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예인 중국과 비교해볼 만한 우리나라의 전근대 건축물[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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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고기먹는스님 댓글 0건 조회 100회 작성일 24-03-03 2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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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포스팅에서 '장관이다 싶을 한국 문화재가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받고서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중국을 기준으로 하면 없다는 답글을 달았다. 사실 이건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규모에서 중국과 비교할 수 있을 나라는 비슷한 인구의 저 멀리 다른 제국들을 끄집어 와야 한다.


이건 중국이 좋고 싫고와는 별개의 문제다. 심지어 중국 주변 국가 특히 한국, 일본, 베트남, 몽골은 건축 양식과 장식까지도 중국의 영향을 막대하게 받았다.


그런데 일본에 히메지성이나 (지금은 소실된) 오사카성처럼 중국의 규모에 조금 못 미치는 수준으로라도 쫓아가는 건축물이 있었던 것처럼 우리나라에도 그런 수준으로 존재하다가 소실된 문화재가 없지는 않다. 그런 문화재 중 대충 떠오르는 것 몇개를 정리해본다. 황룡사 9층 목탑처럼 널리 알려진 굇수급 건축물은 제외한다.



1. 요동성


요동성은 고구려가 요동을 차지한 뒤에 지키던 성이다. 기존에 있었을 중국의 토성을 그대로 사용한 건지, 아니면 다른 장소에 새롭게 세운 건지는 명확하지 않아서 목록에 넣어야 하나 고민을 했는데, 수백 년 동안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었다는 점을 감안해서 넣었다. 토성은 주기적으로 보강하고 때로는 갈아엎어야 하기 때문. 설사 요동성이 본래 중국의 성인 걸 고구려가 그대로 사용했다고 해도 그게 수백 년이 되었으니 중국의 성이 아니라 고구려의 성이라고 봐야 한다.


요동성은 고구려가 방어를 위해 세운 성 중에는 매우 드물게 평지에 세워진 성이었다고 한다. 위치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전해지지 않으나 성벽의 높이가 성가퀴를 포함해서 10길(30m)에 육박했다는 기록은 남아 있다. 북한에서 요동성의 단면이 그려진 그림이 출토되기는 했는데, 그 무덤의 양식과 연대에 대한 의문점이 남아 있어서 중국계 국가가 세운 요동성인지 고구려가 세운 요동성인지 확신할 수 없다. 물론, 토성이었는지 고구려식 석성이었는지조차 미지수다. 그저 존재했다는 점만 확실시된다.


참고로 30m는 런던탑의 화이트 타워보다 3m 높은 수준이다.


Whitetowerlondon.jpg 중국과 비교해볼 만한 우리나라의 전근대 건축물
- 런던탑이 27m로 알려져 있다.




2. 삼년산성


5세기 중반부터 석성을 짓기 시작한 신라는 삼국 중에서 가장 높고 험난한 성을 쌓았다. 그 중에서 최고봉은 역시 삼년산성이다. 발굴 조사를 통해 삼국 시대의 산성들이 대체로 높았다는 게 드러나고 있지만, 여전히 삼년산성의 추정 높이를 넘지는 못 한다. 구간에 따라서 높이가 달라지기는 하지만 대개 10~20m라는 결론이 나왔으며, 특히 계곡 쪽이 20m에 육박해서 '산성'이라기보다 '성산'이라고 불러야 하지 않나 싶을 정도다.


삼년산성은 현대에 들어와 많은 부분이 무너져 있었는데, 그렇게 무너지고 남아 있는 구간조차도 이미 6~13m였다. 그런데 이보다 더 많이 남아 있었을 조선 시대에는 남아 있는 성벽을 18척(5.5m)으로 기록하고 있으니 정말 대충 조사했구나 싶다.


지금은 일부 구간을 최대한 정비하고 복원해놓았지만, 어디까지나 성벽을 적당하게 올려놓은 정도기 때문에 성이 남아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래도 혹시 주변을 지나가다 들를 일이 있으면 가보시길. 그냥 정비만 해놓은 건 데도 굉장히 웅장하다.


encykorea-보은 삼년산성 성벽.jpg 중국과 비교해볼 만한 우리나라의 전근대 건축물
- 삼년산성은 이 정도로만 복원해놨다. 아예 전부 복원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상당부분 창작이 되어버리기 때문에 유네스코 등재를 노리고 있는 문화재로선 고를 수 없는 선택지다.



3. 경복궁 경회루/서총대


지금 남아 있는 경복궁 경회루도 웅장하다. 화려한 장식이 없어서 그렇지 규모만 보면 대단한 수준의 건물이다. 중국과 비교해볼 만한 규모다. 그런데 조선 전기 경회루는 더 대단했다.본 포스팅에 다루고 있는 건 규모기 때문에 조선 유학자들을 빡치게 한 경회루의 장식은 배제한다.


