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예인 발해에 대한 몇 의문점과 그에 대한 답변[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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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고기먹는스님 댓글 0건 조회 50회 작성일 24-04-19 0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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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딱히 무언가를 다룬다는 그런 느낌은 아닙니다. 최근에 글을 쓰고 받은 의문들이나,

질문점들, 그리고 문의점들 중 다룰 가치가 충분하고 논하기 좋은 주제를 따로 집어내서 제가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것들을 답변해 보고자 쓴 것입니다.


이후로도 궁금한 것이나 논해보고 싶은 게 있는 분들은 이야기 주셔도 좋습니다.





☆분명히 문왕때까지는 말갈계 관료들과 말갈계 신하들이 꽤 보인다. 그런데 이들은 갑자기 문왕 후반부부터 보이지 않기 시작하다가 강왕 이후부터는 아예 보이지 않는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저는 이것에 대해 이렇게 생각합니다.


건국 초기에는 말갈도 아무래도 함께 움직여서 나라를 세웠기도 하고, 말갈의 지분도 있었으니 말갈족들이

발해에 어느정도 참여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것은 발해의 관료들 이름 중에 말갈계 이름이 꽤 있었다는 것에서

드러납니다.



『책부원구』 971권, 조공 中


-(722년) 11월에 발해가 그의 대신 미발계를 보내 내조하고 보라매를 바쳤다.


-13년 정월에 발해가 대수령 오차지몽을 보내고 흑수말갈이 장군 오랑자를 보내 함께 들어와서

새해를 축하하고 방물을 바쳤다.


-(730년)5월에 발해말갈이 오나달리를 보내 해표피 5매, 표서피 3매, 마노배 1개, 말 30필을 바쳤다.


-(737년)정월에 발해말갈 대수령 목지몽이 내조했다. 4월에 발해가 신하 공백계를 보내 보라매를 바쳤다.


-29년 3월에 발해말갈이 신하 실아리를 보내고 월희말갈이 그 부락의 오사리를 보내었으며 흑수말갈이

신하 아포리계를 보내 새해를 축하했다.




그리고 문왕 에도 대흥 2년(739)에 일본에 서요덕과 함께 방문한 사진몽이 존재하며,752년에 일본에

사신으로 간 모시몽, 문왕 후반기에 활동한 사도몽 등이 있습니다. 그런데 문왕 후반부에서 넘어가면,

이후로 발해에서 나오는 인물들 중에 말갈식 이름을 한 고관은 아예 보이지 않습니다.


저는 이것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생각을 해 보고 있습니다. 그래도 이들이 완전 많은 수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있었는데, 왜 한꺼번에 그것도 마치 한번에 싹 쓸어버린 듯이 기록에서 전멸해 버린 걸까요?



1.말갈계는 문왕 시대 이후 고구려계와의 파워게임에서 밀려서 자연스레 관직에서 사라졌다.


-진짜로 그렇다 해도 이후로 기록에도 나오지 않게 되고 싸그리 전멸해 버린 것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고고학적으로 보시는 분들이 이쪽으로 주장을 하시기도 합니다.



2.말갈계가 한꺼번에 보이지 않게 된 원인은, 대원의의 정변에 대원의의 편으로 참여했다가 토벌되면서

이후로 관직 길이 끊긴 것이다.


-제가 현재 추측하고 있는 루트입니다. 문왕대까지 사서에 관료로서 나오던 말갈계가 강왕 이후 아예 삭제

되어 버렸다면, 반드시 그 이유가 있을 겁니다. 저는 그 이유를 대원의의 정변으로 추측하고 있는 중입니다.

하지만 이는 일방적인 추론으로서, 증거가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향후 연구가 더 필요합니다.



3.발해의 말갈계 인물들이 이름을 고구려식으로 바꾼 것이다.


-뭔가 허무맹랑한 것 같은데 뭔가 들어보면 설득력이 있는 거 같기도 하고 말이죠.. 근데 굳이?...






☆대조영은 고구려인일까 말갈인일까?



-이것은 예전 글에서도 썼었지만, 구당서에서 굳이 대조영을 '고려 별종' 으로 취급하고, 그 아비인 걸걸중상과

대조영 본인이 고구려인 집단의 우두머리였던 것을 보면, 대조영은 고구려인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혹은 말갈 혼혈일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발해는 왜 이리 왕권이 불안정하고 찬탈이 많을까?



