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예인 발해 멸망전 고찰 (6) - 925년 반란설 하편[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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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쿠로 댓글 0건 조회 107회 작성일 24-03-25 0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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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편과 이어지는 글이기 때문에 반드시 전편을 보고 와야 합니다. 그리고 전편을 보면서 함께 읽어야 합니다.



발해멸망전 고찰 6편 - 925년 반란설 상

-https://www.fmkorea.com/6849396028






우선 야율요골의 공격이 있던 때인 3~4월을 체크해 놓고, 반역자로 추정되는 이들이 고려에 온 시기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대부분의 인물이 9월에 고려에 내려왔고, 일부의 인원만 12월에 내려왔습니다.


저는 야율요골의 결정타가 있는 이후, 야율우지가 이야기한 '이심'을 반란 내지 반정부 쿠데타라고 생각하고 있다고

전편에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근거는 요사의 야율우지전 외에도 다음과 같습니다.



★혹시 이 글이 보기 귀찮으시면 맨 아래로 내려서 종합요약 부분만 보시면 됩니다.





925년 중순 당시는 발해가 피해는 입었지만 아직 멀쩡하게 살아 있었다.


-분명히 야율요골이 925년 정월에서 초까지 행한 압록부 공격은 매우 성공적이었고 발해 입장에서는 치명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야율요골의 진격은 거기까지였고, 야율요골은 4월에서 11월 사이에 거란 본국으로 돌아가 있는 상태였습니다. 따라서

야율아보기가 서방 원정에서 돌아오는 925년 말까지는, 야율요골의 원정군은 더이상 발해땅으로 진격을 하지 않았으며, 야율아보기와 재상 야율우지는 서방 원정 중이었기 때문에, 딱히 거란의 공격이 있을 수가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비상시도 아닌 이 상황에 뜬금없이 수도를 벗어나서 타국으로 달아난다는 것은, 매국 행위이자 조국을 배반하는 행위입니다.


그리고 이들의 직급은 전원이 고관대작인 만큼, 자신들이 누리고 사는 것도 있을테고 자신들의 부귀영화와 나름의 기반도 있을텐데, 그렇기 때문에 이들이 거란과의 전투가 잠시 잠잠해진 이 때, 물론 압록부의 신주,환주가 함락당하고 서경 신안성이 함락되어 발해가 상당한 타격을 입었지만, 발해의 주력군이 장령부와 압록부에 신속하게 배치되었고,(이 부분에 있어서는 후술하겠습니다. 정황상 야율요골이 발해를 더이상 공격하지 못하게 된 유력한 원인입니다.)그 덕분에 발해는 한숨 돌릴 수 있었기 때문에 불안에서 비교적 안정으로 형국이 바뀐 지음, 발해의 수도에서 고관대작을 하고 있는 이 인물들이 발해를 뜬금없이 달아나서 고려로 갈 개연성이 전혀 없습니다.


따라서, 이들이 외국인 고려로 갑자기 향했다는 것은, 정상적인 상황이면 결코 일어날 수가 없는 일이며 분명히 비정상적인 일이 일어났기 때문에 이들이 기반과 명예, 재산을 모두 버리고 고려로 향한 것이라 추리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원인으로는 반란 혹은 반정부 쿠데타가 제일 유력합니다.




이들은 직급을 보면 분명히 정당성의 고관대작들이고, 당연히 수도인 홀한성, 혹은 홀한주(용천부)에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그런 고관대작들이 국경을 건너서 고려까지 멀쩡하게 달아났다.



-이들은 나라와 함께해야 하는 고관대작인만큼, 나라의 운명이 힘들어지고 있는 이 시점에, 당연히 함부로 움직일

수 없는 이들이었음이 틀림없습니다. 하다못해 무관이라면 맞서 싸우러 나가기 때문에 개연성이 있지만, 무관이라고 인증이 된 신덕과 대심리를 제외하면 전원이 문관입니다. 따라서 이들은 자리를 지키고 왕을 보좌할 의무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앞장서서 달아난 상황입니다.



