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예인 10세기~11세기 동아시아를 떠들썩하게 했던 포로모타부의 해적질[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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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댓글 0건 조회 66회 작성일 24-05-17 2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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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편인 포로모타부 후편입니다.


https://www.fmkorea.com/7036443288





사실 이 글의 메인 내용은 지난 글을 끝으로 완전히 끝맺음을 지었습니다. 오늘 이 글은, 지난 글에서

하지 못한 이야기를 함께 나눔과 동시에 해적질로 유명했던 포로모타부의 해적질열전과,동여진의 자체적인 관직으로 추정되는 관직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 글로서 발해잔존세력에 대해 썼던 이 시리즈는 끝을 맺게 되며, 다음 글부터는 다시 발해 시절로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여진해적.jpg 10세기~11세기 동아시아를 떠들썩하게 했던 포로모타부의 해적질


우선 포로모타부의 해적질은 워낙 유명한 행각이라서 따로 언급할 것은 없습니다.



여러분들도 교과서나 인터넷에서 가끔 보신, 동여진 해적질. 동여진의 해적행각들이 모두 이 포로모타부의 짓입니다.




ehdduwls gowjr.jpg 10세기~11세기 동아시아를 떠들썩하게 했던 포로모타부의 해적질




이 해적질은 1000년대에 제일 많이 성행하였으며, 피해국은 고려(우산국 포함)와 일본, 그리고 진짜 의외지만,

포로모타부의 명목상 상국인 요나라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저는 저번편에서 포로모타부 자체가 발해의 후계세력이자

발해의 파편 중 하나라고 서술했기 때문에, 이 10~11세기를 뒤흔든 골치아픈 '여진 해적'은 그 실체가 발해의 후계세력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생각합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발해 후계세력과 여진이 합체된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들은 장장 100년 사이에 온갖 해적질과 깡패짓을 일삼았으며, 고려와 우산국에 어마무시한 피해를 입히고, 심지어 바다 건너

일본에까지 피해를 입히고, 전편에서 말했듯이, 자신들의 상국인 거란의 국민을 납치하고 요나라에 피해를 끼치기까지 했습니다.

이들 때문에 고려는 골치아픈 해적질을 상대하느라 많은 세월을 보냈으며, 우산국은 아예 나라 자체가 정상적인 자립을 할 수

없게 되어 고려에 완전히 흡수되게 되고 맙니다.


또한 이들이 발해의 잔존세력과 관계가 있다는 것은 요나라도, 고려도 알고 있었을것이라 판단되며, 고려가 발해를 점점 동족이라 생각하지 않게 되는 원인 중 하나가 되고, 나아가 동북쪽의 여진들의 난리와 함께, 고려가 여진정벌을 기획하게 된 원인 중 하나로 생각됩니다. 그래서 제가 전편에 이들이 요나라에 계속 두들겨 맞는 것을 보더라도 딱히 불쌍하지 않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 포로모타부가 발해의 파편일 것 같다는 추론을 한 이상, 저는 이들의 영역 내에 이들이 배를 띄울 수 있는 강이나 항구가 존재한다고 보고 있으며, 이들의 영역 중에 구 발해 해군의 기지가 있지 않을까 하고 예측은 하고 있지만,

현재 자료 자체가 존재하지 않아서 이 이상은 추측의 영역밖에 할 수가 없다는 것 역시 아쉽습니다.



오늘 알아볼 것은 상술했듯이, 포로모타부의 해적질 기록, 그리고 민폐 기록, 더불어 이들이 속해있는 '동여진'의 기록

중 흥미로운 기사들을 살펴볼 예정입니다. 우선 동여진의 기록이 제일 먼저 시작하는 948년부터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편의상 고려사, 고려사 절요에서 여진의 기사는 매우 많기 때문에, 특정 기사를 제외하고는 동여진에 대해서 서술한 기사만 추리도록 하겠습니다. 어떻게 보면, '사료로 살펴보는 동여진과 고려의 관계' 이기도 한 글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다루는 대상은 '동여진'에게 '고려'가 당한 것만 추려 볼 것입니다. 일본의 예도 존재하긴 하지만 제외하도록 하겠습니다.



