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예인 발해 멸망의 시발점, 폐왕 대원의의 정변 (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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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푸히헤헤햏ㅎ 댓글 0건 조회 40회 작성일 24-03-15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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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글의 마지막 챕터입니다. 오늘 글은 사료가 정말 없는 곳에서 제가 최대한 추측을 한 글인지라,

대충 거르고 넘기셔도 문제없는 부분이 많습니다. 항상 말하지만, 이 부분은 아직 정설이 없습니다.

따라서 제가 한 말이 절대적인 진리가 아님을, 생각하셨으면 합니다.




이번 글은 폐왕 대원의의 정변 그 자체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이 정변이 가져온 영향과 그 결과를 이야기하고,

이후 발해가 어떻게 되었는지와, 이후 발해에 끼친 영향을 고찰해 보는 것이 그 목표입니다.



폐왕 대원의의 정변과, 2번항목의 발해 내의 고구려계와, 말갈 외의 여러 이종족이 합쳐져 형성된 '발해계'

(이하 발해계로 명명합니다.) 의 대립 가능성, 그리고 처음에 고구려인들이 중심으로 다른 일부의 이종족들이 합쳐져

만들어낸 발해국이, 이제 시간이 지나고 여러 이종족이 합쳐져 고구려인 말고도 다양한 종족들의 비중이 커져서,

고구려인들이 절대다수인 고구려보다, 고구려적인 요소에 타종족의 요소도 합쳐져서 발해계가 자연스레 만들어지고

있는 과정,



'발해인이 만들어지고 형성된 과정'과 고구려의 색에 여러 색이 합쳐져, '고구려의 후계국인 발해'가 아니라 '발해국으로서의, 발해만의 새로운 색'이 생겨난 과정을 문왕의 왕권 강화 시도와 함께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따라서 오늘의 설명은, 2번 항목의 마지막을 설명드림과 동시에 이후에 발해에 미친 영향을 설명하겠습니다.

들어가기에 앞서, 제가 이 시기를 바라보는 관점을 잠시 설명드리자면,


698년에 고구려의 구장인 대조영이 세운 발해는, 초창기에는 고구려의 후계국이라는 그 타이틀만큼 고구려의 색채를

강하게 띠고 있었습니다. 전신인 고구려가 망한지 반백년도 되지 않은 시점이었고, 당연히 고구려인이 주축이 되어

고구려의 고토에 만들어진 나라인만큼, 2대 왕인 무왕 시기와 3대 왕인 문왕의 초중반까지는 고구려의 색채를 매우 강하게 띄고 있었습니다.



저는 우선 고구려인들이 주축이 되어 발해를 세운 이후, 발해는 고구려 그 자체, 고구려의 정통후계국을 표방하고 있었으며, 실제로 그러하게 행동하였지만, 56년에 다다르는 기나긴 문왕 시기를 거치면서 고구려의 영토 이상으로 발해의 영토가 확장된 것에 따라 여러 이종족들이 발해로 유입되어 고구려 때와는 다르게 상당한 다민족국가가 되어 있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마치 나라를 이루는 민족 중에 독일계가 제일 많기는 하지만, 그 수가 반 정도밖에 되지 않아 다른 민족들과의 타협과 공존을 항상 고려하고 신경쓸 수밖에 없었던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처럼 말입니다.


저는 초반에는 고구려가 멸망한지 30년만에 나라를 복구하였고, 고구려의 터에 나라를 세운만큼 고구려의 색채가 매우 짙었던 발해가 문왕 중기 시기를 기점으로 영토가 상당히 넓어짐에 따라 초반부터 있었던 속말말갈 말고도 그 외의 월희, 우루, 철리, 솔빈, 흑수, 불열 등의 말갈들, 해족, 일부 실위나 거란족, 거기에 안사의 난으로 발해로 유입된 중국인까지 포함되어 여러 이종족들이 유입이 되어 이들의 비율이 점점 높아지자, 지금까지 고수했던 고구려만로서의 정체성을, 즉 고구려 우선주의, 고구려 계승주의를 포기하고 여러 종족들이 살아가는 다민족국가임을 인정하고 살아가게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은 고구려 계승주의, 고구려계들의 시도가 바로 대원의의 반란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미약하게나마 뒷받침할 수 있는 문왕 시기~문왕 이후시기의 검토할 점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수도의 계속된 이동, 그 이후.



