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예인 발해 멸망전 고찰 (3) - 공백의 5년(913~918)[13]

페이지 정보

작성자 쿠로 댓글 0건 조회 64회 작성일 24-03-22 01:23

본문





이번 3편은 발해의 925년 반란설을 쓰기 이전에 짚고 넘어가야 하는 부분입니다.

발해의 상황이 멸망직전인 925년에는 분명 좋지 않았으며, 요동을 빼앗기기 이전에는 확실히 좋았을 것이 분명한데,

그럼 어디부터 잘못되었고, 어디부터 엇나가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는 대목입니다.


요약이 존재하기 때문에 읽기 힘든 분은 요약만 보셔도 무방합니다.



우선 거란과 발해의 대립은, 발해의 마지막 왕인 대인선의 시기 조금 이전, 혹은 대인선의 시기부터 시작된 것으로

판단됩니다. 거란과 발해의 본격적인 대립 시기에 왕이 된 대인선의 시대는, 우선 907년 5월에 후량에 왕자 대소순을 사신으로 보낸 것에서 처음 언급됩니다.



『책부원구』 972권 中


-후량 태조 개평 원년(907) 5월에 발해왕자 대소순이 해동의 물산을 공납했다.




참고로, 대인선 시기의 조공기록은 책부원구 뿐 아니라 구오대사, 송회요, 문헌통고에서도 나옵니다.

하지만 책부원구가 그 중에서도 조공기록을 잘 기록해 놓았기 문에 책부원구의 기록으로 설명합니다.


이 대소순의 이동 시간과 이동 경로를 생각하여 대인선의 재위 시작년도를 906년으로 거의 기정사실화 시키고 있긴 하지만,

완전히 그렇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907년에 후량에 도착한 대소순도 대인선의 즉위를 알리기 위해서 간 것인지, 아니면

그냥 사신으로 간 지 아직 모릅니다. 그래서 대인선의 재위를 표기할 때는 지금도 (?~926)으로 표기합니다.



우선 906~7년은 대위해 이후 거란과 발해의 대립이 슬슬 본격적으로 치닫는 상황으로 향해 가고 있던 직전으로 판단되나,

등재서열사건을 일으킬 정도로 발해가 여유가 있던 모습을 보여줌으로 판단해 보면, 아직 거란과의 전면충돌은 하지 않은 것으로 판단됩니다. 아마도 이때 대인선이 즉위한게 확실하다면,등제서열사건을 일으킨 오소도는 자국의 왕의 즉위를 알리러

당을 방문하여 그 자리에서 깽판을 치고 왔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 다음에는 바로 다음 년도인 908년에 다시 발해는 당을 무너뜨리고 세워진 후량에 전중소령 최예광을 보내 조공합니다.



『책부원구』 976권 中


-후량 태조 개평 2년(908) 정월에 발해국 조공사 전중소력 최예광 이하에 관작과 봉록을 더해 주고 아울러 차등있게 금과 폐백을 하사했다.(후략)




그리고 동시에 일본에도 배구를 사자로 보내어 외교를 계속 이어 나갔습니다. 이 구절은 일본의 여러 자료에 있지만,

여기서는 부상약기의 자료만 가져오겠습니다.



『부상약기』 23권 中


-연희 8년(908) 정월 8일에 좌대신이 아뢰기를 백기국이 발해입근대사 배구 등이 도착했다는 장해문을 올렸습니다.

(후략)



그리고 그 다음 사신은 909년에 재상으로 알려진 대성악이 갑니다.



『책부원구』 972권 中


-3년(909) 3월에 발해왕 대인선이 재상 대성악을 보내 조공하고 남녀노비 및 담비가죽, 곰가죽 등을 바쳤다.




참고로 이 대성악은 정황상 현재 발해의 정권을 주도하는 기관이 선조성이기 때문에, 선조성의 좌상이나 우상으로 판단되며,

이 대성악을 926년 당시 거란의 침입때 3만을 이끌고 나갔다가 패퇴하고 이후 동단의 우재상이 된 그 인물이라고 추측하는

의견들이 있습니다. 너무 자료가 부족해서 유추하기 힘들지만 말입니다.



