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예인 제자에게 품은 질투로 미쳐버린 한 군인의 이야기[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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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쿠로 댓글 0건 조회 127회 작성일 24-05-08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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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n._Gallieni_LCCN2014697689_(cropped).jpg 제자에게 품은 질투로 미쳐버린 한 군인의 이야기

이는 행복하게 시작하지만 눈물로 끝나는 종류의 이야기다


두 주인공 모두 긍정적으로 그려지지 않지만 한 주인공이 특히 그러하다




갈리에니는 일류였다


자신의 유능함을 알고 있었고,별다른 친밀감이 느껴지지 않는 정치계를 경멸했고, 자신과는 달리 경력이 화려하지 않은 동료들에게 우월감을 느끼곤 했다


갈리에니 밑에서 복무한 로이테는 6개월 간의 식민지 복무가 프랑스 본토에서 보낸 모든 시간보다 유익했다고 떠들곤 했다


로이테의 동지들이 듣기에 불쾌한 소리였지만, 갈리에니는 부하의 말에 동의했고 자신의 의견을 숨기지도 않았다


본토파 군인들도 똑같이 그런 논쟁에 집착했고, 식민지파 군인들을 편하고 이국적인 삶을 선택한 광대 무리라 부르며 경멸했다



갈리에니는 인도차이나, 수단, 마다가스카르 등 여러 식민지에서 쉬지 않고 복무한 프랑스 식민제국의 건설자 중 한 명이다


그는 옛날 옛적의 지주들과 공통점이 많았는데, 당대에 문명화 사명이라고 여겨졌던 법을 제정하고 평화와 번영을 강요하며 이에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용서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러했다


독재적이고, 고집스럽고, 매우 독립적인 갈리에니는 상관과 정치적 감독을 총독직 연임의 방해물로 여겼으며, 그들이 없는 공간에서 지휘권을 행사하는데 익숙했다



그는 신중하게 골라부하의 고삐를 풀어주어 추종을 빠르게 얻어냈다


그는 다소 괴팍하다는 평판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장교들에게 두루두루 존경 받았으나, 그가 정신적 장님이라고 비난하곤 했던 에콜 드 게르와는 자주 충돌하곤 했다


이는 훗날 그가 GQG에 비난의 눈사태를 쏟아낸 이유를 설명해준다



갈리에니는 식민지 전역으로 멀리 나가있었기 때문에 당시 군대에 영향을 미치고 있던 정치적 논쟁에 휘말리지 않고 피할 수 있었다


그는 공화주의자이긴 했지만 온건파에 가까웠고, 강베타를 존경했다


식민지 경력 덕분에 넓은 눈을 가지게 된 갈리에니는 동료들과는 다르게 독일에 대한 복수에 관심이 덜했다


게다가 그는 프랑스 남서부 출신이고, 예비군에 대한 견해가 달랐음에도 가족끼리 친했기 때문에 장 조레스와 꽤 가까운 사이였다



갈리에니는 훈수를 좋아한 데다가 무례한 프리마돈나 같은 일면이 있어 남을 짜증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남들에게 최고로 인정받지 못할 때마다 격분했으며, 설득을 쉽게 포기하고 경멸하는 태도를 취했다


마른 전투 이후, 그는 점차 자신이 적대자와 무능한 사람으로 둘러싸여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는 자신을 조프르, GQG, 정부, 의회가 방해하고 있다고 믿었다


이 믿음이 출판된 갈리에니의 일기의 거의 모든 페이지에서 읽혀진다


실제로는 그의 병과 우유부단함이 방해했을 뿐이지만, 느끼고 있던 무력감이 죽을 때까지 악화되었다




이 이야기는 조프르가 마다가스카르에서 갈리에니 밑에서 복무하며 행복하게 시작한다


그는 이 거대한 섬에 1900년 3월 1일에 도착했고, 1901년 10월에 파리로 떠났다


그는 갈리에니의 눈부신 찬사와 최연소 준장 칭호를 안은 채 프랑스로 돌아갔다


1902년에 섬으로 돌아온 조프르는 1903년 봄을 마지막으로 프랑스행 배를 탔다


장군이 된 조프르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그의 가장 자랑스러운 성취는 디에고 수아레즈 항구의 요새화였다


그는 갈리에니에게 찬사와 만족감이 담긴 추천서를, 그의 기억에 남아 몇년 후에도 다시 언급되는 추천서를 받았다.


조프르는 1901년 10월 12일에 49살 나이로 준장이 되었는데, 갈리에니가 최소 3명의 식민부장관에게 보낸 사적인 편지는 그가 제자의 진급을 도왔음을 증언하고 있다


갈리에니의 도움 없이도 조프르는 확실히 장성급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빨리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두 사람은 1910년 전까진 다시 만나는 일이 없었는데, 저 년도는 조프르가 상임전쟁심의회에 들어간 해다


갈리에니는 1908년 8월에 심의회에 들어갔다


그리고 1911년에 참모총장 미셸이 해임되며 생긴 공백 상황에서 조프르가 참모총장이자 전시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아마 갈리에니의 축복과 지지 덕분이였을 것이다


갈리에니는 조프르가 자신과 같은 식민지 학파고,에콜 드 게르에 입학한 적도 없었기 때문에 지지했다


갈리에니는 자신의 참모들에게 에콜 드 게르의 교육을 전부 잊으라고 말하곤 했다


먼저 참모총장직을 제안받은 사람은 갈리에니였으나, 그는 다음 두 가지 이유로 거절했다


첫번째로, 은퇴까지 2년 반 남았었다


두번째로, 그가 메시미에게 미셸을 해임하라고 주장했었다


적어도 이게 메시미가 회고록에서 밝힌 갈리에니의 거절 사유다


정작 갈리에니가 남긴 기록에선 이런 이야기가 없어 진위 여부가 문제되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




