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예인 고구려 왕 5명을 조명해보자[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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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쿠로 댓글 0건 조회 81회 작성일 24-03-22 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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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글도 포텐 갔습니다. 펨코 회원들한테는 항상 감사합니다. 고구려 다음에는 위진남북조 아니면 요 금 원할 생각인데 지금 거란 고려 전쟁이 드라마로 소개되고 있으니 요 금 원으로 할게요.


원제는 거품 낀 고구려왕인데 제목과 내용이 매치가 안되고 또 비추도 상당히 먹어서 제목을 변경했습니다.

의도치 않게 혼란스럽게 해서 죄송합니다. 그렇지만 내용 자체는 꽤 알차니깐 괜찮을거에요. 잘 보셨으면 추천 부탁드리겠습니다.


1. 유리명왕

영웅적 왕자관의 절정


유리명왕 자체는 무능하지 않지만 그 기록을 곧이곧대로 믿으면 곤란한 군주다.

기록으로는 고구려 초기 왕계는 부자계승이지만 이는 저번 글 동천왕 글에서 나온 것처럼 후대에 윤색된 것이고 비혈연적 관계이며 6대부터 형제 계승으로 보고 있음.


그래서 유리명왕 이야기를 보면 주몽과 부자관계가 아닐 가능성이 높은 게 구삼국사 참고한 동명왕편에서 유리는 한참동안이나 나오지 않다가 태자라고 딱 한 번 언급됨. 또한 보통 유리가 주몽 만날 때 칼을 맞춰서 주몽이 인정한다고 보고 있고 내가 본 학습만화에서는 유리명왕이 엄마 밑에 있다가 주몽 만나러 가는 것을 봤을 것이다.


그런데 기록에 따르면 유리명왕 혼자 움직인 게 아니라 도조 구추 등 사람을 이끌고 내려옴.

삼국사기 내용 동명왕편을 보면 유리가 언급 되는 건 마지막 19년조에서나 뒤늦게 나오고 유리 남하, 태자 책봉, 주몽 죽음이 싹 다 몰려있을 정도로 부자연스러움.


이렇기에 유리명왕의 내용 역시도 현실적으로 말이 안되는데 햇빛을 가로막는 신성한 이적을 보였다고 하며 의강명자의 견해를 보면 비혈연적인 관계임에도 기록에는 혈연인 것처럼 쓰여지는 경우도 있다고 함. 즉 이런식으로 후대에 윤색된 사례도 당시 동아시아에서 보이기에 고구려가 혈연 주작 친다고 쳐도 그렇게 이상한 건 아님.


대무신왕 역시도 초딩 나이 때 부여군을 격파하거나 재위 기간 때 말도 안되는 판타지 생물을 받거나 이런 식으로 영웅적인 기록들이 강조됨.


극단적으로 1~5대 군주를 실존하지 않다고 보기는 하지만 정설은 아니다. 이렇기에 고구려 초기 왕들을 보면 주몽도 마찬가지고 왕이 되기 전 영웅적인 설화들이 강조된다. 즉 이는 혈연관계보다는 신성한 능력이 더 돋보여야 지지를 받는다는거임.


유리명왕의 태자들은 죽는 애들이 많은데 애들이 혈연관계보다는 영웅적 왕자관에 맞지 않아서 우수수 죽는거임. 또한 우리가 흔히 아는 내용인 비류 온조가 형제는 커녕 주몽 아들인 건 아닐 가능성이 압도적으로 높음. 온조왕 편에서도 다루었지만 서울 강남 지역은 꾸준히 애들이 남하했고 그 중 3세기 중엽에 남하한 적석총 세력이 선주민들과 융합했다. 고구려에서 내려온 건 맞아서 정통성 얻으려고 설화 섞은거임.


내가 거품 낀 백제 편에서 온조왕 설명했는데 그 학설에서는 그냥 비류는 미추홀국과 백제의 연맹을 합리화하려고 온조와 형제처럼 후대에 윤색 된 것으로 보고 있음.


그니깐 고구려 초기 왕들을 볼 때 기록으로 볼 때는 그냥 그러려니하고 왕위를 준 것으로 묘사되지만 이는 후대의 윤색으로 보고 있고 동천왕 편에서도 언급했지만 여러 연구자들이 이미 지적한 내용이라고 했다.


