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예인 [낙랑군사] 공손씨가 낙랑군을 접수하고 대방군을 설치하다.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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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쿠로 댓글 0건 조회 56회 작성일 24-06-01 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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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제가 네이버 카페 '부흥'에 연재한 [낙랑군사]의 일부를 발췌 및 수정한 것입니다.

*이 글 하나만 봐도 무방하도록 서술하였습니다. 이전 글을 안보셔도 상관 없습니다.

*너무 길면 제일 아래 3줄 요약!




1. 들어가며..

후한 시절의 낙랑군은 생각보다 강력하진 못했습니다.

한(韓)에게 채찍을 휘둘렀으나 한은 그 세력을 온존히 보존하였고,

오히려 요동군, 현도군의 실패로 고구려가 부담스러울 정도로 성장하였습니다.

이렇게 낙랑군에 그림자가 드리울 때 중국에서는 다시 한번 혼란의 바람이 불어옵니다.

낙랑군(樂浪郡)은 어디까지나 '행정기구'입니다.

그래서 낙랑군을 통치하는 중앙 조정의 흥망이 낙랑군의 강약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칩니다.

낙랑군은 후한(後漢)의 성립기에도 혼란의 파도로 영동 7현을 잃게 되었는데

이번에는 어떤 혼란이 찾아올까요?

2. 중원의 혼란

서기 184년 중국을 뒤흔든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고

중원은 각종 군웅이 할거하는 '난세'가 펼쳐집니다.

이 당시의 이야기는 <삼국지>를 통해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데

중국의 영웅들은 천하를 통일하겠다는 일념으로 전쟁을 벌이고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영토를 넓히는데 열중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때 낙랑군(樂浪郡)을 차지한 군주는 누구일까요?


3. 공손씨의 낙랑군(樂浪郡)

그건 바로 '공손탁'이란 사람입니다.

그는 동탁으로부터 서기 189년 요동태수로 임명이 되는데

공손탁은 요동태수가 되자마자 내부의 반대세력을 숙청하고,

요동군을 요서군, 중료군으로 나누고 각지에 태수를 두어 곧바로 자립해 버립니다.

그후 그는 요동후 평주목을 자처하면서 한고조 유방, 한세조 유수의 사당을 세워

정통성 확보에 치중하고(서기 190년),

또한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공손탁은 고구려와 함께 부산(富山)의 도적을 토벌하고,

부여의 왕에게 일족의 딸을 시집보내 활발한 외교활동을 하기도 합니다(삼국지 동이전).

그는 요동군 뿐만이 아니라 이 즈음하여 낙랑군(樂浪郡)도 접수해버림으로서

요동군과 낙랑군을 잇는 거대한 지역을 다스리게 되었습니다.

중원의 입장에서는 공손탁이 다스리는 지역이워낙 변경이기 때문에

<삼국지> 동이전에서는 이 지역을 '해외(海外)'라고 표현하기도 하였습니다.

공손탁은 중원의 관심과는 먼 지역에 있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왕과 같은 실세를 가지고 있었고

실제로 조조가 공손탁을 영녕향후로 봉하자

"나는 요동에서 왕으로 지냈는데 무슨 영녕향후인가?"라는 말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공손탁은 요동군과 낙랑군을 성공적으로 접수한 것으로 보이는데

특히 조조가 서기 196년 헌제를 옹립하고 자신의 부하인 양무를 낙랑군 태수로 임명하여 파견하였을 때

그때 공손탁의 조치는 다음과 같습니다.

<삼국지> 양무열전

낙랑태수(樂浪太守)로 전임되었지만

요동(遼東)에 있는 공손도(公孫度)가 양무를 멋대로 억류하여

그로 하여금 부임하지 못하게 했다.

그렇습니다. 공손탁(=공손도)은 조조의 부하 양무를 억류하여

중원으로 하여금 낙랑군이 자신의 영역이라는 것을 확실히 각인시켰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아들인 공손강에게 서기 204년 지배권을 물려주었습니다.

4. 대방군(帶方郡)의 설치

아버지로부터 요동군, 낙랑군의 지배권을 물려받은 공손강은

주변의 세력들을 적극적으로 통제하려고 하였습니다.

중원을 견제하려고 오환에 대하여 유화책을 사용하는 반면,

고구려에 대하여는 강경한 태도를 유지하여 충돌이 잦았습니다.

