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예인 임진왜란사를 찾아볼 때 참고하기 좋은 사관의 변화. [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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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댓글 0건 조회 3회 작성일 24-06-18 0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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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역사라는 건 마이너 취미에 가깝고, 그중에서도 전쟁사 라는 영역은 남초만의 전유물이 되는 편이라. 잘 교정이 안되는 편.

특히 역덕이라는 친구들은 내가 가장 잘 안다는 오만함으로 뇌를 두르는 경우가 있어서, 퍼나르다 보면 부정확한 기술이 커지고 커져 다수설로 굳어지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실수를 방지 하기위해 실례를 들어 조심해보자. 좀 연구자들보다 '그 연구자들이 열심히 한역해준 몇개 사료를 찾아볼 줄 아는 내가 더 잘났어!' 라는 이상한 자신감은 줄일 필요가 있다.

https://www.fmkorea.com/7142741488

임진왜란)어째서 조선군은 용인전투에서 참패했는가?

이 친구의 주장을 요약하면 '용인전투는 이순신이든 권율이든 누굴 데려와도 못 이기는 전투' 인데 그렇진 않다. 사관의 변화를 설명하는 중간 중간에 왜 그런지 확인해보자.

기록의 나라 조선답게 왜란 직후 해당 사건을 조명하는 기록은 신나게 쏟아져 나왔는데. 그에 반해 일제시대까지 왜란에 대한 재평가와 연구노력은 미미한 편. 일제시절 일본 참모본부는 전쟁사를 정리하는 작업을 했는데. 이 레이더에 임진왜란이 걸려 일본학자들이 꽤 많은 학술적 성과를 낸다. 일본 사료와의 교차 검증 및 관련 문헌 수집의 집대성에 성공하나. 참모본부의 의도가 당연히 섞일 수밖에 없지. 즉 임진왜란의 평가를 패배주의적으로 서술하는 식민사관류의 영향이 짙게 남는다. 이 영향을 받은 최남선 등의 저술도 역사가 현재와 과거와의 대화라는 명언 답게 결론이 영 이상하고.

해방 이후 한국학자들은 이에 대항하는데 보통 두 종류다. 하나는 충무공에 집중하는 전기류 저술이고. 다른 하나는 민족주의 사학이다. 임진왜란의 참혹함과 그로 인한 패배주의적 서술을 극복하려면 영웅에 집중하자는 전기류, 혹은 소설이 잘 팔릴 수밖에 없고 그래서 남은 저작물이지. 국사학계에서도 식민사관을 극복해야 한다며 한민족의 투쟁을 강조하는 시각을 강조했고. 그러다 보면 또 생기는 부작용이, 민족과 민중. 의병을 강조하다 보니. 선조는 뭐했어? 조정은 뭐했어? 양남의 감사 김수나 이광은 뭐했어? 비판론이다. 가령 전란 당대에는 선조를 대놓고 깔 수는 없으니 영호남의 사족들이 남긴 기록에서 김수나 이광은 죽일 놈이 되는데. 이건 당대의 기록에서든. 해방이후 민족주의 사학의 바람이든 공통점이 있는 사관이지. 또 한계가... 당대 기록이던 해방 이후 사학이던 전쟁사를 분석하는데 전쟁사 전문가들이 별로 참여를 안 해요. 30~50년대 출생 학자들이 요즘 역덕후보다 한학에 조예가 깊어 다양한 사료에 접근하긴 하는데. 전쟁사 관련 성과의 축적이 부실한 건 기억하자.

