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예인 발해 멸망전 고찰 (4) 918~924년까지 발해는 과연 무엇을 했을까? -하편[15]

페이지 정보

작성자 쿠로 댓글 0건 조회 65회 작성일 24-03-22 21:09

본문



지난 편의 마지막에서 이어집니다.





저는 이 시기에 발해가 과연 무엇을 했을까? 라고 질문을 던져 본다면,


고려와의 친선교류, 그리고 신라에의 도움요청, 집안정리. 이 셋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중 고려와의 친선 시도와 신라에의 도움요청은 사서를 살펴보았을때 거의 유력해 보입니다.

우선 고려의 왕건이 훗날 후삼국 통일 이후 언급한 내용이 자치통감에 들어 있습니다.



『자치통감』 284권 中


-서역승(호승) 말라가 후한 고조에 일러 말하기를, 발해는 우리와 혼인했습니다. 그 왕이 거란에 붙잡혔으니 더불어 같이 그를(거란을) 쳐서 취합시다. 라고 했으나 고조는 듣지 않았다.




이 대목을 살펴보면,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여 강대해진 이후에, 서역승(호승) 말라를 통하여 후진 고조 석경당에게, 함께 거란을 쳐서 발해왕을 구하자고 요청하지만 후진의 고조 석경당이 무시하고 응답하지 않은 내용입니다.(이 사람의 일생과 행적을 생각해보면,

거란을 생까는 것을 넘어서 거란을 공격하는 것을 당연히 할 수 있을 리가 없습니다.)



여기서 제일 중요한 대목은, 왕건이 거란에게 잡힌 발해왕(대인선)을 구하기 위해 후진의 석경당에게 발해는 우리(혹은 나)와 혼인한 사이이다. 라는 대목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와 같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1.이당시 고려의 군사력은 결코 허접하지 않았다.(실제로 왕건 생존당시 고려 군사력은 혜종~정종기 일시혼란기보다

나았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효형, 『발해유민사 연구』, 혜안, 2007, 제 2장 中)

2.발해는 왕건이 즉위하고 고려가 세워진 이후, 어느 시점에 고려와 교류를 하여 고려의 왕건 혹은 누군가와 혼인 관계를 맺었다.





그럼 여기서, 고려와 발해는 실제로 친선 관계가 있었는가? 그리고 그것은 언제였는가? 이것이 관건이 됩니다.



우선 역사를 살펴보면, 왕건이 궁예를 뒤엎고 고려를 세운 년도가 918년입니다. 그리고 918년은 발해의 멸망인 926년의 8년 전입니다. 동시에 918년은 발해가 거란에 사신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보낸 년도입니다. 918년 2월에 발해가 거란에 사신을 보냈으며, 왕건이 고려를 세운 때는 918년 7월말입니다.


따라서 거란에 사신을 보냈던 발해가 거란과의 충돌을 절대로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다음, 그렇다면 현재 발해가 동맹으로 삼을 국가가 아예 없는 상황에서, 요동을 상실하여 연락이 안 되는 중국보다는 차라리 바로 아래에 있는 고려에게 신속하게 손을 내밀었을 가능성은 매우 크며, 개연성이 성립됩니다. 그리고 그 친선의 결과로 왕건 혹은 고려 왕족이나 고려의 유력자와 발해의 인물을 결혼시켰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혼인은 두 세력간의 결합, 동맹에 상당히 자주 등장하는 단골메뉴이며, 실제로 효과가 있습니다. 과거의 국가들도 혼인동맹을 상당히 자주 한 것이 역사에서 보이며, 이 분야의 끝판왕으로는 합스부르크 가문이 있습니다. 그 외 유럽 가문들도 왕족들끼리 혼인을 상당히 많이 했으며, 지금도 그 영향으로 유럽의 왕가들은 꽤 가까운 촌수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현대 한국에서도 왕족은 사라졌지만 대신 정계,재계의 거물들, 세력가들, 재벌들이 서로 결혼으로 합세하거나 친선을 다지고, 협력하는 경우를 상당히 자주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혈연으로 묶인 관계이기 때문에 서로의 공통 이익을 위해 함께 나서기도 합니다. 더러는 사이가 좋지 않거나 서로 견제하는 상황에서 상황을 완화시키고 앞으로 잘 지내보려는 목적으로 행하기도 합니다.