그리고 공손강은 자신의 영지 남쪽에 있는 낙랑군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졌는데

후한(後漢) 말기낙랑군이 쇠퇴하여 유민들이 한(韓)으로 이탈하는 것을 보고

이를 막고자 일단의 개혁 조치를 취하는데 그것이 바로 대방군(帶方郡)의 설치입니다.

<삼국지> 한전

건안(建安) 연간(서기196~220)에공손강(公孫康)이

둔유현(屯有縣) 이남의 황무지를 분할하여대방군(帶方郡)으로 만들고,

공손모(公孫模)·장창(張敞) 등을 파견하여한(漢)의 유민(遺民)을 모아 군대를 일으켜서

한(韓)과 예(濊)를 정벌하자옛 백성들이 차츰 돌아오고,

이 뒤에 왜(倭)와 한(韓)은 드디어 대방(帶方)에 복속되었다.

대방군(帶方郡)의 정확한 설치 시점은 문헌상 불분명하나

공손강이 공손탁의 뒤를 이은 서기 204년에서

조조가 오환을 정벌하여 서편의 위협이 증가되는 서기 207년 사이라고 봅니다(임기환).

대방군은 과거 진번군이 있던 곳으로 현재의 황해도 지역으로 비정됩니다.

공손강은 공손모와 장창을 대방군에 파견하여 중국 유민들을 모아 군대를 만들고

한(韓), 예(濊)를 상대로 군사 작전을 감행하는데

이것이 어느정도 효과가 있었는지 한(韓)으로 흘러들어간 유민들을 되돌아오게 하는 효과가 있었습니다.

다만, <삼국지> 동이전에서 왜와 한이 대방에 복속되었다는 것은 지배를 받았다는 표현이 아니고

대방군이 왜와 한에 대한 외교 업무를 담당했다고 보면 됩니다.

5. 대방군(帶方郡)의 설치 목적과 성격

공손강은 낙랑군을 부흥시켜도 될 일을 왜 굳이 대방군까지 설치하였을까요?

공손강은 낙랑군의 둔유현 이남을 분할하여 '황지'에 대방군을 설치하였다고 하는데

여러가지 견해가 있지만 필자가 가장 그럴듯하다고 여기는 견해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로 낙랑군으로 하여금 고구려와 옥저, 예 방면을 주력하도록 하고,

대방군은 한(韓), 왜(倭)에 주력하도록 하여 업무를 효율적으로 분담하려는 목적이라는 것(권오중),

둘째로 성장하고 있는 한(韓)을 효과적으로 압박하기 위한 목적이라는 것,

셋째로 공손씨 입장에서 중원과 연결된 재지세력이 있는 낙랑군보다는

'황지'를 대방군으로 만들어 오로지 공손씨만의 영향력이 확고히 미치는 영역을 만들 목적이라는 것입니다(오영찬).

저는 이들 견해에 대하여 모두 찬성하고 있음을 밝힙니다.

오영찬 교수는 공손씨의 대방군은 '군사적인 성격'이 강한 행정기구라고 평가하였는데

우선 공손모와 장창이 군사를 모아 군사 작전을 감행하였다는 기록도 있을 뿐더러

대방군에 있는 기리영에서의 '영(營)은 군대의 주둔지를 의미하고,

대방군 산하의 건중교위의 '교위(校尉)'는 군대 단위의 '교'의 지휘관을 가리키고,

대방군 산하의 새조연사의 '새(塞)'란 변방의 이민족의 통제를 담당하고 있는 의미로

공손씨는 '황지'에 군사적인 목적의 대방군을 설치하여

한(韓)으로 이탈하는 주민을 막고 한(韓)의 성장을 견제하고자 하였다고 봅니다.

6. 대방군(帶方郡) 주도기

대방군의 설치로 인하여 낙랑군은 권한이 축소가 됩니다.

특히 낙랑군의 주 임무였던 한(韓) 지역의 견제임무가대방군으로 이관되면서

낙랑군은 당연히 권한이 축소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후 중국측 기록에서는 대방군을 위주로 역사를 서술하게 되는데

따라서 역사가들은 이 시기를 '대방군 주도기'라고 부릅니다.

대방군은 한과 예를 맞상대하는 것을 주임무로 하는데

낙랑군은 이를 지원하는 식으로 운용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대방군은 한(韓)에 대해서 공손모, 장창의 사례에 비추어 보았을 때

군사적인 압박을 넣는 정책을 쓴 것 같고,

반면 왜(倭)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군사적인 압박을 넣기보다는 유화책을 사용하였습니다.