그럼에도 좋은 고전이 나오는데. 1967년에 출간된 임진전란사다. 주 저자는 이형석으로 일본 육사 출신으로 육군에 들어가 전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이 된다. 세금으로 국사학자들을 끌어다 임진왜란사 편찬위원회를 만들고 온갖 사료를 집대성한다. 그렇게 나온 게 1900쪽이 넘는 임진전란사지. 실록이며 난중일기며 유명한 1차사료는 물론이고 안 유명한 사적기록도 다 뒤지고 일본측 연구자료까지 갖가지를 끌어다 정리한다. 저 용인전투 관련글을 쓴 친구는 1900년대에 나온 책이라고 주장하며(은근 슬쩍 연대를 옛날로 물리는 장난을 친다) '임진전란사가 임진왜란 당시에 나온 책이냐?'로 평가절하를 하는데.... 전사편찬위원장이 정리한 전란사를 우습게 보는 친구는 처음본다. 너무 자신감이 지나쳐. 이친구가 왜 이형석 중장에 대해 화가 났냐고? 이 친구는 난중잡록에 따르면 전라감사 이광이 충청으로 북상할 때 10만 군대를 소집해서 끌고갔다고 적혀있으니. 정말 10만군이 북상한 줄 알거든. 이형석 중장은 각종 자료를 교차검증해 이광의 호남 1차 북상군은 8천 정도였을거라고 추계한다. 전라도 방어사 곽영이 초기에 경상도를 지원한 병력을 5천 정도로 추계한 것도 이형석의 연구결과일텐데..... 이를 부정하는 학계의 자료는 내가 본 적이 없다. 본 역사학도나 다른 친구들은 있으면 적어줘. 이형석의 임진전란사는 고전으로 손색이 없는 배경을 갖고 있다. 학계에 부족했던 군사학, 혹은 전쟁사 중심의 전문가가 저술책임을 맡았다는 점. 일제 시대 태생이라 한학에 정통하다는 점. 세금으로 학자들을 굴렸으니 온갖 사료를 다 뒤져서 연구결과를 주장했다는 점. 육사출신이라 식민사학의 영향을 받았을까? 오히려 위원회에 참여한 국사학자들의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편이다. 임진전란사의 한계는 당시 사관대로 의병 중심의 항쟁을 고평가하다보니 입체적인 분석엔 한계가 있다는 정도. 또 학계 출신이 아니니 학맥을 잇는 제자들이 빈약해 주로 인용되진 않는 다는 점 정도. 아마추어 역덕들이 구해놓고 보기엔 60년대 저술이라 조사 동사만 한글이고 죄다 한문이라 짜증난다는 정도.

아무튼 사관의 변화로 돌아오자. 70년대 들어 의병 중심의 사관에 비판기조가 등장하는데. 향토사회. 혹은 사족과 조정의 통제를 연구해 민중항쟁의 비중을 낮추는 게 더 입체적인 해석이란 분석들이 나온다. 의병의 주체로 조정은 배제되고 사족과 민중의 두 요소가 강조되었는데. 실제로는 사족에 대한 통제를 조정이 적극적으로 시도했다는 연구인거지.


식민사학(일본놈들)은 짜증나지만, 민도는 미개하니 위대한 영웅의 영도를 받아야 한다 류 유신체제의 영향이 줄어들면서. 80년대 이후 연구는 90년대까지 두 가지 흐름이 생긴다. 하나는 윗대가리의 압박에서 벗어난 군사학 전공자들이 세금의 도움을 받아 임진왜란의 전쟁사. 전시제도. 주요 교전의 재현 등에서 연구 결과를 축적한다. 국사학계에서도 전쟁사는 전쟁사로 봐야 한다며 서양식 전사학문의 영향을 좀더 받아야 한다는 주장이 이때 나온다. 다른 하나는 지방자치제의 영향으로 지방대. 거점대학에서 향토사학이 발전하기 시작한 것. 저 용인전투 글을 쓴 글쓴이는 이런 경향을 무시하고, 왜란 당시 전라감사 이광의 의도를 본인이 출처없이 추정하면서..... 근거를 영남 군사활동 관련 논문으로 대는데. 솔직히 이해하기 어려웠다. 80-90년대 향토사학의 축적결과를 확인하려면, 호남 활동은 호남 향토사학자의 논문을 찾아봐야 하고. 전투는 군사학 전문가의 연구 결과를 합해서 봐야 하는데. 뭔 이상한 자존심인지?

