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예인 900년에 있던 발해와 거란의 전쟁 - '자라산 전설'[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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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댓글 0건 조회 84회 작성일 24-03-26 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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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라산 전설' 은 현재 흑룡강성 일대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발해의 전설입니다.

대부분이 지배층에 대한 저항과 지배층의 억압, 착취. 그리고 대 거란항쟁이거나,

3대 국왕인 문왕의 치적, 수도인 상경과 동경의 건설배경을 중심으로 하는 전설들이 많은데,

이 자라산 전설은 조금 다른 내용의 전설이기 때문에, 이로 인해 자라산 전설의 배경이 되는

대위해 왕 시기의 발해를 제가 전에 해놓은 독자연구와 연결시켜서 대강 추정해 본 것이

오늘의 글입니다. 그럼, 이것을 위해서 우선 원문인 자라산 전설이 무엇인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참고로, 꼭 제가 맞다는 보장은 없고, 이 글은 전설과 지금까지의 연구를 가지고 섞어낸 '추측'입니다.

따라서 이 글의 신빙성은 보장할 수 없으며, 절대 사료나 논문이 아닙니다.





저는 이 전설의 주인공은 5대가 아닌 14대왕(?)인 대위해왕이라고 판단합니다.


그 이유는 전설을 소개해 본 다음 후술하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이 전설의 주인공을 대위해왕이라고 보는

증거 역시 조금씩 다릅니다.


발해국 '제 5대왕때의' 일입니다. 왕은 나라를 잘 다스리고 태평성대를 누렸다고 합니다.

백성들은 여느때 없이 호의호식하면서 왕을 칭송하였다 합니다. 해마다 꽃피는 5월이 되면 왕은 친히

어림군(친위대)을 이끌고 나가 왕궁과 백여리 떨어진 홀한주에 가서 사위와 함께 살구산 속에서 사냥을

하였다고 합니다. 어느해 이른 봄에, 대왕은 막내아들을 데리고 들놀이를 떠났습니다. 금 갑옷을 입은 대왕이

위풍당당하게 북대문을 나서자 수많은 백성들이 성 앞까지 나와 대왕 만세!!하고 소리쳤다 합니다.


그리고 이튿날 새벽, 대왕은 사위와 아들과 더불어 살구산으로 떠났습니다.

만물이 소생하는 봄, '말갈부' 동쪽에 위치한 살구산은 흰구름이 뜨고 꽃이 만발하였다 합니다.

일행이 살구꽃 냄새를 맡으며 천천히 걷고 있을, 커다란 사슴 두마리가 달려왔습니다. 대왕은 그것을 보자

명마를 타고 쏜살같이 뒤쫓아가서 활재주로 한마리를 잡았습니다. 사슴이 고꾸라지자 모든 병사들과

신하들이 대왕 만세! 하고 외쳤으며, 실로 대왕의 활재주는 귀신도 따르지 못할 정도로 훌륭했다 합니다.




대왕의 사위 또한 커다란 사향노루가 지나가자 긴 창을 들어 한번에 등허리를 찔러 노루를 잡았습니다.

하지만, 대왕의 막내아들은 자신의 친구들과 함께 오솔길을 떠나 첩첩산중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동안 귀하게

자란데다가 무예가 출중하지 못하고 몸이 그리 튼튼하지 못한 그는, 종일 산속을 헤맸으나 토끼 한마리조차

잡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대왕의 꾸지람을 들을까봐 무서웠던 겁니다.


막내아들은 아무 사냥물도 얻지 못한 채 맥없이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에휴...하고 입맛이나 다시고 있던

막내아들 앞으로 갑자기 거대한 짐승이 하나 등장했습니다. 이를 본 막내아들은 얼쑤! 하고 소리치면서

반가워하며 검을 뽑아 짐승을 힘껏 내리쳤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갑자기 챙가당!! 하는 소리가 나면서

검이 두동강 나는겁니다.