여기서 잘 생각해보면, 나라가 이미 망했거나,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해서 희망이 없다고 판단하거나, 혹은 왕의 명령을 받아서 임무를 수행하는 것 외에는 정상적인 방법으로 이들이 용천부를 벗어날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고관대작 주제에 용천부를 벗어나 무려 고려까지 달아났으며, 인원을 살펴보면 신덕이 500인, 나머지 인원들이 백성 100호를 거느리고 왔습니다. 이것을 보면 뭔가 수상하다는 것을 느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중앙 정부에서 일하는 이들이, 국가 몰래 빠져나와 타국에 투항하는 것이 반역죄로 다스려질 것이 뻔한 상황에서(당연한 말이지만 이들은 그 직위가 높기 때문에 국가를 배신하고 달아나다 잡히면 극형에 처해질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하루라도 일찍, 1초라도 빠르게 움직여야 할 시간에 수백명이나 되는 인원들을 데리고 먼 남쪽에 있는 고려까지 달아났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신덕만 해도 500에 달하는 인원을 데려 왔으며, 이어서 온 무리들은 무려 인구를 100호나 데리고 왔습니다. 그 당시 인구를 생각해보면, 이 한번에 1천명가량이 되는 발해인이 발해의 수도를 빠져나와 고려로 달아난 것입니다. 아직 발해가 망하지도 않았는데 말입니다.


따라서 홀한주, 즉 용천부에 있던 이들이 대규모 인원까지 거느리고 국경을 넘어 고려로 달아났다는 것은, 절대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불가능하고, 목숨이 걸린 탈출인데 수백에 달하는 대인원을 거느리고 가는 것도 이상합니다. 그리고, 고대 국가에서 인구는 곧 국력인데, 발해 정부가 천이 넘는 인원들을 데려가는 이들을 순순히 보내 주었을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들은 고려로 총합 1천가량은 되는 것으로 추정되는 인구를 데려 왔습니다. 이는 이들이 '인구를 동원할 수 있는 무언가의 행동'을 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설마 정부의 허가를 받고 인구를 이동시킬 리는 없으니, 이것을 제외한 남은 선택지와, 요사 야율우지전의 내용을 조합하면, 남은 길은 상술한 반란 내지 반정부 쿠데타 뿐입니다. 현재 925년 중반기의 발해와, 926년 발해멸망전 때의 발해를 보고, 925년에 고려로 달아난 이들이 반란을 일으켰다고 하고 이야기를 풀어나가면 926년 당시의 발해가 왜 그리 허망하게 무너졌고, 대체 거란군을 막아서는 병력이 노상이 이끈 병력을 제외하면 왜 하나도 없는가? 하는 의문을 대답할 수 있는 여지가 나옵니다.




925년까지는 거란군을 어느정도 막아내던 발해군이 926년에는 아예 무력한 모습만 보여주었으며, 분명히 항상 강병을

주둔시켜 지킨다던 부여부가 3일만에 함락되어 버렸다.



-이 3번은 제 개인적인 추측과 연구가 많이 들어간 항목입니다. 실제로 그 전년도인 924년에 발해는 거란에게 강한 공격을 퍼부어서 요주를 함락시키고, 이어서 쳐들어온 거란의 침입을 모두 격퇴한 모습을 보입니다. 그리고 925년 연간에도 비록 야율요골의 거란군에게 압록부를 털린 상태지만,


(압록부 2개 주를 함락한 거란군이 이대로 압록부의 2개 주와 서경을 거란의 영토에 바로 넣었는지, 아니면 발해의 반격을 대비해서 그냥 털어먹고 거란의 영역으로 물러났는지는 아직 확실치 않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두개 중에 후자가 아닐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야율요골이 지금까지의 거란-발해 전쟁에서 제일 눈에 띄는 엄청난 전공을 올렸음에도 불구하고 발해를 더 공격하지 않은 것은, 압록-장령부 라인으로 발해 주력군이 증강되어 구멍을 메꾸러 온 것이기 때문이다. 라고 생각하면 야율요골이 압록부 이상으로 올라가지 않은 것이 납득이 갑니다. 이것을 보면, 925년의 야율요골의 공격이 있던 925년 정월에서 봄까지는 발해군은 정상적인 작동을 하면서, 비록 선빵을 맞고 당했지만 버티고 있었으며 규모가 꽤 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발해군 상태가 좋지 않고 허물어지기 직전이었다면 야율요골이 발해군을 공격했을 가능성이 있을테니 말입니다.