사실상 이 내용이 이 글의 핵심부분입니다. 그리고 이 파트는 제가 추론해낸, 제 예측에 가까운 설입니다.

이 부분은 무조건 맞는 것이 아니고, 훗날 근거가 나오면 틀릴 수도 있는 설입니다. 따라서 주의하고 보시기 바랍니다.

혹은 안 보셔도 무방합니다.




맨 처음 발해의 수도는 구국(舊國) 지역, 즉 구 고구려 고토 지역의 동모산 일대입니다. 그리고 무왕 시기에서 문왕 시기

(자세한 것은 나와 있지 않지만 당현종의 시대인 천보 연간 742~755년 사이로 추정됩니다.)에는 중경 서고성에 수도를 잡았으며, 이후 756년에 상경의 홀한성으로 수도를 옮기고, 그리고 785년으로 추정되는 시기에 다시 동경 팔련성으로 수도를 옮긴 후, 그곳에서 대원의의 반란이 터집니다. 반란이 끝난 이후 성왕은 수도를 도로 상경 홀한성으로 옮기고, 발해의 수도는 멸망기까지 홀한성이었습니다.



『신당서』 발해전 中


-천보 말년(756년)에 대흠무가 상경으로 도읍을 옮겼으니, 바로 엣 도읍지에서 3백리 떨어진 홀한하의 동쪽이다.


-정원(785~804) 때에 동남쪽의 동경으로 도읍을 옮겼다.


-이어서 대굉림의 아들 대화여를 왕으로 삼고 다시 상경으로 돌아가 연호를 중흥으로 고쳤다.





여기서 생각해보면, 맨 처음에 수도를 한 구국 지역(중경의 조금 왼쪽입니다.), 그리고 중경 지역을 보면 고구려 고토의

지방임을 알 수 있습니다.



고구려가 초기에서 그리 먼 시기가 되지 않아 두만강 유역을 차지했기 때문에(여기서 나오는 동경용원부 지역),

이곳은 아무래도 고구려계의 입김과 고구려계의 세력이 매우 컸을 것으로 생각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문왕이 갑자기 수도를 상경으로 옮긴 시기를 살펴보면,


756년. 즉 당에서 안사의 난이 터져서 발해에 많은 중국인과 이민족이 유입된 직후입니다.

그 이전부터 영토확장으로 인해 고구려 시절보다 더 많은 말갈들이 유입된 이후 이 시기부터 발해가 급속히 다민족국가화 된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래서 마침 당에서 난 안사의 난과 그 위협을 핑계로, 갑자기 몰려든 이종족들을 우선은 받아들이되 조심은 하고, 안사로 대표되는 당의 반란세력이 발해로 갑자기 칼을 돌릴 것을 대비하여 혹시나. 하는 마음이 합쳐져 천도했을 가능성도 보입니다. 그리고 후술할 왕권강화의 역할도 여기에 플러스 됩니다.



그럼, 그 이유가 무얼까 하고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훗날 발해가 급격히 고구려의 색채를 벗어 던지고,

말갈과 고구려가 섞여 발해족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면, 기존의 세력이었던 고구려계와, 그 외의 말갈을 비롯한 이종족들 간에

분명히 모종의 사건이 있었으며, 그것은 문왕때 간간히 보이던 종족간의 대립이 아닐까 하는 추측이 존재합니다.


발해는 앞서 말했듯이 고구려계가 주축이 되어 이룬 나라로서,

당연히 대조영과 대씨만이 아닌 다른 고구려계 인물들도 합쳐서 함께 와서 나라를 만들었을테고, 고토에 남아있던

고구려계 인물들 역시 합류하였을 것입니다.


