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예인 '발해 노상'의 배신설에 대한 반박[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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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푸히헤헤햏ㅎ 댓글 0건 조회 92회 작성일 24-03-26 2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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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얘기할 내용은 발해 노상에 대한 얘기입니다.


이 내용은 많은 분들이 상당히 궁금해하고 있는 내용인지라, 발해멸망전 이번 편을 쓰기 전에,

한번 이야기를 하고 들어갈까 하고 생각을 계속 하고 있었습니다.



밑에 요약본이 있으니, 귀찮으신 분은 요약본을 보시면 됩니다.





이 발해 노상은, 발해멸망전 당시 926년 1월에 거란군이 부여부를 함락시킨 이후,

바로 상경성(홀한성)으로 직공할 때 병력 3만을 이끌고 거란군과 맞붙은 인물로서, 처참하게 깨지고

훗날 발해정부가 전복되고 난 다음 그 자리에 거란이 깔아둔 괴뢰국인 동단국의 우대상이 됩니다.



이것 때문에 노상이 거란과 내통하여 발해를 팔아넘겼다...라고 추측을 하는 사람이 많고,

실제로 과거 학계에서도 설이 나온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왜 지금은 진지하게 연구되고 있지 않을까요??




당연히 논파 될만큼 되었으니 그런 겁니다.






물론 발해사 관련 사료가 파편으로 주로 남아 있어서 확실하게 알 수 없는 역사도 있고,

역사에 다양성은 없으니 장담할 수는 없지 않냐? 라고 얘기를 하긴 하는데,



아쉽게도 이 노상 배신설은 너무나 쉽게 반박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더이상의 주장이 나오기가 힘든 겁니다.

가끔 이것을 진짜인 양 믿고 있거나, 진리라고 너무 쉽게 근거도 없이 받아들이는 분들도 있는데,

그런 분들을 위해 직접 1차사료 들고 설명드리겠습니다.




우선 본론을 설명하고, 그 다음에 간간이 사람들이 하는 주장, 의문을 넣고 설명해 보겠습니다.



우선 발해멸망전 당시 925년말을 보겠습니다.




야율아보기는 925년 12월에 조서를 내려, 다음과 같이 말을 하고 출정합니다.





『요사』 제 2권, 태조본기 하 中

.

-유독 발해는 대대로 원수로서 아직 설욕을 못했으니 편안히 있을 수가 있겠는가. 하고 군사를 일으켜

발해왕 대인선을 정벌하러 친히 출정했다. 황후, 황태자-대원수 야율요골이 모두 따라나섰다.

윤 12월 임진일에 목엽산에서 제사를 지냈다. 임인일에 오산에서 청우와 백마로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냈다.

기유일에 살갈산에 머물며 사귀전을 행하였다. 정사일에 상령에 머물다가 밤에 부여부를 포위하였다.




※참고로 이 '사귀전'은 거란에서 큰 일이 있거나 할때 일이 잘 되기를 기원하거나, 하늘에 비는 의미로서,

사형수를 형틀에 묶어놓고 화살을 쏘아 맞추어 죽이는 의식입니다. 이때 쏘는 화살을 '귀신의 화살'

이라고 해서 '사귀전'이 되었습니다.




위와 동일


-천현 원년(926년) 봄 정월 기미일에 흰 기운이 태양을 꿰뚫었다. 경신일에 부여성을 무너뜨리고 지키던 장수들을 죽였다.




부여부가 포위된 날이 대략 12월 31일입니다. 그리고 나서 1월 기미일은 1월 2일이며, 경신일은 기미일의 다음 일인

1월 3일입니다. 이걸 풀어보면, 12월 31일 새벽에 부여성을 기습포위하였으며, 2일에 치명타를 먹였으며, 1월 3일에

부여성을 함락시킨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대거란 방어선의 핵심이었던 부여성은 3일만에 허망하게 거란군에 함락되고 맙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지적하는 문제의 노상 배신설의 근거가 나옵니다.