918년~919년의 발해 상황을 이것과 맞추어 검토해 보면, 발해의 상황은 그리 좋지 않습니다. 북방의 조그마한 이민족들은

거란에 맞설 파트너로 적합하지 않고, 유일한 친선국 일본은 바다 건너에 있어서 실질적 도움을 줄 수가 없는 상황입니다.



그렇다면 자의이던지, 타의이던지, 발해를 도울 수 있는 세력은 그 여부를 떠나 남쪽을 마주하고 있는 고려 외에는 존재하지 않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발해는 자연스럽게 고려에 친선을 도모했고, 고려 역시 북방의 거란도 주시해야 했고, 뒤에 있는 후백제가 건재한 상황이라 발해의 친선요구를 받아들였을 수도 있습니다. 비슷한 시기, 견훤은 어떻게든 거란과 친선을 맺으려고 노력하고 있었기 때문에 거란과 팽팽하게 맞서고 있는 발해와 손을 잡은 것이 아닐까 합니다.



아쉽게도 이 당시 발해와 고려의 혼사가 이루어진 대상이 누구인지는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해당 기록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 일에 대한 반응은 다음과 같이 나뉩니다.



1.왕건 본인의 알려지지 않거나 덜 알려진 부인


2.왕건을 제외한 고려 주요 왕족(남녀를 가리지 않고)과의 혼인


3.사실 그런거 없었고, 왕건이 후진을 선동하려고 꾸며낸 말에 불과.



일각에서는 그나마 2번이 유력하고, 2번의 경우에는 발해 유민 출신으로서 고려에 와서 벼슬을 하다 요나라로 달아나서

그곳에서 벼슬을 하다 죽은 고모한이 유력하다고 합니다.


하지만 많은 대씨왕족 내버려 두고 굳이 주요 귀족인 고씨와 결혼을 시켰는지는 의문이고, 고모한이 발해에서 고려로 간 이후 태조의 딸과 결혼한 것 자체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 시기는 이미 발해가 멸망한 이후라서, 고모한은 아직 발해가 망하지 않았을 때에 고려와 한 결혼에 포함이 되기 힘들다고 판단합니다. 고모한은 그 이후 사고를 치고 요나라로 달아나서 요나라의 장군으로 활약하는 삶을 살다 갑니다.


게다가 고모한이 진짜로 태조의 딸과 결혼하긴 했으나, 고려에서 사고를 치고 달아난 괘씸한 놈인데, 기록말살을 당해도

모자란 자를 태조가 좋은 의미로 기억했는지도 미지수입니다. 혹은 진짜로 괘씸한 놈은 맞지만, 당위성을 만들기 위해

태조가 그러한 사실은 무시하고 그냥 말했는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저는 고모한은 이 대상자가 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1번의 가능성도 있긴 한데 저는 왜인지 3번에 계속 마음이 가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좀 더 연구가 필요할 것 같으니우선 여기에서 일단락 시키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있었는지 없었는 지 확실하지 않은 결혼교류 이야기가 나올정도면, 고려와 발해는 어느 정도 교류와 친선을 갖추고 있었다는 것이 확실해집니다. 그리고 이 조합은, 후백제가 거란에 접근하여 친선을 도모하려 하는 것을 발해와 손을 잡음으로서 견제하려 했던 고려와, 후방의 안정 겸 거란에 함께 대항할 수 있는 동료를 찾으려 했던 발해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진 것이라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어차피 교류를 할 상대는 현실적으로는 이미 고려 뿐이었고, 후백제는 거란에 잘 보이려 하는 중인지라 현실적으로도 이해타산적으로도 나쁜 선택이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이 동맹/친선이 잘 되었을 경우, 발해는 북방에서 거란을 막고, 고려는 남쪽에서 후백제를 막으면서 둘의 동맹이