조프르 참모총장 임명 과정의 진실이 무엇이든 간에 갈리에니가 그 자리를 거절했음은 사실이다


그런데도 갈리에니는 자신의 부하에게 총사령관 자리를 양보해주어 은혜를 입혔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조프르에게 정신적 권위를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갈리에니와 조프르 둘다 받아들였다고 믿기엔 너무 놀라운 상황이다


유일하게 가능한 해석은, 둘다 어차피 이 상황이 일시적일 거라 생각했고 지금까지 서로 문제가 없었기에 앞으로도 충돌이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는 해석이다


게다가 조프르가 참모총장이 되면서 정치적으로 큰 이점이 발생했기에 다른 고려사항은 뒤로 밀려났을 것이다




두 사람의 삶은 1914년 여름까지 계속되었다


두 사람은 몇가지 사안, 특히 인사 문제를 두고 갈등을 빚기도 했지만 우호적으로 지냈다


갈리에니는 조프르의 사람보다는 자신의 사람(예를 들어 통킹과 마다가스카르 전역의 베테랑 제라르)을 선호했다


하지만 이는 일상에서 흔히 보이는 충돌일 뿐, 두 사람의 평화로운 동거에 별 방해가 안되는 배경 소음에 불과했다


두 사람은 일상적인 아침 운동을 위한 승마 중 부아 드 불로뉴에서 마주치는 일이 일과 중에 만나는 일보다 더 많았다




사실 두 사람은 성격차이가 너무 심해 사적으로 만나는 일이 없었다


둘의 성격엔 궁합도 비슷함도 없었다


갈리에니는 문학을 사랑하는 문화적인 남자이자 적어도 하루에 한 번은 스스로 두뇌 목욕이라고 부르는 활동을 했다


그는 독일어, 이탈리아어, 영어를 다양한 수준으로 구사했고, 그의 식민지 경험을 담은 여러권의 책을 출판했다


반면에 조프르는 자기 전문분야 외엔 아무 것에도 관심없는 천박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줬다


그는 재치있는 발언과 최신 가십거리로 파리지앵 상류 사회가 좋아할 법한 대화를 못하는 둔하고 서투른 사람이였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갈리에니는 우아하고 총명했다


다음 짧은 발췌문을 보면 알겠지만 푸앵카레는 갈리에니를 만날 때마다 좋은 인상을 받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밀르랑은, 키 크고 잘생겼고 우아한 외모에 군복을 멋있게 차려입은 갈리에니와 함께 찾아왔다.갈리에니는 지난번에 만났을 때와 똑같이, 늘 쓰고 다니는 안경 뒤의 단호하고 꿰어보는 눈빛과 체계적인 사고방식과 냉정하고 정확한 발언력의 보유자였다.'



갈리에니가 유혹적이였다면, 조프르는 치명적인 진지함으로 사람들을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마다가스카르의 총독은 팀북투 정복자라기 보다는 말리 철도 건설자로 알려진 남자와 공통점이 많지 않았다


이렇게 극명하게 다른 두 사람이 군 생활 중 운명의 장난으로 엇갈리고 적대자가 되리라곤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두 사람은 상임전쟁심의회 회의가 열릴 때마다 만났는데, 기록에 따르면 갈리에니는 회의 동안 말을 거의 하지 않았다


아예 발언을 하지 않은 적도 여러번 있었다


그가 그나마 입을 열 때는 조프르의 관점에 동의하는 발언을 하는 게 다였다


조프르는 회고록에서 갈리에니를 떠올리며 그의 도상연습과 봄 기동훈련 결과를 몹시 칭찬하고 있다


조프르 입장에선 솔직한 감상이였겠지만, 정확한 평가는 아니다


1912년 봄 기동훈련에서 갈리에니가 마리옹 장군을 잡아내긴 했으나 그의 지휘에선 아무런 총명함도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훨씬 객관적이였을 독일 주재무관은 갈리에니를 우유부단하고 선택을 망설인다며 혹평했다


그럼에도 갈리에니가 은퇴하자 상임전쟁심의회는 오찬을 위해 모였고, 그가은퇴하지 않길 바랬던 조프르는 칭찬세례를 퍼부었다


그리고 저 조프르의 바램은 1차대전이 발발하자 이루어지게 된다





갈리에니는 은퇴 생활 중 아내를 병으로 잃었다


거의 직후에 위기가 터져 전쟁장관 메시미의 부름을 받고 복귀하게 되었다


그는 1914년 8월 2일에 파리로 찾아왔고, 총사령관 조프르의 부탁이 받아들여져 Ad Latus가 되었다


이 라틴어는 공식적인 지위가 아닌 총사령관에게 문제가 생겼을 때의 잠재적 승계자를 의미한다



그런데 여기서 첫번째 오해가 발생했다


갈리에니는 조프르의 GQG에 정말로 들어가고 싶어했다


당연히 조프르는 거절했다


갈리에니가 작전통제권을 조프르에게 공유받을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니 좀 놀랍다


그처럼 군대식 습관과 관습을 잘 알고있을 사람이 의사결정에 자기가 관여하게 되리라고 한순간이라도 믿었다니 말이다


만약 마다가스카르에서 조프르가 이런 종류의 행동을 했다면, 갈리에니는 즉시 그를 프랑스행 배에 태워 아냈을 것이다


머리 둘 달린 참모부는 지금껏 존재한 적 없고, 앞으로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당연히 갈리에니는 이 사건을 일기에도 회고록에도 기록하지 않았다