하지만 1년도 채 되지 않아서 발해군은 926년의 야율아보기의 친정 당시 전혀 막지도 못하고, 발해 역사상 한 번도 뚫린 적이 없던 부여부가 3일만에 뚫려 버리고, 부여부에서 홀한주까지 그 먼 거리를 거란군이 향하는데, 막아서는 병력이라고는 노상의 3만밖에 없다는 것도 이상하고, 현재의 고고학 발굴 성과를 보면, 부여성에서 홀한주로 오는 길목, 즉 송화강 유역에서 홀한주로 들어오는 길목에는 방어용 성도 분명히 여러개 존재합니다.(방학봉, 발해의 성[발해성곽], 정토출판, 2001)



그런데 아무리 전격전을 벌였어도 그 짧은 기간에 거기까지 아무 저항도 받지 않고 오는 것도 그렇고, 3만밖에 안되는 병력 뿐인데 최하 추산치 17만명 이상이 되는 거란군에 '꼴아 박은' 노상 휘하 3만명(이 병력은 정황상 발해의 수도방위군 내지 최정예군인 신책군이나 천문군으로 추정된다는 학자들의 의견이 있으나, 저는 그렇게 보고 있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후술하겠습니다.)


도 전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심지어 중앙정부가 그렇게 허무하게 무너진 이후에는 여기저기서 군이 일어나서 거란군과 교전을 하고, 발해의 최후의 주력군으로 생각되는 병력들이 거란군과 교전을 하여 읽는 사람들을 헷갈리게 하는 부분도 존재합니다. 이렇게 발해의 최후의 순간에는 이해가 가지 않는 여러 미스테리가 존재합니다.


우선 925년 중순까지는 이상이 없어 보이던 발해군이 왜 926년에는 그리 허망하게 당했는가? 라는 물음에, 물론 발해는

외침을 받으면 중앙군에 지방 부의 병력들이 합세하여 연계하는 형식으로 군을 편성하여 각개격파 당해서 그렇다. 라는 이야기를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전부 설명이 힘듭니다.




그래서 제가 상술해 놓은 이 물음들을 해결하기 위해 현재 연구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925년 반란설입니다.



이 반란설이 만약 거듭된 연구로 인해 사실로 판명이 나면, 925년에 발해에 생긴 난리와, 925년 연간에 고려로 달아난 이들의 행적, 그리고 이들이 어떤 자들인지, 어떤 짓을 했는지, 그리고 926년에 멸망전 당시에 발해가 왜 그리 허망하게 당했는지를 상당수 유추가 가능합니다. 그래서 제가 현재 이 925년 반란설을 지겹도록 계속 연구하고 살펴보고 갱신하면서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우선, 925년의 야율요골의 공격으로 인해 925년 중반의 발해는 개국 이래 처음으로 5경 중 한곳이 함락당하는 대참사를 겪어서, 국내 정세가 매우 불안정했으리라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서 나온, 저번 편에 언급한 그 분위기와

기사가 그 증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882년 이후로 발해를 강력하게 친위독재통치로 측근들과 통치하고 있던 대위해계의 국왕 대인선은 이로 인해 국내의

불만과 현 정권을 탓하는 성토를 들었을 것입니다. 특히 이들에게 당해서 정권을 내놓고 야인으로 살아가며 이들의 하수인 역할을 하고 살던 정당성-중대성의 관료들, 그들이 주축이 된 구왕족인 대야발계 왕족들 역시 분위기에 편승하여 백성들과 함께 현 정권을 비판하고 나섰을 가능성이 충분하며, 이들은 정부 공개 비판을 했을 가능성도 있으며, 이 시기가 대야발계가 왕위를 되찾을 절호의 찬스라고 판단하여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여력을 털어 놓아 반정부 쿠데타 혹은 대놓고 반란을 일으켰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저는 여기서 만약 이들이 정부에 대항하였다면 어떤 루트로 전개가 되었을까 하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1.대야발계(정당성,중대성 세력) 구왕족들이 정부를 비판하여 민심과 여론의 악화가 생겨나자, 대인선의 발해 정부가 이들을 숙청할 것을 결심, 대야발계 구왕족들은 이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키는 루트