이어지지 않게 끊어버린 다음에 중국(발해가 살아 있었을 당시는 후당.)과 연계하여 거란을 샌드위치 만들고 후백제를 일망타진하는 것이 가능했던,전혀 허황된 계책이 아니고 진짜로 실현 가능성 충분하며 개연성이 있는 나름 괜찮은 계책이었습니다. 게다가 후당의 이존욱은 거란 상대로 많은 승리를 거둔 명장이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이 조합은, 제일 중요한 후당이 이존욱이 야율아보기와의 전투에서 대승한 다음 거란에 대한 생각이 사라져 버렸으며, 이후 이존욱이 몇년간 코스프레 질에 삽질을 하다가 황당하게 세상을 뜸으로서 흐지부지 되어 버립니다. 게다가 고려 역시 태조 왕건이 후백제와의 갑작스러운 전쟁에 휘말려 아무 행동도 할 수 없게 됨으로서 세 나라는 동맹은 커녕 따로따로 놀게 되어, 결국 혼자 남아버린 발해는 그 틈에 거란의 맹공을 받고 멸망하고 맙니다.


만약 여기에서 후당과 발해의 연계가 잘 되어서 거란에게 양면전쟁을 강요했더라면 거란의 팽창과 성장은 지금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줄어들었을 지도 모릅니다. 최악의 경우에는 후당과 발해에게 협공당해 거란 자체가 멸망하는 경우도 생겨났을 가능성이 있었다는 데에서, 상당히 아쉬운 역사의 한 대목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따라서 대인선이 중국-고려와 연계하려 한 것은 지극히 당연하고, 정상적이고 좋은 판단이었습니다. 다만 시대의 운이 너무 좋지 않고, 발해가 급습을 당해서 한큐에 무너져 버린 것이 아쉬울 따름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919~924년 사이에 발해가 한 행동으로 강력하게 추정되는 것 중 하나는 신라와의 동맹 및 협조요청입니다.

그 추측은 다음과 같은 사서들에 등장합니다.



『거란국지』 1권 中


-태조가 흥기한 초기, 8부를 병탄하고 이어서 군사로서 해국을 병탄했다. (그러나) 대인선이 매우 두려워하여 은밀히

신라 등 여러 나라와 서로 돕기로 약조하였다. 요나라 태조가 그것을 알고 의논을 하였으나 결단을 내리지 못해 사냥을 나갔는데, 열흘이나 사냥을 그치지 않았다.



이 거란국지의 엄청난 떡밥이 담겨있는 기사 때문에, 발해가 신라와도 결원을 맺은 것이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다만 학계에서는 학자에 따라 서로 다르게 발해와 신라의 결원이 과연 언제였을까? 라는 주제를 제각각 해석하고 있습니다.


현재 유력한 것으로는, 911년설(한규철), 923년설(북한 사회과학원 력사연구소), 923~924년 사이(임상선), 924년설(일본 주장), 924~925년 사이 설(김은국), 925년설(김육불) 등등이 있습니다.


위의 글에서 대략 8부와 해를 병탄했다는 내용이 나오기 때문에, 정황상 그 직후가 아닌가 싶습니다.

우선 학계에서는, 거란 태조가 해를 병탄한 것이 911년이니 그 이후로 잡는 경향이 많습니다. 하지만 해가 그 사이에 다시

빠져나가거나 반란이라도 일으켰는지, 923년에 다시 해가 거란에게 정벌당한 기사가 나옵니다.



『요사』 태조본기 2권 中



-3월 무인일에 전간산에 주둔하면서 반기를 든 해의 호손을 토벌하여 붙잡고 귀전을 쏘아 죽였다. 그 무리 3백명을 죽여 구하에 버렸다. 해에 타괴부를 설치하고 발로은에게 임시로 그 일을 총괄하게 하였다.