흥미로운 내용은 유리가 주몽집단을 무력으로 병합인데 이는 유리가 칼로 증명했을 때 피가 났다는 표현 때문에 그럼. 그렇지만 다른 견해로는 무력보다는 주몽과 유리 모두 고구려 왕실의 모태를 이룬 집단에 소속되었음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초기 왕계가 신능이 강조되어서 원래 거품 군주로 동명성왕 대무신왕도 같이 있었는데 너무 날로 먹는 거 같아서 뺏다. 거품 낀이 무능함이 아니라 백제 글의 사례처럼 자기가 안한걸 했다고 후대에 윤색 된 경우도 포함되는데 너무 씹뇌절이라.


1. 전문가의 견해

나는 파인.jpg 고구려 왕 5명을 조명해보자

나는 애플.jpg 고구려 왕 5명을 조명해보자

이미 1~5대 왕계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사료비판적으로 보고 있는 시각이 많음.


2. 모본왕

중국을 호령한 고구려의 군주인가?


환빠들한테 꽤나 유명한 왕이다. 왜 유명하냐면 모본왕 기사 중에 후한서에도 나와있는 내용인데 북평 어양 상곡 태원을 공격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거에 대해서 모본왕 시기부터 대륙을 호령했다고 주장하거나 아예 없는 사실이다라고 주장함.


다만 후한서를 보면 구려라고 명확히 언급됐기에 아예 없는 일로 보기는 힘들다. 그렇지만 정복 목적도 아니며 별 대단한 일은 아니다. 그 이유는 그 당시 배경을 살피면 알 수 있음.


당시 채융이라는 고구려 입장에서 꼰대가 집권하고 있었지만 후한 입장에서 30년동안 일하면서 오환 선비 흉노의 결집을 방지하고 회유와 정벌을 적극적으로 써서 제압하였음. 우선 모본왕 재위 기간 때 기록으로만 보면 선비 이종 만리와 고구려 무리가 이탈했다고 한다.


현재 학계에서는 이재성의 문제 제기로 고구려 무리라고 보는 것인데 고구려의 무리를 고구려 그 자체로 보기 어렵다는 측도 있다. 또 모본왕 재위 기간에 후한서 고구려전에서 우북병, 어양, 상곡, 태원을 공격한 구려가 채융의 회유로 모두 변경에 조공하였다고 하고 후한서 광무제기에서는 요동요외 맥인의 일로 기록하고 있기에 고구려 혹은 구려라고 했지만 고구려 무리와 마찬가지로 고구려 자체를 가르키는 것이 아니라고 보고 있기도 함.


이렇기에 후한서 채융전의 기록된 고구려 무리와 잠지락 대가가 이끈 종인이나 요동요외 맥인은 고구려처럼 인식되는 고구려의 예속민으로 생각된다.


예속민 아니라고 가정해도 기록 그 자체로 보면 고구려의 단독 행동은 아니었으며 채융에 대한 시위, 약탈 정도로 보는 게 맞다. 또한 후한 역사로 봐도 뭔 엄청나게 큰일도 아니었고 채융은 계속해서 요동에서 근무했음.


또한 유리명왕과 대무신왕은 신능과 군사적인 능력이 강조됨. 유리명왕, 대무신왕 재위 기간 기사 보면 군공들이 있는 반면 모본왕이 ㄹㅇ 중국을 호령했고 이민족들 모아 주도적으로 했다면 영웅적 왕자관에 충족하는 인물인데 실상 기록을 보면 채융의 회유에 대충 넘어감 정도로 묘사됨.


그리고 결국 모본왕은 시해 당했음. 모본왕이 진짜 폭군인지도 논란이 있긴 하지만 하나 확실한건 시해 당했다는거다.


3. 고국천왕

고구려 초기 내정 goat


내정하면 소수림왕을 goat로 뽑지만 사실 고국천왕도 교과서에 나오는 거 이상으로 대단함. 소소림왕이 고구려 중기를 대표하는 내정 goat라면 고국천왕 고구려 초기 goat인 거 같음. 고국천왕은 고구려 나부체제에서도 매우 중요하게 다뤄짐.


첫번째는 방위부의 등장임. 방위부는 고구려본기 기사에서 대무신왕대에 남부 사자 추발소의 존재가 보여서 대무신왕대나 그 직후에 설치되었다고 보지만 문제는 대무신왕대의 방위부 기사는 앞뒤 시기로 방위부의 존재를 맥락 없이 고립되어 있어서 자료상으로는 방위부는 고국천왕대가 찐이다.


