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예인 발해, 그 이후 - 정안국 파멸의 카운트다운[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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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푸히헤헤햏ㅎ 댓글 0건 조회 69회 작성일 24-05-05 2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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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역사적인 검증된 확실한 사실이 아니고, 제가 독자적으로 연구한, 제 연구결과이며,

오류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먼저 밝힙니다.



전편 - 970~981년 사이 정안국의 미스터리

-https://www.fmkorea.com/6990420603






전편에 이은 글입니다.

우선 전편에는 970년부터 981년 사이에 정안국에서 있던 일들을, 사료를 동원하여 풀어 보았습니다.



그 결과를 이야기하자면, 970년에 오랜만에 정안국이 역사에 다시 등장한 이후, 연파의 반란이 일어나고, 정황상 이 때

오씨가 열씨에게서 정안국의 왕위를 찬탈 했으며, 이후 정안국이 그 연파의 반란에서 연파를 도운 이후 요에게 979년에 공격을 당하고, 이후 981년에 오현명이 왕위를 이은 직후부터 다시 시작합니다.




지금부터 다룰 981년은 역사에 정안국이 멸망했다, 혹은 결정적인 피해를 입어 재기불능이 되었다. 라고 추측되는 986년에서 5년 전입니다.




우선 지금까지의 상황을 간략히 다시 설명해보자면, 연파가 975년에 황룡부(구 부여부)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며, 요나라는 병력을 파견했으나 결국 연파를 잡지는 못하고 돌아갔습니다. 이것은 연파와 바로 지근거리에 있던 정안국의 영향력과 도움이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요군 역시 연파 단독은 이길 수 있기 때문에 군을 보내 패배한 연파를 추격한 것입니다. 그런데 추격까지 하고 포위를 했는데도 물러난 것은, 연파 단독이 아니라 누군가가 연파를 도왔기 때문에 더이상 연파를 공격하다가는 요군 역시 위험해지기 때문입니다. 그 주체가 누구인지 생각해보면, 연파가 달아난 곳인 올야성의 근처에 있는 정안국 세력밖에 없습니다.



연파는 반란에서 패하여 우선 올야 지역으로 철수 하였으며, 자신의 안위와 요에 대한 지속적인 항전을 위하여 정안국에 SOS를 쳤다고 느껴지며, 정안국 역시 황룡부에서 요의 벼슬을 지낸 적이 있으며, 황룡부의 병력을 빼내 온 연파를 받아들이면 세력 확장과 충분한 선전이 가능하기 때문에 받아들인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연파는 정안국의 오씨 세력과 손을 잡고 열씨 세력을 몰아냈으며, 오씨는 정안국의 왕위를 얻고 연파와 더욱 공고하게 연합을 하였을 것이라 추측이 됩니다. 그리고 윗글에서 언급한 대로, 976년에 정안국이 요를 공격한 것은, 연파의 영향(연파가 찬탈을 도와주었으니, 연파가 원하는 대로 요나라를 공격한 것) 혹은, 왕조가 바뀌면서 국민들에게 무언가 보여주기 위한 활동이 아니었나 생각이 됩니다.



그 결과, 거란은 973년부터(전편에 빼먹었는데, 973년에도 정안국이 요를 친 정황이 보입니다.) 976년에 이르기까지 거란이 송과의 전쟁에 바쁜 틈을 타서 옆구리를 찔러대는 정안국을 손 봐줘야겠다 생각 했는지, 정안국을 드디어 공격해 버립니다. 그리고 여기서 요경종이 참여한 장수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다는 사실이 등장하고, 같은 시기인 979년에 고려에 수만의 발해인이 달아난 것을 보면 979년에 거란이 정안국을 한 번 친 것은 거의 확실해 보입니다.



따라서 전편에 나온 오현명의 송태종에 보내는 글처럼, 정안국은 대대적인 요의 침입을 받았으며, 어찌어찌 막아는 냈으나 나라 자체가 상당한 타격을 입었고, 이를 막아낸 오현명의 할아버지가 사망하고 오현명이 왕위를 이어받는 시기인 981년에 송에 사신을 보낸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리고 이번 이야기는 981년부터 계속됩니다.