따라서 저는 이 해의 병탄을 923년으로 봅니다. 그리고 이 결탁의 시기는 거란의 발해에 대한 위협이 이전보다는 적었던

910년대가 아닌, 본격적으로 커진 920년대 이후라고 생각합니다. 이를 정리하면,

발해가 거란의 성장을 두려워했고, 해까지 재병합하자 발해가 신라를 비롯한 여러 나라들과 결원을 맺었고, 이후 발해와

거란의 본격 충돌이 생겨나고 그로 인해 발해가 멸망했다. 라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923년 3월에 거란이 해의 호손을 토벌하고 해를 다시 지배하에 넣은 시점 이후, 924년 5월에 발해가

준비를 마치고 거란을 선제공격하는 사이 시기가 바로 신라를 비롯한 주변 국가(한자로는 신라제국[新羅諸國]이라 되어 있습니다. 해석해보자면 신라를 포함한 여러 나라라는 뜻입니다.)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결원을 맺은 시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여기 써있는 '제국'이라는 말을 굳이 쓴 것으로 보면, 그 결원의 대상은 신라 뿐 아니라 신라 외 나라들. 즉 위에서 직접적으로 친선관계를 맺은 고려가 그 대상이 아닐까 합니다.



당시 이 923년경 신라의 왕은, 신라의 54대왕 경명왕(917~924)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때의 신라는 발해보다 훨씬 심각한

상황으로, 경상도 일대만 겨우 차지하고 있을 정도였습니다. 이 상황에서 신라가 누군가에게 도움을 준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으므로 별 의미 없는 외교적 동맹, 외교적 협력에 지나지 않는다고 봅니다. 하지만 이 당시의 신라의 경명왕 역시, 고려와 친선관계를 맺고 나라를 어떻게든 살려보려 노력한 만큼, 별 의미는 없지만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발해와도 손을 잡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또 주목할 점은, 여기서 어쨌거나 발해가 신라와 결원을 맺었는데, 불과 몇년도 지나지 않은 926년 1월에

발해가 멸망할 당시, 거란측에서 자신들을 도와 공을 세운 나라에 신라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요사』 속국표 中


-천현 원년(926) 2월에 회홀, 신라, 토번, 당항, 사타가 정벌을 따라와서 공이 있으므로 상을 주었다.




이 당시의 신라 왕은 이전의 왕인 경명왕의 아우 경애왕이었습니다. 경애왕은 형이자 전왕인 경명왕과 비슷하게 나라를

되살리려 어떻게든 노력한 왕으로서, 태조 왕건에게 견훤을 믿지 말라고 한다던지, 견훤을 칠 것을 요청한다던지, 태조 왕건이 후백제를 칠 때 신라군을 보내어 돕기도 하는 등 어느 정도 신라를 복구하고 후백제에게 버티던 왕이었습니다.


이 때의 신라는 일시적으로 고려에 모든 것을 의존하던 경명왕 시기와 다르게, 조금 더 자주 국가로서의 모습을 보여 주었으며, 신라군이 이 까지는 고려군과 연합하여 작전을 펼치기도 하는 등 성과가 있던 것으로 보입니다. 삼국사기 견훤 항목을 보면,

견훤이 경애왕을 죽이고 경순왕을 즉위시킨 다음에 나라의 재보와 병장기와 기술자들을 몽땅 빼앗아 갔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는 경애왕 시기까지는 신라가 그래도 어느 정도는 독자적으로 움직이고, 신라군이 존재는 하며 싸울 여력은 조금이나마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금 이 경애왕 항목을 살펴보면, 그 이전 경명왕은 고려에 의존하여 후백제를 견제하였지만 고려를 너무나도 전적으로 의존하는 바람에 신라 국내에 반발을 샀을 가능성도 존재합니다. 이어서 왕에 오른 경애왕은 고려를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은 그만두고 어느정도 나라의 힘을 복구시키려 노력하고, 왕건을 부추겨서 견훤과 서로 싸우게 하여 둘 다 힘을 빼 놓고 신라가 그 틈에 힘을 다시 얻으려는 의도가 느껴지는 행적을 행합니다. 실제로 신라본기 경애왕 기사에서 경애왕이 태조 왕건을 부추기고 견훤을 험담하고 치도록 이야기하는 부분이 몇번 나옵니다.