아무래도 고구려에서 별거 아니었던 대씨 왕족들에 비해, 함께 나라를건국했던 대씨 직계 왕족 이외의 고구려의 계승을 원하는 세력, 그리고 고토에 계속 남아 있었던 고구려계 세력은 대씨 직계 왕족들에게 있어서 나라를 다스리고 왕권을 강화하는 데에 있어 방해가 되고 걸림돌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리고 고구려에서 계속 내려오던 천손사상을 생각해보면, 이들은 발해에 많은 종족들이 정착하여 발해가 이종족화되는 것을 경계하고 싫어했으며, 고구려 계승주의를 고집했을 가능성이 보입니다. 이종족들의 유입에 위기감을 느낀 고구려 세력들이 자신들의 세력을 결집하여 고구려 계승주의를 부르짖으며 강경하게 나섰으며,


(마치 2010년대 후반부터 갑자기 아랍에서 난민들이 엄청나게 몰려들자 국수주의, 보수주의적으로 변해버려 자국우선주의가 팽배하게 된 유럽의 상황과 같이 말입니다.)


문왕 역시 이들을 완전히 때려잡을 수는 없었으며, 이들을 이용해야 국정을 편안히 다스릴 수 있다 여겼는지는 모르겠지만, 거기 화답한 듯이 이들을 이용하여 왕권강화를 할 겸 문왕 중반기에 그들을 따라 국수적인 고구려 계승주의를 받아들였을 가능성도 있으며, 비슷한 시기인 759년부터 대일본 외교 서신에 고려라는 국호가 서서히 나오기 때문에 그 영향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물론 756년 이후에 갑자기 몰려온 많은 이종족들에 대한 경계, 그리고 난리가 터져 뭔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은 중국 상황을 보아 발해 정부가 756년에 1차로 상경으로 수도를 옮긴 일은 굳이 고구려계와의 파워게임이나 왕권강화의 일환이라 말 할 수도 있지만, 중국의 난리(안사의 난)와 중국에서 온 이종족들이 이유일 가능성 역시 배제할 수 없습니다. 발해 정부가 이들을 경계하고, 중국을 경계한 것은, 앞에 쓴 축성전설에서도 나오듯이, 생존을 위해 성을 지나치게 쌓은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고 봅니다.


하지만, 그것은 700년대 중반 일이고, 그 이후부터는 무언가 달라져도 계속 달라지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앞에 말한 대로 문왕 시기, 즉 당의 안사의 난 이후 5경이 완비되고 난 후, 문왕은 수도를 중경에서 상경으로 옮깁니다. 수도를 상경으로 옮겼다는 것은, 위에 말한 중국의 난리에 대한 대비 말고도, 영토가 확정되어 이제 영토의 통치체제를 확고하게 자리잡는다는 의미도 있을 테고, 그동안 구국-중경-동경 지방에 자리잡고 있는 구 고구려 세력을 견제하는 의도 역시 있었을 것이라고 보입니다. 과거에 고구려 시절 장수왕이 국내성에서 평양성으로 수도를 옮겼듯이, 문왕 역시 이전부터 상경과 동경을 건설하면서 수도를 옮길 타이밍을 재고 있었을 겁니다.



그리고 마침 756년에 터진 안사의 난은 적절한 명분이 되기 충분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살기도 좋으며 말갈을 경영하기도 가깝고, 구 고구려 세력과 멀어서 고구려 세력들의 눈치를 볼 일 없는 상경, 홀한주 지역은 점점 다종족화 되어 가는 발해의 주도로서 좋은 지역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축성전설에 나오는 수많은 축성들이 홀한주 지역에도 어느정도 해당이 된다는 것을 생각하면, 문왕은 처음부터 수도를 옮길 생각을 하고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 상경은 756년부터 785년까지 약 30년간 수도로서 기능합니다.




그리고 당의 제도를 한참 받아들이던 774년, 갑자기 문왕의 연호가 대흥(大興)에서 보력(寶曆)으로 바뀝니다. 이 보력이 무슨 뜻이냐면, 왕이 새해에 신하에게 나눠주는 달력을 뜻하며, 달력을 나누는 것은 황제(제왕)의 고유권한입니다. 즉, 이 보력 연호에는 달력으로 상징하는 천하의 질서를 주재하는 군주의 위상과 그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이것은 뭐냐면,


한마디로 왕권강화를 본격적으로 하겠다. 이 말이 됩니다. 그리고 이 때를 시작으로 중앙통치기구들이 설치되고 전국을 슬슬 정비하는 움직임이 보이면서 통치력 강화를 시도합니다. 여기까지 보면, 수도를 옮기는 것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서의 목적이 꽤 크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785년, 어느 새 야심차게 바꾸었던 연호는 다시 도로 대흥으로 돌아가 있고, 문왕은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수도를 또 한번 옮깁니다. 이번에는 과거 고구려의 책성이 있던 인근부분인 동경 팔련성으로 수도를 정합니다.