오현명에게 서신을 받은 송태종은 안 그래도 976~979년 사이에 있던 요와의 전쟁에서 거나하게 요에게 물을 먹고, 목표달성도 하지 못한 상태로 물러났기 때문에, 후방에 있던 나름 강한 나라(라고 알려져 있는)인 정안국이 SOS를 치자 매우 기뻐하며 글을 보냅니다.




『송사』 491권 열전, 정안국 항목 中


-황제께서 조서로 답하여 이르길, 정안국왕 오현명에게 이른다. 여진 사신이 이르러 올린 표문을 받았다. 딤이 예전에 수조고 내린 유지에 또한 감격했음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대는 멀리 있는 나라의 큰 우두머리이자 이름난 왕의 후손으로 돌연히 마한의 땅을 차지하여 경해 밖에 있는 탓에, 강한 적에게 병탄당해 그 옛 땅을 빼앗기고도 맺힌 원한을 풀지 못했으니, 쌓인 울분을 어떻게 씻을 수 있겠는가. 더구나 더 흉포한 오랑캐가 아직도 전갈의 독기를 뿜어내기에 군사를 출동시켜 잠시 정벌하였더니 무릇 하늘의 재앙이 널리 퍼져 연달아 패하고 있으니 멸망을 기다릴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짐이 이미 변경 고을들에 강력한 병사들을 널리 주둔시켜 놓았고 추운 겨울을 넘긴 후 바로 토벌할 것이다. 그대가 만약 능히 여러 대의 치욕을 생각하여 미리 온 나라의 병사에게 알려 내가 거란의 죄를 토벌할 때에 맞서 그대가 복수하려는 뜻을 펼친다면, 북방의 사막이 평정된 후 관작과 상을 내이 것이다. 마땅히 나라를 길이 보존할 계책을 생각해서 호기를 놓치지 말라. 더구나 발해가 조정의 교화에 귀부하길 원하고 부여도 이미 적정을 배반하였으니, 그대의 묵은 복수심을 떨쳐 협력하여 함께 정벌하기로 한다면 분명 큰 공을 세울 것이다. 아직도 망망한 바다에 가로막혀 사신을 보낼 겨를 없지만, 간절한 마음이야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라고 하였다. 조서를 여진 사신에게 부쳐 가지고 가서 정안국에 주도록 하였다.




송태종이 정안국의 사신을 받아 표문을 읽은 것은 981년 겨울로 나와 있습니다. 아마 이 답장이 오현명에게 향했을 때는 982년 연간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그런데, 편지 한 장 받은것 치고는 너무 좋아하는데, 여기에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오현명이 보낸 편지 한 장에 송 태종이 저렇게 좋아하고 기뻐하며, 무한 신뢰를 보내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1.바로 얼마 전에 요나라와 싸워서 정말 안타깝게 실패했기 때문.


2.'발해염부왕' 역시 송나라에게 협조를 하고 있던 와중에, 정안국까지 합세하겠다는 뜻을 밝혔기 때문.

(이로 인해 이번에야말로 요나라에 크게 이길 수 있겠구나 하는 들뜬 마음까지 합해서.)





『문헌통고』 327권 사예고 정안 항목 中


-태평흥국 연간(976~984)에 태종은 먼 곳을 경영할 방략으로 호로를 치기 위해 그 나라에 조서를 내려 기각지세를 펼치라고 명하였다. 그 나라(정안국) 역시 원수들의 침해와 업신여김을 원망하고 있는 터라, 중국이 바야흐로 군사로서 북벌하려는 것을 듣고 왕사에 의지하여 원한을 풀려 하였는데 (송 태종은)조서를 받고 크게 기뻐하였다.(후략)




별 거 아닌거 같은데 왜이리 기뻐하냐? 라고 생각하기 이전에 송태종은 재위기간의 대부분을 요와의 전쟁에 썼으며, 요나라와 그만큼 치열히 싸워 왔으며, 최후 역시 대요 전쟁에서 생긴 부상이 도진 것이라는 이야기까지 있을정도로 거란족과의 전쟁에 신경을 많이 쓰던 황제였습니다.