깜짝 놀란 막내아들은 친구와 졸개들을 대동하고 이게 뭔가 해서 다가가 보았는데,

수백근이 넘는, 오래 묵은 커다란 자라였습니다. 안 그래도 사냥에서 완전 허탕치게 생긴 막내아들은 매우

기뻐하면서 이놈이면 큰 상을 받을 수 있겠다! 하고 기뻐하였씁니다. 그리고 이 일을 비밀에 붙이고는 졸개들에게

자라를 데려가도록 명했습니다.


정오에 이르러 대왕과 신하들, 장수들, 병졸들은 모닥불을 피워놓고 사냥한 짐승들의 가죽을 벗기고 맛있게 구워 먹었습니다. 관습대로 사냥물을 구워먹고 그 다음날 잡은 짐승의 가죽을 가지고 등급에 따라 포상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맛있게 식사를 한 대왕은 초저녁부터 침상에 누워 피곤을 풀고 있었는데, 고요한 밤에 갑자기 우웅~하는 이상한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것이었습니다. 새벽녘에 뜬금없이 이상한 울음소리가 거대하게 들려오자, 군사들고 대왕도 신하들도 모두 이게 무슨 일이냐? 하고 놀랐습니다.


이윽고 동이 트고 짐승 소리때문에 잠을 다 설쳐버린 대왕은 짜증이 났으나 관례대로 아침조회를 했습니다. 대신들이 모두 사냥한 짐승들을 가지고 보여주고, 각각 상을 받았습니다.


제일 마지막에 막내아들이 꿇어앉고 큰 소리로 의기양양하게 외쳤습니다. 보기 드문 짐승을 잡았으니 받아달라고 말입니다. 흐뭇해진 대왕은 기쁜 마음으로 허가했고, 막내아들이 일어나 뒤로 손짓하자, 대문 밖에서부터 장정 넷이 커다란 짐승을 들고 왔습니다. 그리고 이 커다란 자라가 우우웅-하고 울부짖자 대왕과 대신들은 몽땅 대경실색 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이 자라를 본 대왕은 진노하면서 소리쳤습니다.



"이 괘씸한 놈! 자고로 자라는 땅의 신선이거든 네 신선에게 이리 무례하게 굴었느냐! 그 죄 '릉지처참'을 당해도

과분하지 않다! 여봐라! 저놈의 목을 베어 신선님께 효시하거라!!"



갑자기 천당에서 지옥으로 떨어져버린 막내아들에게 군사들이 우르르 달려가 결박하였습니다. 이걸 보자

수하의 문무 백관들도 화들짝 놀라면서 대왕에게 모두 엎드리면서 한번만 용서해 달라고 빌었습니다. 대왕은 대신들의

면목을 보아 죽을죄는 면해주겠으나 신선을 무례하게 끌고 온 죄는 크다 하여 즉시 곤장 백대를 내렸습니다.



리고 친히 '룡상'에서 내려가서 자라의 앞에 가 엎드려 말했습니다.



"신선님. 무지한 아들이 신선님을 모독하였으니 죄송하기 그지없습니다."



말을 마치고 나서 자라의 몸에 얽힌 밧줄을 풀어주니 자라는 우 웅- 하고 또 울었습니다. 그러나 이번 울음소리는

어젯밤처럼 무서운 소리가 아니라 부드럽게 들렸다 합니다. 그리고 자라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 내렸다 합니다.

대왕은 시종들에게 술(??)과 산해진미를 가져다 자라 신선님께 대접하라고 명을 내렸습니다. 그러자 자라는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산해진미를 먹고나서 궁전을 벗어나 살구산으로 떠났습니다.



세월은 흘러서 자라가 돌아간지 10년이 지났습니다.


이전부터 발해와 대립하고 싸웠던 '료나라'는 발해국에 침략의 마수를 뻗쳤습니다. 900년의 일이었습니다.