2.아예 대야발계가 이때가 기회라고 생각하고 정부를 모략하고 민심을 꼬드겨서 홀한성이나 용천부에서 반정부 쿠데타를 일으켰을 가능성


3.사태를 이 지경으로 만든 정부에 대한 불신과 여론, 대야발계의 정부 비판이 이어져 이것이 충동적으로 대대적인 반란으로 이어졌을 가능성




1,2,3 어떤 루트를 타던지, 총괄적인 내용은 같아집니다. 어찌되었던 압록부의 참사로 인해 대인선의 현 발해 정부는 많은 동요와 여론 악화가 생겨났으며, 이로 인해 구왕족들이 이를 선동하거나 이 때가 정권을 되찾을 기회라고 여겨서 대인선의 현 정부를 비난하거나 이간질하거나 아예 반란을 일으켜 공격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세개 모두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고 이야기를 이어 가겠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1번과 3번이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떤 루트를 탔던 간에 우선 이 반란은 안그래도 야율요골의 원정에 치명타를 맞은 발해에게 있어서, 거의 트롤링이나 다름없는 사건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발해 멸망의 제일 큰 원흉이자 직접적인 이유로 이 925년 반란설을 드는 것입니다.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키려고 하는 것이 기정사실화 된 시점에서 힘을 합쳐서 맞서기는 커녕, 쿠데타 내지 내전으로 안그래도 힘든 상황에 힘을 완전히 빼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야율우지가 적들의 이심으로 인해 싸우지도 않고 이겼다. 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라 판단합니다.


실제로 926년의 발해멸망전때 교전은 부여부 전투와 노상군과의 전투, 홀한성 전투. 딱 세번이 전부였습니다. 3번만에 그 큰 나라가 망해버린 것입니다.


우선 저는 야율요골의 압록부 공격 이후, 발해 정부에서 급박하게 비어 있는 압록부 국경과 장령부를 방비하러 발해의 주력군을 파견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를 들어보자면, 잠시 다음년도인 926년의 상황을 살펴보겠습니다. 왜 926년을 설명하느냐 하고 궁금해하실 분이 있을줄 압니다. 하지만 926년의 상황을 설명해야 지금의 상황을 이해시키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언급을 해야 합니다.



『구오대사』 37권 中


-지금은 발해왕의 아우가 병마를 거느리고 와서 부여성 안의 거란을 포위공격하고 있다고 아뢰었다.


『문헌통고』 326권 中


-얼마 안되어 야율아보기가 죽자 그는 군사를 거느리고 그 아우에게 부여성을 치라고 명령했는데,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송사』 491권 외국전 中 (송회요 293권에도 같은 내용 존재)


-야율아보기가 죽자 발해왕이 다시 부여를 쳤지만 이기지 못하였다.


『요사』 소아고지전 中


-적들의 유기 7천명이 압록부로부터 원조하러 오는 것을 만났는데 기세가 대단했다. 아고지가 휘하의 정예를 거느리고 그 예봉을 직접 범접하여 일격에 무너뜨렸다.(후략)


『요사』 한연휘전 中


-또 강묵기와 함께 장령부를 치고 함락했다.


『요사』 태조본기 2권 中


-3월 무오일에 이리필 강묵기, 좌복야 한연휘를 보내 장령부를 치게 했다.




발해가 멸망한 다음의 기사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을 몇개 뽑아보면,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키고 2월 초(3일 정도)에 제일 먼저 안변부, 막힐부, 남해부, 정리부의 내조와 항복을 받습니다. 그리고 3월 초인 3월 무오일(3월 3일 정도.)에, 타 부들의 항복을 관대히 받고 위로하여 돌려보내던 거란은 갑자기 장령부를 공격합니다. 이리필 좌복야같은 높은 지위의 인물들이 상당한 규모의 군을 이끌고 가서 장령부를 함락시킨 것으로 추정되며, 이후 거란 본군을 향해 쳐들어오는 압록부의 대단한 군세를 소아고지가 막아내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이 내용은 요사의 소아고지전에만 나옵니다.)


