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예인 4-4-2 : 사키 / 퍼거슨 / 벵거 / 시메오네 (상)[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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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고기먹는스님 댓글 0건 조회 82회 작성일 24-05-05 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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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누스 미헬스 / 엘레니오 에레라 / 아리고 사키 / 요한 크루이프 / 펩 과르디올라

제가 생각하는 역대 축구사 최상단에 위치하는 전술가들입니다. 놀랍게도 에레라를 제외하면 모두 '토탈 풋볼'의 족보에 위치하는 감독들이죠. 이 중 본인의 철학을 녹인 하나의 구조로 큰 반향을 일으킨 인물은 아리고 사키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가 성립한 4-4-2는 아직까지도 현대 축구의 명장들의 패에서 떨어지지 못했으니까요. 그러나 사키의 4-4-2 / 퍼거슨의 4-4-2 / 뱅가의 4-4-2 / 시메오네의 4-4-2 / 현재의 4-4-2 는 모두 각기 다른 매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은 사키 / 퍼거슨의 4-4-2까지 알아보고 (하)편에서는 벵거 / 시메오네 / 현재의 4-4-2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1-1. 공격 시에는 볼을, 수비 시에는 공간을 독점해라 - 사키이즘


image.png 4-4-2 : 사키 / 퍼거슨 / 벵거 / 시메오네 (상)

사키의 전술 철학, 사키이즘의 발단을 간략하게 설명해 보겠습니다.

- 3명이기엔 너무 넓고 5명이기엔 너무 좁은 가로 68m를 수비하기 가장 적절한 숫자는 4명이다. (횡적 관점)

- 측면에 한 선수만 배치하기에는 너무 위험하고 세 선수를 배치하는 것은 낭비니 측면 세로 105m를 수비하기 가장 적절한 숫자는 2명이다. (종적 관점)

- 남은 두 선수는 공격수이자 1차 압박선으로 이렇게 10명을 배치한다면 가장 빈틈없이 균형 있게 필드를 지배할 수 있을 것이다.

위의 3가지를 합쳐 사키는 대인 방어가 아닌 지역 방어라는 새로운 발상을 해냈습니다. 대인 방어와 지역 방어의 가장 큰 차이는 '본인들의 구조를 능동적으로 가져갈 수 있는가?'로 4-4-2는 지역 방어를 시도하는데 가장 적절한 선택지였던 것이죠.


image.png 4-4-2 : 사키 / 퍼거슨 / 벵거 / 시메오네 (상)

기본적으로 사키의 밀란은 라인이 굉장히 높은 편이었습니다. 이는 오늘날의 게겐프레싱과 유사한 이유로, 전방에서 끊임없는 압박을 실시하면서 상대의 공을 상대의 진영에서 뺏어내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반바스텐과 굴리트는 그 1차 압박선으로 상대 수비진을 끊임없이 압박하였고, 그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볼을 잘 다루는 센터백이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에 효과는 굉장했습니다.

사키의 4-4-2는 수비 시에만 유지된 것이 아닌 공격 시에도 유지되었던 대형입니다. 다만 도나도니는 안첼로티 - 레이카르트 라인과 반바스텐 - 굴리트 사이에 발생하는 Channel을 침투하기도 했으며 도나도니가 측면 깊숙이 가면 굴리트가 살짝 내려오기도 했습니다. 안첼로티 - 레이카르트는 과한 전진보다는 공격진과 수비진의 사이 간격 중 적절한 위치에 자리를 잡아 공간을 점유했고 (레이카르트는 가끔씩 침투하기도 했습니다) 말디니와 타소티는 에바니와 도나도니가 전진한 공간으로 들어가 측면의 공격 숫자를 늘려주었습니다.


image.png 4-4-2 : 사키 / 퍼거슨 / 벵거 / 시메오네 (상)

보시면 아시겠지만 수비는 중앙 지향적, 공격은 측면 지향적인 선수들의 동선입니다. 현대 축구의 Motto이기도 한 이 문장은 사키이즘에서부터 내려왔던 것입니다.

아리고 사키의 4-4-2에서 대부분의 4-4-2의 장단점이 존재합니다.

