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예인 과연 태종 이방원은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을까? [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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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댓글 0건 조회 52회 작성일 24-06-02 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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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fmkorea.com/7094865190


이 글은 설명하기 쉽게 음슴체로 작성되었습니다


맨 밑에 세 줄 요약 있음


Screenshot_20240601_110241.jpg 과연 태종 이방원은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을까?

라고 하는데과연 그럴까?
1.경제 개혁도 없어?
주로 태종 시대에 언급되는 대표적인 경제 개혁은 저화 유통 시도일 것인데 쟤가 요즘 나무위키를 적극적으로 오염시키고 있어서 그런가 나무위키를 둘러보면 이런 내용이 있음


"조선 태종 때와 세종 때 중국을 본받아 저화를 발행하였는데, 이것은 쌀을 본위로 하는 화폐로 유통 시도 되었다. 그러나 여러가지 이유로 저화 정책은 실패한다."

저화 문서의 항목 첫 문단에 있는 글인데 관련 논문으로 반박을 해보고자 함

https://www.dbpia.co.kr/journal/articleDetail?nodeId=NODE09231936 - 조선 태종대 저화 발행 배경에 대한 재검토 - ‘화폐정책’이 아닌 ‘재정정책’의 맥락에서 <소순규>
이 논문을 보면

태종 2년 본격 시행된 첫 번째 저화 발행의 목표는 녹봉으로 지급되는 紬布를 대신하기 위한 다소 제한적인 것이었다. 경상도 주포전에서 주포 수세를 미곡으로 전환하면서 녹봉 지급용 주포 부족이 예상되자 이를 저화로 대체하도록 한 것이었다. 아울러 주포 대신 저화를 지급받은 관료들이 피해를 입지 않도록 저화가 시장에서 통용되기 위한 여러 정책을 시행하였다. 그러나 경상도 주포위전의 미곡 수세가 국가 재정상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 것으로 판명되면서 1차 저화 발행은 매우 짧은 시간 안에 포기되었다

이 문단만을 보았을때 경제개혁이 실패하였다고 볼순 있다하지만

태종 10년경에 이르러 두 번째로 저화가 발행되었는데, 이때는 저화를 직접적으로 쌀과 교환하여 국고곡을 확보하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태종 7년 이후 군량미 확보 필요가 증가하고, 태종 9년부터는 명나라의 북정이 본격화되면서 이를 대비하기 위한 군량 확보가 절실해졌다. 이리하여 태종 10년 다시금 저화가 발행되었으며, 다시 발행된 저화를 흥용하기 위한 정책은 태종 초반에 비하여 훨씬 강력하게 이루어졌다. 일부 세납을 저화로 대체하고 호저화, 세공저화 등을 신설하였다. 아울러 두 번째 발행된 저화는 태종 집권 기간 내내 유통되었고, 국고곡 확보라는 정책의 목표도 일정 부분 성공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요컨대 태종 10년 저화의 재발행은 화폐의 도입이란 일반적인 의미에서 시행된 것이 아니라, 저화와 쌀의 교환을 통한 국가 재고곡 확보를 위한 재정 확보책이었다. 태종 7년경부터 군자곡 확보 필요성이 증대하고, 태종 9년경 영락제의 북정이 현실화되자 미곡 확보를 위한 여러 정책이 등장하였고, 저화 역시 그 일환으로 시행되었던 것이다. 저화를 통해 어느 정도의 미곡을 확보하였는지는 정확히 알긴 어려우나, 태종 9년 이후 미곡 확보 추이를 참고해 보면 저화의 발행의 정책적 목표는 충분히 달성된 것으로 생각된다.

라고 나옴 즉 시행 이유에 따른 목적을 충분히 달성했다는 점에서 실패라고 볼 수 없고 그에 따라 태종이 경제개혁을 하지 않았다는 주장은말이 되지 않음

2.제도개혁도 거의 없어?
이것 역시

https://www.dbpia.co.kr/journal/articleDetail?nodeId=NODE11725217 -조선 초기 태종의 대간 언론 인식: 한국적 언론문화 생성의 시원(始原)에 관한 일고찰

이 논문을 인용하여 반박하겠음

여기서 보면 시작에 들어가는 말부터

역사적으로 조선조에서 이러한 대간제도의 토대는 태종대에 놓인다. 즉 태종 1년에 대대적으로 관제 정비가 이루어지는데, 이 때 사간원이 독립 기구가 되어,사헌부 사간원 양사 시스템이정립된다. 이와 더불어 양사에 의한 다양한 언론 활동, 즉 간쟁(諫爭), 탄핵(彈劾), 시정(時政), 인사(人事) 관련 언론 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기 시작한다.