『고려사』 2권 정종 3년 中


(948년) 가을 9월 동여진(東女眞)에서 대광(大匡) 소무개(蘇無蓋) 등을 보내 말 700필과 토산물을 바쳤다. 왕이 천덕전(天德殿)에 나아가 말을 살펴본 후 3등급으로 나누어 값을 매겼는데, 1등 말은 은주전자 1개와 금(錦)견(絹) 각 1필, 2등은 은 바리때 1개와 금견 각 1필, 3등은 금견 각 1필로 정하였다. 갑자기 우레가 치며 비가 내렸으며, 물건을 관리하는 사람들에게 번개가 내리치고 또 전각 서쪽 모퉁이도 번개가 내리쳤다. 왕이 크게 놀라자 근신(近臣)들이 부축하여 중광전(重光殿)으로 들었는데, 드디어 편찮게 되자 사면령을 내렸다.



-조금 우스갯소리로 하는 소리지만, 동여진이 제대로 처음으로 각잡고 와서 방물을 바친 것이 이 948년입니다.

이 왕은 고려의 정종입니다. 그런데 앞으로 이들이 할 짓이 괘씸해서인지 모르지만, 하늘이 노하여 문자 그대로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 떨어집니다. 앞으로 이들이 할 악행에 대한 예고편인가 생각이 가끔 들기도 합니다.






『고려사』 3권, 목종 8년 中


〈을사〉8년(1005) 봄 정월 동여진(東女眞)이 등주(登州)를 침략하여 주진(州鎭)의 부락(部落) 30여 곳을 불태우자 장수(將帥)를 보내 그들을 막았다.



-드디어 이제부터 시작이 되고 있습니다. 여기의 동여진이 포로모타부인지 알 길은 없으나, 동여진과 고려의 기나긴 쌈박질의 시발점이 되었다는 데서 그 초두를 장식하고 있기 때문에, 이 기사를 넣었습니다.






『고려사』 4권 현종 2년 中


-(1011년 8월)동여진의 배 1백여척이 경주를 침략했다.


-저는 이 기사의 주체가 포로모타부라고 강력하게 의심하고 있습니다. 여진 중에서 유독 이질적이던 존재인 포로모타부의 특성인 배 만들기가 가미된, 해상 침입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배의 대수가 100여척이었다는 것은, 포로모타부가

그리 비실비실한 세력은 아니었다는 증거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 1011년 8월의 사건을 시발점으로 해서

고려는 포로모타부의 해적질에 상당히 시달리게 됩니다.





위와 동일, 현종 3년(1012년)


-5월 기사 동여진(東女眞)이 청하현(淸河縣)·영일현(迎日縣)·장기현(長縣)을 침략하였다. 도부서(都部署)의 문연(文演)·강민첨(姜民瞻)·이인택(李仁澤)·조자기(曹子奇)를 보내 주군(州郡)의 군사를 독려하고 〈동여진군을〉 공격하여 달아나게 하였다.



-참고로 여기서 말하는 청하현은 지금의 포항입니다. 배를 타고 왔다는 말은 써 있지 않지만, 당연히 발해고토에 살고

있는 포로모타부가 고려의 상당한 후방인 이 곳을 치려면 배를 이용하는 길 외에는 방법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당연히

배를 타고 와서 해적질을 해 간 것입니다.






위와 동일, 현종 5년(1014)


-철리국주(鐵利國主) 나사(那沙)가 여진(女眞)의 만두(萬豆)를 사신으로 보내 말과 담비의 초서피(貂鼠皮)와 날다람쥐의 청서피(靑鼠皮)를 바쳤다.


제가 왜 동여진의 해적질 기사 절대다수를 포로모타부라고 생각하느냐면, 동여진이 아닌 이들은 여기의

철려처럼 구분이 아예 되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고려 입장에서도,


1.동여진


2.서여진


3.그냥 여진


4.그외 타인들


이렇게 구분이 나름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이 면에서는 다른 가능성보다는 동여진이 바다로 쳐들어온

것을 거의 포로모타부로 취급하는 것입니다. 참고로 여기 나온 철리국주 나사는 저번 올야국 파트에서, 올야의 왕

오소경의 처자식을 잡아서 요나라에 바친 그 인물입니다. 이 이후로는 요나라의 겐세이를 받아서 그런지, 혹은 요나라

가 그에게 자중하라는 명을 내렸는지, 더이상 올야를 공격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습니다. 다만 요나라에 대한 신뢰가

약간 의문감이 들었는지, 고려 쪽에도 줄을 대고 있는 모습을 보입니다.