발해왕의 막내아들이 고수하던 마지막 전선은 무너지고, '료군'은 홀한말갈부(정황상 홀한성이 있는 용천부로 판단됩니다.) 를 '먹으려고' 달려들었습니다. 전선에서 퇴각한 막내아들이 아무 도리도 없이 홀한주를 빼앗기게 생겼다고

보고를 올리자, 대왕은



"네 이놈! 평소에 너를 그리 일워 주었건만, 도무지 무뢰한당의 버릇을 고치지 않더니 네가 오늘 나라를

말아먹는구나! 여봐라! 저놈을 당장 옥에 가두어라!!" 하고



진노하여 아들을 옥에 '쳐넣은 후', 바로 갑옷와 투구를 쓰고 친히 친위군을 이끌고 나가 지휘하였습니다.

60대 고령에 이른 대왕은 자신의 군사재능을 몽땅 발휘하여 눈부시게 싸웠으나,



각 주의 원군들이 미처당도하지 않아 고군분투하고 있었습니다.



어느날, 발해군은 수십배 되는 적군과 싸운 끝에 많은 사상을 내고 후퇴하였습니다. 적들이 대왕이 직접 지휘하는 발해군을 뒤쫓는 바람에 발해군은 쉬지도 못하고 식사도 하지 못하고 절벽을 넘고 산을 타고 있었습니다. 샘물조차 찾기 힘든 산중이었습니다. 마침 이 산은 살구산이었습니다. 대왕도 병사들도 장군들도 모두 지쳐서 물만 찾으면서 가쁜 숨을 몰아쉬는 이때, 갑자기 대왕이 앉아있던 바위가 움직였습니다. 갑자기 바위가 움직여서 소스라치게 놀란 대왕은,이게 뭐지 하고 쳐다보았는데, 바로 10년전에 자신이 살려준 그 거대한 자라였습니다.


"아이고 신선님!"


하면서 대왕이 고개를 조아리자, 자라는 긴 목을 들어 대왕의 발끝을 끌고 산중턱으로 기어갔습니다. 뭔가 싶어서

대왕과 군사들은 그저 조용히 따라갔는데, 자라가 멈춰 선 곳에는 샘물이 있었습니다.


대왕과 군사들은 난데없이 퐁퐁 솟는 샘물을 보자 갈증을 해소하고 기운을 회복하였습니다. 그리고 밤중이 되자

대왕은 직접 병사들을 지휘하여 적진에 뛰어들었습니다.


난데없이 기습을 당한 료군 진영은 난리가 났고, 료군의 비명소리가 하늘을 찔렀습니다. 마침 이때 여러 주의 원군들도 당도하여 발해군은 '원쑤'들을 무찌르고 료군을 무자비하게 타격하였습니다. 료군은 한놈도 도망치지 못하고 전멸하였습니다.


발해왕은 이 싸움에서 대승을 거두었으며, 전투 이후 대왕은 몸소 살구산으로 찾아가 고마운 자라를 찾아서 감사를

표하려 하였으나, 그 자라는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에 아쉬워한 대왕은 자라를 영원히 기념하기 위해

백성들과 함께 자라산을 쌓고 그 산 밑에 돌비석을 세운 후 비문을 새겼다고 합니다.


지금도 '녕안' 동쪽에는 자라와 흡사한 산이 하늘을 떠받들고 솟아 있는데, 그 산밑에 가면 맑은 샘이 솟고 있다 합니다.



-김동훈 외 2인, 『향토전설집』, 연변대 조선문학연구소, 306~311p




우선 제가 이 전설의 배경이 된 시기와 '대왕'을 대위해로 추정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1.전설 중에서 흔치않게 명확하게 연대가 나왔다.


