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예인 왕망에게 패배한 고구려 추는 누구일까?[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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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쿠로 댓글 0건 조회 53회 작성일 24-03-14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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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들어가기 전에, 고구려 선대 왕들의 기록은 술작이 있다는 점을 미리 이야기하고 들어가야 한다.

실제 고구려의 기틀을 많이 정비한 것을 보이는 제6대 태조대왕은 (삼국사기에도 태조왕이라고 특히 표기됨) 기록상 118세를 산 것으로 보이니 말이다. 요즘에서도 118세는 살기 어렵다. 믿기 힘든 이야기이므로 신뢰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금석문에서도 보이는 게 있다.



광개토대왕릉비.JPG 왕망에게 패배한 고구려 추는 누구일까?

광개토대왕릉비는 당대 고구려인들이 쓴 금석문이므로 당시의 인식을 그나마 정확하게 알 수 있는 귀한 자료다.


여기에는 이런 글귀가 있다.


....17세손에 이르러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이 18세에 왕위에 올라....

삼국사기 기준으로는 광개토왕은 13세손으로 되어 있다.

실제 광개토왕은 고구려 왕으로는 19대 왕이다. 조금 차이가 있다.

(물론 왕 기준으로 17대가 아니라는 해석도 있다)



이렇게 고구려 왕가에서 술작을 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글을 읽어 주기를 바란다.

그만큼 초기 고구려사는 미스테리한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먼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유리왕31년의 기사를 보면....


31년(12) 한의 왕망이 우리의 병력을 징발하여 오랑캐를 정벌하려고 하였다.

(중략)

부여와 예맥이 다시 일어나면 큰 근심거리입니다." 하였는데 왕망이 듣지 않고 엄우에게 명하여

이를 공격하였다.

엄우가 우리 장수 연비(延丕)를 유인하여 목을 베어 머리를 수도로 보냈다.

(양한서와 남북사는 모두 구려후(句麗候) 추(騶)를 유인하여 목을 베었다고 하였다.)

(하략)





다른 기사도 보자.



왕망의 초에 고구려 군사를 징발하여 호(흉노)를 정벌하게 하였으나 가지 않으려 하여 강압적으로 보냈더니, 모두 도망하여

중국의 군현을 노략질하였다.

요서의 대윤, 전담이 그들을 추격하다가 살해되었다. 그 책임을 구려후(句麗候)()에게 전가시켰다.

(중략)

왕망은 그 말을 듣지 않고 우에게 (고구려를 치도록) 명하였다.

우는 구려후 도() 를 만나자고 유인하여 그가 도착하자 목을 베어 그 머리를 장안에 보내었다.

왕망은 크게 기뻐하며 천하에 포고하여 고구려란 국호를 바꾸어 하구려라 부르게 하였다.


<한서 왕망전>




한자가 추/도가 비슷하다. 그렇다면 고구려의 대표격 인물로 보이는 이 추라는 사람은

누구이길래 머리가 잘렸으며, 고구려의 국호까지 하구려로 불리게 만들었을까?



1. 장수 연비=구려후 추


삼국사기 김부식은 당시에 남아 있던 여러 가지 역사서를 참고하여 글을 쓴 것으로 잘 알려져 있기에,

삼국사기에서만 나오는 연비라는 인물이 눈에 띈다. 중국계 역사서인 한서에는 나오지 않기 때문에 관심이 간다.

국내 사서에는 목이 잘린 주체가 연비라는 인물로 나오기 때문에 개연성이 있다.


왕망이란 사람은 전한을 멸망시키고 신나라를 세운 인물. 국제정치로 보나 내부정치로 보나

명분이 많이 필요했음이 틀림이 없다. 중국 군대를 이끌었을 엄우도 전과를 과장했을 확률이 있으므로,

고구려 장수 연비를 사로잡아 목을 베었는데, 구려후 추로 전과를 과장했을 것이라는 설이다.



* 그렇다면 당시에 있는 구려후 추라는 사람은 누구일까는 의문이다.




2. 유리명왕 = 구려후 추


이 기사를 보면 서기 12년경에 구려후 추가 패배하는데, 이 때 고구려 왕은 유리왕이다.


하지만 유리왕이 목이 잘린 것으로 보면 문제가 되는 부분이 있다. 삼국사기에는 유리왕이 서기 18년에 사망한 것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기록을 보자.



주몽이 죽자 여달이 대를 이어 즉위했다. 여달이 죽자 아들 여율이 대를 이어 즉위했다. 여율이 죽자 아들 막래가 즉위했고, 이어 부여를 아울렀다. 막래의 자손에 계속 이어져 궁에 이르렀다.

<위서>



여기서 막래가 부여를 아울렀다는 기록 등을 보았을 때 학계에서는 막래는 대무신왕으로 해석하는 것이 지배적이다.(노태돈)


그렇다면 여달은 2대 왕이니 유리명왕일 것이다. 여율은 누구일까?


유리명왕이 12년에 패배하여 목이 잘려 죽고, 그 아들 여율이 18년까지 즉위하다가 모종의 이유로 죽거나 그만두고

대무신왕이 뒤를 이은 것을 아닐까?


고구려인들은 나라 이름까지 강제 개명당한 치욕을 숨기기 위해 '여율'을 역사에서 지우고,

목이 잘린 사람을 장수 연비라고 바꾼 것을 아닐까?



3. 추모왕= 구려후 추


고구려의 창립자인 추모왕의 앞글자와 비슷하다는 게 눈에 띈다. 고구려 당시에도 동명성왕 내지 동명왕이라는 표현보다

추모왕이라는 표현을 대부분 사용했기 때문에 그렇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추모왕의 사망 연도는 기원전 19년. 이 기사와는 30년 차이가 난다.


<삼국사기> 에서는 20년 정도 오류가 있다고 보기도 하는데,

(대무신왕 모친이 송양의 딸이라고 하는데 나이가 맞지 않다)

이러면 말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추모왕은 <구삼국사> 기록에 의하면 기원전 58년에 태어난 인물이다.


추모왕이 구려후 추라면 70대 노인이라는 이야기인데 믿기가 참 어렵다.


일단 중국이나 일본에서 고구려가 기원전 30~40년대 사이에 건국된 것은 검증이 되니 기원전 58년생이라는 것은 신뢰할 만 하다.


만약에 추모왕이 구려후 추라면 고구려인들이 국가적 치욕을 숨기기 위하여


왕들의 생년 및 재위기간을 조작했음이 틀림이 없다. 고구려를 세운 왕이 목이 베인 것이니 말이다.



노태돈 교수는 중국의 기록보다, 김부식이 참고한 것으로 보인 자체 전승된 삼국사기의 왕력이

더 신빙성 있다고 보므로, 추=추모이지만 이것은 고구려 지배자를 의미하는 호칭 정도로 보았다.



과연 전쟁에서 패배하여 잡혀 목이 베인 인물인 구려후 추는 누구일까?



성과와 명분이 필요했던 중국의 프로파간다일까?


아니면 국가적 치욕을 숨기기 위한 고구려인들의 술작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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