위와 동일, 현종 6년(1015)


-여진(女眞)이 배 20척으로 구두포(狗頭浦)를 노략하자 진명도도부서(鎭溟道都部署)가 격퇴하였다.



이것은 동여진이라 써 있지 않지만, 어차피 여진족 중에 배타고 쳐들어올 놈들은 포로모타부밖에 없으므로, 저는 이것도 포로모타부의 행각이라고 생각합니다.





위와 동일, 현종 8년(1017)


-동여진(東女眞)의 개다불(盖多弗) 등 4인이 내투(來投)하여 변방을 지킨 공을 본받을 것을 요청하자, 이를 허락하여 우대해서 예우하고 물품을 하사하였다.


동여진 중에 저렇게 고려로 들어와서 먼저 굽히고 방물을 바친다던지, 내투하는 족속들도 존재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들은 '동여진'에 속한 다른 부족이라 생각하고, 포로모타부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포로모타부는 줄기차게 계속 고려를 침공 및 약탈하고 있는데, 굳이 그들이 고려측에 항복하여 내투할 일 자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위와 동일, 현종 9년(1018)


-우산국(于山國)이 동북여진(東北女眞)의 침략을 받아 농사일을 못하게 되자, 이원구(李元龜)를 보내 농기구를 하사하였다.



급기야 이들은 우산국(울릉도)까지 공격하여 농사일을 못 할 정도로 만들어 버렸으며, 고려에서는 관리를 파견하여

이들을 돕기 위해 농기구를 직접 하사까지 합니다.


여기까지 보면 이들은, 고려를 몇 번 찔러본 다음에, 고려의 강력한 반격을 받아서 패퇴하자, 이번에는 상대적으로

만만한 우산국(울릉도)를 건드린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우산국 역시 고려가 대놓고 도와주고, 우산국의 달아났던

백성들까지 고려의 보호 아래 다시 돌아가자, 한동안은 조용히 지내기 시작하고, 동여진 일파들은 고려에 조공을 하는 등 별 말썽을 부리지 않았습니다.





위와 동일, 현종 11년 中


-기유, 동여진(東女眞)의 추장(酋長) 달노(達魯)가 무리를 인솔하고 와서 자기 나라의 쌀 3백 석을 바쳤다.



그 중에는 이렇게 자국의 쌀까지 가져와서 고려에 바치는 이들도 있었으며, 말, 가죽 등 자신들이 바칠 수 있는 데서

최대한 성의를 갖추어 바치기도 합니다.






『고려사』 5권, 현종 19년(1028년) 中


-5월 신축 여진(女眞)이 평해군(平海郡)을 침공하였는데 이기지 못하고 돌아가자, 적의 배 4척을 추포(追捕)하여 모두 죽였다.



그런데, 또 약발이 다 되었는지, 아쉬운 게 생겼는지, 이들은 다시 해적질을 시작하여 이번에는 평해군(현재 울진군)을

또 공격합니다.





『고려사절요』 3권 현종 19년 10월(1028년) 中


-동여진(東女眞)의 적선 15척이 고성(高城)을 노략질하고 또 용진진(龍津鎭)에 침공하여 중랑장(中郞將) 박흥언(朴興) 등 70여 인을 잡아갔다.


얻어맞은지 얼마나 되었다고 또 쳐들어와서 고성을 노략질하고, 이제는 고려의 장수까지 침입해서 잡아가는 만행을 저지릅니다.






『고려사』 5권, 현종 20년(1029년) 中


-윤2월 기해 여진(女眞)의 해적선 30여 척이 동쪽 변방을 침입하자, 선병도부서판관(船兵都部署判官) 조윤정(趙閏貞)이 공격하여 달아나게 하였다.



그런데 고작 4개월만에(바로 위의 기사가 11월 말이고, 이 기사는 2월의 기사입니다.) 다시 '해적선'을 30여척이나

이끌고 고려로 쳐들어왔다가 패퇴하여 달아납니다.





