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예인 (ㅇㅎ) 의외로 한국전쟁에서 대규모 병력 파병하고도 잊혀진 국가[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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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푸히헤헤햏ㅎ 댓글 0건 조회 89회 작성일 24-05-14 06:26본문
1950년 발발한 한국전쟁
이 때 최초로 국제기구 산하의 연합군인 유엔군이 창설된다
머나먼 동방의 신생국을 돕기 위해
총 16개국이 병력을 파병했고
많은 이국의 젊은이들이
한국 땅에서 영원히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게 된다
근데 이 16개국에 못들어갔지만
대규모 병력을 파병한 국가가 있으니
Hola! Koreano!!
Soy Puertorico!!
잉 시발 이젠 하다하다
텍사스까지 국가로 치는거냐?
사실 여기는 푸에르토리코다!
사실 엄밀히 말하면
푸에르토리코는 미국의 자치령이다
??? : 씨발 저 포빨이 새끼 혓바닥이 기네? 비추나 쳐먹어라
사실 굉장히 어려운 개념이긴 하지만
일단 국가원수가 미 대통령이고
1898년 미서전쟁의 승전으로 미국이
스페인으로부터 삥뜯은 지역이긴 하다
다만 실질적인 통치는 푸에르토리코인들의 선거를 통한
현지인 주지사와 독자적인 자치 의회가 진행하며
푸에르토리코만의 헌법을 제정했으며
어쨋든 미국의 50개 주에는 들어가지 않아 미국 선거권도 없다
물론 미국 시민권이 주어지긴 하지만
인구 99%가 스페인어를 쓰는 지역 + 독자적인 시민권, 여권이 존재한다
푸에르토리코인들인 미 연방군에 입대가 가능했고
그래서 1차 대전부터 미군에 입대하여
미국이 수행하는 전쟁의 첨병 역할을 했다
물론 인구의 99%가 스페인어만 쓰기에
이들로만 이뤄진 제 65보병연대가 따로 존재할 정도
※ 무려 1차대전에 가장 먼저 투입된 미군 부대
한국 전쟁이 발발하고 미국이 참전을 결정하자
이 65연대 역시 한국에 파병되는 것이 결정된다
이에 총 6만명의 푸애르토리코인들이
자원입대하여 65연대에 배속돼 한국으로 떠난다
병력 규모로만 보면 미국과 영국에 이은3번째 규모였고
당시 푸에르토리코 인구는 370만명 정도였다
근데 하필 이들이 처음 실전을 겪은 전투가
바로 미군 역사상 최악의 전투 중 하나이자
어마어마한 혹한지에서 펼쳐진 장진호 전투였는데
이들 푸에트로리코인들은 눈이란 걸 보지도 못한 사람들...
아열대에서 바로 존나 추운 함경도에 도착한
푸에르토리코 병사들이 입고있던 건 아열대 미군 군복...
참전용사인 헤르만 브라보옹의 회고에 따르면
이 때 난생 처음으로 눈을 봤고
영하 30도의 날씨에 땅이 다 얼어붙어
참호도 못팠다고 한다.
심지어 영어도 안통하니 미군의 물자 배치도
매우 느렸다고...
게다가 당시 중공군에게 완전히 포위되기 직전 상태였던 미군!
그러나 이 65연대가 끝까지 무너지지 않고 지켰기에
포위망은 완전히 형성되지 못했고
그 사이 미 해병대가 흥남으로 빠져나갈 교두보를 확보하게 된다
또한 중공군이 추격을 시작하자
65연대가 직접 중공군과 싸우며 흥남 철수의 시간을 벌었다
그리고 이 65연대가 흥남에서 철수한 마지막 미군부대였는데
이들은 10만명의 유엔군과 9만명의 피난민이
배에 오를 때까지 중공군과 교전했고
텅 빈 흥남항에 지뢰와 폭약을 매설한 뒤
가장 마지막으로 전함에 올랐다
이 공으로 해군부대 표창을 받는다
이후 51년 2월에 치뤄진
유엔군의 대반격인 킬러 작전에서
유엔군 최초로 한강을 건넌 연대가 되었고
6월에는 한탄강을 넘어 북진하며 2개 연대의 중공군을 박살낸다
이에 미군도 푸에르토리코 병력의 질을 인정하며
후안 세자르 다빌라 대령을 사령관으로 임명해 독자적인 작전권을 준다
이후 고지전에서도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는데
주로 중부전선에 배치되어 전투를 수행한다
이중 철원에서 펼쳐젼 잭슨 하이츠 전투에서
이들은 중공군을 상대로 포격을 뚫고 착검 돌격(??)을 성공시켜
휴전 때까지 이 고지를 사수한다
다만 이들은 영어를 대부분 다 못했기에
미군 부대와의 소통과 공조가 매우 어려웠고
명령이 잘못 전달되는 일도 많았으며
미군 지휘부에게 인종차별적인 일도 많이 당했다
하지만 이들은 푸에르토리코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싸웠고
3년간 5905명을 사살하고, 2000명을 포로로 잡았으며
미국 대통령 부대표창, 부대훈공장까지 받는 등
매우 성공적으로 한국에서의 전투를 마무리한다
푸에르토리코 깃발을 품고 전투에 나섰지만
어쨌든 미군 소속이었기에
이들의 활약은 단순한 미군의 활약으로 덮여지게 된다.
심지어 한국에서도 이들이 참전했는지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이니...
그러나 푸에르토리코에서는
타국에서 용맹히 싸운 이들을 잊지 않고 기리고 있으며
수도 산 후안에는 거대한 전몰용사 추모비가
스러져간 이들을 기리고 있다
복권이 이루어져
한국에서도 따로 푸에르토리코 참전 용사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고 있으며
코로나 시기에도 최우선적으로 마스크를 보낸 곳이
바로 이 푸에르토리코 참전용사 가정일 정도이다
-끝-
+
타국가 장병들이 또 있으니 바로 멕시코이다
대충 10만명 정도가 참전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여긴 멕시코계 미국인과 멕시코인이 혼재되어 있어 파악이 어려운 실정
하지만 멕시코는 1951년 35만 달러의 구호금과 함께
자국 젊은이들이 미군에 입대하는 것을 허가해 줘 전쟁에 기여한다
미군에서 복무하며 싸웠는데
이들의 언어인 나바호어가 지랄 맞게 어려워서
암호 대용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아무튼 이들도 최근 재조명 받아
코로나 사태 당시 한국이 마스크를 보낸 최우선 대상 중 하나였다
따로 복무하며 한국에 파병왔는데
아일랜드는 당시 군사 중립 주의를 표방하여
한국에 병력을 파병하진 않았지만
캐나다, 영국에 있던 아일랜드인들이 자발적으로 입대해
영국군의 얼스터 소총부대에 배치되어 임진강에서 맹렬히 싸웠다
이들은 16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대부분 부산 유엔군 묘지에 묻혀있다.
추천해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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