위 사료와 동일


-병인일에 척은 야율안단과 전 북부재상 소아고지 등에게 1만 기병을 거느리고 선봉에 서도록 명했는데,

대인선의 노상병(老相兵)을 만나 격파시켰다.





우선 노상은, 부여부를 함락시키고 상경으로 직공하기 시작한 거란군의 선봉을 만나 3만의 병사를 이끌고 온

것으로 판단됩니다. 그리고 야율안단과 소아고지에게 패배하고 포로로 붙잡힌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리고 여기서 사람들이 노상이 배신했다고 생각을 하는데요. 2월에 발해의 수도를 함락시키고 발해를 평정하였다고

공표하고 난 다음 논공행상을 하면서 한 행적들입니다.




위와 동일 사료(요사 2권 태조본기 하권)


-(2월)병오일에 발해를 동란으로 고치고, 홀한성을 천복이라 하였다.(천복성이라고 개칭하였다.) 황태자 야율배을 인황왕으로

책봉하여 동란국을 다스리게 하였다. 황제의 아우 야율질랄을 좌대상으로, 발해 노상을 우대상으로, 발해사도 대소현을 좌차상으로, 야율우지를 우차상으로 삼았다.(후략)




노상 배신설을 말하시는 분들은, 주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노상이 저항을 했다면 어떻게 6일만에 빠르게 홀한성 직공을 하겠느냐?


-노상은 내통을 하고 있었거나 항복해서 그 대가로 거란에게 높은 관직을 받은 것이다.




대충 이렇게 나뉘어집니다. 이것들을 토대로, 노상이 배신하고 거란에게 길을 열어준 것이다.

혹은 원래부터 내통을 하고 있었다.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이 사서를 보고, 다른 1차사료를 더 가져오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집니다.



우선 저는 야율아보기의 부여부 함락 이후 상경성 직공은 예정에 없던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를 말씀드리자면, 야율아보기는 우선 부여성을 함락한 직후, 바로 상경으로 갈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발해를 멸망시킬 생각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둘째치고, 내통을 하여 발해의 내부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면 과연 부여성 함락 이후

인구조사 시도나 하면서 시간을 끌고 있었을까요? 요사 종실전의 야율돌욕(야율배) 항목에서는 부여성 함락 직후의 상황이 조금 더 나옵니다.




『요사』 종실전, 의종 야율배 항목 中


-천현 원년(926)에 발해정벌에 따랐으며 부여성을 공략했다. 주상이 호구를 단속하려 하자, 야율배가 간하기를,

"방금 땅을 차지하고서 백성을 단속하려 한다면 백성들이 불안해 할 것입니다. 만일 파죽지세로 곧 홀한성에 간다면

반드시 공략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태조가 그 말을 따랐다.




라는 이 사이의 정황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야율아보기가 진짜로 노상과 내통을 했다면 노상에게 발해의 내부정보에

대해 다 듣고 있었을테고, 발해의 부여부~용천부 사이가 비어버린 이유 역시 파악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 부여부~용천부 사이의 방비가 왜 비어버린지에 대해서는, 저는 압록부~장령부의 주력군 배치와, 925년 반란으로 인한

여파로 주력군을 압록부~장령부에 배치하느라 거란의 타깃이 아니었던 부여부 쪽은 덜 신경을 쓴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나쁘게 말하면 진짜로 방심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노상과 약속을 하고, 맞추어 왔다면 야율아보기는 부여성에서 편안히 앉아서 호구조사 따위를 할 시간은 없습니다.

노상이 언제 탄로날지도 모르고, 시간을 너무 끌면 노상이 협력을 할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게 됩니다.


호구조사란, 그 영역을 자국의 영역으로 넣기 위해 이곳에 사람이 얼마나 사는지를 조사하는 작업입니다.

이 작업을 야율아보기가 명했다는 것은, 야율아보기는 발해를 우습게 보지 않고 있으며, 부여부를 점령했으니 부여부를

차근차근 거란의 땅으로 만들면서 지켜 나가면서, 발해를 공격하는 전진기지로 삼겠다는 의도가 깔려 있습니다.

그러니까 호구조사를 한 것입니다.


