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예인 발해 멸망에 대한 의문점 고찰 (上)[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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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쿠로 댓글 0건 조회 45회 작성일 24-03-29 21:48

본문


들어 가기 전에


이 글은 제가 현재 쓰고 있는, 발해 멸망전 파트의 '최후의 순간' 부분을 보충설명하려는 목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발해 멸망에 대해서 전체적으로 알고 싶으시면 해당 글을 먼저 보시는 것을 추천하며,

이 글은 해당 글의 보충설명 내지 좀더 자세한 부연설명에 해당합니다.









https://www.fmkorea.com/6859630208



이 글에 나왔던, 발해 노상 내통설 반박을 하면서, 생각외로 발해의 멸망과정에 대해 많은 분들이 궁금해 하시고,

또한 알고 싶어 하며, 잘못 알고 있는 경우, 오해하고 있는 경우도 많다는 것을 어느 정도 깨달았습니다.


따라서 이 글은 위에 링크한 발해 노상 내통설에 대한 반박글과 함께, 발해멸망전에 대한 의문들을 제가 연구한

방식으로 풀어 나가는 글이 될 것 같습니다.



이 글의 시작시점은 926년 1월 초 시점입니다.


925년에 압록부의 절반을 함락시키고 발해에 큰 피해를 준 거란은, 발해가 압록부와 장령부를 방어하기 위해

이 두개의 부로 주력군을 보내도록 하는 데에 성공합니다. 그리고 925년 중반에 발해의 수도권에서 반란이 터졌기 때문에,

(925년 반란설)



925년 말 야율아보기가 서역 원정에서 돌아왔을 시기에 발해의 상황은 생각외로 좋지는 않았습니다.



925년 초에 야율요골(훗날의 요태종)의 원정 때문에 압록부의 절반이 함락되고, 발해 5경 중 하나인 서경 신안성이

함락된 것에 대해서는 저번 글들에서 제가 서술한 바 있습니다.



https://www.fmkorea.com/6846820595



이 글에서입니다.



거란과 전쟁을 한 이래, 아니. 발해가 건국한 이후로 발해 내륙까지 털리고 무려 5경 중 하나가 적의 손에 떨어졌다는

사실은 발해에 엄청난 동요를 불러일으킨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불행 중 다행으로, 이후 야율요골은 빠르게 거란으로

철군을 합니다. 이에 대한 원인으로는 야율요골이 더 이상 욕심부리지 않고 발해에게 상당한 타격을 준 다음에 돌아갔다.

라는 설과, 야율요골이 거기서 더 전진하다가 발해 주력군과 회전을 벌여 패배해서 빠르게 퇴각한 것이다. 라는 설들이

있지만, 확실한 것은 아직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발해 정부는 현재 방어선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 부여부 라인은 내버려 두고, 방어선 자체가 없기 때문에

거란군이 다시 몰려오면 답이 없는 압록부-장령부 라인에 주력군을 보낸 것으로 보이며, 이 병력은 926년에 거란과 맞서 싸운

병력수를 추산해 보면 적어도 15만 이상으로 보입니다. 이 병력들을 차출하기 위해 주력군의 다수를 징집했을 뿐 아니라,

당연히 인근의 부들로부터도 차출을 받아서 군대를 형성했을 것이고, 당연히 인근에 있었던 부여부 역시 그 대상이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상황에서, 나라의 불안과 동요, 현재 집권층인 선조성계 세력과 대위해계 왕조를 좋지 않게 보고 있는,

과거의 왕계인 대야발계가 이 틈을 타고 일어나 쿠데타나 반란을 시도한 정황이 보입니다. 이 쿠데타가 사실이었을 시,

야율우지가 훗날 요태종에게 말한 발해의 '이심'이 정확하게 설명됩니다.




발해지도 5.jpg 발해 멸망에 대한 의문점 고찰 (上)




925년 중순에 일어난 것으로 예측되는 반란은, 발해군의 주력군 다수가 장령부와 압록부에 배치되어 있는 틈을 타서

일어난 것으로 파악되며, 발해의 수도권인 용천부나 발해 수도인 홀한성에서 일어났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들이 정부군에게 패한 것은 확실하며, 이들은 남은 세력을 그러모아 고려로 달아난 것으로 파악됩니다.


하지만 이들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당연히 발해의 중앙군에 피해를 끼쳤을 테고, 안 그래도 주력군을 장령과 압록으로

내려보내서 가용 병력이 줄어든 발해 중앙군은 피해를 입어 당장 뚫려 있는 부여의 병력을 보충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어쩌면 부여부가 발해 건국 이후로 한번도 뚫린 적이 없는 강한 요새라는 것에서 방심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이 반란자들로 추정되는 자들이 마지막으로 고려에 오는 것은 12월 29일입니다.

그리고 야율아보기가 부여성을 친 것이 12월 31일입니다.