-900년 봄이라고 명확하게 거란과의 전쟁이 벌어진 시기를 언급했습니다. 이는 여느 전설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면으로서, 이렇게 구체적으로 전해져 내려왔다는 것은, 진짜로 900년 당시 거란과의 전쟁이 있었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정황상 거란과 발해 사이의 본격적인 전쟁 역시 800년대 후반에서 900년대

초 사이에 처음 터진 것으로 추측되고 있는 현 상황과 맞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 전설이 전승될 당시,

이 900년이라는 년도가 추산을 해서 전해져 온건지, 아니면 후대에 끼워맞춘 것인지는 생각을 좀 해봐야 합니다.





2.왕이 백성을 잘 다스리고 태평성대를 열었다는 것.


-최근 연구에 의하면, 대위해-대인선기는 발해가 대건황-대현석기의 암울함을 바로잡고

다시 해동성국으로 나아가 제 2의 전성기를 맞이하던 시기입니다. 이 시기에 발해는 국력을 뽐내고 있었으며,

신라와 당을 도발하는 사건을 일으키고도 뒷감당을 생각 안 할 정도였습니다. 따라서 가능성이 있습니다.

게다가 사불허북국거상표에서 나오는 당의 칙지에, '자리의 위아래를 어찌 국력의 성쇠로서 결정한단 말인가?'

라면서 발해의 요구가 무례하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말하는 동시에 발해가 신라보다 국력이 위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3.직접 사냥과 전쟁에 나서고, 직접 백성들을 신경쓰고, 미물에게까지 마음을 베푸는 왕

(뇌피셜 주의)


-제 독자연구, 그리고 연변대의 연구 등에서 보면, 대위해는 기록은 거의 없지만, 발해를 다시 일으켜 세우고,

나라를 복구하고 전성기를 다시 불러온 왕입니다. 그리고 정황상 대야발계의 4대 통치동안 대건황-대현석 시기를

거치면서 도탄에 빠진 나라를 되살리고 왕으로 있었다는 것은, 민생과 국민들에게 신경을 썼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정도로 눈치없는 사람이면 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뒤집을 능력도 없다고 봅니다. 그리고, 직접 사냥과 전쟁에

나섰다는 것에서 꽤 강골인 왕으로 추정되며, 강골형 행동대장형 리더들이 주로 정변을 성공시켰던 선례들 처럼,

(연개소문, 당태종, 사마의, 왕건, 이성계, 등등) 이 시기의 왕으로 추정되는 대위해 역시 강골에 리더쉽과 통치력,

무력이 어느정도 있지 않았을까 하고 예상이 됩니다.



4.사위와 막내아들이 있다.

-이 사위는 제가 타자의 난이도를 위해 누락시켰지만, 무려 대장군의 직책에 올라 있습니다.(전설 원문에

대장군이라고 나옵니다.) 여기서 보시면, 제 독자연구나 방학봉 교수님 연구 일부를 보신 분은,


발해 말기 대위해~대인선 시기의 발해는 강력한 친인척 위주, 측근 위주의 비정상적의, 독재가 꽤 가미되어 있는

족벌통치, 파벌통치를 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인선은 기록에서 나오듯이,사신으로 가거나 국가직으로 일하는 왕자들도 많았지만, 그 형제들로 추정되는 자들도 꽤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전왕으로 추정되는 대위해의 아들들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그 대위해에게 알려지지 않은 딸이

있었을 수도 있고, 사위도 있었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저는 두가지에 주목했습니다.



1.사위의 직책이 대장군이다.


2.막내아들, 즉 막내왕자가 전쟁 당시 마지막 전선을 맡았다는건, 적어도 군 사령관급 이상의 인물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 대장군이라는 직책은....




발해국지 13권 제 2 직관고 中


-대장군은 각 1명인데 궁성의 수비와 숙위를 담당한다.