-저는 이 근본적인 스타트를 폐왕 대원의의 정변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 시초로, 폐왕 대원의가 대조영계의 직계를 강왕의 직계를 제외하고 몽땅 죽여버려서 이 사단이 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대조영 직계의 강왕계가 이후 계속 살아남아 대를 이었다면 모를까, 문제는 이 대조영 직계가

강왕의 아들 3명 당시에 사실상 끊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분명 강왕의 아들인 정왕, 희왕은 아들이 있었으며,

이 아들들이 사신으로 다녀오기까지 한 것으로 보면 분명히 대를 이은 것 자체는 맞는데, 간왕의 사후에 왕위가

방계인 대야발계로 넘어갔다는 것은, 이들이 서로 싸우다 전멸하거나 몽땅 살해당했거나, 혹은

강왕과 그 아들들 시기를 거쳐서 확고한 권신으로 떠오른 대인수를 당해낼 수 없어서라는 결론이 나올 가능성이

큽니다.


그래서 선왕 대인수는 남아있던 대조영 방계를 물먹이고 왕에 오르는 것에 성공했지만, 대조영 방계들을 모두

찍어누를 수는 없었을 겁니다. 대신 당과 주변국에게 자신의 왕위계승을 정당화시키고 공인을 받아서 정당성을

세우는 방식을 쓰고, 불교를 중흥시키고 걸걸중상 숭배의식을 만들어서 국민의 의식을 다른 데 돌리고, 때마침

성공한 해북제부 병탄, 그리고 대외 원정들의 성공으로 인해 어찌어찌 대야발계의 집권을 안착시키는 데는 성공

합니다.


하지만 이후 대이진-대건황-대현석을 거치자 발해에는 다시 불안한 기운이 감돌았으며, 이 때 일어난 882년

정변으로 대조영 방계로 예상되는 대위해가 왕위에 오르고, 그는 그 이전에 왕위를 훔쳐간 대야발계의 권력을

완전히 거세시켜 버리고 자신들의 앞잡이로만 일하게 두고, 자신의 친위세력인 선조성과 문적원을 중심으로 한

기형적인 친위독재정치를 편 것으로 추측됩니다. 이 체제는 대인선 대까지 계속되었지만, 이 체제 역시 대야발계들이

아직 살아 있다는 데에서 불안한 점이 남아는 있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924년에 거란과의 전면전이 시작된 이후,

925년에 발해가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여 압록부와 서경 신안성이 함락되는 엄청난 사태가 터지자 기다렸다는 듯이

대야발계는 반란을 일으키고, 이 반란은 발해 중앙군에게 상당한 타격을 준 것으로 예측됩니다. 그리고 이 상처를

극복하기도 전에 926년에 야율아보기가 대병력을 움직여 수도직공으로 발해의 숨통을 끊습니다.


결국 발해는 대원의의 정변 때 직계왕족이 거의 끊어져 버렸으며, 강왕 이후 직계가 완전히 끊어짐으로서,

대야발계가 왕위를 가져감으로서 대조영 방계와 대야발계의 반목이 시작되고, 그 반목은 이후 882년 정변과

925년의 반란을 낳았다고 예상됩니다. 만약 대원의의 정변이 없었다면 대조영 직계들도 어느정도 살아 있었을

테고, 그렇다면 대야발계가 왕이 되어 이런 갈등과 대립의 불씨를 뿌릴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저는 발해의 왕권의 불안함과 찬탈잔치의 시작은 폐왕 대원의의 정변이 그 스타트를 끊었다고 봅니다.

그리고 결국 이것이 발해의 멸망원인 중 상당수를 차지하였다고 생각 합니다.


이 글에 대한 보충설명은, 제가 쓴 글 중 아래에 링크되어 있는 폐왕 관련 글에 있습니다.







☆발해가 요동을 차지한 시기는 언제일까?



-이미 문왕 때에 요동의 북반부를 차지했다고 하는 고고학적 증거들이 있다고 하며, 요동을 완전히 점거하지는 못한

상태에서 강왕 시기에 마찬가지로 요동을 노리던 거란과 붙어서, 거란을 물리치고 크게 이긴 후 요동을 완전히

지배권에 넣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는 『통전』에 나오는 802년조 기사에, 요동이 모두 동이(정황상 발해)의 땅이 되었다.