발해에서 빙빙 돌아갈 지라도, 고려로 내려오는 시간을 고려해 보면, 발해 중앙군은 적어도 12월 초까지는 반란자들과 줄기차게

싸웠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제일 처음 고려에 항복해 오는 신덕 등이 9월 6일에 항복해 온 것을 보면, 반란은 늦어도 925년

늦여름쯤에는 시작되었을 것입니다. 그걸 고려해보면, 발해는 925년 초에는 야율요골의 침입에 시달렸으며, 그 침입이 가시자마자

수습하기도 전에 반란이 일어나서 거의 4개월 동안 반란에 시달렸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한마디로 925년 이후 쉴 겨를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 와중에 당연히 싸우고 정리하기 바쁜지라 병력차출로 인해 평시보다 가용인원이 적어진 부여부에 원래대로

병력을 보충할 시간은 없었을 것입니다.



제가 전 편에서도, 부여부는 상당히 강력한 방어기지이며, 만약 부여부가 멀쩡한 상태였다면 야율아보기도, 야율요골도 쳐들어

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지만 925년 12월에 야율아보기가 발해공격을 천명하고 부여를 곧바로 쳤다는 것은,

야율아보기가 발해 내부 사정을 모르긴 했어도 부여부의 병력이 줄어들고 부여부의 상황이 좋지 않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제가 저번 편에 써놓은 대로, 12월 마지막 날에 부여성을 포위하고 1월 3일에 부여성을 함락시킵니다.

발해 건국 이후로 단 한번도 거란의 침입을 허용하지 않고 항상 강병을 두어서 거란을 방비한 발해 최고의 요새 부여성은

이렇게 허무하게 거란에게 함락되고 맙니다.




이제 논의해 볼 점은 여기서부터입니다.





부여성이 포위되고 함락된 이후, 수도인 홀한성에서 노상이 3만의 병력을 데리고 출전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바로, 부여성에서 연락을 보냈기 때문에, 홀한성에서 병력을 보낸 것입니다.거란의 침입 자체를 아예 모르고 있었다면 당연히 병력을 파견했을 리가 없습니다. 부여성을 지키던 장수는 완전포위되기 직전에 홀한성에 급보를 보낸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이 급보는 당연히 왕인 대인선과 발해 조정에 왔을테고, 발해 조정에서는 바로 얼마 전까지 반란의 여파에 시달렸으므로

지금 당장 가용병력이 별로 없었을 것입니다. 상술했듯이, 주력군의 다수는 압록부와 장령부에 내려가 있으며, 아직 총동원령을

내리지 않은 상태라서 각 부의 병력은 소집하지 않은 상태일 것입니다. 발해군의 병력모집 체제는, 발해군의 절도사 체제를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중앙군에 각 부의 병력들이 합쳐져서 만드는 체제였습니다.


따라서 925년 12월 당시에는 이미 모아놓은 발해군 주력군을 제외하면, 아직 지방군이 소집되지 않은 상태이므로, 당장 중앙의

정부에서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수도가 위치한 용천부의 병력과 금군을 제외하면 없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노상에게 주어서

보낸 3만 병력은, 대인선이 소집령 없이 바로 동원할 수 있는 발해 금군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발해 금군 특성상, 최선임 금군으로 여겨지는 천문군, 좌신책군, 우신책군. 이 각각의 편제 1만씩 잡은 3만명일 가능성도

보고 있습니다.



제가 글을 쓰면서, 발해군이 수십만이나 있는데, 왜 노상에게 3만만 주어 내보낸 건가요? 혹은 왜 거란군의 기습에 허무하게 당한

건가요? 라고 물은 분이 많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 발해군의 군 체제에 있는 것입니다. 발해군은 우리에게 좀 더 익숙한

비잔틴 제국의 예처럼, 각 부의 절도사,도독들이 병력을 모아서 중앙군에 합류시키는 형태로 병력을 모았기 때문에, 외적이 쳐들어올

때에 지역방어나 소규모 지역전쟁의 경우에는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었지만, 나라의 운명을 걸고 총력전을 벌일 때에는 그 제도가

오히려 방해가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반란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는 이 상태에서, 발해가 거란을 제대로 상대하려면 소집령을

다시 내리고 각 부 병력들이 중앙에 합류하기를 기다려야 하는데, 거란이 재빨리 기습을 한 상태라서 발해는 지방군들을 모으지도

못하고 당한 것입니다.



그리고 발해의 노상은 요사와 야율안단전으로 살펴보면, 노상군을 격파한 바로 그날 밤에 홀한성을 포위했다고 나와 있기에,

노상은 수도에서 멀리 가지 못한 상황에서 거란군 선봉대 기병 1만명에게,

그들이 올 것이라는 것을 예측도 하지 못한 상태에서 기습당해서 손 쓸 새도 없이 무너졌을 것입니다.



여기서 저는, 대인선이, 거란군 수십만이 몰려오는데 왜 노상에게 3만만 주어 내보낸지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생각을 해 보면, 그 3만이 아무리 정예일지라도 대략 20만 안팎이 되는 거란군을 야전에서 상대하는 것은 당연히 미친 짓입니다.

그런데 대인선은 노상을 출격시켰습니다. 그렇다면, 대인선과 노상의 생각대로 되려면, 이들이 적어도 이기지는 못해도 선전할 수 있는

싸움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야전이 아니라, 농성, 혹은 진을 치고 방어전을 펼치는 것입니다.