그리고 이 909년에 요사에서,


『요사』 1권 태조 야율아보기 中


-3년(909) 봄 정월에 요동에 행차하였다.



라는 기사가 있는 것을 보면,최하 909년에는 확실히 요동을 둘러싸고 발해와 거란의 대립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911년, 912년에도 후량에 사신을 활발히 보낸 기록이 나옵니다.


그 이전의 대건황~대위해 까지는 발해가 조공을 보냈다던지 책봉을 받았다던지 하는 기록이 거의 없지만,

이상하게 대인선대의 기록은 많습니다. 이는 역사를 편찬할 때 책부원구, 구/신오대사, 문헌통고를 지을 발해왕 중

제일 그 시기에서 근접한 시기인 대인선의 시대 자료를 구하기 수월해서 그랬을 수도 있고, 단순이 중국이 당말의 혼란기에서

어느정도 조공을 다시 받고 정식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 라는 것도 느낄 수 있습니다.




위와 동일(책부원구 972권)


-건화 원년(911) 8월 발해국이 사신을 보내 조하하고 또 방물을 바쳤다.


-건화 2년(912) 5월에 발해왕 대인선이 왕자 대광한을 보내 경제(?)를 칭송하는 표와 방물을 진상했다.





이렇게대인선 초기에 대중국 조공이 이전의 발해사에서의 조공보다 많은 이유는, 아무래도 거란과의 대립이 슬슬

발해의 중요 국면으로 떠오른 것이 그 이유가 아닐까 합니다.



확실히 사서에 나오는 대인선의 기록 중 대다수는 대중국,대일본외교와 조공입니다. 정황을 따져보면, 907,908,909년의 조공은 의례적인 조공이라 생각하면, 아무 기록이 없는 910년을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전까지 중국에 열심히 조공을 하던 발해가 갑자기 910년에만 중국에 조공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이 때부터 거란과의 대립이 본격적으로 확전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조공을 못 할 긴박한 일이라도 있었을까요. 뒤에 나타난 사료들과 사실로 보아하면, 이 910년에 거란과 본격적으로 전쟁이 시작되거나, 대립이 시작된 것이 아닐까 의심이 됩니다.


그리고 911년과 912년에는 다시 발해의 조공기록이 보입니다. 이때 발해의 대 중국조공이 다시 이어지는 것을 보면, 910년에 확전/대립이 된 이후로 다시 발해가 숨을 돌리고 중국측에 다시 조공을 보냈다. 라고 하면 얼추 들어맞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부터입니다.



912년까지 중국에 조공을 열심히 하고 자신을 어필하던 발해는 갑자기 조공을 뚝 끊어버립니다.



이후 거의 10년이상 발해의 대중국 조공은 이 시기에 없었습니다. 그리고다시 조공이 재개되는 때는, 912년에서 무려 12년이나 지난 924년입니다. 우선 이 다음년도인 913년부터, 발해가 거란에 조공을 보낸 918년까지 발해의 기록은 어느 사서를 찾아보아도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중간인 915년에 거란의 황숙인 야율할저가 반역모의를 일으키고 발해로 달아났다가 금방 다시 거란으로 돌아온 사건 1개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럼, 그 사이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가? 하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대건황~대위해 사이에 사료가 거의 없는 발해지만, 다행스럽게도 말왕 대인선 시기는 타국들의 도움으로 인해 사료가

좀 있는 편이고 덕분에 어느정도 대인선 시기의 발해를 추측해 볼 수 있는 정황이 존재합니다.


우선 912년의 기사를 보면, 912년 5월에 발해의 사신이 도착하여 조공을 한 것으로 나옵니다. 그리고 발해 사신이 돌아간 이후부터 거란과 전쟁이 터졌거나, 거란의 군사활동이 있었을 가능성을 저는 보고 있습니다.



저는 그 퍼즐을 한 논문에 소개한금석문에서 찾아 조립해 보았습니다.