그렇지만 2세기 후반 중앙집권력의 강화로 설치 됐을 거라고 보고 있음. 근데 고국천왕도 2세기 후반에 재위하던 임금이고 기록상 최초로 등장한다는 점에서 고국천왕 때 설치됐다고 이해해도 별 무리 없을 거 같다.


두번째는 국상제임. 명림답부 사망 이후 을파소가 2대인데 이 10년간 국상은 공석이었다. 물론 고대사가 기록이 적어 사실 있었는데 기록 부족으로 유실 된 거 아니냐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게 유일한 공석이며 3세기 말까지 공석인 적이 없었기에 찐공석으로 보는 게 맞음.


왜냐면 국상 제도의 성격 때문인데 국상이 총괄하는 임무이다보니 다른 부들이 반대했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을파소 사례를 보면 고국천왕은 처음에 우태를 주고 중외대부에 임명했지만 을파소는 거부함. 여기서 중외대부의 성격은 왕의 측근으로 보고 있어서 서폿으로 맡기려고 했는데 을파소는 실질적 권한을 지닌 국상을 원해 고국천왕이 국상을 주자 그제서야 받았음.


또 을파소의 성향을 봐야하는데 을파소는 연나부 모반 진압 이후 안류가 을파소를 다시 천거했다는 점에서 나부가 아닌 계루부 편제인 방위부 소속으로 보고 있다. 또 제가회의에 참가하는 제가들이 귀족으로 변모하면서 귀족 회의가 되었다. 이렇기에 귀족들이 신진으로 구진을 이간한다고 비판했으나 고국천왕이 씹상남자처럼 귀천을 막론하고 국상에 복종하지 않는 자는 족을 멸하겠다고 반응함.


세번재는 연나부 견제임. 연나부는 당시 너무나도 세력이 강했다. 그 이유는 차대왕 시해를 명림답부가 했고 그 계기로 득세함. 고국천왕 시기에 계루부의 강화와 맞물려 다른 나부들의 세력이 약해지기에 고국천왕 입장에서는 연나부만 재끼면 되는데 연나부의 기세는 왕비를 배출할 정도. 이에 고국천왕이 제거하려하자 도리어 왕도를 공격했으나 친위군을 동원해 진압하고 국상 을파소를 임명해 사태를 수습하려고 했음.


그렇지만 고국천왕 사후에 일어난 발기와 연우 사이의 왕위 쟁탈전은 고국천왕의 개혁에도 불구하고 기존 나부 세력이 건재하지만 고국천왕 때 그나마 제대로 밟아서 이정도로 수습한거임.


네번째는 진대법 실시다. 교과서에 잘 나오므로 생략.


4. 미천왕

고구려 최고의 화가


교과서에 나오는 미천왕의 업적은 낙랑군 대방군 위주만 나오며 그 배경에 대해서는 조금 부실함. 참고로 화가는 미천왕의 치밀한 계획이 돋보여서 그렇게 적은거지. 그림 그리는 화가는 아님.


미천왕은 311년에 장수를 보내 서안평을 장악하고 313년에 남진하여 낙랑 그리고 이듬해 대방도 잡고 15년에 현도까지 먹었다.


그런데 이것은 미천왕의 뛰어난 큰그림이었음. 우선 처음에 서안평을 먹었다는 점인데 이는 고구려 서진의 종착역인 요동정벌의 빌드업이라고 볼 수 있지만 서안평을 먹으면서 낙랑 대방이 낙동강 오리알이 됐다는거임. 연계를 차단해 결국 낙랑 대방은 먹히면서 거기 있던 한족들이 흡수 당한다.


그 다음은 바로 현도군이다. 현도군은 무력하게 죽었는데 그 이유는 낙랑 대방군은 이미 죽은 상태였기 때문에 결국 쉽게 잡아먹힘. 자치통감에 나오는 313년 진나라 현도태수 배무의 사망과 그 동생과 아들이 모용외한테 귀부한거임. 사실 이때 현도구 상황이 별로 좋지 않지만 미천왕은 낙랑 대방부터 친 이유가 연계를 막아 확실하게 하려는 의도였던 거 같다.