위와 동일, 현종 20년 5월 中


-경진 동여진(東女眞)의 해적선 10척이 명주(溟州)를 침입하자 병마판관(兵馬判官) 김후(金厚)가 공격하여 퇴각시켰다




위와 동일, 현종 20년 6월 中


-을축 동여진(東女眞)의 400여 인이 동산현(洞山縣)을 침략하였다.



이번에는 1달 간격으로 쳐들어왔다가 얻어맞고 달아나기까지 합니다. 이 기사와 위의 두개가 죄다 1029년 한 해에

일어난 침입입니다.




위와 동일, 현종 21년 4월 (1030년)中


-무자 동여진(東女眞)의 만투(曼鬪) 등 60여 인이 와서 과선(戈船, 戰船의 하나) 4척과 〈호목으로 만든 화살인〉 호시(矢) 117,600개를 바쳤다.


이것은 포로모타부가 거의 확실하다 생각합니다. 그 와중에 배를 4척 바쳤다는 기록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줄기차게

침공해서 뜯어가 놓고 지금와서 굽신거리면서 배를 바치는 행위가 참 수상하기 때문에 고려 정부에서 이들을 믿었는지는 의문입니다.



위와 완전히 동일


기해 철리국주(鐵利國主) 나사(那沙)가 여진(女眞)의 계타한(計漢) 등을 보내 노랑담비가죽[貂鼠皮]을 바치며 책력(冊曆)을 요청하므로 이를 허락하였다.



그 와중에 건강하게 아직도 잘 살고 있는 철리왕 나사.





위와 동일, 현종 21년 6월 中


-을묘 동여진(東女眞)의 봉국대장군(奉國大將軍) 소물개(蘇勿蓋) 등이 와서 말 9필, 과선(戈船) 3척, 호시(矢) 58,600개 및 무기와 의장(儀仗)을 바쳤다.



여기서도 배를 바치고 있습니다. 이쯤되면 이들은 포로모타부라고 확실하게 이야기를 해도 될 정도가 아닌가 합니다.





『고려사절요』 4권 정종 2년 2월(1036년) 中


-동여진(東女眞)의 적들이 배를 타고 삼척현(三陟縣) 동진수(桐津戍)를 노략질하여 인민들을 사로잡았다. 수장(守將)이 풀숲에 복병을 두고 적들이 돌아가는 틈을 엿보다가 북을 치며 갑자기 습격하니, 사로잡고 참수한 것이 40여 급이었다.


잠시간 잠잠하더니, 또 해적근성 못버리고 고려를 치러 옵니다. 다행히 이들의 공격은 실패로 끝났고, 상당한 피해를

입고 돌아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 중간인 1051년에 고려의 양계를 침공한 여진의 기록이 있지만, 이들은 해적질이 아니라 육로로 왔기 때문에,

해적열전에 포함시키지 않았습니다.




위와 동일, 문종 6년 5월(1052년) 中


-동여진(東女眞)의 추장(酋長) 고지문(高之問) 등 25인이 와서 토산물을 헌상하였다.



위와 동일, 6월 中


-동여진(東女眞)의 고지문(高之問) 등이 바다를 건너와 삼척현(三陟縣) 임원수(臨遠戍)를 공격하였다. 수비하던 장수 하주려(河周呂)가 병사를 끌고 성을 나와 군사들에게 호령하기를, “저들은 많고 우리는 적지만, 만약 사람마다 스스로 전투를 치르며 그 몸을 아끼지 않는다면 전쟁에서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라고 하고는 마침내 방패를 끼고 칼을 빼어든 채 진격하였다. 마침 안변도호판관(安邊都護判官) 김숭정(金崇鼎)이 관할하는 여러 수(戍)를 순찰하다가 근처에 이르자 도적들이 그 뿔피리 소리를 듣고는 구원병이 곧 도착할 것이라 생각하여 결국 놀라 흐트러졌다. 하주려의 군대가 승세를 타고 돌격하여 10여 급을 사로잡거나 참수하니, 적이 무너져 달아났다.