이 금석문은 거란의 금석문으로, 960년에 제작된'상국도감태부묘지명'이라고 합니다. 일본에서 아이신기오로 울히춘 교수가

이에 대해 연구했던 것으로 보이며, 국내에서도 단국대의 류병재 교수가



《상국도감태부묘지명(上國都監太傅墓志銘)》에 보이는 ‘신라(新羅)’와 거란문자 ‘sh-ul--r’ 관계 일고찰



이라는 제목으로 쓴 논문이 해당 금석문을 다루고 있습니다. 사실 이 류병재 교수의 논문은

역사학이라기보다, 언어학적 측면에서 거란어로 신라를 ~이라 불렀다. 그래서 그것에 대해 연구하고 있는 논문입니다.

하지만 저는 언어학을 모르기 때문에 당연히 이 논문을 언어 설명하려고 가져온 게 아닙니다.

그럼 뭐 하려고 이 논문을 가져 왔는가? 하면, 바로 이 논문에 나오는상국도감태부묘지명의 내용입니다.




상국도감태부 묘지명 中


-아버지[皇考]의 휘는 조보린[doborin]이다. 일찍부터 병권을 통치하였고, 일찍이 분우(分憂)하여 □하였으니 동쪽으로는 신라(新羅)의 거활(巨猾, 대단히 교활하거나 그런 사람)을 거두어들여 정리하고, 서쪽으로는 타타르[達涅, tatar, 旦)의 간교한 무리를 평정하였으며, 또 강토를 열어 훌륭하게 번영시켜 진실로 패국(國)을 도모하였다.




이 '상국도감태부' 라는 사람은 요나라 시대 야율근덕(914~959)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이 부분은 이 야율근덕의 가계를 소개할 때 그 아버지를 소개하는 란에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뜬금없이'신라'가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게 바로 키워드입니다.



그런데, 이 묘지문에서 보면, 야율근덕의 아버지가 타타르를 친 것에 대한 해석이 나옵니다.


당시의 시대 상황을 고려했을 때 한문비문에 나오는 그 국력과 영토가 경주 일대 영역으로 축소된 ‘신라’를 직접 평정하는 것은 지리적으로 가능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한문비문에 나오는 ‘신라’ 혹은 그와 대응된다고 알려진 ‘ulwur’는 과연 누구를 지칭하는 것인가? 먼저, 거란대자 비문에는 보이지 않지만 한문비문에 등장하는 ‘서로는 타타르를 평정’했다는 “西平達涅狡徒”라는 기록과 대응되는 상황은 『遼史』에 일부 나타난다. 910년을 전후한 시점에서 타타르 부를 공격했다는 기사는 “(태조 6년, 912년) 가을 7월 병오일에 몸소 출불고(朮不姑)를 정벌하여 항복을 받고 수만 명을 포로로 잡았다.”39)라는 기록이다.


-류병재,『상국도감태부묘지명(上國都監太傅墓志銘)》에 보이는 ‘신라(新羅)’와 거란문자 ‘sh-ul--r’ 관계 일고찰』,

한국몽골학회, 2020, 186p 中



당연히 이 910년 전후에 신라는 완전히 쪼그라들어 한반도 동남부에 겨우 안착해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런 신라와 거란이

국토가 붙어 있지 않는데도 교전을 벌일 수 있을 리가 없습니다. 게다가 신라는 거란에게 내내 유화적인 제스처를 취하고, 조공도 하고, 발해멸망전 당시에 지원까지 한 나라인데 거란을 대놓고 적대할 이유도 없으며 싸울 이유는 더더욱 없습니다.

그리고 해당 논문에서 류병재 교수는 아이신기오로 울히춘 교수의 주장 역시 함께 소개합니다.