일단 3층 건물이었다. 조선왕조실록을 살펴보면 3층 설계도를 살펴보고 빡쳐서 2층으로 하라는 건의가 빗발치는데 그냥 씹고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사치로 유명했던 연산군도 굳이 경회루보다 더 화려한 건물을 만들 필요가 없었는지 서총대를 경회루와 같게 만들라고 명령했는데, 이때 서총대의 높이가 10길(30m)였으니 경회루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즉, 지금의 경회루보다 10m 더 높았다.


이 서총대의 높이 10길이라는 기록을 중종 반정의 명분으로 삼기 위해 과장한 것 아니냐고 의문을 품는 분도 있던데, 명분으로 삼기 위해서 남긴 기록에는 10길이 아니라 수십 길이라고 적어놨다. 아니 중종형 수십 길은 너무한 것 아니오? 20길만 돼도 60m란 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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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시안성의 성벽 위에 올라간 누각이 높이 30미터 정도이므로 규모 측면에선 조선 전기 경회루와 좋은 비교가 될 것 같다.




4. 광통보제사와 5층 목탑


고려의 왕들은 개경을 사찰의 도시로 만들었다. 개경 안에만 사찰을 28개를 세웠으니 말 다했다. 많은 사람이 개경의 민가가 초가집 투성이었다는 기록만 보고 조선 말기의 한양성과 비슷할 거라 생각하곤 하는데, 그럴래야 그럴 수가 없는 구조다. 성 안에 28개의 사찰이 세워진 마당에 귀족들의 집이 엄청나게 들어섰다. 개경은 중앙 귀족들 뿐 아니라 지방 귀족의 자제들이 볼모로 끌려와서 사는 도시였다. 별궁도 여럿 세워졌다. 그런데 어떻게 초가집 투성이일 수가 있겠나.


고려 말기 홍건적의 침입, 위화도 회군으로 대부분의 사찰이 폐사된 시점에도 조선 초까지 사찰이 민가보다 많았다는 기록이 남은 도시가 개경이다. 현종 말기부터 인종 때까지 개경은 목탑과 석탑이 줄을 잇고 사찰과 귀족들의 집에 세워진 누각으로 가득한 도시였을 수밖에 없다. 서긍이 본 초가집들은 산중에 지어진 귀족이 아닌 백성들의 거주지였을 가능성이 크다. 그 외의 지역에 자리가 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런 곳이기 때문에 고려 후기에 왕이 개경 안의 모든 건물을 기와집으로 만들도록 명령할 수 있지 않았나 싶다.


그런 개경에서 가장 거대했던 사찰은 광통보제사다. 건물의 숫자가 1000채라서 조선 말기 경복궁의 500채보다 많았다. 광통보제사에서 가장 압도적인 건물은 5층 목탑이다. 200척이 넘는, 그러니까 60m가 넘는 5층 목탑이었다. 교토 도지 목탑이 첨탑 포함해서 55m니까 광통보제사 5층 목탑은 이것보다도 훨씬 높았다는 얘기가 된다. 안으로 올라갈 수 있는 구조라서 여기에 올라갔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이 5층 목탑은 소실되었다가 조선 전기에 개성의 어느 상인이 돈을 대서 다시 건설했다. 역시 상업의 도시 개성...... 그렇게 조선 전기에 '5층각'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버티던 목탑은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때 사라진 것으로 추정된다.



02301_1700002_01.jpg 중국과 비교해볼 만한 우리나라의 전근대 건축물
- 교토에 가보신 분들은 도지 목탑이 얼마나 크고 아름다운지 알 거다. 광통보제사 5층 목탑은 이보다도 훨씬 높았다. 그래서 가끔 봉은사가 목탑 하나 거대하게 세워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콘크리트 좀 들어가도 괜찮으니 말이다.



5. 분황사 모전 석탑


우리나라는 석탑만 잔뜩 만들었다는 인식이 있는데, 이건 틀린 인식이다. 석탑 못지 않게 목탑도 잔뜩 만들었다. 나무로 만든 목탑이 지금까지 전해져 오지 않는 건 어쩔 도리가 없는 일이다. 보통 큰 사찰은 석탑과 목탑을 함께 건축해놓는 일이 많았다.


우리나라 석탑은 대부분 규모나 화려함에서 중국의 석탑에 비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중국은 벽돌로 만든 탑이 많아서 그렇다고 주장할 수도 있는데, 중국도 돌로 만든 석탑이 존재한다. 대신 높이가 전탑에 비해 좀 낮다.


그런 상황이기에 꺼내놓을 수 있는 게 바로 분황사 모전석탑이다.