그 다음 미천왕의 목적은 요동인데 모용외라는 걸출한 인물이 있었음. 이렇기에 미천왕의 낙랑 대방은 현도군 고립도 있지만 장통 문제도 있음. 낙랑 출신인 왕준이 장통을 설득하여 모용외한테 귀순하였는데 실제로 장통은 낙랑 대방을 근거로 고구려한테 적대했음.


이렇기에 전연과 장통의 연계 자체를 차단하고 배후의 낙랑이 장난질하는 거 막으려고 순서대로 서안평으로 고립, 그 뒤 낙랑 대방 빠르게 정리, 혼란한 현도 먹고 그제서야 본격적으로 요동 진출로 간거임. 또 기록으로는 장통이 간 이유를 왕준의 설득으로 보지만 고구려 백제의 성장으로 더이상 낙랑 대방이 전혀 우위를 점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서천왕 때부터 부지런하게 공격한 결과라고 봐야하며 미천왕 때 서안평 점령으로 더더욱 불리한 형세를 낳게 되어 올라간거라고 보는 측도 있음.


19년에 최비가 모용외 싫다고 우문선비 단선비 고구려 파티에 초대해서 참교육을 제의했는데 이걸 미천왕이 수락하여 모용부 수도 극성까지 감. 그런데 모용외도 호걸이라 이간질에 낚여서 결국 후퇴하고 와해된 걸로 알고 있지만 실상은 조금 다름


고구려 본기를 보면 여노가 하성에 있어서 모용외가 장통을 보내 여노를 잡았다고 하는데 이를 보면 이 레이드는 실패했어도 미천왕이 지속적으로 요동에 알박기하는 것을 볼 수 있음. 모용외도 이러한 행동에 적극적으로 대항했는데 19년에 모용인 직접 파견해서 지방 지배 도모하고 320년에 미천왕이 바로 요동 공략 나서고 21년에 모용한을 요동과 평곽에 주둔 시켜 군사력 증강하고 동진으로부터 요동군공 직위를 받아 고구려의 사기를 꺾으려고 노력함.


모용부 역시도 고구려를 크게 경계할 정도로 미천왕이 나라를 성장 시켰지만 훗날 정자 차이로 개털리게 된다. 모용외 다음은 모용황, 그러면 미천왕 다음은? 고국원왕.....


또 미천왕의 서진은 20년 이후로 갑자기 존재감이 없어지는데 그 이유는 낙랑 대방 때문임. 애들은 자기 색이 매우 강한 지역임. 한족들이 설치하기는 했으나 시간이 지나고 한나라의 쇠퇴로 인해 포지션이 애매해져서 중국사라고 하기에도 무리가 있음. 또한 땅 자체도 좋은 편이라 낙랑 대방 경영에 집중하는 것으로 돌리면서 없다고 추정하기도함.


보면 알겠지만 미천왕의 대외정벌은 그냥 한 것이 아니라 연계 차단하는 콤보 공격이나 마치 큰그림을 그려놓은 것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였음. 다만 낙랑 대방 경영에 겹쳐 상대도 워낙 유능하기도 했고 정자 차이 때문에 결국 고구려는 고국원왕 때 전연한테 굴복한다.

5. 문자명왕

위대한 할아버지와 잘난 아들을 둬서 묻히는 왕


문자명왕은 대표적인 거품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고구려의 전성기가 더 길어진 건 아들 안장왕이 유능해서 그런거임. 장수왕 말년까지 장수왕이 괴물 같은 넘이라 노령이어도 친정하여 인자강 포스를 보여줌.


문자명왕 시기부터 남진이 쇠락하는데 그걸 이어받은 안장왕이 오곡원 전투의 대승으로 백제의 북진을 아예 조져버리면서 전성기 기조 유지함. 오곡원 전투가 만약 사실이면 이미 문자명왕 대외업적은 이미 뛰어넘은 셈.


신설을 지지하는 쪽도 오곡원 전투 이후 영향력 날라갔다고 할 정도로 큰 전투임.

또한 기록으로 보면 이미 문자명왕 대의 잦은 천재나 궁문 붕괴 사건 등 의미심장한 기록들이 나오는데 고구려의 쇠락을 보여주고 있는 기록이다. 안장왕대가 스타트는 조금 더 안좋은데 실적으로는 더 높다. 안장왕 때는 북위도 육진지란으로 동아시아 전반이 혼란스러웠는데 남부로 백제를 견제하고 서부로 요서를 공격해 유인들을 먹으면서 잘 헤쳐나갔음.