라고 언급되고 있고 기록을 인용하여 그 사례들을 제시한 뒤 마침말로

선행연구에서는 태종이 대간 언론을 억제한 것으로 보고 있으나, 본 연구의 분석 결과 태종은 재위 전 시기에 걸쳐 대간 언론이 국정 운영에 반드시 필요하다고 보는 인식 아래, 기본적으로 대간 언론을 장려하고 있었다. 구체적으로 태종은 재위 초반에 공신, 사관(史官)의 간쟁에 대해서도 긍정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또한 태종은 바람직한 사헌부와 사간원 양사의 관계정립을 위해 양사의 다양한 상호 대립을 중재하고자 노력한다. 그리고 재위 중반에 태종은 구체적인 대간 언론의 방식을 정비하는데, 이 과정에서 태종은 1, 2인도 간할 수 있도록 대간의 간언 방식을 다양화한다. 그리고 재위 후반에는 권신을 견제하기 위해 대간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인식을 명확히 드러낸다.
2절 <기본적 검토>에서도 살펴 본 바와 같이, 조선조에서는 중국과 달리 대간이 국왕, 재상과 더불어 중앙 정부 구성과 운영의 한축을 담당하고 있었다고 평가되고 있다.본 연구 결과는 이러한 3각 시스템의 토대가 사실상 태종 시기에 마련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겠다.그리고 이와 같이 구축된 국왕, 재상, 대간이라고 하는 3각 시스템, 특히 대간 중시의 구조에서 조선중기의 정암 조광조, 남명 조식, 율곡 이이, 그리고 우암 송시열 등에 의해 크게 발전하여 지금으로 이어지는 직언 문화가 파생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23) 이 점에서 태종 시기에 토대가 놓이는 이러한 3각 시스템의 성립은 직언을 매우 높게 평가하는 지금의 한국적 언론문화 생성의 시원(始原)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또한 이처럼태종이 토대를 놓은 3각 시스템은 고려시대 무신 정변 발생 이후 200여 년 동안 지속된 왕권의 불안정함에 대한 최종적 해결책에 해당한다고 생각된다.

즉 저 글 내용과 달리 제도개혁이 없었다는 말 역시 반박이 되는 내용이 나옴언론 제도 개혁의 토대가 나온게 개혁이 아니면 도대체 무엇을 개혁으로 부르고 싶은걸까?

3.외정(外征)도 없어?
이 역시도

https://www.dbpia.co.kr/pdf/cpViewer - 조선 태종대 대명의식과 여진 정벌(征伐)

이 논문을 살펴보면 조선 초 조선은 북방으로 진출하려하고 여진 지역에 영향력을 확대하려하며 명과의 마찰이 생겼으나 태종 10년(1410년)에 단행된 모련위 정벌에서 북방 지역 경략을 위해선 명과의 우호적 관계가 필수라고 보았고 국정과 외교관계 안정을 위해서 사대의 명분을 강조한다고 적었음

즉 조선 초기엔 유독 활발한 대외정벌이 이루어졌는데 이 대외정책은 주변국과의 대립을 불러올수 있었음에도 이 과정에서 이루어진 정벌은 여진 지역에 대한 조선의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한 정벌이었는데 출병 규모가 다른 기록들에 비해서 작긴하나 대군을 동원해서 압도하기 보다는 소수 정예병력 운용을 통해 기습이 목적이었기에 소수의 병력이 동원된 것이고 이를 통해 기습이 성공하여 병력을 동원 한것에 비해 큰 전과를 얻을수 있었다라고 적고 있음

그래서 이러한 명을 의식하면서도 여진 영역을 조선의'자국 영역'으로 간주하여 대응하던 방식은 훗날 세종대에 4군 6진의 신설과 영토확장이라는 성과를 가지고 왔다는 점에서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성과라고 할 수 있음