라는 기사에서 확인이 가능하며, 당 정부에서 이 직후인 805년에 강왕에게 금자광록대부 검교사공을 더해

준 것을 보면, 이 직위는 거란을 크게 물리친 것 때문에 당 정부에서 준 것으로 강력하게 추측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저는 발해가 요동에 진출한 것은 고왕~문왕 시기라고 보며, 요동을 완전히 점유한 것은 강왕 시기라고 봅니다.




☆왜 발해는 고려 국호를 문왕 후반부에 포기했을까?



-발해는 문왕 시기에 잠시 고려 국호를 대일본 외교에서 사용하다가 철회합니다.


이는 제가 써놓은 글 중 아래 링크에 있는 글에서도 나옵니다.

축성전설 글과 발해국호 관련 글입니다.



그에 대해서는 거기에 제가 하고 싶은 말을 써 놨습니다. 이 글의 내용으로 연결지어 보면,

저는 문왕이 집권 후반부에 왕권강화정책을 폈으며, 그의 일환으로 고려 국호를 썼던 것으로

예측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 반발한 반대세력들과 부딪혀 결국 문왕의 왕권강화시도는 실패로

돌아갔으며, 고려 국호 역시 철회된 것으로 보입니다. 문왕의 통치가 오래되다 보자, 처음에는 좋은

징조로 시작되고 나름 나쁘지 않았던 문왕의 통치도 후반부로 가면서 레임덕에 빠진 모습을 보여주는데요,

이것 역시 그 일환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폐왕 대원의는 이 시기에 문왕을 돕다가 통수를 친 권력가

혹은 문왕의 반대파 중 제일 큰 권력가가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폐왕 관련 글에 있습니다.





☆발해의 국가 약화는 언제부터 있던 것일까?


-저는 발해사에서 발해의 국가 약화가 있다면, 다음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1.문왕 사후에 벌어진 대원의의 정변, 그 직후 그것을 수습한 강왕의 초기


2.강왕 사후의 강왕 아들 세명의 혼란기~선왕 극초기


3.대건황 사후 대현석의 시기


4.발해가 거란과의 전쟁에서 요동을 빼앗긴 시기라고 강하게 추측되는 912~913년


5.925년에 있던 야율요골의 압록부 절반 함락



이 중 제일 큰것은 4번과 5번이라 생각합니다.







☆발해의 병력은 얼마나 있었을까?



-솔직히 말하면 저도 확실히는 모릅니다. 하지만 그 예측이 되는 자료들은 좀 있습니다.


아래 링크에 있는 발해의 군제 글을 보면,

발해가 당의 제도를 본따와서 군제에도 적용시켜 사용하고 있는 것이 보입니다.


그리고 요사 지리지에 있는


'해북을 병탄하여 땅이 사방 5천 리나 되고 군사가 수십만이었다'



라는 구절을 보면, 그리고 당에서 해동성국이라는 칭호를 붙이고, 발해가 강대해졌다는 표현을 쓴 것을 보면

발해의 국력은 상당히 강하고 유지 병력 역시 적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발해의 대대로 내려오는 적인 거란이 쓴 기록들을 발췌하여 만든 요사인 만큼, 발해에 우호적인 시선은

별로 없고 객관적인 시선과 비판, 조소하는 시선이 은근히 많은데요, 그 요사에서조차 발해가 대이진 번성하였고

군사가 수십만이었다는 것은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발해는 상술했듯이 당의 복잡한 군제를 그대로 받아오고

독자적인 군제도 거기에 추가했기 문에, 군사력이 강하면 강했지 절대 약하진 않았을 겁니다.


더군다나 동북아 최강국으로 떠오른 거란을 20년넘게 정면승부 해서 승리도 꽤 거두고 야율아보기에게도 좌절을

꽤 안겨주었던 것을 생각하면 말입니다. 그리고 925년에 주력군을 모두 잃거나 남쪽으로 돌린 이후에도 거란의

수도급습에 3만+@의 병력이 더 있었던 것도, 위기에 처하고 힘든 상황인데도 아직도 이정도나 병력이 남았구나.

라고 생각, 이해하시면 편합니다.