그리고 이 981년 겨울에 오현명이 보낸 편지 앞에 송태종이 '오사성 부유부 발해염부왕'에게 서신을 보낸 것을 우선 기억해야 합니다. 이 오사성 부유부 발해염부왕은 지금도 누구인지 많은 의견이 엇갈리는 사람이며, 학자들마다 다른 의견을 내놓고 있지만, 대체적으로는 975년에 반란을 일으키고 무사히 탈출하여 본인 독자세력을 만들어 정착하는 데 성공한 연파, 혹은 현재 발해부흥국 중에 제일 큰 세력인 정안국의 왕인 오현명, 혹은 제3의 인물 중 하나를 뜻한다는 해석이 많습니다. 저는 발해염부왕은 연파라고 생각합니다. 우선 왜 발해염부왕이 연파인지 알아보기 전에, 송태종이 연파에게 보낸 서신을 소개해 보겠습니다.





『송사』 4권 태종본기 中


-태평흥국 6년(981) 7월 병오일에 발해 염부왕에게 조서를 내려 거란 토벌을 돕게 하였다.



『송사』 491권 외국열전-발해국 항목 中


-태평흥국 6년(981)에 오사성 부유부의 발해염부왕에게 조서를 내려 이르기를, 짐이 비구를 이어받아 사해를 다 소유하였으니 온 천하가 따르지 않음이 없게 할 것이다. 더구나 태원 지역은 국가의 보장인데, 최근에 거란에게 부당하게 절취되고 마침내 승습되기까지 하여 요나라에 기대어 후원이 되었고, 여러 대가 지나도록 주벌을 벗어나 있었다. 짐이 지난해에 친히 정예군을 거느리고 모든 장수들을 대동하여 병문의 외딴 성채를 함락시켜 흉노의 우비를 끊어 버리고 더구나 조벌하여 백성들을 소생시켰다. 벌레같은 북쪽 오랑캐들은 도리에 어긋나게 원한을 품고 함부로 차츰차츰 잠식하여 우리 국토를 침범하므로, 이전에 군사를 출동시켜 역습해 목을 베고 노획한 것이 매우 많았다. 이제 북을 울리면서 깊숙히 쳐들어가 돗자리 말듯이 신속하게 진군하여 그 용정을 불사르고 오랑캐를 크게 무찌르려 한다.


평소에 그대의 나라는 원수들과 인접하여 있어 병탄되면서도 힘으로 능히 제재하지 못하고 그대로 복속되어 땅을 떼어 주며 시달리고 있다고 들었다. 짐의 신기(신령한 깃발)가 적을 쳐부술 때 이웃나라에게 울분을 씻을 기회가 되니, 부족을 전부 출동시켜 우리 병사의 선봉을 돕도록 하라. 그 전멸을 기다려 성대하게 상을 내리겠다. 유주와 계주는 다시 중원에 귀속시키고, 북방 사막 바깥은 전부 그대에게 줄 것이다. 가능한대로 협력하라. 짐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라고 하였다. 당시 송이 군을 크게 일으켜 거란을 정벌하려 했기에 이런 조서를 내려 황제의 뜻을 알린 것이다.





우선 오사성은 현재 역사가들에 의해, 연파가 웅거한 성인 올야성과 같은 성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부유부'는 연파가 거병한 '부여부'와 상당히 흡사한 느낌이 나고 있습니다.(일각에는 발해염부왕의 '염부' 역시 '연파' 와 비슷한 발음이 난다고 주장하기는 합니다.) 이것으로는 연파라고 추측하기 힘든 거 아니냐? 발음장난 아니냐? 하는 의견 역시 존재합니다.



하지만 우선 981년에 송태종이 염부왕 말고도 오현명에게 직접 이름까지 언급하면서 서신을 보낸 점, 그리고 이 당시에는 발해 잔존세력 중에 우두머리로 불리울 사람은 아무리 찾아봐도 정안국의 오씨 가문 말고는 연파밖에 없었다는 점을 위의 추측과 함께 들면, 발해염부왕은 연파가 맞다고 생각합니다. 오현명과 염부왕에게 각각 서신을 보낸 년도가 똑같은 981년이고, 오현명이 염부왕이 맞다면 굳이 오현명을 오현명이라 칭하지 않고 염부왕이라 칭했을 것입니다.