메시미는 두 사람이 협력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생각을 잠깐은 했다


그는 전쟁부 청사에 갈리에니의 책상을마련해주었고, GQG가 의도적으로 정보를 조금만 전달하는 상황에서도 갈리에니가 최대한 작전 상황을 추적하도록 했다


8월 14일, 갈리에니는 상황을 더 자세하게 알고싶다는 메시미의 요청으로 GQG에 방문했다


그러나 조프르는 정치가 군사 작전에 영향을 미치는 일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으려 했기 때문에, 갈리에니가 개입을 위한 도구로 사용되고 있음을 간파하고 잠깐만 만나준 후 참모들이 상대하도록 했다


갈리에니는 전 부하의 이러한 환대에 기분이 몹시 좋지 않았을 것이다







프랑스의 상황은 8월 동안 악화되기 시작했는데, 특히 20일부터 그렇게 되기 시작해 파리 문제가 떠올랐다


파리 요새화지대를 지휘하고 있던 파리 군정장관은 다름아닌 미셸이였다


전시에 파리 공성 상황이 선포되면 군정장관에게 민사, 군사적 권한이 전부 넘겨진다


파리는 행정과 입법의 소재지라는 점에서 다른 요새들과는 달랐다


그럼에도 파리 군정장관의 첫번째 임무는 1909년 공성전 교리가 규정하고 있는 바에 따라 요새의 방어 태세를 갖추는 것이였다


파리 방어계획은 이전부터 존재해왔고, 공들여 개선되어 왔다


하지만 도시의 리비에르 요새는 현대화된 적이 없고, 당대에 쓰인 표현을 빌리자면 폭탄 자석으로 변해 있었다


1840년에 건설된 요새들은 파리 방어계획이 화포를 그 안에 위치시키고 있음에도 탄약창으로 쓰이고 있었다


일반적인 믿음과는 달리 리비에르 요새선은 어떤 역할도 하지 않았고, 요새선 안쪽에선 어떤 요새화 작업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대신 파리의 방어는 도시 외곽에 건설된 200km 둘레의 참호, 콘크리트 흉벽, 철조망과 500문의 화포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재산권 문제로 오직 동원령이 내려지고 파리 공성 상황이 선포된 후에야 참호를 파고 포대를 위치시킬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이 모든 작업을 최대한 서둘러야 했다



방어는 향토부대(4개 사단, 1개 여단)에게 맡겨졌다


8월 15일 이후에나 존재하게 되었지만 말이다


상브르 전투 이후 상황이 심각해지기 시작하자 전쟁장관 메시미는 며칠 안에 파리가 위험에 처하게 되리란 사실을 갑작스레 깨달았다


그러나 방어를 위한 작업은 여전히 진행되고 있었다


여기엔 많은 사정이 있으나, 자세하게 알아보는 대신 불쌍한 미셸이 편리한 희생양이였다는 사실만 알아두면 된다


미셸은 1911년 때보다도 메시미의 존중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격한 언쟁이 오간 회의 이후 다시 한번 해임되고 말았다


메시미는 갈리에니를 찾아갔고, 8월 26일에 그를 파리 군정장관으로 임명했다



조프르와 갈리에니의 두번째 갈등이 곧 터져나왔다


갈리에니가 군정장관직을 받아들였을 때, 그는 조프르가 아니라 전쟁장관의 명을 받고 있었다


그는 파리를 방어하기에 부족한 자원 탓에 메시미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했으나, 메시미는 장관이였기 때문에 조프르를 찾아가야 했다


갈리에니는 군정장관직을 받아들이면서 현역으로만 구성된 3개 군단 즉 6개 사단을 요청했는데, 이는 10만이 조금 넘는 병력이다


그는 1914년 프랑스군의 전체 전력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었는데, 당시에 현역병으로만 편성된 사단은 46개였다


이는 프랑스군에서 제일 질 높은 병력의 16%를 파리 주변에 주둔시키는 데만 쓰겠다는 기괴한 요구였다


조프르는 병력이 너무 적은 상황에서 이동이 불가능한 부대를 만들고 싶지 않았기에 요청에 응하길 꺼렸다


갈리에니의 요구는 그가 자신의 임무를 얼마나 이해하고 있었던 건지 의문이 들게 한다



갈리에니는 혁명적인 사람이 아니였다


그는 수단에서 돌아온 후 1889년에 에콜 드 게르에 특별 시험을 치뤄서 입학했고, 이전부터 존재해왔고 그에게도 익숙했던 전통적인 개념들에 안주하게 되었다


1870년 이후 그의 군사적 능력은 식민지 탐험 중 부족들에게 공격받았을 때만 시험받았는데, 독일군은 이들과 차원이 다른 존재였다


그는 파리 군정장관으로서 다른 이의 방어계획에 맞춰야 했지만 자신의 계획을 변경하지 않았다


또한 당시에 존재했던 공성전 교리에만 집착했다


1915년 2월 말까지도 갈리에니는 독일군이 요새를 공격할 때 규정대로 하지 않았다고 불평해댔다


조프르는 회고록에서 그가 직위에 따라 교리를 준수해야 하긴 했으나, 파리 방어를 위해 해결해야 하는 문제를 이해하지 못해 개념이 철저하게 정적이였다고 비난했다


조프르의 접근법은 갈리에니와 전혀 달랐기에 야전에서 야전군으로 파리를 방어하길 원했다




갈리에니는 프랑스군이 후퇴하는 상황에서 파리를 방어할 준비를 마치기 위해 작업 속도를 늘리려고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러나 노력말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는데, 그가 회고록에서 비난한 수준보다 더 효율적이였고 열심히 일했던 미셸과 똑같은 문제를 겪고 있었기 때문이였다