1052년에는 5월에 고려에 와서 토산물을 조공한 동여진 추장 고지문이 바로 다음달인 6월에 바다를 건너와

해적질을 하다가 고려에게 격퇴당한 사건이 생깁니다. 이 고지문의 의도와 취지는 모르겠으나, 의도가 따로

없다면 상당히 황당하게 느껴집니다.



이후로 고려의 대 여진 포용정책이 열심히 시행되자, 귀신같이 동여진의 대 고려 해적질은 자취를 '한동안'

감춥니다. 이후 한동안은 동여진, 서여진 등의 여진들과 관련된 사건은 죄다 공물, 방문, 귀부 건입니다.

한동안 고려와 여진 해적은 볼 일이 없는 것 같았는데......이것이 끝은 아닙니다. 또 시작했습니다.




『고려사』 8권, 문종 18년(1064년) 中


윤5월 무진 동여진(東女眞) 적의 괴수 마질개(麻叱盖) 등 100여 인이 배로 바다를 건너 평해군(平海郡) 남포(南浦)에 침입하여, 민가를 불사르고 남녀 9인을 사로잡아갔다.



그놈의 해적근성은 어디 안가는지 10년만에 돌아온 동여진 해적질입니다.

상당히 오랜만이었는데, 이 때 왜 고려랑 잘 지내다가 뜬금없이 해적질을 벌였는지에 대해서는, 자체 농사 실패, 멍청한 통치를 자랑했던 요도종이 원인이라는 이야기 등등이 있습니다. 진위는 아직 알아챌 수 없지만, 뭔가 문제가 생겼던 것은 분명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고려가 여진을 완전히 믿지 못한 이유 중 하나가 이것이라 생각합니다. 분명히 어느 때는 조공도 잘 보내고 귀부도 하고 사이좋게 지내다가 이유도 모르고 동기도 없는 침략과 약탈을 반복하기 때문에,고려 입장에서는 상당히 거슬리고 스트레스였을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여진을 믿을 수 없는 족속이라 생각하는 것도 저는 무리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고려사』 8권, 문종 25년 3월(1071년) 中


-신축 동여진(東女眞)의 귀덕장군(歸德將軍) 상곤(霜昆) 등 22인이 포로 된 우리나라 사람을 속환[購還]하였다.



오죽했으면 친 고려파로 생각되는 동여진 귀덕장군이자 추장인 상곤이라는 사람이 포로를 도로 보내주기까지 합니다. 이 상곤은 이후로도 고려편에 공물을 보내는 사람 중 하나로 등장합니다.



너무 열받고 짜증났는지 1073년 중순에는 고려측이 여진을 선제공격하여 한번 손 봐주기까지 이르릅니다.

이 때 공격대상은 확실하지 않으나, 협력한 고려측 여진의 추장에 고려에 조공하던 이들의 이름이 존재하는 것으로

보이고, 이들이 동여진의 인물들임을 고려하면, 고려에게 이 때 얻어맞은 여진은 동여진 일파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봅니다. 이 토벌로 인해 동여진 내의 고려를 자꾸 괴롭히는 이들은 상당한 타격을 입었다고 추정이 되며, 고려 측 여진족들이 잘 싸운 것으로 나옵니다.





그런데 한동안 기세가 꺾였던 것으로 생각되었지만, 근성의 해적질은 아직 완전히 끝나지 않았습니다.



『고려사』 11권 숙종 2년 7월(1097년) 中


임신 동여진(東女眞)의 적선(賊船) 10척이 진명현(鎭溟縣)을 침략하자,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 김한충(金漢忠)이 판관(判官) 강증(康拯)을 보내 그들과 싸워 이겨서 배 3척을 노획하고 48명의 머리를 베었다.



-이쯤 되면 고려의 대 여진 전략도 슬슬 강경으로 변화를 하던 때이며, 여진 내에서도 완안부가 서서히 떠오르기

직전이며, 요나라 역시 맛이 가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살기 힘들어진 포로모타부가 또 배타고 덮치기 만만한 고려를

침공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리고 이것이, 동여진 해적의 마지막 침공 기사입니다. 이후로 여진 세력은 완안부의 깃발 아래 모여서 고려와 한번

붙은 이후, 금나라를 세워 요나라를 공격하여 큰 세력을 이루게 됩니다. 그리고 한 때 상국이자 약탈대상이었던

고려와의 관계도 역전되고 중국의 반을 차지할 정도로 잘 나가게 되지만, 몽골의 침략으로 인해 완전히 무너져 버리고 맙니다.