따라서 경애왕은 보다 자주적인 신라의 복구를 위해 고려와의 관계를 일방적 의존에서 대등한 관계로 변경하고, 동시에 신라의 더욱 안전한 미래를 위하여, 그리고 거란과 줄을 대고 있는 후백제를 견제하고 자신들이 거란과 친해지기 위해서 노선을 갈아타 버렸을 가능성도 존재합니다.


거란이 확실하게 신라의 편을 들고, 고려 역시 관계 양상은 바뀌었을지언정 신라를 그 이전과 비슷하게 돕는다면 후백제가 신라를 섣불리 공격하기 힘들 것이라는 계산도 있었을 겁니다.


따라서 저 기사와, 이 상황이 모두 확실하다면 신라는 거란을 도움으로서 나라를 보전하려는 할 수 있는 수는 모두 써 보고 있었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발해가 920년대까지 딱히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으며, 말갈의 이탈 역시 딱히 일어난 것이 없습니다. 말갈의 이탈이 딱히 없었다는 것은 그만큼 말갈에 대한 통제가 잘 이루어지고 있다는 뜻이며, 발해의 내부사정 역시 딱히 나쁘지 않다는 뜻도 됩니다. 실제로 전에 제가 올린 책부원구의 조공표에도, 발해가 흔들린다고 여겨지는 그 시점까지 발해에 복속된 말갈들의 독자 조공은 924년의 흑수말갈을 제외하면 단 한개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삼국사기를 보면 920년대에 뜬금없이 말갈이 신라,고려를 공격한 기록이 존재합니다.



고려사』 82권 中


-태조(太祖) 3년(920) 3월 북계(北界)의 골암성(巖城)이 자주 북적(北狄)에게 침략당하기 때문에 유금필(庾黔弼)에게 명하여 개정군(開定軍) 3,000명을 거느리고 골암에 가서 동산(東山)에 큰 성을 쌓고 머무르게 하니, 이로 인해 북방이 평안해졌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12권 中


-경명왕 5년(921년) 2월에 말갈 별부인 달고의 무리들이 북쪽 변경에 와서 노략질을 했다.


『고려사』 1권 中


- 4년(921) 봄 2월 갑자 흑수(黑水)의 추장(酋長) 고자라(高子羅)가 170인을 거느리고 내투(來投)하였다.


위와 동일(고려사 1권)


-임신, 달고적(達姑狄) 171명이 신라(新羅)를 공격하러 가는데, 길이 등주(登州)를 통과하니 장군 견권(堅權)이 맞아 싸워 크게 패배시켜 말 한 필도 돌아가지 못하였다. 왕이 명하여 공이 있는 사람에게 1인당 곡식 50섬씩을 하사하니, 신라왕이 이 소식을 듣고 기뻐하며 사신을 보내 사례하였다.


위와 동일(고려사 1권)


-여름 4월 을유 흑수(黑水)의 아어간(阿於閒)이 200인을 거느리고 내투(來投)하였다.




이 사료들을 보면, 이 당시에 별 일 없었던 발해와 고려의 국경이 요동치기 시작합니다. 전부 921년의 기사입니다.


혹자들은 이 사료를 보고, 발해가 끝물에 다다라서 발해의 지방지배가 모조리 붕괴하고 말갈들이 날뛰는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확실히 말하건데 이 921년에는 거란의 발해 공격도 없었으며 말갈들 역시 잠잠했습니다. 말갈이 발해의 통제를 제대로 벗어나 독단을 취한 것은 아무리 빨라도 924년입니다. 그럼 여기의 이 말갈 잔해들은 뭔가? 라는 의문이 듭니다.



2년 사이에 말갈이 소규모지만 고려와 신라를 치고, 그리고 921년에는 추장이 고려에 항복하는 등 항복행렬까지 생겼습니다.