갈리에니가 이루어낸 뚜렷한 혁신이나 속도 변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가 8월 27일부터 9월 6일까지 이루어낸 성과는 같은 시간동안 미셸이 이루어낸 성과와 차이가 없다


만약 독일군이 9월 4일이나 5일에 파리를 공격했다면 쉽게 성공했을 것이다


물론 갈리에니와 미셸 둘다 이 위급한 상황에 책임이 있지는 않다


한편 조프르는 땅을 포기하여 시간을 번 다음 가능한 빠르게 공세로 전환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는 공세가 가능하도록 8월 25일에 새로운 야전군(제6 야전군)을 좌익에 편성했다


그는 이를 우익의 병력을 가져와서 해냈는데, 이것은 전략적 상황을 바꾸기 위해 철도를 작전적으로 사용한 첫번째 사례 중 하나로 여겨진다







갈리에니에겐 여전히 3개 군단이 없었다


그러나 메시미의 후임 전쟁장관 밀르랑이 9월 2일에 조프르와 거래에 성공했다


그는 조프르의 제6 야전군을 갈리에니에게 줬고, 동시에 갈리에니의 파리 요새화지대 지휘권을 조프르에게 넘겼다


이 조치는 지휘할 병력이 생긴 갈리에니와 모든 병력을 이용할 수 있게 된 조프르를 동시에 만족시키는 듯했다


그러나 갈리에니는 야전군을 얻으며 GQG에 종속되자 당황했다


밀르랑이 이런 조치를 취하며 직접 언급한 공성전 교리 144조와 151조에 명시된 규정을 따라 갈리에니는 조프르의 부하가 되었고, 이 조항들을 곡해할 방법은 없었다


이 때부터 갈리에니의 역할은 두가지가 되었다


우선 그는 파리 요새 뿐만 아니라 야전군을 지휘하게 되었다


여기에 더해 250만 인구가 거주하는 파리와 그 교외의 일상생활 측면을 포함한 모든 공무를 거의 전적으로 책임지게 되어 매우 까다로운 상황에 빠졌다





우리는 한가지 흥미로운 점을 짚고 넘어가야 한다


갈리에니가 조프르에게 종속된 이후부터 상당한 양의 공식, 비공식 서신이 오가게 되었다


이 중에 비공식 서신은 두 사람의 관계를 잘 보여주기 때문에 흥미롭다


갈리에니가 하나도 빠짐없이 모든 편지를 '나의 친애하는 조프르에게' 라는 짧은 문구로 시작한 것이다


군대에서 이런 인삿말은 상급자가 하급자에게 사용하는 것이며, 이는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다


갈리에니가 이런 표현을 무의식적으로 사용했다 할지라도, 여기엔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갈리에니는 여전히 마다가스카르에 있었고, 조프르는 여전히 그의 부하였다


반면 조프르가 갈리에니에게 보내는 편지는 언제나 '친애하는 동지에게' 라는 말로 시작하는데, 이는 갈리에니를 자신과 동등한 입장으로 봤다는 의미이다


조프르는 감히 '나의 친애하는 갈리에니에게' 라는 표현을 쓰지 못했다


그렇게 할 권한과 명분이 있었음에도 말이다





이제 마른으로 가보자


제1차 마른 전투의 승자는 누구인가?


1914년엔 일반적으로 조프르가 승자로 여겨졌지만, 1920년대에 뒤집히기 시작하다 1930년대엔 갈리에니가 승자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갈리에니 지지자들의 열성적인 칭송은 표현에 절제라는 게 없었던 시대적 맥락을 고려해도 이례적인 수준이다


다음 몇 줄의 문장만 봐도 알겠지만, 그들의 언어적 거만함은 한계를 뛰어넘었다



'갈리에니는 전쟁의 이론적 규칙과 사관학교의 가르침을 깨고 폰 클루크의 독일군의 순간적으로 노출된 측면에 자신의 칼을 휘둘러 모든 것을 잃을 뻔 했던 순간의 불확실성을 극복하고 한쪽으로 기울어지고 있던 승리의 저울에 균형을 맞추었다'



조프르 지지자와 갈리에니 지지자들 간의 논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지만, 최근엔 조프르 쪽으로 승리의 저울이 기울어지고 있다






전투가 진행되는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하는 방법엔 두 가지가 있다


첫번째는 당시 사람들이 작성한 명령서, 보고서, 주고받은 전화통화와 편지, 회의록 등의 기록을 살펴보는 것이다


이는 느리고 체계적인 방법이다


어떤 면에선 필수불가결한 방법이지만, 여기에만 의존하면 오해가 생기기도 한다


진실에 접근하려면 전투의 배경이 되는 다양한 요소까지 전부 고려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배경의 영향을 활용하는 두번째 방법으로 주제를 조명하여 건조하고 사실을 담은 증거에만 기반한 역사의 한계를 보완해야 한다


그리하면 사건을 더 넓고 명확한 관점으로 보게 되고, 오해와 모순을 바로잡게 된다


그러니 그런 배경적 요소 몇가지를 보자



의사결정자들의 성격부터 시작하도록 하자


갈리에니는 과민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반사 신경이 과민했다


그는 무엇이든 즉흥적으로 결정하는 종류의 사람이였다


조프르는 훨씬 침착했고, 말수가 적고, 수다를 불쾌해하는 사람이였다


그는 결정을 내리는데 많은 시간을 쏟았고, 절대 서두르지 않으며 한 문제에 관련된 모든 사실들을 머릿속에서 여러차례 검토한 후에야 명령을 내렸다


그의 의사결정 과정은 매우 현대적이고, 그의 장교들은 자유롭게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며 서로 논쟁을 벌였다