그렇다면 한문비문의 “東收新羅巨猾”와 이와 대응된다고 하는 거란대자 비문의 “ulwur를 제압하다”는 것은 어느 시기를 말하는 것일까? 愛新覺羅(아이신기오로 울히춘 교수를 지칭)는 『遼史』 등의 한문 사료의 고증과 기존 학자들의 설을 재검토함으로써 한문명 출보리(朮保里)가 이 전투행위를 전개한 대략적인 시간을 고증하려 노력하였다. 이를 통해 910년대 소고구려, 허망(虛妄)설, 태봉국(泰封國)설 등등을 다시 검토하여 ‘신라’와 ‘ulwur’는 누구인지 밝히려 노력하였다.愛新覺羅(아이신기오로 울히춘 교수)에 따르면,



이 당시 거란이 요동지역에 대한 침입은 태조 2년(908년)부터 계속되었고 발해가 멸망한 926년 사이에 요동지역에서 거란과 대립을 했던 대상은 ‘발해’인들이었다는 것이다.



-위와 동일.(류병재 교수의 논문)


10세기 초에 거란인들이 신라의 구칭(舊稱)인 ‘ulwur’를 발해(渤海)에 전용(轉用)한 것은 거란인이압록강 유역을 고구려나 신라 계통 민족의 고지(故地)로 여겼기 때문이라고 결론 내리고 있다.44) 즉,민족(韓民族)이 실제로 거주한 지역이라는 뜻에서 ‘ulwur’라는 민족 통칭을 썼다는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痕得太傅墓志》에 나오는 ‘ulwur’는 '한민족 가운데' 발해인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위와 동일.(류병재 교수의 논문)



아이신기오로 울히춘 교수는 거란이 당시 908년 이후부터 발해의 요동 지역을 침입하였으며, 이후 926넌까지 요동에서 거란과 대립을 한 상대들은 발해인이었다는 주장을 합니다. 제 생각 역시 동일합니다. 또한, 이 지역은 과거부터 신라가 유명했고, 고구려와 신라 계통 민족의 고지라는 의미에서 신라라는 표기를 쓴 것이 아닌가 하고 추측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 즉 한민족이 거주하고 있던 지역이기 때문에 '신라'라는 유명한 민족 통칭을 썼다. 이 말입니다. 그리고 '한민족'을 '신라' 로 표기하고, 그것이 나타내는 바는 한민족 중에 해당 지역을 차지하고 있는 '발해인'을 지칭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울히춘 교수는 이를 바탕삼아 발해인과 거란인들이 격돌했던 시간을 913년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송인종이 만들게 한 『무경총요』에 지리정보들이 포함되어 있는데,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무경총요』 中


- 개주(開州), 발해의 옛 성이다.虜[요나라?]의 왕[虜主]이 동쪽으로 신라를 토벌하고그 요해처에다 도시를 건설하고 주를 삼았으며 다시 개원군(開遠軍)을 설치하였다. 서쪽으로 래원성(來遠城)까지 120리이다. 서남쪽으로 길주(吉州)까지 70리이다. 동남쪽으로 석성(石城)까지 60리이다.


- 내원성(來遠城),虜中이 경술년에 신라를 토벌하고성을 쌓고 지켰는데 즉 중국 대중상부(大中祥符) 3년(1010년)이다. 동쪽으로 신라 흥화진(興化) 까지 40리이고 남쪽으로 바다까지 30리이며 서쪽으로 보주까지 40리다.


- 보주(保州),발해 옛 성이다.동쪽으로압록강 신라국경을 공격하고교장(場)을 설치하고,호시(互市)에서 서로 이익을 취하였다. 동남쪽으로 선화군(宣化軍)까지 40리이고 남쪽으로 바다까지 50리이며 북쪽으로 대릉하(大陵河)까지 20리이다.



이 기록들을 보면, 이 시기에 발해와 거란의 충돌이 일어난 것으로 판단되는 이 지역들의 주와 성들을 모두 발해의 옛 성이라고 써 놓았습니다. 당연히 위의 기록대로 신라는 이 곳에 이 시간에 있을 수가 없습니다.그리고 이 기록에도 이들을 '신라'라고 표현해 놓음으로서, 이 '신라'는 발해를 나타내는 것이 확실해졌습니다.물론 여러 추측이 있지만, 거란이 왜 발해를 신라라고 불렀는지는 아직까지 알 수 없습니다.(위에 류병재 교수가 쓴 대로, 한민족 전체를 가리키기에, 이미지가 제일 크고 유명한 신라를 갖다 붙였다는 설이 제일 설득력이

높습니다.)