또한 이 편지를 받는 주체가 연파가 확실하다는 전제를 하면, 연파는 975년에 반란을 일으킨 이후, 요나라에게 물을 세번이나 먹이고 미리 송과 연락하여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정안국과 연합하여 요의 침공을 수차례 막아낸 영명한 인물이자 발해인에게 있어서는 매우 유능한 인물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981년에 송에서 연파에게 편지를 보냈다는 것은, 그 이전에 연파가 송과 연락을 하고 있었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 연파는 군 사령관으로서의 능력도 출중하고, 정세를 읽을 줄 아는 눈도 있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만약 발해 전성기에 태어났으면 정말 대단한 인물이 될 사람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979년에 요나라에서 귀순해온 '대난하'의 존재도 있었기 때문에, 송 태종은 대난하, 염부왕, 정안국의 오현명 이렇게 셋이 송을 돕는다면 요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문헌통고』 326권 사예고 발해 항목 中


-송 태평흥국 4년(979)에 태종이 진양을 평정하고 군을 유주로 옮겼다. 그 추수(추장, 우두머리) 대난하가 소교 이훈 등 16명과 부족 300기를 거느리고 와서 항복하였다. 대난하를 발해도지휘사로 삼았다.




그리하여 송태종은 요에서 항복해와서 요의 내부를 잘 알고 있는 대난하, 그리고 마찬가지로 요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요를 들쑤셔 놓은 장본인인 연파, 요에게 이를 갈고 있는 발해 잔존세력 정안국의 왕인 오현명 이렇게 세 세력을 데리고 요나라와 다시 전쟁을 하면 이길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한 것이 확실해 보입니다.


실제로 송태종은 오현명에게 글을 쓰기 이전인 981년 정월에 역주에서 요군을 깨뜨렸으며, 982년 연간에는 당홍구와 부주, 삭주에서 요군에게 승리합니다. 그리고 송태종은 이에 고무되어 진짜로 이들을 데리고 요나라와 전쟁을 다시 시작하려 했으며, 그를 위해 진짜로 서신을 보내어 정안국과 연파에게도 호응하게 한 것이 드러납니다.





『송사』 491권 외국 열전 발해국 中


-태평흥국 9년(984) 봄에 대명전에서 연회를 베풀고 대난하를 불러들려 오래도록 위무하였다. 황제가 전전도교 유정한에게 이르기를, 난하는 발해의 큰 우두머리로, 몸을 공손히 하여 우리에게 귀부하였으니 그 충순함을 아름답게 여긴다. 무릇 오랑캐의 습속은 말달리기를 즐기기 때문에, 높고 푸른 하늘이 되는 늦가을을 기다렸다가 수십 필의 준마와 함께 교외로 나가 사냥케 하여 본성을 따르게 하라. 라고 하였다. 대난하에게 민전 10만과 술을 하사하였다.



『거란국지』 6권 경종 항목 中


-건형 6년(※건형은 요경종의 마지막 연호로서, 979년에서 그 아들인 요성종의 초기인 983년까지 쓰였습니다. 983년에 연호가 통화로 교체되었기 때문에 983년은 성종의 통화원년이 됩니다. 그래서 건형 연호는 4년이 끝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건형 6년이라 얘기한 것은 사서를 쓴 이가 실수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건형 6년이 실제로 존재했다고 치면 984년입니다. 그리고 이 984년은 위의 송사의 송태종의 발언이 나온 년도와 동일합니다.) 가을 7월에 송태종이 북침을 하고자 하여 발해왕에게 조서를 보내 병사를 일으켜 상응토록 하였다. 그러나 발해는 요가 두려워 끝내 이르지 못하였다. 사신을 보내 발해를 책문하였다.




이 두개의 사료를 살펴 보면, 송태종은 대난하, 연파, 정안국이 자신과 함께 싸워줄 것으로 기대하고 전쟁을 준비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대난하를 불러 위로하고 준비하게 하고, 동시에 발해 세력들에게도 연락을 하여서 요를 공격할 준비를 하려 하는 것이 보입니다. 하지만, 송태종이 이렇게까지나 기대를 걸었는데도, 981년에 송에게 굽신하면서 열심히 함께 요를 쳐달라고 한 정안국과 연파는 둘다 쌍으로 별 반응이 없었습니다.