저는 애시당초 노상의 병력은 저란군과 야전을 하는 것이 아닌, 방어전을 상정하고, 부여부와 용천부 사이의, 홀한성으로 오는 길목을 막아 진을 쳐서 거란군을 상대하면서 시간을 벌던지, 혹은 길목에 있는 성에 들어가서 거란군을 상대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기병 비중이 그다지 크지 않았으며, 보병 위주였다고 생각하며, 보병 위주였기 때문에 소아고지의 선봉 기병대에게

기습당했을 때 맥없이 무너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대인선의 의도는, 마치 백제의 멸망시기처럼 의자왕이 계백에게 시간을 끌게 하는 사이 지방군을 부르려 했던 것처럼,

당장 가동 가능한 금군을 모두 노상에게 맡겨서 거란이 오는 길목을 진을 치고 지켜서 거란군을 상대하면서 시간을

끌려 한 것이라고 보입니다.



이것은 상당히 개연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부여성에서 거란의 침공을 알렸을 때, 대인선은 바로 각 부들에게 병력소집을

명하는 신호를 빠르게 보냈을 것입니다. 그리고 거란군의 진격까지 시간을 버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에, 노상에게 현재 용천부에서

소집가능한 금군의 대다수를 주어서 거란이 올 길목에 진을 치고 거란군을 상대로 버텨가면서, 발해 지방군이 소집에 응해서

달려오는 것까지 버티는 것이 목표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이후 홀한성이 함락되고 난 다음, 대인선이 시간을 5일이나 끌고, 항복한 다음에도 시간을 최대한 끈 다음에야

항전에 들어감으로서 최종적으로 홀한성이 1월 20일에야 함락되게 한 것, 그리고 발해의 각 부들이 홀한성 근처까지 왔다가

야율아보기를 2월 초에 알현한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나름 대인선의 의도가 보여집니다. 또한, 대인선이 항복을 한 다음에

시간을 또 끌다가 항복을 번복하고 항전을 한 것과도 연결이 가능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편에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쓴 글들



발해멸망전 고찰 1편. 멸망의 전조

-https://www.fmkorea.com/6837781243


발해멸망전 고찰 2편. 925년 이전의 발해 정치상황

-https://www.fmkorea.com/6840383814


발해멸망전 고찰 3편. 공백의 5년(913~918)

-https://www.fmkorea.com/6841829328


발해멸망전 고찰 4편. 918~924년까지 발해는 과연 무엇을 했을까?(상편)

-https://www.fmkorea.com/6844051571


발해멸망전 고찰 4편 (하편)

-https://www.fmkorea.com/6844149065


발해멸망전 고찰 5편

-https://www.fmkorea.com/6846820595


발해멸망전 고찰 6편 - 925년 반란설 상

-https://www.fmkorea.com/6849396028


발해멸망정 고찰 6편 - 925년 반란설 하

-https://www.fmkorea.com/6850618504


발해멸망전 고찰 7편 - 마지막 순간(상)

-https://www.fmkorea.com/6862001225






발해멸망전을 제외한 다른 글들



5경 15부 62주에 대한 오류 가능성 검토

-https://www.fmkorea.com/6797762364


발해 국호는 발해가 맞습니다

-https://www.fmkorea.com/6801049872


무왕과 대문예의 형제싸움으로 인한 나비효과

-https://www.fmkorea.com/6804185836


발해사 최대의 미스터리, 882년 정변설

-https://www.fmkorea.com/6807940225


'886년 사건'의 진실에 대하여

-https://www.fmkorea.com/6809313438


'쟁장사건'은 왜 일어났을까

-https://www.fmkorea.com/6810052709


'등재서열사건'은 왜 일어났을까

-https://www.fmkorea.com/6812375697


전설과 설화로 살펴본, 발해 문왕 시기의 어두운 면

-https://www.fmkorea.com/6814511926


발해 멸망의 시발점, 폐왕 대원의의 정변 (1)

-https://www.fmkorea.com/index.php?mid=mystery&category=15037454&document_srl=6817289827


대원의 정변 2편

-https://www.fmkorea.com/index.php?document_srl=6817562512&s_comment_srl=6817568874#comment_6817568874


문왕과 강왕의 관계에 대한 미스터리

-https://www.fmkorea.com/6817851720


폐왕이 문왕의 가족을 몰살시켰을 가능성에 대해.

-https://www.fmkorea.com/6817911871


대원의 정변 3편

-https://www.fmkorea.com/6819337509


대원의 정변 4편

-https://www.fmkorea.com/6820973328


대원의 정변 5편

-https://www.fmkorea.com/6821034193


발해의 군제

-https://www.fmkorea.com/6822795205


발해 선왕(상편)

-https://www.fmkorea.com/6824049857


발해 선왕(하편)

-https://www.fmkorea.com/6824625532


대이진의 찬탈 가능성에 대한 글

-https://www.fmkorea.com/6826837680


선왕과 대건황의 공통점

-https://www.fmkorea.com/6832473378


경박호와 모란강 전설로 본 대건황-대현석 시기의 불안

-https://www.fmkorea.com/6833752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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