장점

- 적응하기가 쉬운 구조

- 공격과 수비의 밸런스가 아주 잘 맞는다는 점

- 다른 구조로 변형하기 용이한 구조

단점

- 그 당시 축구계를 지배하던 판타지스타를 둘 포지션이 애매하다는 점

- 볼을 점유하는데 불리한 구조

- 종적인 간격이 벌어지기 시작하면 치명적이라는 점

특히 단점의 1항, 판타지스타를 둘 포지션이 애매하다는 점이 사키가 감독직 생활을 다소 이른 시기에 마감하게 만들지 않았나 싶습니다. 굴리트와 도나도니는 충분히 트레콰르티스타로서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지만 사키이즘 아래에서 부품이 되었고 결과적으로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굴리트와 도나도니같이 사키의 말을 고분고분 듣지는 않았고 그 대표적인 예가 사키와 사이가 좋지 않은 로베르토 바조였죠.


image.png 4-4-2 : 사키 / 퍼거슨 / 벵거 / 시메오네 (상)

1-2. 카테나치오를 반 포기한 이탈리아인

image.png 4-4-2 : 사키 / 퍼거슨 / 벵거 / 시메오네 (상)
그 당시 세리에A의 주된 구조는 3-5-2, 리베로와 조나 미스타를 활용한 포메이션이었습니다. 양 윙백은 깊은 지역까지 오버래핑하고 가운데 3명의 미드필더가 가로 68m를 구성하는, 그리고 전방의 강력한 공격수 2명을 활용해 3 vs 2의 수적 열세를 어떻게든 극복하려는 구단들의 생각이었죠. 사키는 조금 달랐습니다. 최대한의 공격 기회를 창출하기 위해선 1) 본인들이 공을 소유해야 하고 / 2) 슈팅까지 수월하게 할 수 있는 구조를 선택해야겠다는 것이었죠. 4-4-2는 그런 의미에서 카테나치오가 가져가던 이상주의와는 아주 반대되는 현실적인 구조였습니다.


image.png 4-4-2 : 사키 / 퍼거슨 / 벵거 / 시메오네 (상)

4-4-2만의 Identity는 4개의 Channel (4레인)에서 종패스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 당시에는 5레인, 즉 하프 스페이스에 대한 구분을 크게 안 했었기 때문에 이 점은 상대 수비진에겐 상당히 위협적이었습니다.


image.png 4-4-2 : 사키 / 퍼거슨 / 벵거 / 시메오네 (상)

조나 미스타, 3-5-2는 3개의 Channel (3레인)에서 종패스가 가능합니다.


image.png 4-4-2 : 사키 / 퍼거슨 / 벵거 / 시메오네 (상)

토탈 풋볼의 상징, 4-3-3은 중원이 센터백에게 공을 받기 위해 내려오지 않는 이상 종패스가 사실상 불가능했습니다. (물론 이쪽은 수많은 삼각형이 장점이기 때문에 또 다른 장점이 있는 셈이죠)

종패스의 길이 많기 때문에 4-4-2는 수비에서 공격까지 패스만 이어진다면 슈팅까지 수월하게 할 수 있는 구조였습니다. 실제로 반바스텐과 굴리트가 많은 득점을 기록한 루트 중 하나가 수비진에서 한 단계를 뛰어넘고 찔러주는 종패스였죠.

다만 볼을 계속해서 점유하는데 4-4-2가 좋은 포지션은 아니었고 그걸 사키도 알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사키가 하기 어려운 역발상을 두 개 하는데 그중 하나가 아까 언급한 전방에서의 끊임없는 압박이었고 두 번째는 점유율을 굳이 계속 점유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무슨 뜻이냐면 한 번 공격할 때의 시간은 길게 가져가지 않되, 그 횟수를 상대보다 훨씬 많이 가져가면서 점유율도 가져가고 가둬놓고 패겠다는 발상이었죠. 가장 대표적인 경기가 88-89 유러피언 컵 결승전 슈테아우아와의 경기였습니다. 4:0으로 이긴 이 경기에서 로쏘네리는 정말 수도 없이 공격을 가져가면서 볼을 점유했고 마무리를 늦추지 않았습니다. (재밌게도 이 발상을 현대 축구에서 가져가는 감독 역시 클롭이죠. 도르트문트든, 리버풀이든 경기당 슈팅 숫자가 많은 편에 속합니다)


image.png 4-4-2 : 사키 / 퍼거슨 / 벵거 / 시메오네 (상)

image.png 4-4-2 : 사키 / 퍼거슨 / 벵거 / 시메오네 (상)