저는 이것을 발해 내부의 붕괴가 아니라, 발해가 신라, 고려와 결원을 맺고 거란과 한판 하기 위해 집안 단속 겸 전쟁준비를 하는 과정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선 상술했듯이 거란이 920~921년에 발해를 친 기록은 어디를 찾아봐도 없습니다. 오히려 다른 방향에서 열심히 확장중이었습니다. 그리고 924년에 이탈이 보이는 흑수를 제외하면 아직 이 때 말갈의 이탈은 보이지 않습니다. 딱히 발해가 말갈에 대한 통제가 불가능했다고 보기 힘든 이 920~921년에 말갈의 일파가 신라를 쳤고, 말갈의 일부가 고려에 항복했다는 것은,




발해가 거란과 싸울 대비를 하면서 문제를 일으킬 소지가 있는 말갈(그 중 특히 흑수말갈)을 강하게 통제 시도를 했다던지, 말 안듣는 말갈(특히 고려와의 국경지대의)을 정리하거나 숙청했을 가능성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혹은 거란과의 결전을 준비하기 위해 말갈 통제 일부를 포기하고 전쟁준비에 올인했다고 추측할 수도 있겠지만,


최초의 말갈 이탈은 924년 9월에야 일어난다는 것을 보면 저는 전자가 더 설득력이 있어 보입니다. 그리고 이후 말갈이 발해 멸망시까지 다시 고려와 신라의 사서에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이 때 말갈 내부도 강하게 정리한 다음 불순세력들을 숙청했을 가능성도 보입니다.



또한 전쟁준비는 온 나라의 물자를 모으고 통합해야 가능합니다. 고구려계 지역이나 발해에 제대로 복속된 말갈 지역이야 별 불만 없이 전쟁준비에 협조했을 테지만, 발해에 느슨하게 통합되어 있거나 발해에 반발적인 모습을 많이 보인 흑수말갈은 그를 매우 싫어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발해가 전쟁준비를 위해 선례 없이 자국과 말갈을 쥐어 짜서 물자를 모으자, 발해-고려 국경지역에 있던 말갈들도 발해 정부에게 쥐어 짜임에 따라 살기 힘들어져서 고려와 신라를 약탈하러 간 것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년도에 오는 추장들의 항복행렬 역시 이 설을 뒷받침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전쟁준비가 끝나서 만반의 대비를 한 후, 924년까지 아무 일 없다가 갑자기 발해가 5월에 거란을 공격한 이후에도 9월의 흑수말갈 이탈 외에는 아무 이탈징조가 없는 것을 보면, 발해가 이 시기에는 딱히 흔들리지 않고 거란과의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으며, 아직 나라 꼴이 제대로 돌아가고 있었다는 것 역시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발해가 거란 선공에 성공하고, 같은 년도 7월에 거란의 야율아보기가 직접 군을 거느리고 보복을 위해 발해를 공격하였지만 9월에 패하여 후퇴합니다. 이 때인 924년 9월에 흑수가 후당에 보낸 사신이 도착합니다. 따라서 흑수는 이 때, 거란이 발해에게 보복하기 위해 군을 일으킨 시점에서 이 때가 발해에게서 빠져나갈 절호의 시기라고 판단하여 이탈한 다음 후당과 교류했을 가능성이 매우 커 보입니다. 하지만 이 때에도 흑수를 제외한 말갈의 이탈은 보이지 않습니다.





따라서 발해가 918년 이후 920~921년 사이에 전쟁을 준비하면서 923~924년까지 가만히 있었던 것은 놀고 있던 것이 아니라,

지금 이야기한 고려,신라와의 친선도모, 그리고 전쟁준비, 말갈 통제를 함께 하고 있던 것으로 여겨지며, 세간의 인식대로

발해가 유연하지 못하고 생각을 짧게 하여 거란에 사신을 단 한번만 보내고, 사태파악을 못해 무너졌다는 설은 동의가 힘들 것 같습니다.