그리고 이 대장군이 존재하는 군은, 중앙군이자 친위대인 좌우맹분위,좌우웅위, 좌우비위, 남좌, 북좌우위,

그리고 좌우 신책군입니다.(천문군은 확인불가) 이정도의 직책이면 최측근 맞습니다. 그리고 황실의 부마는 보통,

동양의 황실에서는 거의 실권없는 명예직을 주어 놓고 권력의 자리에서는 멀어지게 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고려나 조선의 예처럼 말입니다. 그 이유는, 부마의 가문이 정치에 개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도 있고,

(물론 이 반대의 경우인 왕비, 비의 가문이 정치에 개입하는 것을 막기위해 외척을 막는 케이스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 반대입니다. 오히려 부마가 대장군직을 맡고 중용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는 발해 말기에

대위해, 대인선 시기에 요직으로 보이는 인물들이 죄다 친인척, 자기 파벌이었다는 내용과 일치될 수 있습니다.


동양의 왕가, 황가들은 태자가 아닌 다른 왕자들에게 병권을 잘 주지 않으려 하는 모습을 많이 보입니다.

왕자들이 권력과 군사를 가짐으로서 나라가 개판이 되거나 엎어진 경우도 꽤 있기 때문이죠. 당 태종이나 조선 태종

같이 말입니다. 그리고 청에서도 친왕들은 후기로 갈수록 군사 분야에서는 멀어지는 모습이 보이고,


일본의 일본제국 시기에서도 친왕들은 그냥 얼굴마담 역할로 군대에 장교로 참여하지, 본인이 병권을 휘두르는 일은

별로 없었으며(없다는건 아닙니다.) 그나마도 군부의 최고지휘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전설에서는 대놓고

부마와 막내왕자가 대장군과 사령관으로 나와 있습니다. 따라서 이 전설의 배경 시기인, 친위독재통치를 하던

대위해-대인선 시기와 묘하게 들어 맞습니다.




5.군(거란군)이 대패하였다는 내용



-생각해보면, 발해와 거란 사이에서 투닥임이 한 두번 있던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정황상 발해는 요동을 빼앗기기

전까지는 거란에게 그리 꿀리지 않는 상태에서 호각지세를 펼치고 있었습니다.(사실 요동을 뺏긴 이후에도 잘

버티긴 버텼습니다. 925년의 압록부 공격이 저는 개인적으로 거란-발해 전쟁의 결정타였다고 봅니다.) 그리고 거란과

발해의 사이에서, 거란인들이, 야율아보기가 그렇게 이를 가는 이유도 거란 역시 발해에게 최하 몇번 이상 대패와 괴롭힘을 받았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추측이 있습니다.



요 태조가 요사에서도 말하는 '지난날의 원한'에 발해에게 당한 것,

발해군에게 대패한 것 역시 끼어 있지 않을까 합니다. 상식적으로 보면, 공격을 할때 딱히 대패한 것도 없고, 패하더라도

그리 큰 패배가 아니면 원한이 사무칠 이유까지는 없습니다. 두 나라가 아예 원수라고 칭할 정도도 아니고 말입니다.



또한, 경박호 전설과 장백산 전설에서도 나오듯이 거란이 발해를 쳤다가 반격당해서 패배하는 내용의 전설은 꽤 있습니다. 따라서, 거란은 발해와의 대립 및 전쟁에서 역사에 기록되지는 않거나 누락되었지만, 만만찮은 전력을 갖추고 있던

발해에게 여러번 쓴맛을 봤을 것이고, 그 중에는 대패 역시 포함되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국왕이 직접

친정한 전투도 최하 몇 번 존재하고, 국왕이 위태로워졌을 정도의 전투 역시 존재했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이후 거란이 요양부(요동)을 빼앗은 시기는 적어도 빠르면 910년대 초반, 늦어도 910년대 중반대로 판단되기 문에 이 전투에서 대패한 거란은 900년대 말까지는 발해 방향에 대규모 침공을 할 수 없었다.라고 하면뭔가 아귀가 들어 맞습니다.