모전석탑이란 말 그대로 '전돌을 모방한 석탑'을 의미한다. 전돌(벽돌)을 만들기 위한 재료가 턱없이 부족했던 데다 기껏 만들어서 운반해온 전돌은 대체로 왕실과 귀족의 저택 장식물로 사용해야 했다. 그렇게 전돌이 부족한 상황에서 전탑을 만들고자 했던 신라인은 다음과 같이 생각해버렸다.


누군가: 아하! 돌(안산암)을 잘라서 전돌처럼 만들어 쌓으면 되겠구나!

신라 석공: 씨발 샛키야


이 모전석탑 문화는 고려 초까지 이어지다가 영토의 확장과 무역으로 전돌의 재료를 조금 더 구하기 쉬워지는 고려 중기부터 사라진다.


분황사 모전석탑은 규모의 미학을 잘 실천하고 있다. 우리나라 석탑들 중에서 가장 웅장한 건 미륵사 석탑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분황사 모전석탑이 훨씬 웅장하다. 분황사 모전석탑의 높이는 48m일 것으로 보이며, 이는 중국의 석탑들과 비교해볼 만한 수준이다. 9층이라는 기록과 남아 있는 부재들을 종합해서 계산했을 때 나오는 수치다. 이에 대한 반박도 존재하는데, 선덕여왕 때 신라에 그런 기술력이 있을 리 없고, 층에 따라 좁아지는 비율을 고려했을 때 7층 이상이 되기 어렵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이렇게 치더라도 30m는 거뜬하게 넘는다.


개인적으로 황룡사 9층 목탑 못지 않게 언젠가 꼭 복원되기를 바라는 탑이다. 경주가 여기에도 좀 신경을 써주길 바란다.


encykorea-경주 분황사 모전석탑 정측면.jpg 중국과 비교해볼 만한 우리나라의 전근대 건축물
- 저 뚜껑은 일본이 급하게 마무리해 놓은 거다. 원래 있던 게 아니다.




엄밀하게 말해서 이러한 건축물은 영토가 커서 다양한 재료들이 존재하고, 막대한 인력을 동원할 수 있는 제국들, 그러니까 로마나 중국과 같은 나라들이 규모의 미학을 더 잘 실천한다. 어쩔 수 없다. 인구는 곧 자금을 의미하고 한 번에 동원할 수 있는 인력을 의미한다. 기술의 발전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현대에 들어서도 마찬가지다.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으로 마오쩌둥이 독재질하며 미쳐날뛰었음에도 중국은 막대한 인구를 바탕으로 과학 기술 측면에서 미국의 바로 뒤까지 쫓아왔고, 90년대 말까지도 허허벌판이던 중국의 대도시들은 약 20년만에 뉴욕과 시카고보다 더 화려한 도시로 변신해버렸다. 사실, 이건 우리나라도 거들었으니 화를 낼 필요도 없다. 우리도 도시 건설에 참여하고, 건축 노하우 전수해주고, 중국에 공장을 세움으로써 중국에 투자했다. 중국은 막대한 인력을 바탕으로 세계의 공장으로 변모한 끝에 지금의 모습이 될 수 있었다.


그런 맥락에서 전근대의 건축물을 규모로 중국과 비교하는 건 비합리적이다. 쓸 수 있는 자금과 인력 면에서 차원이 다르지 않나. 특히 명나라부터 중국은 벽돌을 대대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건축물의 규모가 압도적으로 커졌는데, 우리나라는 벽돌을 만들 재료가 부족해서 쫓아갈래야 쫓아갈 수가 없게 되어 버렸다. 벽돌을 사용한 사대부의 집 담장도 화강암으로 벽을 올린 뒤 마무리만 벽돌로 한 수준에 불과하다. 강화도 등에 간신히 벽돌로 쌓은 성의 흔적을 보면 벽돌보다 석회가 더 많이 사용된 것 아닌가 싶을 정도다. 이러한 현실적 한계도 이해를 해야 한다는 얘기다.


오히려 본문에 적은 것처럼 중국 못지 않은 규모의 건축들을 꾸준히 만들어낸 선조들이 대단했던 거라고 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일뽕들 중에는 '고대 건축을 볼 것 같으면 한국에 안 오고 중국에 간다'라는 헛소리를 나불거리기도 하던데, 그렇게 따지면 일본도 다를 게 하나도 없다는 건 왜 모를까. 일본은 양식이 다르다고? 그럼 한국은 중국과 양식이 같은 줄 아나? 일본을 종교처럼 떠받드는 건 그러려니 하겠는데, 그게 우리나라 문화재를 비하하는 쪽으로 연결되면 곤란하다. 우리나라 건축 양식은 중국과 매우 다르다. 그래서 경복궁과 창덕궁에 중국인들이 잔뜩 몰리는 것이다. 제발 정신 차리고 객관적으로 직시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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