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예인 생각보다 유서 깊은 소련의 재즈에 대해[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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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쿠로 댓글 0건 조회 10,429,192회 작성일 24-05-19 23:08본문
유럽의 대부분 국가가 1920년대에 재즈를 받아들였듯이 소련도 늦지 않게 받아들였다.
소련은 재즈를 주류 백인 사회에 배척 받는 흑인들의 음악이라고 인식했다.
소련의 프롤레타리아 사상과 완전히 일치하는 음악인 것이다.
1920년대 소련의 재즈는 탄생하자 마자 전성기를 맞았다.
적백내전이 끝난 후 황폐화 된 국토와 더불어 황폐화 된 소련 인민들의 마음을
달래줄 수 있었던 것이 신문물 재즈였던 것이다.
포스터에는 '흑인-가극, 초콜릿 아이들'이라고 직역되어 써있다.
그리고 외국, 특히 미국 재즈 밴드들이 소련의 레닌그라드에서 공연을 하며
큰 성공을 거두어 소련의 재즈는 더욱 더 몸을 불리게 되었다.
수 많은 재즈 밴드들이 전국적으로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소련 밴드들이 외국 곡을 가져다 연주하며 영어로 노래하는 수준이었지만
점점 시기가 지나며 소련 국내의 작곡가들과 러시아어로 된 작품들이 인기를 얻었다.
소련의 재즈는 러시아 특유의 전위적 성격과 러시아 서정곡과 융합되어
독창적인 재즈로 성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1930년대에 들어 미국에서는 재즈가 고급 문화화가 진행되면서
스탈린 치하의 소련에서 브루주아 문화라고 배척받기 시작했다,
외국 밴드들의 소련 입국은 금지 되었으며
소련 국내 밴드들의 공연들도 제한되었다.
소련 재즈는 1930년대에 가장 힘든 시기를 보냈다.
소련 재즈는 1930년대에 가장 힘든 시기를 보냈다.
작곡가들은 작곡이 금지되거나 수용소로 끌려가고
밴드들은 해체되거나 오케스트라에 합병 당하는 것이 다반사였다.
스탈린의 폭정 아래서 소련의 재즈는 반짝 기상했다 사방에서 뚜드려 맞기 시작했다.
그러나 소련의 재즈가 기사회생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바로 독소전쟁이다
오데사의 미시카 (1942)
마르크 베르네스의 '어두운 밤' (1943)
독소 전쟁으로 소련은 애국심과 민중을 위로할 '예술'이 필요했다.
소련 정부는 임시적으로 재즈의 범람을 허용했고 라디오에서는 항상 재즈가 흘러나왔으며
재즈풍의 선전곡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소련의 붉은 군대는 미군과 협동 작전을 벌이면서 미군악대의 재즈 문화를 들여오기도 했다.
붉은 군대는 대대마다 재즈 앙상블이 조직되었으며
심지어 1945년 승전 직후에는 붉은 광장에서 재즈가 연주되기도 했다.
이처럼 또다시 재즈는 소련 인민의 일상에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1945년 승전 직후의 모스크바는 항상 축제 분위기였으며
수많은 외국, 자국 재즈 밴드들이 공연을 했다.
이때 소련 재즈는 스윙, 비밥, 딕시랜드 등 갖가지 재즈 장르들이 결합 되면서
전성기의 폼을 찾나 싶었지만
소련 정부는 또다시 재즈에 막대한 제재를 가하기 시작한다.
소련에서 '재즈'라는 단어를 금지했으며 '재즈'는 '에스트라다 오케스트라'라는 이름으로 교체되었고
재즈의 생명인 즉흥연주는 금지 되었으며 재즈풍의 관현악만이 허가 되었다.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하고 니키타 흐루쇼프가 서기장으로 추대 되면서
꽁꽁 얼어붙어 있던 소련의 문화계는 해빙기를 갖게 된다.
문화적 해빙기의 시절에 재즈는 다시금 소련의 주류문화로 부활했으며
1964년부터 모스크바에서는 해마다 재즈 페스티벌을 열기 시작했다.
당시의 대중문화에서 재즈는 절대 빠질 수 없는 존재였다.
천재 재즈 피아니스트 바딤 사쿤(Вадим сакун)의 Fast and Good
1962년 바르샤바 재즈 잼버리
소련 영화 다이아몬드 팔(Бриллиантовая рука) 1968년
소련 영화 캅카스의 포로(Кавказская пленница) 1965년
1960년대는 분명히 소련 재즈의 전성기였다.
어딜 가든 재즈가 들렸으며 어느 것을 보든 재즈가 들렸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에는 언더그라운드에 머물러있던 로큰롤이 메인 스트림에 돌입하며
소련식 팝인 '에스트라다 음악'이 탄생하자
소련 재즈는 유행의 뒷전으로 물러나게 된다.
그럼에도 소련의 재즈는 언더그라운드의 영역에서 삶을 이어갔다.
재즈 앙상블 '아르세날'의 북극광 Северное сияние
1981년
재즈 앙상블 '아르세날'의 용서 Прощение
1984년
파벨 옵샤니코프 오케스트라의 Breeze
1984년
이후의 소련 재즈 밴드들은 일렉트릭, 신디사이저가 결합된 세련된 느낌의 모던 재즈를 꿋꿋이 이어나갔다.
소련이 붕괴 할때까지 소련의 재즈는 끊임 없이 성장했다.
그러나 소련의 붕괴 후 경제위기로 인한 재즈 뮤지션들의 러시아 이탈과
서구식 팝의 등장으로 인해 주류에서 완전히 벗어나 버렸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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