6.정황상 900년은 쟁장사건이 생겼던 897년과 등재서열사건이 생긴 906년의 사이이다.


-897년과 906년에 일어난 두 사건은, 발해가 자신들의 국력을 믿고 오만하여 신라와 당에 별 것 아닌 이유로

(심지어 그중 하나는 개인적인 이유이다.)생떼를 부리고 억지를 부려서 민폐를 끼친 사건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즈는 897년의 국가적인 컴플레인에서 906년의 무려, 개인적인 컴플레인으로 안 좋은 방향으로

발전하였습니다. 만약 이 사이에 발해가 거란에게 대패하여 국운이 기울거나 많은 타격을 입었다면, 897년에

까불던 발해도 906년에는 몸을 사리고 저러한 사건사고(?)가 일어나지 않도록 단속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히려 스케일이 더 올라가 버린 것을 보면, 발해에는 별다른 나쁜 사건이 있지 않았으며, 오히려 더 기고만장

해진 느낌이 듭니다.(신라인이 더 잘해서 위에 있는건데 그걸 말도 안되는 이유로 따진다는거부터가 상식을 이미 어마

어마하게 벗어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이 배경에는, 그동안 있던 국력 신장과, 신라, 당의 몰락도 관계되어 있지만,

거란에게 대승하여 그 자신감으로 콧대가 하늘높은줄 모르고 치솟고 있었다. 라는 오늘의 내용을 가미시키면

말이 안 되는 것도 아닙니다. 방학봉 교수님은 발해멸망원인중 하나로 지배층의 교만, 거만, 민중에 대한 착취 등등을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특히나 이 시기에 그 거란에게 대승을 거두었다면 발해가 이렇게 황당하게 전례없이 무례하게

나오는 이유 역시 그 자신감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합니다.



따라서 저는 900년, 정황상 대위해의 시기에 거란과 전쟁이 있었을 가능성도 보이며, 발해군이 처음에는 위기였지만, 어떻게든 극복하여 거란군에게 대패를 안겨주었다는 것은 꽤 가능성이 있어 보이며, 이로 인해 발해의 국력신장과 그 오만함이 더 강해졌을 것이라는 추측 역시 가능하다고 봅니다. 그리고 위에서 나열해 놓은 것들을 살펴 보았을 때,


이 전설의 배경으로 유력한 시기는 정황상 대위해 시기라고 봅니다. 그 이전인 대현석 시기는 발해가 암울에 빠져가고 있을시기라서 전설의 극초반 같은 서술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인 대인선 시기는 계속 발해가 강국으로 남고중흥을 이어 나갔으나, 요동을 빼앗긴 이후로는 거란의 공격에 주로 수세로 나서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마냥 태평성대라고만 보기는 힘들다고 봅니다.



그럼, 지금까지 해 보았던 연구와 이 전설에서 추론해 낸 점들을 조합해서 종합해보면,


자라산 전설에 나온 발해 대왕은 대위해일 가능성이 꽤 있으며,


대위해는 정변을 통해 대현석을 축출하고 왕이 된 이후, 그동안 대야발계의 텃밭이었던 정당성, 중대성을

격하시키고 자신의 친위세력인 선조성 위주로 통치를 하고, 자신의 가족, 친인척, 자신의 파벌 위주의 친위

정책을 펼쳤으며, 강력한 통제로 발해를 바로잡아 다시 발해에 태평성대(해동성국)를 가져왔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리고 거란과의 대립이 점점 전쟁으로 번지기 시작했고, 그를 무찌르고, 잃은 영토들도 회복하여 자신감에 넘치고

있던 상황인지라, 쟁장사건, 등재서열사건 같은 사건들도 야기되지 않았을까 합니다. 또한, 895년 당시 당에서 발해왕인

대위해에게 무언가의 관직을 더해 주었다는 내용도 생각해보면,뭔가 좋은 일이 있었거나, 발해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서 당에서 관작을 올려 준 것이 보입니다.