발해 멸망 직후에 발해의 여러 부들은 거란과 맞서 싸우거나 항복하였는데요, 이 과정에서 자발적으로 거란에게 항복한 부들도 있으며, 항복을 했다가 나중에 반기를 드는 부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중에 거란이 먼저 선제공격을 하여 공격한 부가 두개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925년에 발해 주력군이 배치되었다고 여겨지는 장령부와 압록부입니다. 하지만 거란은 2월에 발해를 완전히 접수한 다음에도 얼마간 이들을 공격하지 않고 있다가, 3월 초가 지나서야 위의 사료처럼 장령부를 공격한 기사가 나옵니다. 하지만 장령부는 발해의 주력군이 주둔해 있어서 그런지, 장령부는 8월에야 함락되었다는 기사가 나옵니다.



『요사』 태조본기 2권 中


-8월 신묘일에 강묵기 등이 장령부를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따라서 장령부가 공격을 받기 시작한 것은 3월이고, 완전히 함락된 것은 8월이라고 보면 개연성이 들어맞습니다.

발해 중앙정부 멸망 이후 거란과 발해 세력의 전쟁을 보면, 1월에 국왕 대인선이 홀한성 함락과 함께 잡히고,

2월에 안변부,막힐부,남해부,정리부 등 여러 도의 절도사,자사들이 내조했다고 합니다.


저는 이 2월에 내조한 절도사와 자사들은 전원 진심으로 거란에 내조하고 항복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여기 지금 언급된 부들은 전부가 몇달 되지 않아 거란에게 반기를 들고 싸우기 때문입니다. 이 2월에 내조한 부들은 거란과 수도의 상황을 보아서, 맞서 싸워야 할지, 아니면 조용히 항복해야 하는지 각을 재고 있었을 것입니다. 발해가 무너지긴 하였으나 중앙정부만 무너진 것이지 각지의 부주현들은 멀쩡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아직 한판 해볼만 하다고 여기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3월이 되기까지 발해 각 부들의 내조는 싸악 사라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란과 야율아보기는 아직 멀쩡한 발해 지방세력들이 무엇을 꾸미고 있는지 확실하게 모르는 상황이 되었기에, 그래서 발해땅을 제대로 전부 손아귀에 넣기 위해서, 발해 세력들의 힘을 꺾기 위해서 발해 주력군이 주둔하고 있는 장령부를 공격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이 장령부 공격에 2명이나 되는 고관대작이 대병력을 거느리고 참여하고, 3월부터 8월까지 함락당하지 않고 금방 함락되어버린 도성보다도 더 오래 시간을 끌었다는 것은, 장령부에 있는 발해군은 발해군 최정예 혹은 최주력 병력이었을 가능성이 상당히 크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하나 더 있습니다. 위에 있는 요사의 소아고지전의 기사입니다. 위의 기사는 적들(발해군)의 기병이 포함된 병력들이 압록부로부터 '원조하러 오는 것'을 만났다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압록부에 주둔했던 발해군은, 기병만 7천명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물론 이 병력이 전원 기병일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왜냐하면 기병만 보냈다가는 전쟁이 제대로 될 수도 없고, 기병을 돕는 보병들과 보급부대가 있어야 기병을 써먹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기병 7천기는 기병만 센 것이고, 정황상 기병의 몇배정도 머릿수가 되는 보병도 함께 움직인다고 해야 맞습니다. 아무리 기병이라 해도 7천기 뿐인데, 무려 한 나라의 재상이 직접 나서서 휘하의 정예병과 대군을 거느리고 요격을 한다는 것은 맞지가 않습니다. 따라서 야율우지전에만 나오는 발해군 기병 7천명은 기병만 포함된 수이고, 보병과 보급부대까지 포함하면 적어도 5~6만, 좀 오버해서 추론하면 10만 이상 정도가 아닐까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부대가 패하고, 위에 서술한 왕의 동생이 실패하고, 장령부가 함락된 이후로는 더이상 항쟁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아마도 장령부의 함락과 함께 제압당할 곳은 모두 제압당하고 쓰러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926년의 전황과 발해 완전 멸망과정의 자세한 경과는 다른 편에서 다루도록 하고, 우선은 본래 내용으로 돌아가겠습니다.