따라서, 이 내용을 지금까지 분석해본 내용에 덧붙여서 결론을 내 본다면, 상국도감태부묘지명에 나온 '신라'라는 명칭이

울히춘 교수의 말대로 발해를 가리키는게 확실하다면,912년 이후 발해와 거란은 본격적인 전쟁에 돌입하게 되었고,

이 본격적인 전쟁에서 발해가 밀려서 요동의 상당수를 잃거나, 요동을 통로 빼앗기게 되는 결과가 나온 것이라 보입니다.


또한,중국으로 향하는 주요 교통로인 요동 해안지역을 이 시기에 상실했으며, 그래서 대안을 찾거나, 혹은 거란에 의해 막혀 있는

상황이 계속되면서 이후로 중국에 사신을 보내지 못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발해로서도 요동을 빼앗겼다는 것이 상당히 비중있는 일이고, 그것에 신경썼기(탈환하기 위해) 때문에 기록이 이 6년동안 없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이 시기를 알 수 있는 자료로 참조할 것이 있으니, 바로 『요사』입니다.(의외로 거란국지는 태조 초반 부분이 좀 부실하게 쓰여 있습니다.) 요사 태조본기는 기록의 부실 때문인지, 혹은 고의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대부분의 구간이 철저하게 태조 야율아보기의 1인칭 주인공시점으로 쓰여 있습니다.


그래서 이 당시 태조와 함께 있지 않던, 혹은 태조가 파견한 이들에 대한 정보,진행이 나와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또 사료를 조각조각 맞추어서 살펴보아 추측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선 909년~912년에 걸쳐 거란은 야율아보기가 중국과 싸우고, 913년 초반에 황제의 아우 야율질랄가의 반란을 겪고 있었습니다.


이 중간에 일어난 타타르 원정과 야율덕광의 아버지 출보리가 출정 한 것이 같은 시기이므로, 이를 맞추어 보면, 야율아보기가 타타르 지역을 정리하고 요동을 공격하러 군을 보낸 사이, 야율질랄가가 이 기회를 노리고 반란을 일으켰을 가능성도 상당히 보이고 있습니다. 이후 야율질랄가의 반란 진압과 야율덕광의 아버지 출보리의 군사활동은 별개로 따로따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915년 겨울, 야율아보기는 압록강에서 물고기잡이를 하였다고 합니다.



『요사』 1권 태조 야율아보기 中


-겨울 10월 무신일에 압록강에서 고기잡이를 하였다. 신라에서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치고 고려에서 사신을 보내 보검을 바쳤으며...(후략)





거란인들의 전통 고기낚시 방법은 얼음 위에 구멍을 뚫고 그 위에 장막을 치고(?) 끈이 달린 구를 던져 고기를 끌어올리는 방법이라고 합니다. (마치 지금의 아저씨들의 얼음낚시 같기도 하네요.)


어쨌든 지금 아재들의 취미 중 하나인 낚시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거란 황제인 사람이 압록강에서 마음 놓고 저렇게 취미를

즐긴다는 것이 주목할 부분입니다. 만약 압록강 유역이 완전히 거란의 차지가 아니라면 지금 한 행동은 미친 짓입니다.


발해에게 언제 공격받을지, 기습받을지 모르는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야율아보기가 (전쟁과 형제놈들의 반란에 너무 지쳐서 멘탈을 잠시 놔버렸을지라도) 바보도 아니고 그런곳에서 취미활동 겸 권위 활동(이 전통낚시 방법은 의외로 역대 거란 황제들이 대대로 이어서 의식처럼 해왔다 합니다.)을 했을 리 없습니다. 따라서야율아보기가 얼음낚시를 하고 빙어튀김을 만들어 먹은 915년 10월 이전에 이미 요동이 뚫리고 압록강 하구가 거란에 넘어갔다는 추측이 가능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 기사 뒤에 신라와 고려의 조공기사가 나왔는데요, 이때 신라가 거란에게 조공을 하였다는 것이 드러나기 때문에, 912~913년 연간에 야율근덕의 아버지 출보리가 싸운 '신라'는 우리가 아는 '신라국'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915년에 나오는 고려는 왕건의 그 고려가 아니라, 궁예의 태봉입니다.