따라서 895년에 당에게서 관작을 더해 받은대위해는 발해를 잘 통치하고 있었으며, 적어도 발해의 위상이 올라갈 무언가의 행동을 하여 성과를 얻었던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혹은 그만큼 당나라를 졸랐다던지.)


따라서 이 시기를 추측한 바로는,

발해가 그동안의 부진을 떨쳐내고 다시 해동성국으로 나아 갔으며, 거란과의 전쟁에서도 대승하고 비실비실대던

신라와 당에 비교하여 강한 모습을 보여주고 제 2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던 시기일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참고로 이번 글은 사료가 아닌 전설로 따져보는 완전 추측성 전설 소개글이기 때문에, 당연히 정확도는

제가 보장 못합니다. 따라서 이 글 자체의 내용을 왜 전설 가지고 썼느냐?

이 전설이 확실하다는 증거 있으냐? 류의 질문은, 받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참고 2. 이 전설의 배경을 대위해 시기가 아닌 강왕 시기로 보고 있는 의견도 있습니다. 하지만 강왕 시기에는

거란과 발해가 이렇게까지 대대로 원수가 되기에는 시간이 모자라기 때문에 강왕 대보다 저는 대위해 시기가 더

옳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글로 인해 알 수 있는 포인트



1.발해에도 백성을 안 괴롭히고 잘 해준 왕이 존재했다.


2.홀한주(용천부)는 홀한 말갈부라고도 불리웠다.


3.발해는 불교가 융성한 국가였지만 민간신앙 및 타 신앙들도 혼재되어 있었다.


4.이 내용이 전부 사실이라면 대위해는 무왕 이후 처음으로 친정을 행한 발해왕이 된다.


5.이미 이 이전 시기부터 발해인들은 거란인들을 원수로 여기고 있으며, 매우 적대하고 있다.


6.발해군의 동원체계는 중앙군, 친위대에 각 주의 지방병력이 모여서 합류하여 적과 싸우는 구조이다.






지금까지 쓴 글들


발해멸망전 고찰 1편. 멸망의 전조

-https://www.fmkorea.com/6837781243


발해멸망전 고찰 2편. 925년 이전의 발해 정치상황

-https://www.fmkorea.com/6840383814


발해멸망전 고찰 3편. 공백의 5년(913~918)

-https://www.fmkorea.com/6841829328


발해멸망전 고찰 4편. 918~924년까지 발해는 과연 무엇을 했을까?(상편)

-https://www.fmkorea.com/6844051571


발해멸망전 고찰 4편 (하편)

-https://www.fmkorea.com/6844149065


발해멸망전 고찰 5편

-https://www.fmkorea.com/6846820595


발해멸망전 고찰 6편 - 925년 반란설 상

-https://www.fmkorea.com/6849396028


발해멸망전 고찰 6편 - 925년 반란설 하편

-https://www.fmkorea.com/6850618504



발해멸망전을 제외한 다른 글들



5경 15부 62주에 대한 오류 가능성 검토

-https://www.fmkorea.com/6797762364


발해 국호는 발해가 맞습니다

-https://www.fmkorea.com/6801049872


무왕과 대문예의 형제싸움으로 인한 나비효과

-https://www.fmkorea.com/6804185836


발해사 최대의 미스터리, 882년 정변설

-https://www.fmkorea.com/6807940225


'886년 사건'의 진실에 대하여

-https://www.fmkorea.com/6809313438


'쟁장사건'은 왜 일어났을까

-https://www.fmkorea.com/6810052709


'등재서열사건'은 왜 일어났을까

-https://www.fmkorea.com/6812375697


전설과 설화로 살펴본, 발해 문왕 시기의 어두운 면

-https://www.fmkorea.com/6814511926


발해 멸망의 시발점, 폐왕 대원의의 정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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