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예인 조선 왕실에서 왕이랑 역대급으로 사이가 안좋았던 왕대비[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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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댓글 0건 조회 117회 작성일 24-03-04 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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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462409997_20150619.jpeg.jpg 조선 왕실에서 왕이랑 역대급으로 사이가 안좋았던 왕대비

조선의 21대 국왕 영조(1694~1776)는 무려 51년을 왕으로 재임하여 조선 역사상 가장 오래 재위한 국왕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음

사실 그는 원래 왕이 될 운명이 낮았던 왕자로 숙종과 그의 후궁 숙빈 최씨 사이에서 태어난 후궁의 아들임. 하지만 그가 왕이 된건 사실상 기적이나 다름없었음

다운로드.jpeg-87.jpg 조선 왕실에서 왕이랑 역대급으로 사이가 안좋았던 왕대비

대략 여러 상황들이 겹쳤는데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고 볼 수 있음

1. 아버지 숙종의 왕비들이 전부 아들을 못낳음

숙종은 평생 3명의 왕비를 배우자로 뒀음. 첫번째 부인 인경왕후(1661~1680), 두번째 부인 인현왕후(1667~1701), 세번째 부인 인원왕후(1687~1757)이 바로 그들임.

첫번째 왕비 인경왕후는 16살, 18살, 19살에 총 3명의 공주를 낳았으나 모두 돌을 넘기지도 못하고 죽었으며 왕비 본인도 19세 나이에 천연두에 걸려 세상을 떠남.

두번째 왕비 인현왕후는 경종의 어머니 희빈 장씨에 밀려 사실상 뒷방신세였지만 일단 합방을 했는데도 자식이 없는것으로 봐서 왕비 본인이 아이를 못낳는 불임이였을것으로 추정됨.

세번째 왕비 인원왕후는 숙종보다 26살이나 어린 딸뻘이며 숙종이 너무 고령이여서 그런건지 몰라도 임신 자체 경험이 없음. 야사에는 임신을 했지만 한번 유산한적이 있다는데 아마 이게 그나마 현실성있을듯.


2. 아버지 숙종의 아들들중 본인과 경종만 성장

아버지 숙종은 왕비들에게서 아들을 얻지 못했으며 후궁인 희빈 장씨(1659~1701), 숙빈 최씨(1670~1718), 명빈 박씨(1665~1703)에게서만 아들을 얻음.

한때 왕비자리까지 오른 희빈 장씨와 사이에서는 장남 경종(1688~1724), 차남 성수(1690~1690)을 낳음

후궁 숙빈 최씨와 사이에서 삼남 영수(1693~1693)와 사남 영조(1694~1776), 오남인 왕자(1698~1698)을 얻음

그리고 후궁 명빈 박씨와 사이에 막내아들인 연령군(1699~1719)을 얻었음

차남,삼남, 오남은 아기때 죽었고 연령군은 만 20세 나이에 자식도 없이 죽어버림. 즉 숙종에게 아들은 경종과 영조뿐이였음.


3. 이복형인 경종이 자식을 못낳음

경종은 아예 자식이 없던 몇 안되는 왕인데 첫번째 부인 단의왕후(1686~1718)는 지병으로 중풍이 있었음. 하필 왕세자빈으로 간택된 이후 발병한터라 강제로 이혼시킬수도 없었고 병세가 심각해서 인현왕후 장례때도 아예 불참할정도로 골골댔다고 함.