많은 증인들이 말없이 의자에 앉은 채 참모들의 말을 경청하는 조프르의 모습을 묘사한다


그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일단 결정을 내리면 참모들은 자신의 결정처럼 받아들였다


조프르가 전화기를 혐오했다고 알려진 까닭은, 조급함 때문에 자기 뜻대로 하려는 사람과 사안을 충분히 검토하지도 않고 즉흥적으로 결정을 내리길 원하는 사람들에게 고통받지 않겠다는 그의 다짐 때문이였다


조프르는 문서를 검토하지도 않고 결정을 내리는 일이 없었다


그는 항상 상황을 넓은 관점으로 바라보았지만, 일단 마음을 정하면 절대로 바꾸지 않았다







조프르와 갈리에니가 진 책임은 명백하게 달랐다


파리 요새화지대 참모부는 오직 에펠탑을 중심으로 반경 30km까지, 요새화지대가 있는 파리 외곽에만 신경썼다


파리의 운명에 대한 책임은 어느 정도 갈리에니에게 있었지만, 조프르의 손엔 프랑스의 운명이 달려있었다


전후 조프르가 마른 전투의 승자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패배했더라면 누구의 책임이였을지는 안다고 말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갈리에니는 단순히 파리 근처에서 적을 제거하는 임무를 맡았지만, 조프르의 임무는 적을 국경으로 다시 밀어내기 위해 패배시키는 것이였다


9월 5일, 전투 바로 전 날, 조프르가 전쟁장관에게 개인적으로 편지를 보냈다


'곧 시작될 투쟁의 결과가 결정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으나, 실패로 끝나면 국가에 가장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승리를 위해 가용가능한 모든 전력을 한 치도 주저하지 않고 투입하겠습니다.'


이 편지를 쓴 사람은 갈리에니가 아니라 조프르고, 짊어진 책임의 성격상 이런 내용의 편지를 쓸 수 있는 사람은 조프르 뿐이다







5개 야전군(곧 6개가 되고 7개가 된다)이 베르부터 퐁투아즈와 더 서쪽의 루앵까지 뻗은 어마어마한 전선을 따라 배치되었다


이 야전군들은 파리 앞에서 일어난 전투 만큼이나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하지만 갈리에니는 이 전투들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사실 파리 군정장관이 알아야 할 이유가 없으므로 당연히 아무것도 몰랐어야 한다



모든 논쟁은 결국 하나의 질문으로 귀결된다


9월 4일에 갈리에니가 주도적으로 제6 야전군을 우르크 강을 향해 투입했는가, 아니면 조프르가 작전을 개시했는가?


두 사람이 결정을 내린 순간에 시차가 있다면 고작 몇시간이였다


이 질문에 대한 논쟁이 곧 논란에 휩싸였고, 논쟁자들이 불완전하거나 오류가 있거나 존재하지 않는 증거와 아무도 들은 사람이 없는 전화 통화를 근거로 자기주장을 펼쳤다


일부 논쟁자들은 기록보관소에서 아무도 찾아내지 못한 신비로운 문서를 근거로 들기까지 했다


리에 대위는 이 문제를 분석하는 최고의 논문을 썼으며, 그의 주장은 탄탄한 근거 위에 세워졌기에 설득력 있다


그는 조프르가 몇시간 차이로 가장 먼저 결론에 도달한 사람이므로 후손들은 그를 승자로 간주해야 한다고 결론내렸다


논쟁자들의 수많은 주장들을 다 살펴보기엔 여백이 부족하나, 독자 여러분이 리에 대위의 논문에서 직접 찾아볼 수 있다



그나저나, 애초에 조프르와 갈리에니가 한 일을 이런 식으로 분석할 필요가 있을까?


당연히 없고, 없는 이유는 많다


우선 총사령관은 조프르였지 갈리에니가 아니였다


9월 초에 일어난 모든 전투는 총사령관의 공식적인 승인이나 최소한 암묵적인 동의로 이루어졌다


총사령관이 두명인 군대는 존재하지 않기에 갈리에니의 지위가 아무리 높더라도 총사령관보다 높은 의사결정자는 아니였다


갈리에니는 이 사실을 알고 있었고, 받아들이지 못했다


만약 두 사람의 역할이 바뀌었다면 갈리에니는 분명히 조프르보다 훨씬 거만하게 굴었을 것이다


갈리에니는 식민지에서 경쟁자의 존재를 용납하지 않았다


조프르가 결정을 내리도록 갈리에니가 촉구했다는 주장으로 이의가 제기되기도 한다


사실 이마저도 가능성이 희박하다


조프르는 가능성을 끌어올릴 있는 모든 수를 쓰기 전에, 특히 제5 야전군이 준비가 끝났다는 신호를 보내기 전에 공격을 개시하는 위험을 지지 않았을 것이다


갈리에니는 측근들이 쓴 글을 근거로 들며 자신이 마른 북쪽을 공격해야 한다고 조프르를 설득했다는 주장을 펼쳤다


그러나 갈리에니는 조프르의 신중함을 우유부단으로 착각했을 뿐이다


뷔그네 중령은 이 문제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조프르는 부하들의 관점을 경청하고, 약간은 영향을 받고, 주장들을 저울질 해보고, 더 넓은 관점으로 검토한 후, 그 자신이 그럴 수 있는 유일한 위치였기에 어느 수준까지 고려하고 받아들일지 결정했다.'