물론 요가 그들보다 강대한 것도 이유 중 하나겠지만 저는 여기서 하나의 루트를 더 제기하려 합니다. 그것은 바로, 송의 연락은 정상적으로 전해졌지만, 송과 발해 잔존세력이 불온한 연락을 주고받고 있었다는 것을 요가 눈치 채었으며, 그로 인해 샌드위치 신세를 당하지 않기 위해 요가 정안국을 친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우선 984년 2월에 '여진'(이라 써놓고 정안국)을 친 것으로 여겨지는 기록이 보입니다.




『요사』 10권, 성종본기 中


-(983년) 겨울 10월(중략) 병오일에 선휘사 겸 시중 소포령(참고로 소포령은 오기이고, 실제 인물 이름은 야율포령입니다.)과 임아 소긍덕 등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동방을 토벌하에 하고, 깃발, 북, 은부를 내렸다.


-(984년)2월 계사일에 국구장 창덕군절도사 소달람이 조근하였다. 갑오일에 장군 야율적불에게 봄옷과 속대를 하사하였다. 병신일에 동로행군선휘사 야율포령이 아뢰길, 여진을 토벌하여 이겼다고 하였다. 이에 사자를 보내 손을 잡고 격려의 말을 전하게 하였다.


-(984년)여름 4월 정해일에 선휘사 동평장사 야율보령과 도감 소근덕이 여진을 정벌하여 승전보를 울리니 야율보령에게는 겸정사령을, 소근덕에게는 신무위대장군을 제수하고 각각 금기와 여러 물품을 하사하였다.




거란에서 '동쪽'에 있는 적은 주로 거란에 복속하지 않는 생여진을 의미하는데, 이들은 정황상 정안국과 가까운 관계에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어쨌거나, 정안국을 손 봤던, 정안국과 협력관계인 여진을 공격하여 약화시켰던, 정안국 세력의 약화와 직결되는 문제인 것은 확실합니다.(둘 다 동시에 쳤을 가능성도 존재합니다.)



저는 이 983~984년의 야율포령의 공격이 진짜로 정안국과 그 휘하 여진을 공격한 것이 맞다고 보고 있습니다. 다만 그 피해규모는 나라가 흔들릴 정도로 크지는 않았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2년 뒤인 986년에 거란이 정안국을 쳐서 상당한 양의 포로와 물자를 얻은 것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어거나, 정안국은 이 시기에 요에게 공격당하여, 엄청난 피해를 입지는 않았지만 요를 공격할수 있는 여력을 상실했음이 분명합니다.하필 이 때 요나라에게 공격당하여 피해를 본 상황이기 때문에 당연히 7월에 송태종에게서 온 조서를 받들어 함께 요를 공격할 수가 없던 것이 아닐까 합니다.



이를 모두 생각해보면, 요에서도 정안국과 여진의 세력을 상당히 신경쓰고 있었으며, 송과 이들이 연합을 하여 자신들을 협공하는 상황이 오는 것을 경계하고 있었던 것이 확실하다고 느껴집니다. 그리고 요 역시 손을 놓고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정안국과 연파의 공격은 생각외로 요나라를 골치아프게 한 데다가 그 빈도가 970년대 이후로 늘어나고 있었으며, 요나라는 점점 진지하게 나라의 역량을 걸면서 승부를 걸어오는 송나라가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요나라가 송을 잘 막아내고, 공격을 하여 많은 성과도 냈지만, 송은 그 특유의 덩치와 끈질김, 경제력을 가지고 요나라를 끝없이 노리고 있었습니다. 이 때 잘못 판단을 하거나, 대패라도 한번 하여 나라의 역량이 꺾여 버린다면,남쪽의 송, 동쪽,동남쪽의 정안국,연파,여진세력에게 요나라는 어떤 일을 당할 지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게다가 송의 황제는 일생동안 요나라를 죽일 듯이 달려들던 송태종이었고, 요의 동쪽에서 요를 언제든 후려칠 준비를 하고 있는 연파는 요나라의 반란자 출신이라 요나라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은 둘째치고, 상당히 유능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요나라 역시 이 시기를 잘못 보낸다면 큰일이 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요나라 내지에 있다가 정보를 가지고 송으로 달아난 대난하의 존재 역시 매우 위험했으며, 하필이면 이 시기에 경종이 982년에 사망하고 성종이 어린 나이에 황제에 오른 상황이었습니다. 요나라 입장에서는 절체절명의 위기로 이어질 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기민하고 영민한 대응을 필요로 했습니다. 이 상황은 해결하기 매우 힘들어 보였습니다.