분명히 저 위에 774년에 왕권강화의 의지를 보이고 연호까지 바꾸었는데, 11년 뒤인 785년에 연호를 원래대로 되돌리고 동경으로 또 수도를 옮긴다는 것은, 774년의 왕권강화 시도가 제대로 통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매우 크게 보입니다.




이 시기에는 발해 민중들도 계속된 축성과 궁궐 건설(수도를 여러번 바꿨는데 당연 그 때마다 거기서 살아야 할 테니 궁궐을 당연히 지었을 겁니다.)에 지쳐 있을 상태이며, 발해에는 이민족들이 많이 흘러들어와 다민족국가화가 진행된 상태이며, 동시에 구 고구려계 귀족들은 이러한 국정의 운영에 상당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만약 대원의가 충동적으로 난을 일으킨 것이 아니고, 과거부터 역심을 품고 잠룡해 있었다는 것이 확실해진다면 대원의가 역심을 품고 준비한 무렵이 이 기간부터일 것으로 생각됩니다.



11년에 걸친 시도 끝에 연호는 롤백되고 수도를 다시 옮겼다는 것은, 이 시기에 문왕이 하였던 왕권강화 정책과 국론통합이 모조리 실패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가지 더, 굳이 고구려계의 세력권인 동경 팔련성으로 이사를 왔다는 것은, 문왕이 고구려계 뿐만 아니라 고구려계 세력들의 눈치까지 볼 수밖에 없는 무언가의 일이 일어났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백성들 입장에서는 축성질에 궁궐 건축에, 세금에, 아주 살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아쉽게도 현재로서는 그게 무슨 일인지 정확하게 갈피를 잡을 수 있는 것이 없지만, 축성과 건설에 지친 백성들의 원망표출이나 반발이 추측되고 있습니다. 참고로 이 시기는 공교롭게도 발해사에서, 발해가 일본에 보내는 사신에게 자국을 고려라고 칭하는 것이 최종적으로 사라지는 시기입니다.


이 모든것을 보았을 때, 774년에서 785년 사이의 발해 정세는 상당히 복잡했을 것으로 보이며, 새롭게 나라를 바꾸고 여러 종족들을 인정하고 당의 문물을 본격적으로 받아들이는 문왕의 정책에 반발이 나왔을 것이고, 나라가 혼란했을 가능성도 유추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가능성이 있다면, 축성과 건축, 징세에 지친 발해 백성들을, 마찬가지로 왕에 반대하고 왕을 아니꼽게 보는 고구려계들이 점점 늘어났을 가능성도 있으며, 그 일파의 리더가 바로 폐왕 대원의였을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리고 결국 문왕이 노쇠하고, 정효공주가 죽자 나라 전체가 큰 슬픔에 빠진 때를 노려 동궁이었던 대굉림, 문왕이 전부

살해당하고 대원의가 왕위를 찬탈했다고 하면 개연성이 없지는 않게 됩니다. 교과서에는 지방통치와 일본과의 연결을

고려하여 수도를 옮겼다고 하는데, 그것만 생각해보면, 문왕시기 내내 계속된 정신나간 축성과 건축, 그리고 문왕 시기 중반 이후로 계속 불안했던 왕권을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종합해보면, 문왕은 처음에는 고구려계를 중시하여 고구려의 구제도와 당의 제도를 혼용해서 쓰고, 자주적으로 고려 국호도 사용하였지만, 점점 이종족이 많아지는 발해의 현실을 고려하여 왕권 강화도 겸사겸사 할 겸 수도도 옮기고, 고구려계만의 독식, 선민의식화를 해결하고 다 같이 충돌없이 살기 위해서 여러 조치를 취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한마디로 상황따라서 판단은 다시 한 것이죠.