하지만 야율돌욕은 현재 발해의 상황을 전해 들었는지, 혹은 포로에게 알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바로 직공을 권합니다.

여기서 야율돌욕의 간언으로 야율아보기가 마음을 바꾸어 바로 용천부로 향한다는 것은, 야율돌욕이 간언하기 전에는

용천부가 비어 있기 때문에 지금 빠르게 기습하면 이길 수 있다는 사실을 야율아보기 본인조차 그 전까지는 발해 내부 상황을

확실하게 몰랐다는 말도 됩니다.

노상과 내통을 했으면 모를 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노상이 3만명을 데리고 거란군과 맞서 싸웠는데, 이들이 너무 쉽게 하루도 안되어 깨졌다. 노상이 버텼으면

홀한성으로 가는 시일이 그리 짧을 수가 없다. 라는 의견이 있는데, 그것은 옳지 않게 느껴집니다.


저는 노상은 부여성이 포위된 직후, 부여성에서 보낸 급보를 받고 재빨리 편성하여 수도에서 현재 보낼 수 있는 병력을 모두

긁어 모은 3만을 데리고 지원하러 가던 병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전 편에 썼듯이, 발해군은 925년의 야율요골의 원정 때문에 서경 신안성이 함락되고 압록부 절반이 날아간 위급한 상황에서, 야율요골이 물러는 났지만, 아예 방어선이 없는 이곳으로 거란의 대병력이 또 쳐들어오면 상당히 위급해지기 때문에, 발해군은 압록부와 장령부에 주력군을 배치해 둔 것으로 파악이 됩니다.


이 상황에서 반란이 터져서 발해군은 추가적인 피해를 입었을 테고, 가용병력수는 더더욱

줄어들었을 것입니다. 이 상황에서 각 부의 병력을 추가적으로 모으기 전에, 거란이 부여부를 공격했다는 급보를 듣자마자

당장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의 대부분을 노상에게 맡겨서 부여부를 돕고, 각 부의 병력이나 추가증원을 요청하기 뒤한 시간을

벌 목적으로 보냈던 것 같습니다. 물론 부여성의 발해군 장수라던지, 발해 수뇌부가 쳐들어온 거란군의 수 자체를 오판했을

가능성 역시 존재합니다.



하지만, 발해군 최대의 요새라던 부여성은 고작 3일만에 함락이 되어버렸고, 대인선도 노상도 이것은 생각조차 못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노상은 부여성으로 지원을 가던 도중, 재빨리 몰려오는 야율안단과 소아고지의 선봉대에게 패해 버렸으며,

그 자신도 포로로 잡혀버린 것입니다.


생각을 해 보면, 거란군이 최하 수십만이 몰려오는데(동국대 연구에서는 이 거란군의 수를 최하 17만 이상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달랑 3만명을 주고 나가 싸우라는건 말이 안됩니다. 차라리 용천부나 홀한성을 방위하는 데 쓰는 것이 낫지요.


저는 이것을 생각하면, 부여부에서 급보를 보낼 때 병력수를 오판해서 보냈거나, 아니면 부여성은 발해 최대의 요새이니

잘 버틸 것이라고 생각해서 우선 최대한 지금 당장 쓸 수 있는 병력을 다 줘서 함께 시간을 끌고 방어하라는 것이 목적이었을

것입니다.




또 하나, 노상이 진짜로 내통을 했다면, 거란군과 조우하여 함께 손을 잡고 방향을 돌려버릴 것입니다.

뭣하러 3만이나 되는 병력을 낭비하고 다 죽여버린 다음에 함께할까요? 그리고 이 병력들은 항복했다는 언급은 일절

존재하지 않습니다. 요사 소아고지전에도, 요사 본기에도 모두 격파했다고 명확하게 나와 있습니다. 노상은 병력이 격파된 후

포로로 잡혔다고 봐야 합니다. 거란군 입장에서도 혹시나 어찌될지 모를 전쟁에서 신분 높은 자는 포로로 잡아두는 것이

향후에 유리할테니 말입니다.