또한 글에 적힌걸 보면"대마도도 못먹은 좆병신새끼 ㅉㅉ"아무것도 모르고 폄훼하고 있는데

애초에 https://www.dbpia.co.kr/journal/articleDetail?nodeId=NODE11394554 김일환, 2012, 「세종대 대마도정벌의 군사적 전개과정」이라는 논문을 보면 애초에 3차 대마도 정벌의 목적은 상륙작전을 통한 적선 109척 파괴+가옥 1939호 파괴+포로 구출을 통하여서 전과를 올린 상태로 철군하려 하였으나 이종무의 단독 판단으로 인한 작은 실책이라고 나와있음

그 근거로는 국내 지휘부였던 영의정 류정현의 종사관으로 현지에 파견된 조의구가 위에 언급한 전과 사실을 가지고 먼저 귀국하여 6월 29일에 조정에 승전을 보고했기에 여기서 이미 조선군은 작전 목표를 달성하여 전쟁의 종료와 철군을 전제로 이뤄진것이며

이 정벌의 영향으로 형식적으로나마 대마도주인 종정성의 복종을 이끌어내고 무역을 끊었다가 계혜약조를 통해 우리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교역을 재개하였고 이는 삼포왜란 이전까지 조선 남해가 평화로워지는 결과를 가져왔기에 절대 실패라고 볼 수 없음

4. 사병 혁파 실패?
사병 혁파에 실패했고 그 이유로 조사의가 태조의 사병인 가별초를 동원하여 난을 일으킨 걸 근거로 들고 있는데


조선 태종대 지방군제의 개편 방향 2020 이라는 논문을 보면 무인정사를 통해 권력을 장악한 태종은 즉위 이전인 정종 2년(1400)에 사병 혁파를 추진하였는데 본격적으로 시행되는 과정에서 중앙군은 성격상 집권층의 이해관계와 직결되어 통치체제의 운영 방식에 즉각적으로 영향을 받으며 변모했으나 지역 사회의 구조가 상이하기 때문에 전체를 일률적으로 개편하기가 힘들었고 이때문에 서둘러 추진하다 나온 몇몇 시행착오가 바로 태조의 가별초가 중심이 되어 일어난 반란인 조사의의 난이었음

근데 쟤 말마따나 이게 실패한 거라면 조사의의 난으로 인해서 진압군측이 패해 태조가 재집권하였던가 아니면 이걸 계기로 사병 혁파가 더디게 진행되었어야 하는데 둘다 그렇게 되긴커녕 확실하게 군사가 중앙의 손으로 들어옴으로서 이는 국가 권력 집중에 아주 큰 도움이 되었음

즉, 저 말은 애초부터아는게 하나도 없으면서 말도 안되는 논리로 개소리하는거임

5. 내정엔 아예 젬병?
내정을 진짜 저주라도 걸린거마냥 ㅈ같이 못했다라고 하며 양전 사업을 예시로 들었는데 쟤가 주장한 양전 갈아엎은 작업이 태조때 6도 93만결에서 6도 96만결로 고작 3만결 늘은게 자랑이냐며 까고 있는데

이 역시도 위에 언급한 논문을 인용하여 보자면


조선 최초의 대규모 토지 조사 사업이 바로 태종 5년에 실시된 을유양전이었는데 이때 조사된 수치가 동,서북면을 제외한 6도의 조사된 수치가 960,000결이었음 근데 이 과정에서 새로 파악된 수치가 300,000결이었는데 이는 여러 이유가 있겠으나 결과적으로 세수의 증대가 이루어졌고 이는 군액의 증가로 이어질수 있는 요인이 되었음

비록 전결수가 늘은것에 비례하여 민심이 나빠지긴했고 실시 과정에서 여러 잡음이 있었던것도 부정 할 순 없고 이를 해소하는 과정에서 임시적인 처방들이 이루어지며 개편의 방향이 바뀐것이 있을지언정 마지막 단계에서 원안으로 회귀하였기에

이에 따라 결국 모든 혼선들은 새로운 체제 수립과정에서 으레 나타날수 있는 잡음이었고 이 과정을 통해서 조선의 새 군제 확립의 토대가 마련될수 있었던것인만큼 이 양전 사업 역시 무작정 병신짓이라고 폄훼할수 없음

세 줄 요약
1. 태종이 한게 없다고 쟤가 가져온 여러 이유로 날조함
2. 여러 관련 논문들을 살펴보니 당연하지만 들은 예시가 맞는게 하나도 없음
3. 쟤 왜 밴 안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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