하지만 이같은 조치는 당연히 고구려계 신하, 백성들에게 반발과 미움을 받았을 테고, 당연히 나쁘게 비춰 말하면 태세전환입니다. 특히나 문왕과 대원의가 같은 항렬인 만큼 통치기간동안 꽤 오래 함께했을 것으로 여겨지는 이 둘의 사이는 여기서 갈라지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발해 지배층은 고구려의 후손을 표방하면서 고구려계 위주의 나라를 유지하려 하는 구세력과, 이종족들+말갈을 인정하고 다민족국가화 되어 가는 것을 인정하고 그를 위해 고구려의 색을 벗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는 신세력으로 나뉘어지게 되고, 정황상 전자의 우두머리인 그는 상황에 따라 태도를 바꾸고 고구려 순혈주의를 버리고 이종족들을 인정한 문왕에 불만을 품고 뒤엎을 준비를 하다가 793년에 일을 낸 것이 아닐까 합니다.




처음에는 고구려주의를 표방한 문왕이었으며, 대원의는 그 옆에서 함께 문왕을 지지하면서 고구려주의를 펼치고 국력강화, 왕권강화를 돕는 우군이었으나, 문왕이 보력 연호 사용을 취소함과 함께 고구려주의를 버리고 점점 커져가는 다종족주의를 인정하자 이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켰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어느 하나 확실한 게 없기 문에 현재는 사료나 정황으로 추측을 하여 합리적인 답을 찾는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현재로서 확실한 사료가 나오지 않은 이상 모두 추측에 불과하겠지만, 문왕 시기에 왕권이 계속 롤러코스터를 탔으며, 수도를 계속 옮긴만큼 국내정세가 문왕 중반 이후 상당히 어지러웠던 것은 사실로 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계속 연구를 하고 무언가를 더 발견하면 확실하게 이야기를 할 수 있을 날도 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번 글의 이 항목은 제가 그냥 개인적으로 이렇겠다...추측하는 것이지,

이게 진리가 아닙니다. 맹신하지 마세요.



문왕의 정책들은 행정정책과 지방정책, 5경제도과 같이 분명히 성공한 것들도 있지만, 안사의 난 이후 생긴 나라 내의 갈등과 국민들의 원망을 완전히 봉합하는 것까지는 실패하였으며, 반대파를 확실하게 정리하지 않음으로 인해 왕권강화와 국론통합은 실패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하지만 문왕의 다다음 왕인 강왕이 이 모든 반대세력을 제압하여 이것을 해 냄으로 인해 이후에 발해는 종족문제로는 잡음이 나지 않게 되었다. 가 추론의 결과물이 될 것 같습니다.



이게 사실이라면, 발해 사회가 많은 이종족으로 인해 혼란이 날 법 한데, 제대로 그것이 다뤄지지 않은 이유 역시,

문왕대에 이미 겪을 사고, 분열, 난리등을 겪고 봉합이 되었기 때문에 이후 시기에 그것이 불거지지 않았다. 라는 추론도

가능합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아직 추론의 영역이니, 맹신은 금물입니다.



다음 편에 계속합니다.





5경 15부 62주에 대한 오류 가능성 검토

-https://www.fmkorea.com/6797762364


발해 국호는 발해가 맞습니다

-https://www.fmkorea.com/6801049872


무왕과 대문예의 형제싸움으로 인한 나비효과

-https://www.fmkorea.com/6804185836


발해사 최대의 미스터리, 882년 정변설

-https://www.fmkorea.com/6807940225


'886년 사건'의 진실에 대하여

-https://www.fmkorea.com/6809313438


'쟁장사건'은 왜 일어났을까

-https://www.fmkorea.com/6810052709


'등재서열사건'은 왜 일어났을까

-https://www.fmkorea.com/6812375697


전설과 설화로 살펴본, 발해 문왕 시기의 어두운 면

-https://www.fmkorea.com/6814511926


발해 멸망의 시발점, 폐왕 대원의의 정변 (1)

-https://www.fmkorea.com/index.php?mid=mystery&category=15037454&document_srl=6817289827


대원의 정변 2편

-https://www.fmkorea.com/index.php?document_srl=6817562512&s_comment_srl=6817568874#comment_6817568874


문왕과 강왕의 관계에 대한 미스터리

-https://www.fmkorea.com/6817851720


폐왕이 문왕의 가족을 몰살시켰을 가능성에 대해.

-https://www.fmkorea.com/6817911871


대원의 정변 3편

-https://www.fmkorea.com/6819337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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