결국 단의왕후는 자식도 못낳고 죽어버리고 이후 들인게 바로 이 글의 주인공 선의왕후(1705~1730)임. 경종보다 17살 어린데 이 왕비와 사이에서도 자녀를 낳지 못한걸 보면 경종에게도 생식능력에 문제가 있던걸로 추정됨



정리하면 이 3가지 상황이 겹쳤다고 볼 수 있으며 형인 경종이 35세 젊은 나이에 급사하자 영조는 왕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음

하지만 그는 왕이 된 후 뜻밖의 인물과 대립하게 되었음

DQTkNg65kbI8Zvsbk2-LroHq3IUMYRRAvmbxFS4MWIdTX_-1VsF8qncN759gqZpMovHGJLloc3Wp6EYRh2kU3A.webp.ren.jpg 조선 왕실에서 왕이랑 역대급으로 사이가 안좋았던 왕대비

바로 이 글의 주인공 선의왕후(1705~1730)임. 사적으로는 영조에게는 형수이며 왕실 법도상 선왕의 왕비로써 영조 재위 시대에 왕대비가 되어 경순왕대비라는 이름으로 조선왕조실록에 가장 많이 나옴

남편 경종보다 17살 어렸고 영조보다 11살 어렸으며 왕대비가 되었을때 그녀의 나이는 불과 만 18세였음. 뉴진스 다니엘. 아이브 장원영 나이대에 과부가 되서 말 그대로 자식도 없이 혼자 되버린거임.

먼저 이 인물의 생애를 알아야 얼마나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는지 알 수가 있음

XIFAJ.webp.ren.jpg 조선 왕실에서 왕이랑 역대급으로 사이가 안좋았던 왕대비

선의왕후는 1705년 12월 3일 함원부원군 어유구(1675~1740, 66세 졸)의 2남 6녀자식들중 넷째딸로 태어났음

왕비의 어머니 완릉부부인 이씨(1683~1712)는 어유구의 두번째 정실부인이며 왕비가 7살때 어머니 이씨가 세상을 떠나고 어유구는 3번째 정실부인을 맞이했다고 함

즉 어유구는

첫번째 부인 - 장녀
두번째 부인 - 차녀, 삼녀, 사녀(선의왕후)
세번째 부인 - 오녀, 육녀, 남동생1, 남동생2

이렇게 가족들을 뒀음.

QXaKS.webp.ren.jpg 조선 왕실에서 왕이랑 역대급으로 사이가 안좋았던 왕대비

그녀의 유년시절 성품에 대한 기록은 매우 드문데 왕실의 왕, 왕비, 대비가 서거하면 일생을 기록하는 제도인 행장에 따르면 '어린 시절 말수가 없었고 성품이 유순해서 집안어른들이 어여쁘게 아꼈다'라고 나와있음.

그냥 그 시절 조선시대 사대부가의 집안법도에 맞는 딸이였음. 그러던 중 그녀의 인생이 바뀌게 되는 한가지 일이 조선왕실에서 일어남

단의왕후.jpg 조선 왕실에서 왕이랑 역대급으로 사이가 안좋았던 왕대비

경종보다 2세 연상의 세자빈 심씨(1686~1718)가 자식도 못낳고 31살 젊은 나이에 급사해버렸음. 사실 심씨는 몸이 정말 현대 기준이면 장애인으로 분류될정도로 허약했음.

왕세자빈으로 간택한 후 중풍이 발병해서 제대로 걷지도 못했고 말을 횡설수설하고 손을 떠는 증상이 항상 있었다고 함. 당연히 자식은 한명도 낳지 못했음.

법적 시어머니 인현왕후가 서거했을때 장례식에 참여하지 못할정도로 건강이 안좋았을정도였음

zTPRZ.webp.ren.jpg 조선 왕실에서 왕이랑 역대급으로 사이가 안좋았던 왕대비

큰며느리가 죽자 숙종의 근심은 날이 갈수록 커지게 됨. 당시 왕세자 경종의 나이는 30세로 당대의 기준이면 조금 빠를 시 손주까지 볼 수 있는 나이였음.