아버지 따라 남진은 뒤지게 했는데 우산성 말고는 거의 다 처참하게 실패임. 당시 고구려의 피지컬이 높았는데도 너무할 정도의 실책임.


동성왕 때도 기록 보면 어느 정도 영토를 되찾아보이는 거 같은 기록들도 나오고(지명 이동설로 보기도 함) 무령왕한테 위천 전투에서 대패하는데 이때 무령왕도 고구려의 보복이 염려되어 다시 신라한테 연락할 정도였음.(동성왕이 탄현에 책 쌓은 이후 제라동맹이 냉랭해짐) . 이후 무령왕대 결국 백제가 다시 강국이 되었다고 할 정도로 인정 받았다. 그런데 반대로 문자명왕의 고구려는 위천 때 너무 크게 패해서 더이상 남진하지 않는다. 아버지 남진 업적 생각해보면 진짜 슬픈 상황임. 백제한테 ㄹㅇ 힘싸움 밀린 거.


다만 대북위외교는 평타는 쳤는데 보통 동아시아사 교과서에서 나오는 효문제는 균전제처럼 문치적인 면이 강조되지만 실제 효문제는 존나 전투광이었다. 실제로 효문제가 세자를 입조하라고 했으나 문자명왕은 병을 핑계로 종숙을 보냈다.


이에 효문제가 협박조로 만약 어길 경우 군사를 동원하겠다고 했다. 그 이유는 효문제의 친정체제 구축으로 일부러 강한 척하고 원정 보내고 그랬음. 어차피 태무제가 고구려 침공을 포기한 이유도 보면 알겠지만 유연과 남조가 더 우선이었기 때문에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또한 효문제 이후 선무제부터는 고구려를 비롯한 타국에 대한 강경대응이 줄기 시작한다. 그렇지만 문자명왕이 주변국 통제를 못하자 선무제가 대놓고 뭐라할 정도로 그 위상이 떨어짐. 대신 한국 고대사에서는 매우 중요한데 북위가 고구려의 영역을 확실히 인정해줬다는거임.


문자명왕 때 고구려 영토 최정점을 찍어서 전성기를 유지했다도 있는데 이는 확실히 중국 기록으로 반론된다. 통전 같은 기록들을 보면 오히려 고구려 후기로 갈수록 영토가 불어난다. 이는 바로 이전에 적은 한국에서 인지도 낮은 고구려의 명군들에서 소개했음.


하지만 인물평할 때 중요한 점은 모든 인간들이 잘한 점도 있지만 못한 점도 있으며 당시 상황을 잘 봐야한다. 그렇지만 장수왕보다 확실히 딸리는 게 개로왕은 여러 제도를 도입하고 내정도 원만하게 잘 운영하고 외교관계도 적극적으로 했지만 장수왕 어택땅에 결국 한성 조졌고 신라 역시도 장수왕이 개빡세게 공격해서 큰 위기에 처한적도 있었음.


하지만 동성왕 무령왕이 유능하긴 하고 신라도 열심히 성장하고 있어서 문자명왕의 남진이 장수왕보다 난이도 있고 또 문자명왕이 장수왕이나 안장왕보다 못한 인물이니 딸리는 게 사실임.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자명왕 때 최대 영토를 완성했다거나 안장왕은 쏙 빼고 광개토 장수 문자 이렇게 고구려 최전성기하면서 문자명왕을 라인에 껴주는데 사실 안장왕이 ㅈ빠지게 대외정책하고 한강 세력이나 한인들 계속 끌어들이면서 개혁을 꾀했기에 장수 안장 중간에 낀 문자가 조금 더 고평가 받는 거 같다.

안장왕 인지도가 문자명왕보다 더 떨어지는 거 같긴함. 안장보다 문자명이 개간지임.

1. 효문제의 마음

효문제.jpg 고구려 왕 5명을 조명해보자

6. 나가면서


요 금 원은 명군들과 듣보잡들 위주로 다룰 듯함. 어느 한 부분만 강조 시켜 그쪽 위주로 다루려고 함. 예를 들어 요 성종을 다룬다면 내정 다루면 내정만 다루거나 외정 다루면 외정만 다루거나 그런식으로 할 생각이에요.


신라도 요청 받아서 하긴 할텐데 지금 정보 모으고 있으니 중국사 끝나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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