이게 태봉과(고려와) 거란의 첫 만남입니다. 당시 태봉의 국경은 평양 언저리까지 미쳐 있었는데, 912~913년의 원정으로 인해 거란이 요동을 뚫고 압록강까지 내려온 것을 보면, 국경이 좀 더 내려가 태봉과 맞닿았을 가능성이 있고, 태봉 측에서도 거란과 친선을 도모하기 위해 사신을 보냈을 수도 있습니다.




이후 916년, 917년에 야율아보기가 돌궐, 토혼, 당항, 소번, 사타 등등을 토벌하고 중국과 열심히 싸우는 동안 발해는

무엇을 하였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 공백의 6년과 똑같이 이 2년 역시 아무 자료가 없기 때문에 유추할 수 없지만, 이 어려운 시기에도 말갈의 이탈이 일어나지 않고 요동을 빼앗길 지언정 발해가 이 시기에 흔들리지 않았다는 것을 보면 발해는 이 시기에 나머지 영토들을 건사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고 나라를 안정화시키고 있던 것이 아닐까 하고 조심스레 추측합니다.



이후 918년에 발해가 거란에 사신을 보내 조공한 것을 보면, 발해가 한 나라의 안정화가 어느정도 성공하였는지, 이제 발해 역거란을 떠 보러, 혹은 파악하러 사신을 보낸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 목적은 조공이 아니라 거란이 어떠한 생각을 하고 있으며, 거란의 정세가 어떠하며, 어떻게 거란에 대비해야 할지 그것을 알아보러 보낸게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발해는 이후 거란에 다시는 사신을 보내지 않았으며, 이는 거란의 발해 침공 의지를 발해에서 읽어서 발해도 전쟁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전쟁준비를 한 것이 아닐까 추측됩니다.


그리고 이후 919년에 태조 야율아보기가 요양을 아예 경영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발해측도 동시에 집안단속을 하면서 920년~921년에 말갈을 다시 꽉 붙잡아 매는 등 전쟁준비로 유추되는 행동을 하면서 바쁘게 움직이게 되며, 이는 이후 본격적인 거란-발해의 멸망전을 야기하게 됩니다.




따라서 발해사에 기록이 없던 913~918년간의 공백의 5년을 정리,요약해 보면,




1.912~913년 사이에 야율근덕의 아버리 출보리가 참여한 거란군은 발해의 요동을 뚫고 압록강 하구 지역까지 공격하였다.

이로 인해 요동과 압록강 하구, 현재의 평안북도 지역이 거란에 넘어갔을 가능성이 상당히 크다.


2.1로 인하여 발해는 중국에 사신을 보내는 길이 완전히 막혀 버렸으며, 이는 924년까지 지속된다. 그리고 이 대중국 사신 연락이 끊어진 것은 발해와 중국의 연락, 협공을 불가능하게 만들어 이후 판을 거란에게 유리하게 하는 데 크게 작용한다.


3.하지만 924년의 발해의 거란 선제공격, 그리고 924년,25년,26년에 발해사신이 다시 중국에 조공을 하러 간 것을 보면,

발해와 거란의 전쟁은 지속되고 있었으며, 발해가 924년의 공격 당시 요동의 일부와 압록강 하구 지역은 다시 되찾은 것으로 보인다.


4.야율근덕의 묘지명을 보면, 울히춘 교수의 견해를 보았을 때, 여기서 써놓은 '신라'는 시대 정황을 보면 신라가 아니라, 같은 한민족에 속하는 발해를 얘기하는 것이다.


5.따라서, 이후 920년대에 거란이 압록강 하구를 다시 발해에게 빼앗긴 것은 사실로 보이지만, 발해가 거란에게 요동을

빼앗긴 것은 이 공백의 5년, 그 중에서도 912~913년 연간이 제일 유력하다.