참고로 숙종은 첫번째 왕비 인경왕후와 사이에서 만 15세에 첫째(공주)를 낳았음. 경종은 당시 기준 중년에 접어든 나이에 자식이 아예 없었으니 걱정이 갈수록 커짐

심지어 당시 숙종의 건강도 급격히 쇠약해지고 있었고 시각질환으로 앞을 거의 보지도 못했으며 지병인 위장병, 장질환으로 몸이 쇠약해질테로 쇠약해져서 자기의 여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것도 안 상황이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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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해서 법도대로라면 세자빈의 3년상이 끝나고 새 왕세자빈을 간택해야 하지만 이미 늙을대로 늙은 경종의 후사를 위해 세자빈이 서거한 당해에 왕세자빈 간택령이 내려짐

당시 경종이 중년의 나이인터라 왕세자빈을 간택하는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숙종의 왕비 인원왕후(1687~1757)는 17~22세 사이의 양반가 처녀들을 간택하려고 했음.

그러나 조선시대 사대부가 여인들은 평균적으로 11~16세에 다들 혼인을 함. 임진왜란이나 정묘호란같이 국가적으로 난리가 난 시대가 아니라면 장애가 있지 않는 한 16세 이후에도 싱글인 경우 자체가 없었음.

이런 이유로 간택단자에 응한 처녀들의 나이대가 11~13세였고 당시 만 12세였던 어유구의 넷째딸이 왕세자빈으로 간택됨.

어유구가 사헌부 관리로 있으며 일찌감치 숙종과 왕세자(경종)와도 안면이 있는 상황이였던게 큰 이유였을듯함

DSC_0126.jpg 조선 왕실에서 왕이랑 역대급으로 사이가 안좋았던 왕대비

두 사람은 1718년 9월 13일 부부로써 혼례를 치뤘고 왕세자빈 어씨는 다음해인 1719년 9월 당시 관례(성인식)를 치뤘다고 함. 아마 이 시기에 경종과 첫 합방도 이루어졌을것으로 보여짐.


Iovgq.webp.ren.jpg 조선 왕실에서 왕이랑 역대급으로 사이가 안좋았던 왕대비

그녀가 왕세자빈으로 책봉되고 시아버지 숙종에게 첫 문안인사를 올릴 당시 숙종은 시각장애로 인해 며느리 얼굴조차 제대로 보지 못하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했다고 함. 또한 며느리인 왕세자빈 어씨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남김

" 나는 너(선의왕후)의 이롭고 착한 성격을 알고 있으니 훗날 너의 이로움이 세상에 알려질것이다"

" 듣자하니 너의 증조모(어유구의 조모)께서 장수하시고 복이 많으셨다고 들었다. 너 역시 그렇게 살길 바란다"

숙종이 이런 말을 남긴 이유는 장차 아들이 즉위하면 왕비가 되고 또 훗날 어머니 명성왕후(헌렬왕대비)처럼 아들이 왕이 된 왕대비가 될 가능성이 높은 며느리가 자신의 다른 아들들(연잉군, 연령군)을 너그럽게 대해주길 바라는 마음 때문이였음.

이미 즉위 초 5촌 당숙인 인평대군의 아들들을 처단한 경험이 있었고 당시 연잉군(영조), 연령군은 장가까지 가서 언제든지 후사를 볼 수가 있었고 왕세자빈 어씨 역시 자식을 낳을 가능성이 충분했기 때문임.

pVQvm.webp.ren.jpg 조선 왕실에서 왕이랑 역대급으로 사이가 안좋았던 왕대비

하지만 2년뒤 숙종은 만 58세 나이에 결국 서거하고 왕세자 경종이 조선의 20대 국왕으로 즉위했으며 왕세자빈 어씨는 왕비로 승격되었음.

당시 왕실의 최고어른은 숙종의 마지막 왕비 인원왕후로 그녀는 왕대비가 되어 혜순왕대비라는 존호를 받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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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문제가 생김. 경종은 자식이 없었고 어머니인 희빈 장씨(1659~1701)가 왕의 어명으로 스스로 자진(목을 매고 죽음)한 죄인인터라 왕권 자체가 강하다고 볼 수 없었음.