만들어가는 플레이, 혹은 개개인의 능력이 훨씬 중요했던 과거의 카테나치오, 조나 미스타는 이 사키이즘 하나 때문에 쓸쓸히 자취를 감췄습니다. 그리고 그 조나 미스타 안에 있었던 이탈리아만의 포지션, 리베로 역시 이에 해당했죠. 다만 사키는 이 리베로만의 장점은 살리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사키가 밀란에 오기 전까지 로쏘네리의 캡틴이었던 바레시 역시 원래는 걸출한 리베로였습니다. 그러나 사키가 부임한 이후 그는 완전한 리베로로 뛸 수는 없었습니다. 공격 시의 전진을 다소 자제해야 했고 최후방 수비수로서 자유로운 1인이 되지 못했죠. 아마 사키는 이를 현실적으로 보았을 땐 단점으로 인식했을 것입니다. 다만 그는 리베로만의 움직임을 장점으로 바꾸려고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프사이드 트랩이었죠. 리베로는 원래 자유로운 1인으로서 다른 수비수에 비해 후방에 위치했습니다. 사키는 이를 역이용해 바레시에게 이렇게 주문합니다.


image.png 4-4-2 : 사키 / 퍼거슨 / 벵거 / 시메오네 (상)


"상대 공격수가 너를 의식하고 오프사이드에 걸리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 높이 위치할 거다. 그걸 넌 역이용해야 한다. 상대 공격수의 움직임이 앞쪽을 향할 때 재빠르게 다른 수비수들과 횡적인 간격을 맞춰라"

세계 최고의 리베로였던 바레시에게 이는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오프사이드 트랩의 귀재로서 그는 기가 막힐 정도로 상대의 흐름을 끊었고 본인들이 더 볼을 점유할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이 역시 사키가 현실주의적인 철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겠죠.

2-1. 사키식 4-4-2와 잉글랜드식 4-4-2의 합의점 - 퍼거슨

사실 4-4-2의 시초는 사키가 아닌 비센치 페올라였습니다. 그는 4-2-4 구조를 통해 삼바 군단 브라질이 1958년 월드컵에서 우승할 수 있게 만들었죠. 이 4-2-4는 잉글랜드에도 널리 퍼졌지만 초반에는 금방 묻혔습니다. 기본적으로 공격과 수비 사이의 넓은 Channel을 두 선수가 막기에는 역부족이었기 때문이었죠.


image.png 4-4-2 : 사키 / 퍼거슨 / 벵거 / 시메오네 (상)


그러나 1966년 알프 램지 감독이 4-4-2로 잉글랜드를 세계 정상으로 이끌자 4-2-4와 비슷한 구조였던 4-4-2가 잉글랜드 전역을 휩쓸게 됩니다. 대표적인 인물들이 붉은 제국을 이끌었던 빌 샹클리와 밥 페이즐리였습니다. 다만 사키의 4-4-2와의 차이가 있다면 2선과 3선의 간격이 벌어져도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채 4명의 공격과 4명의 수비, 두 명의 하이브리드 선수를 배치했던 것이죠. 사키가 2명의 수비와 8명의 하이브리드 선수를 배치했던 것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퍼거슨은 이 사키의 철학, 토탈 풋볼과 직선적인 플레이를 잉글랜드식 4-4-2에 녹이고 싶었을 것입니다.


image.png 4-4-2 : 사키 / 퍼거슨 / 벵거 / 시메오네 (상)

퍼거슨은 리빌딩이 끝난 92-93 시즌부터 4-4-2의 각 자리에 어린 스페셜리스트들을 앉혀놓기 시작했습니다. 클래식 윙어의 정점이었던 긱스 (1992년부터 주전) / 처진 스트라이커에서 점차 팀의 8번과 10번이 된 스콜스 (1995년부터 주전) / 약 9년 동안 오른쪽의 날카로움을 책임졌던 페어, 네빌 (1995년부터 주전)과 베컴 (1996년부터 주전)은 모두 퍼거슨의 걸작이었습니다. 이외에 브라이언 롭슨, 에릭 칸토나, 폴 인스, 마크 휴즈, 스티브 브루스, 야프 스탐, 드와이트 요크, 앤디 콜 등 수많은 기존의 선수들과 영입생들이 구조의 부품이 되어 팀의 톱니바퀴를 수월하게 돌려주었습니다. 그 결과 맨유는 완전히 암흑기에서 벗어나 전성기의 라인에 올라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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