종종 발해의 인구는 수십만밖에 안되고, 발해군도 다합쳐서 1~2만 내외, 혹은 몇천이라고 이상한 주장 하는 분들이

계시던데, 대체 어디서 그런 주장이 나온지 심히 궁금하네요. 사료까지 무시하고 말입니다.






☆발해와 말갈의 관계는 어떠했을까?



-발해와 말갈의 관계는 제 생각으로는, 초창기에 함께하고 발해 정부에 말갈인들이 출사했을 빼고는

그냥 종속국과 종속부족같은 관계가 아닐까 합니다. 문왕 이후 말갈인들이 왜 발해 정부에서 한순간에 싹 사라진지는

알 수가 없으나, 이후에는 발해의 중앙정부에서 말갈 부족의 수령, 추장 등은 인정하면서 제일 위에 자사나 절도사로

발해인을 앉히고, 그 외에는 모두 용인하면서 발해의 지배만 받아들이도록 하는 간접적인 지배방식을 사용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각 말갈들의 영역과 각 부가 겹치는 것으로 보아, 각 말갈의 영역들 자체를 그냥 그대로 발해의 영역, 부로 만들어서

그 우두머리들 역시 발해에서 그대로 포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압말갈사는 문왕 후반부까지 있었으며.

이후에 발해에서 말갈인 관료 기록이 전멸하고 나오지 않는 것으로 보면 발해가 고구려인과 말갈인의 경계를 없애도록

노력을 했거나, 혹은 발해가 모종의 일로 인해 말갈인을 아예 배제를 해버리고 부역국 취급을 해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혹은 오스트리아 헝가리제국처럼 이중국가 체제도 생각을 해 보았으나, 아직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다만, 발해 멸망 이후 발해 후계국들이 여진의 공격을 받거나, 요 치하에서 발해인들이 여진인을 비난하거나,

금 시절에는 여진인들이 발해인을 토사구팽하고 한족과 동격으로 취급하고 섞어버리는 2등국민 취급한 것을 보면

생각만큼 좋지는 않아 보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것과 위의 사항을 보아서, 갑자기 말갈관료의 언급이 아예 사라지는

강왕 시기의 직전인 폐왕 대원의의 정변에 말갈계들이 끼어들어 패배한 이후 공식적으로 등용이 금지되거나 아예 배제

해버리거나, 속국,속령, 식민지 취급으로 지위를 낮추어 버린건가 하고 생각은 들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말갈과 고구려계가 섞이고 점점 융화되어 발해족이 형성되고 있었다는 주장들도 있기에,

정확한 자료가 나오기 전까지는 말갈과 발해의 관계를 확정지을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게 아쉽습니다.







☆발해사에서 제일 중요한 왕들로는 누가 있을까?



-교과서와 한국사에서는 주로 고왕, 무왕, 문왕, 선왕, 대인선 정도 다룹니다. 그게 대중적으로 알려진 발해의

왕들이자 업적이 있는 왕들, 혹은 마지막 군주니까요.


하지만 제가 굳이 따지면, 저는 고왕, 대인선을 제외하면 무왕, 문왕, 강왕, 선왕, 대이진, 대위해 정도라고 봅니다.

무왕, 문왕, 선왕은 기존 한국사에서도 언급하니 제외하고,

강왕은 우선 제가 중시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1.문왕 사후의 혼란과 대조영 방계가 일으킨 반란을 제압하여 다시 왕계를 대조영 직계로 돌림


2.1로 인해 일어난 발해의 국력약화를 자신의 치세 내에 안정화시키고 국력을 발전시킴


3.거란과의 쟁탈전에서 승리하고 발해가 요동을 결정적으로 점거하게 한 역할


4.3으로 인해 거란이 향후 80년정도 제대로 기를 펴지 못하게 하고, 당에게 칭송받음



대이진의 경우에는


1.할아버지 선왕 이후의 전성기를 더 이어나가서 발해 최전성기를 유지함


2.대중국외교도 화기를 띠고 이 시기에 신라를 공격해서 성과가 있는 것으로 추정.


3.국력이 하늘을 찔렀으며, 그로 인해 교만하기까지 하고, 궁궐도 증축하고, 연호까지 갈아치울 정도로

황금기를 유지함.


4.이 시기가 해동성국의 호칭을 받은 진짜 시기.


5.장건장의 발해국기에서 이 시기 발해를 대단하게 기술하고 있음.




