide한 영화가 아니다. specific한 영화다. 천 가지의 기술을 한 번씩 연마한 것보다 한 가지의 기술을 천 번 연마한 것이 더욱 무시무시하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영화라는 매체는 이미 모든 발전을 끝마쳤는지도 모른다. 현대 영화의 모든 법칙은 (보수적으로 봐도) 60년대에 모든 정립을 마쳤고, 'moving picture'라 불리는 이 예술에서 이미지를 이용한 모든 방법은 다 만들어진 듯한 인상마저 받는다. 영화의 미래는 어디에 있을까. 확신을 가지지는 못하겠지만 <존 오브 인터레스트>가 보여준 방법은 하나의 훌륭한 제안이 될 수 있지 않을까.



(1회차 감상 이후 조나단 글레이저의 아카데미 수상 소감을 보았다. 내가 무엇을 놓친 것인가 생각이 들었다. 2회차는 다른 것들에 집중하고자 했고 1회차의 내 감상은 폐기하고 싶을 만큼 내가 놓친 것들이 많았다. 해서 몇 개의 문단을 추가해 작성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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