하지만 요성종과, 섭정을 하던 그 어머니 승천태후는 결코 무능한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상황을 인지하고 있던 것으로 파악되며, 실제로 984년에 송이 정안국에 도움을 요청할 것을 예측하여

정안국을 먼저 쳐서 힘을 빼 놓아 협공을 무마시켰습니다. 그리고 정안국과 발해 잔존세력들은 이대로 계속 내버려 두면, 요나라에게 큰 화근이 될 것으로 여겼는지, 985년 겨울에 요나라는 드디어 행동을 개시합니다.




『요사』 10권 성종본기 中


-(겨율 11월)병신일에 동쪽 여진 정벌을 나간 도통 소달람과 보살노가 군대가 지나갔던 지역의 지도와 물산을 가져와 바쳤다.





여진 정벌(사실상 요사는 정안국을 인정하지 않고 여진이라고 뭉뚱그려 부르기 때문에, 요사에 여진 정벌이라 나오면

거의 대다수는 정안국 공격입니다.)을 다녀온 이들이 지도와 정보를 바쳤다는 것은, 요나라 황제가 정안국을 공격할 의사를 확실하게 비추었다는 증거가 됩니다. 요나라는 이 때 제대로 역량을 동원하여 각 잡고 정안국을 공격하여 옆구리의 화근을 없앨 준비를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986년 정월, 요군은 드디어 대대적으로 정안국을 침공하였습니다. 이 986년은 우리에게 정안국이 멸망한 년도. 혹은 정안국이 멸망은 하지 않았으나 치명타를 맞은 해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이 986년의 정안국 침공은, 발해 멸망 이후에도 중국 동북지역(만주지역)에서 어떻게든 세력을 유지하고 있던 발해잔존세력이 이 986년을 기점으로 결정타를 맞음으로서 그 세력이 급격하게 약해지고 결국은 서서히 사라지게 되는 시작점이 된 사건이기도 합니다. 지금까지 나라 틀을 제대로 갖추고, 나름 요나라에 열심히 대항하여 싸우던 정안국은 이후 결국 회복을 하지 못하고 역사 속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공교롭게도 그 전조인 발해 역시 926년 정월에 사실상 멸망했는데, 정안국 역시 정확히 60년 이후인 986년 정월에 제대로 치명타를 맞습니다. 그리고 둘 다 이 완전히 멸망한 것은 아니고, 잔존세력이 남아서 버텼으나 결국 사라지게 되는 것 역시 비슷해 보입니다. 그래서 더 안타까움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슬픔의 986년부터는 다음 편에서 다루겠습니다.






오늘 글 요약


1.송태종은 976~981년 사이에 요나라와 혈전을 벌였으나 별 성과도 거두지 못하고 물만 먹었다.


2.그러한 송태종에게 요 내지에서 직접 항복해온 대난하, 그리고 송에게 협력하겠다고 연락한 발해잔존세력의

오현명과 연파가 접근하자 송태종은 이를 호기로 여기고 이들과 함께 요나라를 칠 계획을 세웠다.


3.이것을 알아차린 요나라는 983년과 984년에 두 차례 정안국을 공격하여 이들의 계획을 무너뜨렸으며, 정안국은

984년에 침공을 당한 이후 송의 공격 요청에 호응을 할래야 할 수가 없었다.


4.한편 요나라에서는 자신들의 옆에서 계속 옆구리를 찔러대고 거슬리는 행동을 하는 정안국과 발해 잔존세력을

제거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으며, 984년에 우선 송과 정안국의 연계를 끊어낸 후 정안국을 대대적으로 칠 준비를

985년 말까지 끝냈다.