심지어 당시 왕실의 주요세력들 대부분 노론이였으며 왕실 최고 어른 혜순왕대비 역시 노론측의 정치적 입장을 취하고 있었음

이런 이유로 노론의 4대신들은 이제 32살인 왕에게 후사가 없으니 연잉군을 왕세제로 책봉해야 한다라고 주장함. 그리고 이 일에 대해 매우 불쾌해한 인물이 있었음.


ZKyiW.webp.ren.jpg 조선 왕실에서 왕이랑 역대급으로 사이가 안좋았던 왕대비

바로 왕비 어씨(선의왕후)임. 어씨는 당시 나이가 겨우 만 15~16세였는데 대신들이 왕세제를 들이라고 왕을 겁박하는건 왕비보고 너도 애 못낳는 여자잖아ㅋ라고 무시하는거나 다름없었음

야사에는 노론4대신 앞에서 왕비 어씨가 왕세제 책봉을 주장하는 상소문을 갈기갈기 찢어버렸다는 일화도 전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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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결국 남편 경종의 건강이 예상보다 빨리 좋아지지 않는걸 직감한 왕비 어씨는 소헌세자의 증손자이자 자신에게는 8촌 시동생이 되는 밀풍군을 자신과 경종의 양아들로 삼아 후사를 잇는 계획을 세움.

하지만 이 계획은 실패할수밖에 없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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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왕실 최고 어른 혜순왕대비 때문임. 왕실 법도상 왕이 유고하거나 위급할때 후계자를 정하는건 왕대비, 대왕대비에게 있었고 대비가 2~3명이면 가장 서열이 높은 대비가 정하는게 우선시되었음.

당시 혜순왕대비(인원왕후)의 나이는 30대 후반으로 오히려 의붓아들 경종보다 더 오래 살 가능성이 높았으니..왕비 어씨의 계획은 당연히 실패로 돌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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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약 4년간의 혼란한 상황끝에 경종이 35세 젊은 나이에 서거했음. 야사에는 동생 연잉군(영조)이 게장을 올려 몸에 일부러 무리를 줘서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데 알려진건 없음.

경종이 서거하자 왕실 최고어른 혜순왕대비는 왕세제 연잉군이국왕으로 즉위하는걸 허락한다는 하교를 내렸고 연잉군이 즉위하게 됨. 그가 조선의 21대 국왕 영조(1694~1776)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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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잉군이 즉위하자 겨우 18세였던 경종의 왕비 어씨는 왕대비가 되어 경순왕대비라는 존호를 받고 시어머니 희빈 장씨가 거주하던 창경궁 저승전으로 이주했음.

또한 혜순왕대비(인원왕후)는 혜순대왕대비로 승격되었으며 연잉군의 부인 서씨는 왕비로 책봉되었다고 함.

사실 왕대비 어씨가 저승전으로 이주한건 매우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였는데 조선은 효의 개념이 우선시되던 나라였고 보통 왕, 왕비들도 왕대비(혹은 대왕대비)가 사는 궁궐의 근처에 거주하는게 대부분이였음.

당시 혜순대왕대비(인원왕후)는 창덕궁에 거주중이였고 이런 이유로 왕(영조), 왕비(정성왕후)는 창덕궁에 거주중이였음. 그런데 시어머니를 냅두고 자기 혼자 창경궁으로 가버린다? 당연히 문제가 되는 상황임.

물론 영조는 나중에 창덕궁의 환경이 본인과 맞지 않다고 불평해서 혜순대왕대비가 경희궁으로 이주할것을 권해 경희궁으로 이주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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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에 따르면 왕대비 어씨는 대왕대비를 포함 왕, 왕비와도 사이가 정말 최악이였던걸로 추정되는데 대왕대비(인원왕후)의 생신기념 행사에도 불참하고 문후조차 가지 않았으며 국왕(영조)을 위한 모든 행사에 죄다 불참함.