대위해의 경우에는


1.882년 정변으로 인해 정황상 왕계를 다시 대조영계로 가지고 온 것으로 추정.


2.대야발계에서 다시 대조영 방계로 왕조를 원복시키고, 발해의 국가노선을 완전히 바꾸어버림.


3.발해의 지금까지의 통치 체제를 뒤엎어 버리고 친위 독재체제를 시행, 기존 3성6부제를 완전히

무너뜨리고 선조성과 문적원 위주의 통치를 시행하여 발해가 그 이전과 완전히 달라지게 함.


4.그 이전의 왕들과 달리 상당히 공격적이고 패권적인 정책을 폈으리라고 추정됨.(다만 이게 거란의

비위를 거스르고, 거란과 발해의 충돌을 야기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5.하지만 대야발계를 완전히 숙청하지 않고 하수인으로 두면서 훗날 925년의 결정적인 반란을 야기하게 만듬.

이정도가 되지 않을까 합니다.







☆발해는 왜 전조인 고구려보다 인지도가 적고 비교적 약하다고 알려졌는가?



-이거 역시 참 말하기 뭣한게, 우선 여기 카페 회원님들도 언급한, 관심의 부족. 그것도 상당히 큽니다.

그 다음으로는 고구려에 비해 오히려 후대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사료가 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스토리텔링을

해서 뭘 하려고 해도 가상, 시대미상 이외의 작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발해라는 나라 자체가 대중들에게

매우 생소한 나라기도 하고요.


그리고 전조인 고구려는 자료가 꽤 있기 때문에, 중국과 맞서 싸운 점, 그리고 수,당이라는 거대 통일제국을

제대로 물먹인 점이 부각되고, 거기에 국뽕에 역사 오타쿠들의 시선, 그리고 환에서도 떠받들기 때문에,

대중들이 무관심할 수 없으며, 이곳저곳에서 한민족의 기상, 리즈시절, 당당한 시절 등으로 포장이 됩니다.

마치 대제국이었던 것처럼, 대륙을 호령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실제로 상당수의 서브컬처, 웹소설, 웹툰에서

고구려는 그렇게 필요 이상으로 위대하게 나옵니다.


하지만 발해는 대중적인 관심도 적고, 전조인 고구려에 비해 알려지지도 않았으며, 얼마 전까지만 해도

왜곡된 정보들이 대다수였고, 지금도 말갈다수설 등의 황당한 정보들이 고쳐지지 않고 있는 것도 한 몫하거니와,

고구려 시절은 중국이 분열되어 있는 시기가 길었고 한반도 역시 신라와 백제로 나뉘어 있어서 고구려가 그만큼 활약할 수 있었지만, 발해는 통일왕조인 당나라가 떡하니 버티고 있고, 한반도 역시 강력한 상대인 신라가 있어서 별 재미를

볼래야 볼 수 없었던 것도 큽니다.


그래서 발해의 영토가 고구려와 다르게, 동북으로 많이 올라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더군다나 발해는 고구려처럼 통쾌하게 국뽕을 주면서 화려하게 적을 물먹이는 내용은 없고, 거란에게 너무 허망하고

취약하게 무너진, 힘없는 나라라고 인식이 많이 되어 있기 문입니다.


하지만 발해 역시 사료를 뒤져야 나오지만, 강력한 국가였으며, 당이 대놓고 칭송까지 하고, 2대 왕 시기에 중국을

선공해서 피해를 입힌 면도 있으며, 선왕의 말갈 복속, 대이진 시기의 황금기도 존재하며 대인선 시기에도 동아시아의

최강국이었던 거란을 상대로 비록 막판에 불운들이 겹쳐서 한번에 무너졌지만, 20년이상 대등하게 싸우면서 승리를 거두기도 하고 야율아보기의 계획에 대놓고 물을 먹이기도 하였습니다.


이는 후대에 거란을 정면으로 상대하던 고려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살펴보면 거란을 상대로 승리도 하고 물도 먹이던 발해의 국력이 어느정도였는지 간접 체험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저는 발해 역시 고평가할 부분이 많다고 생각하며, 알려진 부분이 적은 것, 자료가 적은 면, 마지막이 너무 아쉬운것

이것들이 겹쳐서 대중에게 인지도도 별로 없고 왜곡도 많으며 무시되고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이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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