이는 통찰력 있는 평가이며, 우리는 특히 부하라는 단어에 주목해야 한다



조프르는 제5 야전군이 공세를 취할 수 있는지 고민해야 했고, 생공 습지대에서 전투를 벌이면서도 적의 공격을 필사적으로 막아내고 있던 포슈의 상황을 고려해야 했다


하지만 갈리에니는 이런 상황들에 대해 알지도 못했다


랑르자크에게 제5 야전군 사령부를 이어받은 데스페레는 9월 6일에 전투를 재개할 준비가 끝났다고 조프르에게 보고했다


이 정보가 공격작전 개시에 유리한 쪽으로 저울을 흔들었다


따라서 마른 전투에서 데스페레의 역할은 아무리 낮게 잡아도 갈리에니의 역할만큼 중요했다


사실 조프르는 훗날 9월 7일에 반격을 개시하지 않아 후회한다고 밝혔다


9월 7일엔 독일군이 함정에 더 깊게 빠져있었을테니 말이다



조프르가 제7 야전군이 아닌 제6 야전군에게 공격을 허가한 다양한 이유엔 갈리에니의 압박과 제6 야전군을 동쪽으로 밀어붙이기로 한 갈리에니의 결정(그러나 GQG의 뜻에 따른)도 있을 것이다


사실 조프르의 열렬한 지지자들은 갈리에니의 조급함이 마른 전투를 망칠뻔 했다고 주장하기까지 하는데, 실제로 모누리는 8~10일동안 어려운 순간을 여러번 겪었다



게다가 마른 강은 베르과 파리 사이에서 벌어진 거대한 전투에서 가장 장관을 이룬 한 장면에 불과했다


우르크 강에서 벌어진 전투는 중요했지만 다른 전선에서 벌어진 전투도 그만큼 중요했다


마른 전투는 실제로는 프랑스 전투였으며, 승리의 열쇠를 쥔 사람은 갈리에니가 아니라 조프르였다


독일군이 후퇴한 원인은 마른 강에서 패배했기 때문이 아니라 전선 전체에서 패배했고, 후퇴하지 않으면 패배할 위기에 놓였기 때문이였다


그리고 그렇게 된 이유는 프랑스군 보다 지쳐있었고, 병참선이 위험할 정도로 길어져 있었고, 사상자로 인해 전투력이 크게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였다


이 모든 이유 때문에 지도의 화살표가 방향을 바꾸고 있었고, 갈리에니가 파리 근처에서 승리에 기여했더라도 다른 전투들은 그에게 아무 빚도 지지 않았다


갈리에니는 자신의 임무를 넓게 해석한 일류 요새 지휘관의 역할을 해냈다


그는 독일군이 남동쪽으로 방향을 전환했다는 사실을, 조프르보다 전선에 더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아마 더 빠르게 깨달았다


또한 그는 자신의 권한으로 가능한 범위 내에서 제6 야전군을 증원했다


갈리에니는 당연히 박수를 받아 마땅하지만, 대부분의 장군이 그와 같은 위치에 있었더라면 똑같이 했으리란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갈리에니의 회고록을 읽어보면 이 10일 남짓한 시기를 자신의 시련으로 여겼음을 알게 되리라


그는 자화자찬하며 전투의 결과의 모든 공을 자신에게 돌렸다


여기에 모든 내용을 인용하기엔 여백이 부족하다만, 회고록을 직접 읽어보면 무슨 뜻인지 이해될 것이다


그는 조프르의 모든 결정을 흠잡을 뿐만 아니라 그의 말을 왜곡하기까지 한다


조프르가 회고록에서 갈리에니 지지자들의 우상에게 이랬다면 어떤 말이 나왔을지 상상만 해도 두렵다



갈리에니는 자신이 총사령관의 명령을 받는 입장이였음을 어디서도 밝히지 않는다


그가 9월 3일에 조프르에게 보낸 사적인 편지엔 '나의 친애하는 조프르에게, 내가 당신의 명령을 받게 되었음을 알리는 편지를 전쟁장관께 받았소.' 라는 문장이 쓰여있는데도 말이다


그는 대신에 자신이 총사령관의 동반자였다는 암시를 뿌린다


갈리에니가 종속 관계를 감추려했다는 사실을 알아야 사건의 진상을 이해하게 된다


갈리에니가 조프르의 부하가 아니라면, 모든 결정과 사건과 명령은 전적으로 그의 비범한 재능과 계획, 권위, 천재성에서 비롯된 것이 된다


따라서 그가 마른 전투의 승자가 되며, 수학에서 사용하는 용어를 빌리자면 QED다


필자가 갈리에니의 회고록을 읽다가 낙서하고 싶은 충동이 든 용어가 QED다


조프르에게 아무 좋은 감정이 없었던 메시미는 갈리에니에 대한 피에르푀의 발언을 인용했다


'기적을 일으킨 사람은 자신의 서열을 신경쓰지 않았다.'


즉 요약하자면 이렇다


기적을 행한 자, 갈리에니!



갈리에니 파벌이 그가 조프르의 부하가 아니였다는 결론을 명백한 복음적 진실로 간주했다는 사실은 괴시의 글에서도 알 수 있다


'갈리에니는 주도적으로 행동했고, 군정장관의 권한을 행사해 모누리의 야전군에 공격을 명령했고, 후퇴하려는 총사령관에게 공격을 강요했다. 대중은 갈리에니와 요새군이 조프르의 지휘를 받는다고 착각하고 있었기에 이런 사실을 바로 깨닫지 못했다'


이건 실제로 일어난 일에 대한 소원가득한 미신이다


페르상, 르뇨, 르그로 또한 조프르에게 복수하기 위해 같은 접근법을 취했다


갈리에니는 속으로 이 장군들 만큼이나 조프르의 군사적 재능을 회의적으로 바라보았다


혹은 이 장군들이 조프르에게 무능을 이유로 해임당한 이후 그의 군사적 재능을 회의적으로 바라보게 된 만큼이나 회의적으로 바라보았다


무능한 참모들이 모여서 만든 무능한 참모부와 그에 보좌받은 무능한 사람이 어떻게 마른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냈다는 걸까?