더군다나, 요사 소아고지전에는 소아고지 자신이 이끄는 선봉기병대는 500명 뿐이었지만, 야율안단과 소아고지가 함께 이끈

기병 전체는 1만명이었습니다. 그리고 노상의 3만은 확실치는 않으나, 소아고지가 이 500명과 함께 노상군을 패배시켰다는

정보가 소아고지전에 있습니다. 이를 보면 노상의 병력 3만은 보병 위주였을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요사』 열전 소아고지전 中


-발해를 쳐서 부여성을 공략했는데 혼자서 기병 500을 거느리고 노상군 3만명을 패배시켰다.




그리고 소아고지의 병력이 싸우는 동안 나머지 9500명의 기병 역시 합류 했을테니, 기병 1만으로 보병위주 3만을 이기는

것은 그이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거란군 본군 역시 뒤따르고 있었으니 승패의 상황은 매우 뻔합니다.





노상이 내통을 했기 때문에 '높은'관직을 받았다는 것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저는 이 부분은 확실하게 오판이라고 봅니다.

위 사료에도 나왔듯이 노상이 받은 직책은 우대상입니다. 그런데 노상은 명확하게 사료에서도 재상이라고 쓰여 있는

인물입니다. 노상의 상자가 재상 상자니까요. 노상이 동란국에서 받은 관직은 우대상인데, 딱히 달라진 게 없습니다.

발해의 3재상도 정당성, 중대성, 선조성의 재상입니다.



그리고 나라를 멸망시킨 이후, 그 나라에서 일했던 관료들을 그대로 그 자리에 유임시켜서 계속 써먹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상당히 많이 일어났던 일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노상은 제가 보기에 당시 발해 정권의 핵심이었던 선조성의 재상인 우재상이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발해의 제도를 거의 그대로 복붙한 동란국에서도 우대상을 맡아서 연임할 수 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이 당시 유임된 사람 중에 발해의 사도 대소현도 존재하며, 이 대소현도 동란국에서 좌차상이 됩니다.


이런 식으로 항복하여 자리를 받은 사람이 죄다 배신자라고 지목하면, 우상, 좌상, 좌차상, 우차상 네명 중에 무려 두명이나,

재상 넷 중 절반이 배신을 한 셈인데, 이쯤되면 나라가 926년에야 무너진 것이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입니다.




어떤 분들은, 거란의 황숙. 즉 야율아보기의 작은아버지였던 야율할저가 발해에 잠시 내투한 적이 있었는데,

이 때부터 첩자를 보내고 내통을 하여 노리고 있었다. 그래서 무너진 것이다. 라고도 이야기하는데요,



잠깐 요사를 보고, 그리고 야율 할저라는 인물을 살펴봅시다.


우선 야율할저는 요사의 '역신전'에 나오는 인물입니다. 이 역신전이 뭐냐면, 당연히 반역을 저지른 인간들을 모아둔,

이른바 '반역 열전'입니다. 그리고 이 인간이 한 짓을 보면 매우 기가 막힙니다.


평소에도 거만하게 행동하고, 황제를 우습게 알고, 스스로 이리근이 되어 국가의 정사에 간섭하고, 심지어는 야율아보기의

동생들을 획책하고 꼬셔서 황제인 야율아보기에게 몇 번이나 반란을 일으키게 한 인물입니다.

게다가 자신의 행위가 독보적으로 거슬리는 것은 아는지, 자신이 사람들에게 해를 당할까 두려워서 아들들을 데리고 발해로

달아나 장님 코스프레를 하다가 달아났다는 이야기가 열전에 쓰여 있습니다.



『요사』 112권 열전 42권 역신 상 항목 中


-여러 사람들이 나열하여 절을 올리자 내친김에 시책례를 행하고 스스로 이리근이 되어 우월 야율석로와 함께 국정을

관장하였다.


-야율석로가 죽자 야율할저는 사람들이 자신을 해칠까봐 두려워 두 아들(야율질리특, 야율삭괄)을 데리고 발해로 달아나

소경인 양 위장하였다. 뒤에 격구와 말 타기 대회를 틈타 두 아들과 좋은 말을 탈취하여 타고 도망쳐 귀국하였다.