특히 왜에 관하여는 대방군이 전적으로 담당하여 교류한 흔적이 문헌에도 남아있습니다.

<삼국지> 왜전

대방군(郡)으로부터 왜(倭)에 도착하기까지는해안을 따라 물길로 가서 한국(韓國)을 거치고,

남쪽으로 가다 동쪽으로 가면 '구사한국'의 북쪽에 이르러 거리가칠천여 리나 된다.

다시 바다 하나를 건너며 천여 리를 가면 대마국(對馬國)에 도착한다.

그 큰 관리를 '비구'라 하고, 부관을 '비노모리'라 한다.

뭍에서 떨어진 외딴섬 거주하는데거리가 사백여 리이다.

땅은 산세가 험하고 깊은 숲이 많고, 도로는 짐승이 다니는 길처럼 좁다. 천여 호(戶)가 있다.

좋은 밭은 없어, 해물(海物)을 먹으며 스스로 생활하며 배를 타고 남북으로 다니며 쌀을 사들인다.

또 남으로 바다 건너 천여 리에 일명 '(瀚海)'를 건너면 큰 나라가 하나 있는데,

그 곳 역시 관리를 '비구'라 하고 부관을 '비노모리'라 한다.

사방 삼백 리이며, 대나무와 나무가 모여 많은 산림을 이루니삼천여 가구 정도가 있으며

이들에겐 밭이 있어 밭을 경작하는데 그 양이 부족하므로 역시 남북으로 쌀을 사들인다.

또 바다 하나를 건너며 천여 리를 가면 말로국(末盧國)에 도착한다.

4천여 호(戶)가 있어 산이나 바닷가에서 사고 초목(草木)이 무성해 길을 다닐 때 앞사람을 볼 수 없을 정도다.

물고기와 전복을 잡기를 좋아하여 물이 깊고 얕고를 가리지 않고 모두 물에 들어가 이를 잡는다.

육지를 따라 동남쪽으로 오백 리를 가면 '이도국(伊都國)'이 있는데,

관리를 '이지'라 부르고, 부관을 '설모고', '병모고'라 부른다. 천여 호가 있으며,

대대로 왕이 있는데 모두 '여왕국(女王國)'에 속해 있어,

(대방)군의 사자(郡使)가 왕래할 때 늘 머무는 곳이다.

(중략)

대방군으로부터 여왕국(女王國)에 이르기까지 1만 2천여 리이다.

(중략)

(여)왕이 중국의 경도(京都)나 대방군(帶方郡)여러 한국(韓國)에 사자를 보낼 때와

대방군(郡)에서 왜국에 사자를 보낼 때에는 모두 나루터에서 검사한 뒤 문서와 기증하는 물품을

여왕에게 보내어 착오가 없도록 한다.

이 기록은 공손씨가 몰락한 이후의 기록이긴 하지만

대방군이 왜(倭)와 적극적으로 교류를 한 흔적을 나타냅니다.

이렇듯 공손씨는 낙랑군을 분할하여 대방군을 설치하고

대방군은 낙랑군을 대신하여 한과 왜에 대한 임무를 담당하게 됩니다.

낙랑군의 임무를 대부분 대방군이 맡게 된 이 시기를

과연 '대방군 주도기'라 부를만 합니다.

7. 요동과의 긴밀한 관계

공손씨 정권은 요동을 중심으로 자리잡았습니다.

서기 220년 대방군을 설치한 공손강도 사망하고 동생인 공손공이 뒤를 이으나,

8년 뒤에 공손강의 아들인 공손연이 공손공을 밀어내고 뒤를 잇게 됩니다.

이렇게 공손씨 정권을 대를 이어가며 지배권을 물려주고 있는데

공손씨 정권의 세력이 요동군, 낙랑군, 대방군을 포괄하고 있는지라

이들 지역은 서로간에 긴밀한 협력을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공손씨의 힘은 요동군을 중심으로 낙랑군을 거쳐대방군을 통해 외부로표출되는 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공손모와 장창만 하더라도 요동군에서 온 사람인걸 감안하면

공손씨 정권 아래에서 낙랑군과 대방군에는 요동인들이 유입되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사견).