이 글을 종합해보면 919~924년 사이의 5년의 시간동안 발해는, 거란을 대비하고 거란과 맞서 싸우기 위해



1.고려와 친선도모 및 결혼동맹


2.신라와의 결원


3.전쟁준비 및 말갈 통제, 집안단속



이것들을 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리고 절치부심하고 준비한 공격이 제대로 이루어져 924년 연간에는 발해가

거란에 우세하게 싸웠고 거란을 이겼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기세가 925년까지 갔으며, 925년에도 거란을

제대로 막고 물을 먹였으면 좋았겠지만, 거란에게 보란 듯이 선빵을 날리고 거란의 연속 침입을 패퇴시킨 바로 그 다음,




발해의 최대 위기이자 거란 발해 전쟁을 거란측으로 완전히 기울게 해 버린 925년이 찾아오게 됩니다.



다음편에 계속 이어 나가겠습니다.








발해 멸망전 글 목록



발해멸망전 고찰 1편. 멸망의 전조

-https://www.fmkorea.com/6837781243


발해멸망전 고찰 2편. 925년 이전의 발해 정치상황

-https://www.fmkorea.com/6840383814


발해멸망전 고찰 3편. 공백의 5년(913~918)

-https://www.fmkorea.com/6841829328


발해멸망전 고찰 4편. 918~924년까지 발해는 과연 무엇을 했을까?(상편)

-https://www.fmkorea.com/6844051571






발해멸망전을 제외한 다른 글들



5경 15부 62주에 대한 오류 가능성 검토

-https://www.fmkorea.com/6797762364


발해 국호는 발해가 맞습니다

-https://www.fmkorea.com/6801049872


무왕과 대문예의 형제싸움으로 인한 나비효과

-https://www.fmkorea.com/6804185836


발해사 최대의 미스터리, 882년 정변설

-https://www.fmkorea.com/6807940225


'886년 사건'의 진실에 대하여

-https://www.fmkorea.com/6809313438


'쟁장사건'은 왜 일어났을까

-https://www.fmkorea.com/6810052709


'등재서열사건'은 왜 일어났을까

-https://www.fmkorea.com/6812375697


전설과 설화로 살펴본, 발해 문왕 시기의 어두운 면

-https://www.fmkorea.com/6814511926


발해 멸망의 시발점, 폐왕 대원의의 정변 (1)

-https://www.fmkorea.com/index.php?mid=mystery&category=15037454&document_srl=6817289827


대원의 정변 2편

-https://www.fmkorea.com/index.php?document_srl=6817562512&s_comment_srl=6817568874#comment_6817568874


문왕과 강왕의 관계에 대한 미스터리

-https://www.fmkorea.com/6817851720


폐왕이 문왕의 가족을 몰살시켰을 가능성에 대해.

-https://www.fmkorea.com/6817911871


대원의 정변 3편

-https://www.fmkorea.com/6819337509


대원의 정변 4편

-https://www.fmkorea.com/6820973328


대원의 정변 5편

-https://www.fmkorea.com/6821034193


발해의 군제

-https://www.fmkorea.com/6822795205


발해 선왕(상편)

-https://www.fmkorea.com/6824049857


발해 선왕(하편)

-https://www.fmkorea.com/6824625532


대이진의 찬탈 가능성에 대한 글

-https://www.fmkorea.com/6826837680


선왕과 대건황의 공통점

-https://www.fmkorea.com/6832473378


경박호와 모란강 전설로 본 대건황-대현석 시기의 불안

-https://www.fmkorea.com/6833752945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Total 672,693건 1529 페이지
커뮤니티 목록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날짜
93160 연예인
고기먹는스님
153 23:24
20120 연예인
쿠로
73 23:14
17264 연예인
고기먹는스님
81 23:13
31970 연예인
푸히헤헤햏ㅎ
112 23:12
41637 연예인
푸히헤헤햏ㅎ
105 23:11
95033 연예인
고기먹는스님
189 23:08
58626 연예인
쿠로
106 23:08
75904 연예인
쿠로
98 23:06
73005 연예인
쿠로
90 23:05
20240 연예인
푸히헤헤햏ㅎ
134 23:04
46264 연예인
쿠로
118 23:02
56158 연예인
푸히헤헤햏ㅎ
98 22:57
99524 연예인
고기먹는스님
140 22:54
91959 연예인
쿠로
218 22:51
49562 연예인
고기먹는스님
108 22:49
게시물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