영조도 이에 대응하듯이 왕대비전에 올릴 진상품, 생신잔치, 문후등을 전부 사실상 거부했음

왕대비 어씨는 자신의 남편 경종의 죽음은 사실상 시동생 영조의 소행이라고 굳게 믿었던걸로 추정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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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1728년 영조 재임기간 역사상 일생일대의 일이 터지는데 바로 이인좌의 난임. 다행히 난은 진압되었지만 조선왕조실록에는 왕대비 어씨에 대한 기록이 상당히 많이 표현됨.

바로 이 난의 주체자 이인좌가 본인 입으로 '자전(왕대비)께서 왕실의 씨가 바뀌었으니 바로 잡으라고 하교하셨다'라고 주장했음. 이 상황이면 왕대비 어씨 역시 자리를 지키기 어려웠을것임

그러나 조선은 효의 국가임. 이미 선왕의 왕비를 박대하다가 겨난 왕이 2명이나 나온터라 영조는 이 사태에서 왕대비전이 연관되었다는것은 사실상 묻어두게 됨

TGXRf.webp.ren.jpg 조선 왕실에서 왕이랑 역대급으로 사이가 안좋았던 왕대비

그러나 당해에 또다른 비극이 왕실에 생김.바로 영조의 장남이던 효장세자가 불과 9살의 나이에 의문의 죽음을 맞이함. 심지어 세자의 여동생이던 화순옹주도 세자와 비슷하게 독에 중독된 증상을 보여 건강이 위태로워짐.

독살을 의심한 영조는 바로 왕세자의 식사를 담당한 수랏간 궁녀들을 모두 잡아들였고 끔찍한 고문을 시작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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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중 고문받던 궁녀의 이름에서 바로 익숙한 이름이 나옴. 바로 왕대비전임. 왕대비전의 지시로 독을 탔다라고 주장한 궁녀가 나오게 됨.

하지만 영조는 끝까지 효의 도리로 인해 왕대비전을 어떻게 하지 못하고 이 일도 그냥 묻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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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장세자가 죽은 지 2년뒤 경순왕대비 어씨도 불과 24세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음. 그녀의 죽음은 아직도 의문인게 역대 왕비, 대비들과 다르게 병환에 대한 기록 자체가 없었음.

실록에 따르면 " 읍성(우는 소리)을 내고 손으로 주위 바닥, 물건들을 치며 횡설수설한다'라고 나와있는데 영조가 이 증상을 의관들에게 묻자 헛소리를 하는것이라고 답함.

결국 이 기록을 끝으로 그 다음날 경순왕대비 어씨는 서거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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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사에서는 그녀의 죽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함

(1) 대왕대비전(인원왕후)의 명으로 유폐되자 분개하여 곡기를 끊고 아사했다

(2) 대왕대비전(인원왕후)의 명으로 비밀리에 자결을 명받아 자결했다

(3) 세자 암살의 배후로 의심되자 스스로 자살했다

하지만 명확한건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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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는 왕대비 어씨의 3년상 기간에 후궁 이씨를 정1품 빈으로 봉하는 등 당시 절차를 다 무시해서 노론 대신들도 "아 이건 좀"이라는 반응이 나올정도로 대우함

사후 왕대비 어씨의 시호는 선의왕후로 정해져 남편 경종의 옆자리에 안장되었음

의외로 선의왕후의 집안은 왕후 사후에도 좋게 대우받았는데 왕후의 부친 어유구는 사후 품계가 올라갔고 남동생들도 관직에 진출함

KWBxZ.webp.ren.jpg 조선 왕실에서 왕이랑 역대급으로 사이가 안좋았던 왕대비

선의왕후 사후 왕후를 모시던 궁인들이 사도세자의 궁인들이 되었는데 수십년 후 임오화변이 일어나고 혜경궁 홍씨가 말년에 한중록을 집필할 당시 사도세자가 미친 이유를

"어대비(선의왕후)의 거처에서 불결한 밥을 먹고 자라서 그런듯하다"라는 이론을 펼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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