더욱더 간악한 짓을 저지르면서도 늘 교묘한 말로 위기를 넘겼다.



대놓고 사서에 이런 기록이 남아 있는 인물입니다. 야율아보기도 이 인물이 문제 덩어리인 것은 알았지만,

자신의 숙부라서 차마 어쩌지 못한 것입니다.


게다가 이 인간은 자신을 받아주고 은혜를 베푼 조카에게 감사는 하지 못할망정 오히려 야율아보기의 동생들을 유혹하여

난을 일으킵니다. 그러다가 야율아보기의 추격병이 따라오자 붙잡혀 가서 야율아보기와 대담을 하게 되는데, 이때

야율아보기의 말이 걸작입니다.



위 사료와 동일


-태조가 여러 아우들을 돌아보며 이르기를, "너희 무리가 이런 사람의 말을 따랐었느냐?" 하니, 야율질랄이 대답하기를,

"큰일을 도모할 때는 당연히 이런 사람을 써야 하나, 일이 이루어진 뒤이면 또한 반드시 제거해야 할 자입니다."라고 하였다.

야율할저는 대답하지 않았다. 몇 달을 구금해 두었다가 목을 매 죽였다.




황제인 야율아보기도 이 사람을 살리려고 했으나, 죄가 너무 커서 어쩔 수 없이 죽였어야 했으며, 자신도 숙부를 한심하게

바라보았으며, 심지어 난을 함께 일으킨 야율아보기의 동생들까지 이 인간은 일이 성공하면 제거해야 할 자입니다. 라고까지

할 정도면 이 인간의 평판이 어떤지는 감이 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야율아보기라면, 이런 사람을 첩자로 보낼까요?


저라면 절대 안 보냅니다. 저 사람은 첩자로 가면 오히려 거란국의 정보를 몽땅 발해에 빼 줄 인간입니다.

애시당초 능력도 없으면서 오만하고 거만하며 주제넘는짓만 하며 끝에는 반역까지 일으킨, 자신의 분수도 모르는 인간입니다.

이런 인간을 믿고 첩자로 보내느니, 그냥 야율아보기 본인이 직접 염탐하는 게 더 나을 것입니다.



따라서 야율할저 첩자설도 사실상 불가능한 의견입니다.


우선 제가 들은 노상배신설의 몇가지 요지를 제 생각에 맞추어 설명드려 보았습니다.


혹시나 다른 의견, 이견이 있는 분은 댓글로 남겨주시면 친절하게 아는대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이 글을 요약해서 이야기해 보자면



1.야율아보기는 애시당초 발해의 속사정을 몰랐기 때문에 부여 함락 이후 홀한성으로 직공할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내통설은 입증이 불가능하다.


2.내통이 되어 있으면 애꿎은 3만명의 병사는 죽일 이유가 없다.


3,.노상은 부여부를 도우러, 현재 동원할 수 있는 병력 중 대다수를 이끌고 달려가다가 재수 없이 거란 기병 선봉대에

걸려서 박살나고 포로로 잡힌 죄밖에 없다.


4.노상은 동란국 수립 이후 우대상을 받았는데, 이것은 딱히 높아진 직위로 아니고, 노상이 원래 있던 직위로

그대로 유임되었음을 의미한다.


5.역사를 통틀어서 멸망시킨, 혹은 전 조정의 신하들을 그 자리에 그대로 유임하는 경우는 매우 많다.

따라서 노상이 동란국 우대상이 되었다고 무조건 의심하는 것은 옳지 않다.


6.더군다나 노상 말고도, 대소현, 배구 등 구 발해 신하들이 거란에 많이 출사하고 동란국에서 자리를 지켰는데,

이들이 전부 내통을 했다는 것은 도무지 말이 되지 않는다.


7.내통했다는 인물로 지목되고 있는 야율할저 역시 살펴보면 도저히 첩자로 보내기도 힘든 개노답이라, 이 인간을

보내서 포섭했다는 말도 전혀 맞지 않는다.





이렇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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