조프르가 갈리에니의 부하였다는 사실이 파리 군정장관의 의견에 논리적 오류가 있는 신빙성을 더해주었다


기적의 날 이후로 두 사람의 관계는 심각하게 악화되기 시작했고, 의도적으로 상처에 소금을 문지르는 양쪽의 참모들과 정치적 하이에나들에 의해 상황이 더 심각해졌다



갈리에니가 전쟁장관한테 사적으로 보낸 편지들도 그가 자신을 총사령관의 부하로 여기지 않았다는 증거가 되고 있다


그 편지들 때문에 짜증나고 걱정스러워진 조프르는 즉시 그만두라고 요구했다


문제는 9월 7일에 갈리에니가 전쟁장관에게 현재 진행중인 전투에 대해 알림과 동시에 최근 사건들에 대한 사견을 덧붙인 편지를 보내며 불거졌다


'GQG에게 명확한 지시가 내려오지 않아 우르크 강을 일반목표로 하여 제6 야전군을 동쪽으로 전진시켰습니다.'


조프르는 이를 알고 바로 다음날에 전쟁장관에게 편지를 보냈다.


'파리 군정장관은 제 부하고, 정부와 직접 서신을 교환해선 안 됩니다.'


하지만 갈리에니는 무시하고 전쟁장관에게 계속 편지를 보냈다


정부는 다른 장군이 했더라면 용서하지 않았을 행동을 하는 갈리에니에게 관용을 베풀고 용인했다


갈리에니 진영은 조프르를 무너뜨리는 일에 착수했고, 상원의원 두메가 선두에 나섰다


두메는 포슈에게 '내가 전쟁장관이 된다면 조프르를 무능을 사유로 해임하고 갈리에니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할 거요.' 라고 이야기했다


이 말은 즉시 조프르의 귀에 들어갔다


하원의원 괴시 또한 갈리에니를 옹호하며 우상을 찬양하는데 생을 바쳤다







조프르가 1차 마른 전투 승리의 영광을 누리게 된 후, 그의 진영은 공격 보다는 방어에 집중했다


이러한 태도는 보통 패자보다는 승자에게서 보인다


특히 타르디외가 조프르를 보호하는데 앞장섰다



1914년 10월 10일, 뒤늦게 조프르가 친애하는 갈리에니에게 편지를 보내 마른 전투 때 파리 요새화지대에서 얻은 증원병력에 대한 감사를 표했다


그는 편지를 '충실하고 헌신적으로 당신의 성공을 기원'하며 매우 친근하고 격식없이, 그러면서도 이보다 더 크고 깊은 경의를 표할 순 없는 방식으로 마쳤다


이건 갈리에니에게 자기를 계속 무책임한 아랫사람으로 취급해달라는 부탁이나 다름없었다


조프르가 콤플렉스를 키우고 있었던 걸까?



하지만 조프르는 째째하게 굴 줄도 알았다


그는 1915년 9월 25일이 되어서야 갈리에니에게 1차 마른 전투의 공로로 군표창을 수여했는데, 그것도 전쟁장관 밀르랑의 요청으로 마지못해 했다


표창 수여식은 양쪽의 위계질서를 당사자는 물론 모두에게 보여준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된다


갈리에니의 수여식에서 조프르가 한 말엔 따뜻함이 이상할 정도로 부족했다


그는 의무적으로 해야할 말만 하고 끝냈다


갈리에니는 회고록에서 자신은 마다가스카르에서 조프르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수여식을 했다고 지적했다


그건 사실이지만, 정말로 그가 자신을 조프르의 아랫사람으로 생각한 게 아니라면 어째서 조언까지 무시해가며 표창을 받았는지 의문이 든다


이야기를 되돌려서, 조프르의 GQG가 작성한 마른 전투 기밀 문서엔 모누리의 야전군과 파리 요새화진지와 갈리에니가 취한 조치에 대한 언급이 전혀 들어가있지 않다


이게 사실을 왜곡한 건 아닐지도 모르지만, 명백히 은폐한 것이다


이 문서는 마른 전투의 승자에 대한 논쟁에 어떻게 불이 붙기 시작했는지 명확하게 보여준다






마른 전투에 대한 고찰을 마무리하며, 이 문제를 객관적으로 바라본 사람들의 말을 인용하겠다


포슈는 마른 전투의 승자가 조프르냐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당연히 조프르의 업적입니다. 조프르가 준비했고,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마른 전투는 분명히 위대한 승리였습니다. 조프르는 거기에 꼭 필요한 사람이였습니다.'


갈리에니는 어떻냐는 질문엔 이렇게 대답했다


'갈리에니 말입니까? 갈리에니는 자신이 때가 왔음을 알아챘다 주장했지요. 조프르가 그의 주장을 받아들이긴 했지만 결정을 내린 사람은 조프르입니다.'


스피어스는 다른 관점을 보였다


그는 영국인이라 프랑스인들의 분쟁에 끼어들지 않을듯 싶은데도, 조프르 지지자들보다 더욱 노골적인 주장을 펼쳤다


'갈리에니 장군은 자기가 마른 전투의 승자임을 증명하고 싶다는 불안한 열망 때문에 자신을 그 작전의 선동자로 묘사하기 위하여 실제로 한 것보다 훨씬 덜 훌륭한 역할을 스스로에게 부여했다.'