그리고 발해 땅에서 발해군들과 맞서 싸우면서 진압하는 고관대작들과 제장들 위에는 대원수 야율요골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최초의 항쟁인 3월에서 장령부가 최종적으로 함락되는 8월 사이 거란군은 발해 지방군과, 장령부-압록부에 나와있는 발해의 주력군과 전투를 계속 치루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거란군이 5개월이나 걸렸으며 압록부에 있던 발해군의 군세를 보아, 장령부에 주둔한 발해 주력군 역시 그 규모가 상당히 큰 것으로 예상됩니다.




따라서, 지금 위에 이야기한 내용을 보면, 발해 중앙정부 붕괴 이후 수많은 발해군이 동시다발적으로 거란군과 싸우고 있기 때문에, 발해는 925년의 야율요골의 압록부 공격 이후, 움직일 수 있는 발해군의 상당수를 압록부와 장령부로 배치해 놓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주변의 여유 병력들을 차출해서 장령부/압록부로 보내었을 가능성도 상당히 크게 존재합니다. 이외의 부여부의 허망한 격파와 발해 왕제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멸망 파트에서 다루고, 여기서는 지금 하던 이야기를 계속 하겠습니다.



우선 야율요골의 압록부 공격 이후 발해 정부가 현재 동원가능한 주력군의 상당수를 압록부-장령부에 가져다 놓은 것은

사실로 보입니다. 그리고 발해 멸망전 당시에 거란과 직접 맞서 싸우고 전멸했을 부여부의 정예군을 제외하고 노상이 데리고 나간 3만의 병력만이 유일하게 움직인 병력이라는 것에 저는 주목하고 있습니다. 이 병력이 무슨 목적으로 왜 나갔는지는 우선 다음편에서 다루고, 여기서는 3만의 병력만이 움직인 것, 그리고 거란군의 앞길을 방해한 병력이 그 외에 아무것도 없이 프리패스 아우토반이 뚫렸다는 것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과연, 발해가 병력이 없어서일까요? 아니면 나라가 망해가서? 아니면 과연 무엇때문에? 라는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 원인이 반란의 여파라고 생각합니다.



야율요골의 압록부 공격 이후 발해 정부는 당장 생긴 큰 불을 끄기 위해서 뚫려버린 압록부와, 압록부 방향을 도와주면서 동시에 부여 방향으로도 지원을 나갈 수 있는 요충지인 장령부에 대병력을 이동시켰습니다. 주어진 병력 안에서, 여유를 나누고 쪼개어서 한 결정인만큼, 저는 이 결정으로 인해 타 지역의 발해군이 장령부와 압록부로 일부 차출되었을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으며, 특히 현재 발해 정부가 거란의 주 공격목표를 압록부로 잡은 것으로 파악하고 부여부에서도 장령부로 병력을 차출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926년에 거란의 맹공에 부여부가 허무하게 뚫려버리는 결과를 낳았다고 생각합니다. 한마디로, 거란의 주 공세목표가 압록부로 바뀐 것으로 판단한 발해 정부가, 전국의 주력병력을 압록부와 압록부를 도울 수 있는 장령부로 몰빵을 한 상황이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잘못된 선택을 했다고 제가 전편에 이야기 한 것입니다.



발해 내부가 바쁘게 돌아가는 만큼, 당연히 용천부와 발해 내륙의 병력들도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을 겁니다.

그리고 수도인 홀한성과 수도권인 용천부에서도 병력을 차출해 보내느라 평상시의 병력보다 병력이 적어졌을 것입니다.

마침 이 때가 현 정권에 반대하는 이들이 반란을 일으키기에 적절한 시기가 아닐까 합니다.



고려사에 의하면, 제일 먼저 항복해온 신덕이 9월 6일에 항복해 왔으며, 그다음으로 온 무리들은 9월 10일입니다.

