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예인 역사에서 잊혀진 거란과 발해의 대회전인가? - '룡문 전설'[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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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댓글 0건 조회 76회 작성일 24-03-26 0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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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언급할 전설은, 전에 언급했던 전설인 경박호전설이 나온 지역인 흑룡강성의 또다른 전설이자,

발해와 거란의 전쟁을 다루고 있는 전설 중 하나인 '용문(龍門) 전설'입니다.


용문전설은 현재까지 남아있는 거란-발해 전쟁시기를 다루는 전설로서, 전설 중에서 상당히 상세한 내용이

남아있는 전설입니다. 그리고 여러 버전이 있는 다른 전설들과 달리, 다른 버전이 없는 몇 안되는 전설로서,

이 전설을 통해서 발해인들이 거란에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발해가 거란에 대해 얼마나 필사적으로 싸웠는지,

얼마나 미워 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현재까지 살펴본 발해의 전설들은 다음과 같은 양상을 지닙니다.



1.일반 전래 향토전설


2.문왕시기의 축성전설


3.지배층의 수탈, 폭정에 대한 저항


4.거란에 대한 저항과 승리



이 중 4번에 해당하는 용문전설에 대한 내용이 오늘의 글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전설의 양상도 정리해서,

현재까지 남아 있는 발해의 전설이 어떤 양식이며, 어떠한 성격을 띠며, 우리 한국의 향토전설과 어느 점이 비슷하고

어느 점이 다른지 한번 종합적으로 언급, 분석, 비교해보는 글도 쓸 예정입니다.


그럼, 용문전설을 통해 어떤 것을 언급할 지는 용문전설의 대략적인 내용을 설명한 이후에 언급하겠습니다.

특히나 이 룡문전설은 천년이 넘는 세월동안 중국 동북지역의 주민들에게 전해져 내려오다가 조선족들에게도 전승된 전설인

만큼, 전설에서 어느정도의 역사적 사실을 간직하고 있을 가능성도 있다고 봅니다.




경치 좋은 남호두에는 물속에서 솟아오른 두 돌바위가 있습니다. 사람들은이 돌바위들을 '룡문'이라 부릅니다.

여기에 천여년을 두고 전해오는 발해의 전설이 있어서 사람들은 아직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천년도 지난 먼 옛날, 이곳에 '백의민족'들이 모여사는 오붓한 마을이 있었습니다. 마을에는 오누이 쌍둥이가 있는

집이 있었습니다. 남자아이의 이름은 룡남이고 녀자애의 이름은 룡녀였습니다. 룡남이는 창봉을 잘 다루었으며, 룡녀는 활을 매우 잘 다루었습니다.




-여기에 백의민족이 모여 살았다는 것에 주목을 해 보자면, 이 전설이 우리 민족인 조선족들에게 의해 전승되었다는 증거가 될 수 있으며, 혹은 과거부터 백의를 주로 입었다는 우리 민족들의 한 모습이기 때문에, 발해인들 역시 우리 민족이라는 증거 중 하나로 작용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리고 룡녀가 활을 잘 다루었다는 것 역시 우리 민족의 종특인 활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활은 한가지의 비밀이 더 있는데, 바로, 발해의 전신인 고구려의 시조인 주몽이 잘 다루던 무기입니다. 이런 세세한 면에서도 발해가 고구려의 후신이라는 것이 조금씩 나옵니다.




어느해 봄이었습니다. 쌍둥이가 밭에서 돌아와보니, 마을은 온통 불바다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시체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습니다. 쌍둥이의 늙으신 부모님도 칼에 찔려 숨져 있었습니다. 알고보니, 마을이 거란의 침입을 받아 거란군이 마을마다 마을을 불사르고 무고한 백성들을 살해하고 있던 것입니다.


쌍둥이는 거란군의 손에 숨진 부모의 시체를 끌어안고 매우 슬퍼하였습니다. 그리고 부모의 원쑤를 같고 나라를 구하고자 룡남은 부모의 장례를 치른지 이틀만에 자원하여 무사로 뽑혀 발해군에 속해 싸움터로 나가게 되었습니다.

떠나는 날 쌍둥이는 헤어지기 아쉬워 부퉁껴안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오빠야. 꼭 이기고 돌아와!"


"누이야. 원쑤 갚고 돌아올테니 꼭 기다려라!!"


쌍둥이는 눈물을 흘리면서 헤어졌습니다.



-이 대목에서 볼 수 있듯이, 그리고 다른 전설에서도 나오듯이 거란과 발해의 전쟁은 매우 치열했으며, 거란이 말한 '발해와의 대대로 원수관계'가 무엇인지는 아직 알 수 없으나, 거란군은 발해와 발해군, 발해 국민에게 상당한 적대감을 가지고 있는 것이 거의 확실해 보입니다. 그리고 발해의 전설마다 거란군은 항상 포악하고 잔인하고, 적대적인 존재로만 나와 있습니다.