독일군이 후퇴한 직후부터 제6 야전군이 조프르에게 돌아갔고, 갈리에니에겐 주의를 분산시킬만한 것이 없어졌다


갈리에니에겐 그의영지와 요새화지대만 남게 되었지만 여전히 할 일이 많았다


전투가 끝난 직후인 9월 18일, 그는 보르도에 머물고 있던 전쟁장관에게 예전에 했던 요구를 상기시키기 위해서 편지를 보냈다


그는 요새에 주둔하는 병력의 숫자는 방어해야 할 둘레의 길이에 비례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 비율은 지난 40년 동안 참모 장교들이 결론내려왔던 수치였다


따라서 갈리에니는 짧은 계산을 마친 후 10개 사단이라는 인상적인 요청을 했다


이 10개 사단은 갈리에니 본인이 설명했듯이 순수하게 요새에 주둔시킬 목적으로 필요했다


그는 파리에 기동부대가 있어야 한다고 덧붙이며 6개 사단을 추가로 요구해 깊은 인상을 더했다


즉 합쳐서 25만명의 병력을 요구했다


밀르랑은 이 요구를 조프르에게 전달하지도 않았다



갈리에니는 그 편지에서 이렇게 불평했다


'현재 파리는 적이 공격해올 시 방어하기 위해 필수적인 자원을 조금씩 제거당하면서 바닥없는 물자 창고처럼 이용되고 있습니다.'


파리를 물자 창고로 이용하고 있던 사람의 이름을 추측해보라


밀르랑은 보르도에서 갈리에니의 편지에 동봉된 긴 요청 목록을 하나하나 검토한 후 답장을 보냈다


'그 일은 어떻게 야전군이 요새의 파리 수비군과 협력할지 계획할 때 상황과 전반적인 작전 진행을 고려하며 현재 모든 병력을 지휘하고 있는 총사령관에게 달려있습니다.'


요컨대 갈리에니는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갈리에니의 요구가 이상하게 들릴 것이다


하지만 그가 작전 수행에서 독립적인 역할을 하겠다는 비밀스러운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고 가정한다면 쉽게 설명 가능하다


실제로 그의 요구사항엔 야전군에게 필수적인 장비 목록이 포함되어 있다


그가 지휘하는 병력은 야전에 배치되는 용도가 아니였는데도 말이다


이들은 공성전 교리에 명시된 조항에 따라 요새화지대에서 30km 이상 벗어나는 게 금지되어 있었다


따라서 이들에겐 야전군의 보급에 필수적인 수송수단이 필요없었는데도, 갈리에니는 이를 요구했다



갈리에니의 요구가 받아들여지면 2개 야전군을 얻으면서전쟁장관의 부하로 남게 되는데, 그의 입장에선 조프르보단 밀르랑이 다루기 훨씬 쉬웠을 것이다


그는 자신만의 전쟁을 수행하고 무언가 역할을 하기 위해서 작전이 가능한 야전군을 원했다


괴시는 갈리에니가 저녁식사에서 기동군이 있어야 전쟁을 종결시킬 수 있다 말했다고 증언한다


전쟁 전엔 갈리에니를 만날 때마다 칭찬세례를 퍼붓곤 했던 푸앵카레는 회고록에서 이렇게 증언한다


'그는 별개의 군대 2개를 만든 다음 하나를 지휘하고 싶어하는 듯 했다.'



이 요구가 조프르를 밀어내고 무대 중앙에 올라서려는 갈리에니의 뿌리깊은 욕망을 보여주고 있는 게 아닐까?


갈리에니는 1915년 전까지 상원과 하원의 군사위원회에 기동군을 창설하자고 끊임없이 헛되이 요구했다


그가 기동군의 사령관으로 누굴 염두해두고 있었을지는 말할 필요도 없다







1914년 9월 24일, 조프르가 밀르랑에게 Ad Latus를 포슈로 교체해달라고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는 포슈를 이렇게 칭찬했다


'포슈 장군은 인격과 군사 사상을 고려했을 때 타 지휘관들과 비교하지 못할 정도의 능력적 우위를 점하고 있다.'


심지어 조프르는 갈리에니 때와는 달리 포슈를 곁에 두려고 했다


밀르랑과 정부는 현재 진행중인 작전이 끝날 때까지 이 요구를 비밀로 한다는 조건으로 Ad Latus 교체 요청을 받아들였다


후방에서 서류 작업만 하게 될 것을 우려한 포슈의 거부로 결국 결정이 내려지진 않았다


갈리에니가 이 소식을 들었을까?



조프르는 전쟁장관에게 보내는 또다른 편지에서 파리 방어와 관련된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그는 갈리에니가 요새화를 완료하기 위해 향토사단까지 요구하자 전쟁장관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이번에는 갈리에니의 이름을 직접 거론하며 호통을 쳤는데, 보고 느낀 점을 말해보라


'갈리에니 장군이 제시한 이유들은 주목할 가치조차 없어 보입니다. 우리 전선이 강화될수록 파리 전쟁장관이 우려하고 있는 가상의 위험이 줄어들게 됩니다. 모든 사령관들이 각자 해야할 일을 하고 있습니다. 갈리에니 장군은 만약 요구사항이 변하면 저에게 알려야 할 것이며, 저는 그를 만족시키기 위해 해야할 일을 할 것입니다.'


조프르가 보내는 편지의 어조는 전례없이 건조해졌고 비정상적으로 격렬해졌다.


여러 알려지지 않은 사건들, 특히 마른 전투의 승자에 관한 논쟁이 두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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