이들이 반란을 일으킨 다음 진압당하고 고려로 재빨리 달아났을 시간을 고려해 보면 이들이 반란을 일으킨 시점은, 적어도 야율요골의 침공이 끝난 4월 이후에서 이들이 달아날 수 있는 기간을 고려한 7월말~8월 초 사이입니다. 당연히 전쟁의 결과도 보지 않고 무턱대고 반란을 일으켰을 리는 없으니, 실제로 유력한 기간은 5~7월 사이가 됩니다. 이들은 절체절명의 시기를 겪은 발해에서 군사 유출과 군사 이동이 많아지고 발해의 수도권인 용천부와 홀한성에도 병력이 많이 비게 되자, 이 때를 호기로 삼아 반란을 일으켰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신덕만이 따로 왔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어쩌면 이들은 각자 따로 반란을 일으킨 다음에, 따로따로 진압당했을 가능성도 보입니다. 이들이 용천부에서 같이 반란을 일으키고 같이 진압당했는지,혹은 신덕만이 나가있는 전장에서 반란을 즉석에서 일으켰는지, 그리고 이 반란이 어떻게 진행되었고 어떻게 종결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반란이 발해군에게 치명타를 주었다는 것만큼은 확실합니다. 안그래도 급박한 순간에 일어난 반란은 발해 내부에 많은 상처를 안기고, 발해군에게도 많은 피해를 입혔을 가능성이 크고, 결국 발해 정부는 반란을 진압했어도 상당한 피해를 보고 그것을 수습하기도 힘들었을 것입니다.


저는 12월에 항복해 온 모두간과 박어는 이들과 반란을 함께 일으켰는지, 이들 이후에 반란을 일으켰다가 또 진압되었는지는

아직 확실하게 알 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12월에 모두간과 박어가 고려로 달아났다는 것은, 이 반란행렬 자체가 925년 말이 되서야 겨우 진압되고, 그만큼 발해에 피해를 크게 주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봅니다. 그래서 발해의 힘이 한계에 달하고 국력도 손상이 가게 되어, 야율우지가 말한것 처럼 자기네들끼리 이심하여 내전을 하여 우리가 별로 힘 안들이고 발해를 무너뜨렸다. 라고 말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더 살펴보면, 9월에는 고려에 귀부한 백성이 100호에 불과하지만, 12월에는 1000호에 달한다는 것을 저는 주목하고 있습니다. 발해 정부가 앞선 반란을 진압한 다음에 반란을 방지하기 위해 정당성-중대성 세력과 협력자를 처벌하고 숙청하는 가운데 또 우발적인 반란이 다시 한 번 터졌을 가능성을 제기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9월과 달리 1000호나 되는 인구, 적어도 수천이 되는 인구가 고려까지 빠져나갔다는 것은, 발해군이 이 반란을 진압은 하되 앞선 반란으로 인해 힘이 더욱 빠져서 반란진압을 완벽하게 하지 못했던 것이다. 라고 추측을 하면 어느정도 개연성도 맞게 됩니다.



어쩌면 모두간과 박어는 일각의 주장대로 반란 진압과 그 뒷처리, 숙청 과정에서 나라에 염증을 느끼고 공모하여 달아난 이들이라 생각 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나라에 염증을 느끼고 달아나는 사람들이 1천호나 되는 인구를 데리고 안전하게 내려간다는 것 자체가 이해하기 힘든 상황이기에 저는 여전히 이들 역시 반역자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훗날 927년에 나오는 사료에,



『고려사』 1권 태조 10년 中


-3월 갑인 발해(渤海)의 공부경(工部卿) 오흥(吳興) 등 50인과 승려 재웅(載雄) 등 60인이 내투(來投)하였다.



라고 나오는 부분이 존재합니다. 공부경을 비롯한 발해의 경들은 단 한명만이 존재하므로, 이 오흥은 대씨가 아니라는 점에서 우선 대야발계 세력은 절대 아니고, 위에서 설명한 공부경 대복모가 반란을 일으키고 달아난 이후, 대인선이 직접 정한, 근왕파 인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반란을 일으키고 달아난 정당성을 더이상 믿지 않고, 자신의 사람들로 정당성을 채워버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매우 강력하게 드는 항목입니다.