입니다.




이번글은 타 학자의 연구성과와 주장, 그리고 추측이 너무 많이 들어가서 불편하게 느끼실 분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해당 견해와 연구는 제가 한 것이 아니고, 타 학자가 연구한 것을 제가 연구하고 있던 것에 접목시켜서 결론을 내놓은 것으로,

제 독자적 연구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생각지 않게 그 연구와 설명이 주가 되다 보니, 글이 예상외로 너무 짧아진 감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금석문에 나오는 신라가 발해를 뜻하는 것이 확실하다면, 이 또한 발해사의 한 키워드 해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좀 더 이 부분을 연구하고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제 실력이 부족해서 퀄리티가 이 이상은 나오기가 힘드네요.



다음 4편은 예고한대로 반란설의 본편입니다.







5경 15부 62주에 대한 오류 가능성 검토

-https://www.fmkorea.com/6797762364


발해 국호는 발해가 맞습니다

-https://www.fmkorea.com/6801049872


무왕과 대문예의 형제싸움으로 인한 나비효과

-https://www.fmkorea.com/6804185836


발해사 최대의 미스터리, 882년 정변설

-https://www.fmkorea.com/6807940225


'886년 사건'의 진실에 대하여

-https://www.fmkorea.com/6809313438


'쟁장사건'은 왜 일어났을까

-https://www.fmkorea.com/6810052709


'등재서열사건'은 왜 일어났을까

-https://www.fmkorea.com/6812375697


전설과 설화로 살펴본, 발해 문왕 시기의 어두운 면

-https://www.fmkorea.com/6814511926


발해 멸망의 시발점, 폐왕 대원의의 정변 (1)

-https://www.fmkorea.com/index.php?mid=mystery&category=15037454&document_srl=6817289827


대원의 정변 2편

-https://www.fmkorea.com/index.php?document_srl=6817562512&s_comment_srl=6817568874#comment_6817568874


문왕과 강왕의 관계에 대한 미스터리

-https://www.fmkorea.com/6817851720


폐왕이 문왕의 가족을 몰살시켰을 가능성에 대해.

-https://www.fmkorea.com/6817911871


대원의 정변 3편

-https://www.fmkorea.com/6819337509


대원의 정변 4편

-https://www.fmkorea.com/6820973328


대원의 정변 5편

-https://www.fmkorea.com/6821034193


발해의 군제

-https://www.fmkorea.com/6822795205


발해 선왕(상편)

-https://www.fmkorea.com/6824049857


발해 선왕(하편)

-https://www.fmkorea.com/6824625532


대이진의 찬탈 가능성에 대한 글

-https://www.fmkorea.com/6826837680


선왕과 대건황의 공통점

-https://www.fmkorea.com/6832473378


경박호와 모란강 전설로 본 대건황-대현석 시기의 불안

-https://www.fmkorea.com/6833752945



발해멸망전 고찰 1

-https://www.fmkorea.com/6837781243


발해멸망전 고찰 2

-https://www.fmkorea.com/6840383814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Total 672,415건 1529 페이지
커뮤니티 목록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날짜
14771 연예인
쿠로
104 13:09
49656 연예인
고기먹는스님
84 13:09
71380 연예인
고기먹는스님
83 13:07
84094 연예인
고기먹는스님
52 13:06
99590 연예인
푸히헤헤햏ㅎ
73 13:05
83223 연예인
푸히헤헤햏ㅎ
75 13:03
71007 연예인
푸히헤헤햏ㅎ
82 12:49
94743 연예인
고기먹는스님
75 12:47
17648 연예인
쿠로
119 12:46
33893 연예인
푸히헤헤햏ㅎ
94 12:45
34850 연예인
고기먹는스님
104 12:42
57242 연예인
쿠로
58 12:41
38101 연예인
푸히헤헤햏ㅎ
97 12:38
11365 연예인
고기먹는스님
53 12:22
66357 연예인
쿠로
128 12:17
게시물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