5.그리고 986년 정월, 대규모의 요군이 정안국을 공격하였다.




다음편에 계속 이어서 하겠습니다.


의견이나 궁금점 논의점은 댓글로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동안 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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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멸망전 고찰 1편. 멸망의 전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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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fmkorea.com/6969129451


발해 멸망 이후 대씨들이 거의 보이지 않는 이유 - 하

-https://www.fmkorea.com/6969901818


발해 멸망의 의문점 고찰 상

-https://www.fmkorea.com/6865875091


발해 멸망의 의문점 고찰 하

-https://www.fmkorea.com/6879404408




발해, 그 이후(발해잔존세력사)



시작 및 예고

-https://www.fmkorea.com/6978216242


발해 정부 붕괴 직후 상황

-https://www.fmkorea.com/6978958316


후발해에 대하여

-https://www.fmkorea.com/6979120816


정안국이 반역으로 세워졌을 가능성에 대하여

-https://www.fmkorea.com/6984650484


정안국과 백두산 폭발

-https://www.fmkorea.com/6986691160


970~981년 사이 정안국의 미스터리

-https://www.fmkorea.com/6990420603




발해멸망전을 제외한 다른 글들



5경 15부 62주에 대한 오류 가능성 검토

-https://www.fmkorea.com/6797762364


발해 국호는 발해가 맞습니다

-https://www.fmkorea.com/6801049872


무왕과 대문예의 형제싸움으로 인한 나비효과

-https://www.fmkorea.com/6804185836


발해사 최대의 미스터리, 882년 정변설

-https://www.fmkorea.com/6807940225


'886년 사건'의 진실에 대하여

-https://www.fmkorea.com/6809313438


'쟁장사건'은 왜 일어났을까

-https://www.fmkorea.com/6810052709


'등재서열사건'은 왜 일어났을까

-https://www.fmkorea.com/6812375697


전설과 설화로 살펴본, 발해 문왕 시기의 어두운 면

-https://www.fmkorea.com/6814511926


발해 멸망의 시발점, 폐왕 대원의의 정변 (1)

-https://www.fmkorea.com/index.php?mid=mystery&category=15037454&document_srl=6817289827


대원의 정변 2편

-https://www.fmkorea.com/index.php?document_srl=6817562512&s_comment_srl=6817568874#comment_6817568874


문왕과 강왕의 관계에 대한 미스터리

-https://www.fmkorea.com/6817851720


폐왕이 문왕의 가족을 몰살시켰을 가능성에 대해.

-https://www.fmkorea.com/6817911871


대원의 정변 3편

-https://www.fmkorea.com/6819337509


대원의 정변 4편

-https://www.fmkorea.com/6820973328


대원의 정변 5편

-https://www.fmkorea.com/6821034193


발해의 군제

-https://www.fmkorea.com/6822795205


발해 선왕(상편)

-https://www.fmkorea.com/6824049857


발해 선왕(하편)

-https://www.fmkorea.com/6824625532


대이진의 찬탈 가능성에 대한 글

-https://www.fmkorea.com/6826837680


선왕과 대건황의 공통점

-https://www.fmkorea.com/6832473378


경박호와 모란강 전설로 본 대건황-대현석 시기의 불안

-https://www.fmkorea.com/6833752945


여러분이 발해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12가지

-https://www.fmkorea.com/6892905999


발해에서는 과연 어떤 것이 났을까? 1편

-https://www.fmkorea.com/6894662330


발해에서는 어떤 것들이 났을까? 2편

-https://www.fmkorea.com/6895694013


발해에서는 어떤 것들이 났을까? 3편

-https://www.fmkorea.com/6903735052

발해에서는 어떤 것들이 났을까? 4편

-https://www.fmkorea.com/6907296365


발해땅이 추워서 농사가 안된다는 주장에 대한 반박

-https://www.fmkorea.com/6914123453


사료로 알아보는 발해의 고구려 계승의식

발해사신 수난기

대위해의 재위년도 오류 가능성

발해 인구를 소수로 잡는 의견에 대한 반박

-https://www.fmkorea.com/6971696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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