덕분에 대방군은 생각보다 큰 성공을 거두었고,

낙랑군은 비록 권한이 크게 축소되었지만

요동군과 대방군을 연결하는 역할을 하며 나름 잘 유지가 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비록 대방군, 낙랑군이 성공적으로 임무를 완수하였다곤 하지만

이를 대방군, 낙랑군의 자체적인 역량으로 인한 것으로 볼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후한 말기에 이르면 낙랑군이 자체적인 역량만으로는 한(韓)을 통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이러한 자체적인 역량 약화는공손씨 정권 아래에서도 마찬가지라고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낙랑군, 대방군의 성과는 모두요동으로부터의 인적자원, 물적자원이 수혈되었기에 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요동으로부터의 수혈을 걷어내고 낙랑군, 대방군을 바라본다면

그 자체적인 역량은 그다지 크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8. 공손씨 정권의 몰락

이렇게 낙랑군은 중원에서의 혼란을 한발짝 비켜가지만

중원의 혼란은 위, 오, 촉 삼국의 정립으로 귀결이 되어 가고

그중에서 위나라의 세력이 가장 두드러짐에 따라 낙랑군에도 전운이 돌기 시작합니다.

위나라는 서기 207년 공손씨의 우익인 오환을 정벌하고

공손씨가 가지고 있는 산둥반도 동래현을 빼앗습니다.

이에 공손씨는 오나라와 적절히 연결하여 위를 견제하기도 하였으나

결국엔 위나라는 서기 234년 제갈량의 죽음으로 한 숨돌리게 되자공손씨를 공격하게 되었습니다.

위나라는 서기 236년 관구검을 유주자사로 임명하고 공손연을 압박합니다.

이에 공손연은 연호를 소한(小漢)으로 하고 스스로 연왕(燕王)이라고 칭하면서 정면대응하나

결국 공손씨 정권은 서기 238년 사마의, 관구검이 이끄는 위나라의 군대와 동천왕의 고구려의 합세에무너지게 됩니다.

이때 위나라 측은 혹시나 공손연이 낙랑군, 대방군으로 도망갈 것을 대비하여

해로를 이용하여 대방군과 낙랑군을 접수하게 되는데

관련 기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삼국지> 한전

경초(景初) 연간(서기237~239)에 명제(明帝)가 몰래

대방태수(帶方太守) 유흔(劉昕)과 낙랑태수(樂浪太守) 선우사(鮮于嗣)를 파견하여

바다를 건너가서두 군(郡)을 평정하였다.

위나라 측은 대방태수에 유흔을, 낙랑태수에 선우사를 임명하여

대방군, 낙랑군을 정복하게 명을 하였고 성공시켰습니다.

이때 대방군이 낙랑군보다 먼저 기술된 점을 보아도 대방군이 낙랑군보다 주요하게 생각되었던 것이 보입니다.

어쨌거나 낙랑군은 공손씨 정권 아래에서 상당수 영역과 권한을 대방군에게 이관하여 주고

또한 공손씨의 지배를 받으면서 중원의 혼란을 직접 겪진 않았지만

이제는 위나라가 낙랑군, 대방군을 직접 지배하기 시작하였으므로 다시 중원에 편입이 되었습니다.

낙랑군, 대방군의 주인이 공손씨에서 위나라로 바뀌는 순간입니다.

9. 나오며..

낙랑군은 공손씨의 지배를 받으면서대방군과 분리가 되었지만

중원의 혼란과는 무관하게 비교적 편안한 시기를 보낸 것으로 보이며

공손씨의 의도에 맞게 요동군과 대방군을 이으면서 대방군을 지원하는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보입니다.

낙랑군, 대방군은 위나라가 공손씨를 멸망시키고 낙랑군, 대방군을 접수할 때도큰 피해를 입은 흔적이 없어서

위나라 조정은 낙랑군, 대방군을 이용하여아주 적극적인 동방 정책을 펼치게 되는데

중국의 중앙 조정이 직접 나서서 동방에 군사력을 투입한 결과를

다음화에서 자세하게 논하고자 합니다.

중국은 한무제의 고조선 멸망 이래로 동방에 '중앙의 군사력'을 투입한 사실이 없는데

약 350년만에 다시 '중앙의 군사력'을 투입하게 되는데요.

이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화에서 계속합니다.

한울리카 올림.


[3줄 요약]

1. 중원이 혼란스러워지자 공손씨가 요동군, 낙랑군을 접수하였다.

2. 공손씨는 낙랑군을 분리하여 대방군을 설치하였다.

3. 공손씨 시절 낙랑군, 대방군은 상당히 강력하여 '한'을 잘 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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