그리고 동시에 금나라까지 이어지던 발해인과 발해군의 흔적 역시 원나라로 편입된 발해군 일부를 제외하고는 영영 역사에서 사라져 버리고 맙니다.



이 이후, 고려는 숙종~예종 시기에 여진을 손봐주게 되고, 여진은 치열한 싸움 끝에 고려에 화친을 요청합니다.




『고려사』 13권, 예종 4년(1109년) 中


-갑진 동여진(東女眞)이 다시 사현(史顯)을 우리의 국경으로 보내 화친을 요청하였다.


-경신 동여진(東女眞) 추장(酋長) 오로(吳老) 등이 내조(來朝)하였다.


-12월 을미 〈왕이〉 선정전(宣政殿)에 거하여 동여진(東女眞)의 사현(史顯) 등을 접견하고 물품을 차등 있게 하사하였다.



그리고 모두가 아시는 운관, 척준경, 왕자지가 활약한 윤관의 여진 정벌 이후로 고려는 동북지역을 여진에게 돌려주고,

이들은 금방 금을 세워 요나라를 공격하고 자신들이 제국이 됩니다.





『고려사』 15권, 인종원년(1122) 12월 中


-동여진(東女眞)의 추장(酋長) 실현(實現)이 와서 말을 바쳤다.





그리고 이 기사를 끝으로, 고려사에서 발해 멸망 이후, 요나라 시대를 거쳐 온 동여진의 기록은 끝이 납니다.

이 이후로도 1200년대와 1300년대에도 동여진의 기사는 등장하지만, 이들은 이전의 동여진과 다른, 금, 원 시절을 겪으면서 이전의 동여진과 달라진 이들일테니 범주에 끼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지겹고 기나긴 고려-여진 관계에서, 성씨와 그 특성 때문에 발해의 파편으로 의심받는 이들의 이야기를 하다 보면,

발해의 영향이 생각외로 오래 갔구나. 하고 생각이 됩니다. 특히 발해의 파편으로 확실하게 의심되는 포로모타부의

경우에는 1100년 근처까지 고려를 노략질했으며, 이들 외에도 동여진은 발해의 파편의 유산, 그리고 발해인들과 많은

융합이 이루어진 낌새가 보입니다. 이 글은 고려-여진관계를 본격적으로 다루는 글이 아니기 때문에 거기까지

확실하게 다루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제 전공분야와 아예 관련이 없는 분야도 아니고, 발해의 흔적을 찾다 보면 이

분야도 공부 및 연구를 할 때가 있을테니, 그때 제대로 다루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여진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매우 많기 때문에 이 한번으로 끝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 외에도 요나라, 금나라, 원나라에서의 발해인, 발해군에 대해서도 다루어 볼 수 있는 시간이 있으면 다루어

보겠습니다.





아래는 제가 맨 위에 언급한, 여진 고유, 특유의 관직 설명에 대한 이야기입니다.여진의 고유 관직인지, 고려에서 받은 관직을 이들이 내세웠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적어도 포로모타부대왕이라는 직함과 대상, 승상, 그 외 장군들을 모두 고려가 수여했는지는 알 수 없기에 몇 개 가져와 봤습니다.(당연 이것보다 많은 단어들이 등장하며, 이것들은 예시입니다. 중복기록은 제외하고 가져왔습니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오류나 이상한 것,잘못된 것은 수정하거나 다시 알아볼 필요도 존재합니다.




『고려사』 5권, 현종 15년(1024) 中


-(5월)경자 동여진(東女眞)의 회화장군(懷化將軍) 아알나(阿閼那)가 내조(來朝)하였다.


위와 동일, 현종 17년(1026년) 中


-임진 동여진(東女眞)의 귀덕장군(歸德將軍) 거려울(居閭鬱) 등이 내조(來朝)하였다.