반란의 내용과 전개를 알 수가 없어서 아쉽지만, 반란이 있었다는 것 자체는 신빙성이 꽤 있는 주장이기에, 저 역시

이 주장을 밀고 있으며, 연구하는 중입니다.연구의 진전은 더디지만, 현재로서는 알아낼 수 있는 부분은 여기까지인가 합니다.



따라서 이 반란설을 간단하게 종합해보면,




1.925년의 야율요골의 압록부 공격 이후 발해는 큰 위기가 닥쳐왔다.


2.발해 정부는 이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거란의 주 공격로가 된 압록부와, 압록부를 지원할 수 있는 장령부에

발해의 주력군을 다수 배치하였으며, 이를 위해 다른 지역의 병력도 차출하여 많이 모은 흔적이 보인다.


3.국내에서 현 왕조에게 짓눌리고 억눌리고 있던 대야발계는 이 이변이 매우 좋은 기회라고 판단하여

용천부와 홀한성에 병력이 줄어든 것을 기회로 반란을 일으켰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4.따라서 반란을 진압하였지만 발해 정부는 엄청난 타격을 입었고, 이 난을 진압하기 위해 약화된 중앙군이나 지방군을 동원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이 군들 역시 반란 때문에 피해를 보았을 가능성이 높다.


5.반란이 또 한번 터져서 안그래도 힘든 와중에 치명타를 한번 더 맞고, 발해 내부는 개판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는 발해의 국력을 스스로 깎아먹는 짓들이었으며, 발해의 국력과 발해군에 상당한 피해가 갔을 것이다.


6.이것이 바로 야율우지가 지적하던(야율우지전에서 보면 나오듯이, 야율우지는 요태종 앞에서 요태종에게 역사를 잊지

말고 실수하지 말라는 뉘앙스로 훈계하면서 이 이야기를 했습니다. 한마디로 발해처럼 그런 일이 있으면 안된다. 발해는

이심과 내분때문에 우리에게 매우 쉽게 무너져 버렸으니 우리는 그런 일이 없어야 한다. 이런 뉘앙스입니다.)이심이며,

발해는 이로서 거란을 상대하기가 더욱 힘들어졌다.


7.결국 야율아보기가 온 힘을 모아 발해의 멸망을 목표로 쳐들어왔으며, 주력, 정예군 대다수가 장령부,압록부에

나가 있는 발해는 힘도 못 써보고, 병력차출로 인해 약체화된 부여부의 전력은 거란을 막지 못했으며, 허망하게 수도직공을 당해 멸망했다.




7번의 보충설명이자 다음편 스포를 약간 하자면, 저는 발해멸망전 당시 노상이 이끌고 간 3만명은 처음부터 거란군을

요격하거나 맞서려는 목적으로 출격한 병력이 절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해당 견해에 대한 분석은 다음 편으로 미루겠습니다.




이번 파트는 제 개인적인 추측과 연구이기 때문에, 이 글을 쓰는 데 참조한 논문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료는 부분부분 써 놨습니다.






발해멸망전 고찰 1편. 멸망의 전조

-https://www.fmkorea.com/6837781243


발해멸망전 고찰 2편. 925년 이전의 발해 정치상황

-https://www.fmkorea.com/6840383814


발해멸망전 고찰 3편. 공백의 5년(913~918)

-https://www.fmkorea.com/6841829328


발해멸망전 고찰 4편. 918~924년까지 발해는 과연 무엇을 했을까?(상편)

-https://www.fmkorea.com/6844051571


발해멸망전 고찰 4편 (하편)

-https://www.fmkorea.com/6844149065


발해멸망전 고찰 5편

-https://www.fmkorea.com/6846820595


발해멸망전 고찰 6편 - 925년 반란설 상


-https://www.fmkorea.com/6849396028



발해멸망전을 제외한 다른 글들



5경 15부 62주에 대한 오류 가능성 검토

-https://www.fmkorea.com/6797762364


발해 국호는 발해가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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