호남 향토사학자 하태규는 용인전투, 혹은 이광에 대한 평가를 이렇게 서술한다.
용인전투 글을 쓴 친구는 왜란이 터지자 마자 이광이 십만명을 징집했다는 난중잡록을 신뢰하지만. 하태규는 이형석의 추계대로 8천이 북상했다고 인식한다. 당대의 여러 기록은 이광이 우유부단 했다고 주장하지만 하태규 교수는 공포가 전라도 전체에 퍼져있었다고 비판적으로 해석한다. 용인 친구는 신립이 져서+군량이 없어서+비도 와서 이광군이 회군했다고 주장하지만. 당대의 상당수 사족들이 남긴 사료는 이광이 우유부단해서 회군했다고 주장한다. 하태규는 실록에 남은 근거를 들어 한성 함락 소식을 들은 군사들이 자발적으로 회군의 의지를 보였고. 이광이 말리자 칼을 들어 이광을 위협했다는 기록을 예로 들며 이광만의 책임이 아니라고 본다.

유성룡과 선조 이전에, 이순신을 발탁한 문신이 이순신의 덕수이씨 친척 이광인 것도 하태규는 거론한다. 이순신이 파직되었을 때 조방장으로 등용해 군사일을 맡긴게 이광이니까. 그다음에 유성룡의 천거가 나오고 선조의 중용이 있었던 것.

용인전투 글을 쓴 친구는 임용한 박사의 의견도 부정하는데. 대략 이렇다. '하여간 이 개새끼가 조선사 전공도 아닌 임용한 교수 말만 믿는다면서 다른 논문 내용 다 무시할 때' ..... 좀 자아도취가 심한 주장인데. 임용한 박사는 기존 임진왜란사의 축적된 연구 위에서 주장하기 때문이다. 이래서 아마추어 역덕은 학계에서 뭔 얘기를 하는지를 알아야 자아도취가 줄어든다. 이제 사관의 변화로 돌아가볼까?

80~90년대의 사관 변화를 요약하면 두 가지라고 했지? 향토사학의 시각이 발전. 다른 하나는 민중사 및 영웅사의 비중이 줄어들고 군사학 및 전쟁사 관점의 전문가들이 참여해서 왜란의 제도적 분석 강화. 즉 허선도 교수등의 지적이나. 해군 군사연구실등의 저서가 쌓여가면서 입체성이 늘어났는데. 우리가 결론만 간단히 인식하는 '실전경험이 없는 군대의 취약점'을 제도적으로 분석하고 있단 말이지. 임용한이 아무리 파격적인 주장을 잘하는 강연가여도 학계 축적 무시하고 주장 하는 게 아니에요. 용인전투글을 쓴 친구나 다른 친구는 본인이 출처가 이상하거나, 출처없이 과감한 추론을 하는데도, 오히려 남을 헐뜯더라. 그러면 안 된다.

임용한의 문경새재. 혹은 탄금대 관련 의견은 대략 이렇다.

임용한의 탄금대 전투에 대한 재해석
https://www.fmkorea.com/4797596572

전설적 명장 신립. 탄금대에서 몰락한 진짜 이유.
https://dbr.donga.com/article/view/1206/article_no/6701


00년대 이후 임진왜란 관련 사관은 한 번 더 입체적으로 변한다. 기존의 성과 위에. 국사와 세계사의 이분법적 규정의 영향을 지우고. 동북아 관계사로 봐야 한다는 것. 역덕들이 흥미를 느끼기에도 이런 관점이 더 좋다고 난 생각한다.

포텐간 용인전투 관련 글은 출처가 없거나 균형감각이 이상한 추론을 없애고 꽤 많이 갈아엎어야 하는 글로 보이는데. 이건 나중에 에너지가 생기면 써볼께. 저거 쓴 친구가 욕하고 튀었으니 한번쯤 정리해볼 필요는 있겠다. 역사 좋아하는 건 좋아하는 건데. 학계의 연구성과를 받아먹어서 본인 취미가 생긴거면, 좀 학계가 뭔 소리를 하고 있는지 관심 좀 가져야 한다. 그래야 균형감각을 유지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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