위와 동일, 현종 20년(1029년) 中


-을미 동여진(東女眞)의 대상(大相) 쾌발(拔)이 자기의 족속 300여 호를 인솔하여 내투(來投)하자, 발해(渤海)의 옛 성터를 하사하고 그 곳에 살게 하였다.


위와 동일, 현종 21년(1030) 中


-을묘 동여진(東女眞)의 봉국대장군(奉國大將軍) 소물개(蘇勿蓋) 등이 와서 말 9필, 과선(戈船) 3척, 호시(矢) 58,600개 및 무기와 의장(儀仗)을 바쳤다.


위와 동일. 현종 21년 12월(1030) 中


-이 달에 동여진(東女眞)의 영새장군(寧塞將軍) 목사아골(睦史阿骨), 유원장군(柔遠將軍) 알나(閼那)와 귀덕장군(歸德將軍) 아개주(阿箇朱)가 와서 말과 철갑옷, 호시(矢)를 바쳤다.


『고려사』 5권 덕종원년 6월(1031) 中


-을유 서여진(西女眞)의 영새대장군(寧塞大將軍) 아지대(阿志大) 등 27인이 와서 좋은 말을 바쳤다.


위와 동일, 덕종원년 9월 中


-9월 계유 동여진(東女眞)의 대상(大相) 야을한(也乙漢) 등 30인이....


위와 동일, 덕종 3년 2월(1034) 中


-2월 임진 초하루 동여진(東女眞)의 유원대장군(柔遠大將軍) 주달(主達) 등 36인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고려사』 6권 정종 2년(1036) 中


-경신 동여진(東女眞)의 추장(酋長) 오부하(烏夫賀) 등 86인이 내조(來朝)하였다.


-확실하진 않지만, 동여진 세력에도 오씨와 고씨 등, 발해에서 존재했던 성씨가 나옵니다.

이래 기사들과 함께 이들이 발해의 파편일 가능성을 좀 더 보여줄 수도 있는 항목이 아닐까 합니다.


위와 동일, 정종 7년(1041) 中


-병진 서여진(西女眞)의 대승(大丞) 고지지(高支智) 등 15인이 와서 말을 바쳤다.


위와 동일, 정종 8년(1042) 中


-을축 서북여진(西北女眞)의 유원장군(柔遠將軍) 고두로(高豆老) 등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위와 동일, 정종 10년(1044) 中


-계미 동여진(東女眞)의 장군 오을달(烏乙達) 등 남녀 144인이 와서 준마(駿馬)를 바치며 아뢰기를, “우리가 귀국의 변경에 살면서 귀국을 사모하여 귀화하고 신하로서 복종한 지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늘 적이 쳐들어올까 걱정되어 편안하게 살 수 없었는데, 이번에 3개의 성(城)을 쌓아 적의 침입로를 막아주었으므로 내조(來朝)하여 은혜에 감사드립니다.”라고 하자, 왕이 넉넉하게 상을 주고 돌려보냈다.



『고려사』 8권 문종 11년(1057) 中


-병술 동여진(東女眞)의 회화장군(懷化將軍) 고도달(高都達) 등 25인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그 외 궁금한 점, 함께 이야기할 점은 댓글로 부탁드립니다.

하지만 이 주제 특성상 추론이나 알쏭달쏭한 것이 매우 많기에 제가 전부 대답하지 못할 것도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동안 쓴 글



발해멸망전 관련


발해멸망전 고찰 1편. 멸망의 전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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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멸망전 고찰 2편. 925년 이전의 발해 정치상황

-https://www.fmkorea.com/6840383814


발해멸망전 고찰 3편. 공백의 5년(913~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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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멸망전 고찰 4편. 918~924년까지 발해는 과연 무엇을 했을까?(상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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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멸망전 고찰 4편 (하편)

-https://www.fmkorea.com/6844149065


발해멸망전 고찰 5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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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멸망전 고찰 6편 - 925년 반란설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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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멸망정 고찰 6편 - 925년 반란설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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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멸망전 고찰 7편 - 마지막 순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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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멸망전 고찰 7편 - 마지막 순간(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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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멸망전 고찰 7편 -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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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 멸망전 고찰 8편 -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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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 멸망의 의문점 고찰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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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 멸망의 의문점 고찰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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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및 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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