다른 전설이나 이견이 있으면 모르겠지만, 전승되고 있는 발해의 전설마다 거란군의 모양이 이같이 똑같은 것을 보면, 거란군은 진짜로 발해와 싸울 때 잔혹하게 싸웠으며, 발해 역시 그로 인해 죽기살기로 대항 및 공격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비록 발해의 정부가 백성들을 괴롭히고 착취해도, 발해군이 그들의 앞잡이가 되어 백성을 핍박할지언정, 거대한 외적인 거란에게는 힘을 합쳐 뭉쳐서 대항해 낸 것을 보면, 발해의 민초들의 삶은 매우 힘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거란의 침입이 거세어지고, 발해의 여러 전선이 뚫리기 시작하자, 점점 동원되는 발해군도 많아졌습니다. 발해 금군도 이곳저곳에서 사망자를 내고 있었으며, 발해의 지방군 역시 이곳저곳에서 거란군을 상대하고, 거란군을 대적하기 위해 모여 들었습니다. 그리고 발해군에 소속되어 전투 중이었던 룡남 역시 분전하고 있었습니다.


발해의 군사들이 오랑캐와 대치한지 여러날, 어느 날 저녁, 수만명의 거란군 오랑캐들이 룡남이 소속된 발해군이 지키는 골짜기로 쳐들어왔습니다. 앞에는 거란군 부원수 '야율 우얼'이 85근 대도를 거머쥐고 살기등등하게 말을 몰아 왔습니다.


거란군이 지나가는 길을, 발해군이 중간에 끊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이윽고 반격의 호각소리가 산천에 메아리쳤습니다. 룡남은 백여근이나 되는 은창을 거머쥐고 야율 우얼을 향해 말을 몰았습니다. 창칼들이 부딪혀 불꽃이 일고, 싸우는 통에 누가 누군지 구분하기 힘든 시점. 두 장수는 백여합을 싸웠으나 승부가 나지 않았습니다. 갑갑해진 룡남이 패한 척 하면서 슬쩍 말머리를 돌리자, 야율 우얼은 신이 나서 룡남을 뒤쫓아왔습니다. 그리고 야율 우얼이 대도를 들어 룡남의 머리를 까려는 순간, 룡남은 겨드랑이에서 표창을 꺼내어 놈의 면상에 뿌렸습니다. 목에 표창을 맞은 녀석은 크윽! 소리와 함께 말에서 굴러떨어졌습니다.




-야율 우얼이라는 인물이 나옵니다. 이 스토리에서는 큰 역할을 하지 않지만, 어쨌거나 거란측의 사령관 중 하나로 나옵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할 부분이 있는데, 이 인물이 패퇴하고, 죽고 자시고를 떠나서, 야율 '우얼' 이라는 이름을 가진 것입니다. 『요사』 태조전에 보면,태조 야율아보기는 황제가 되기 이전에 거란 일파 중의 하나인 질랄부의 수장이 되었으며, 그 이후 거란 연맹의 총사령관인 '우월(于越)' 이라 불리웠다고 합니다.


그가 거란의 2인자인 질랄부 수장 시절에 붙은 칭호지만, 907년에 흔덕근(痕德菫)의 뒤를 이어 칸으로 선출될 때도 이 칭호를 없앤 것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면, 평생 자신의 칭호로 썼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 우월은, 여기 나오는 우얼과 매우 발음이 비슷합니다. 그런데 이 전설 역시, 정황상 대인선 시기의 거란과 발해의 전쟁에 대해 다루고 있는 것이 거의 확실합니다. 그리고 마침 이때의 거란 황제는 그 야율아보기였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나오는 '야율 우얼' 은 실제로 이름이 우얼인 야율씨의 인물이 아니라, 야율아보기 본인이 평생에 걸쳐 발해와의 전쟁에 많이 나섰으며, 참혹하게 패배한 적도 있고, 승전을 거둔 적도 있으리라는 것을 예측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발해와의 전쟁에 직접 나섰다가 참패를 한 적도 있다는 것은, 요사에서 나오는 '발해와는 대대로 원수였으니' 라고 일컫는 부분과 매우 일치합니다. 그리고 야율아보기가 타고난 용맹한 전사였으며, 역전의 용사라는 것을 생각하면 진짜로 그는 살아생전 커다란 대도를 들고 싸웠을지도 모릅니다. 야율 우월(야율 황제)가 직접 나와 싸웠대. 야율 우월이 나왔대. 야율 우월이 직접 참여했대... 하면서 입소문을 내던 것이, 전해져 내려오면서 비슷하고 좀더 쉬운 발음인 야율 우얼로 바뀌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도 있습니다. 물론 이 부분은 연구에 의한 추측일 뿐, 확정되거나 정사가 된 것이 아닙니다. 해당 추측을 뒷받침해 줄 증거가 아직 나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적진 저 멀리에서 그 광경을 바라보던 대원수 야율 보길은 10여만의 군사를 휘몰고 달려들었습니다. 이 싸움에 동원된 발해군은 겨우 2만의 적은 병력이었기에 퇴각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여러날에 걸쳐 고군분투 하던 중, 룡남의 군세는 '백운산'에서 적들에게 포위당했습니다. 식량과 음료가 떨어졌지만, 룡남이 포함된 발해군은 죽을 각오를 다해 싸웠습니다. 발해군이 백운산에서 포위당한지 3일이 지났습니다. 룡녀는 오빠의 생환소식을 애타게 기다렸지만 아직 아무 소식이 없었습니다.




-여기서도 황제 휘하에서 중앙집권체제를 이루어 빠르게 징병 및 군편제를 이룰 수 있는 거란과 발해의 차이가 납니다. 발해는 바로 모여서 쳐들어갈 수 있는 거란에 비해 마치 동로마제국을 보는 양 중앙군이 따로 있고, 각 지역마다 지방군을 두어서 적이 쳐들어오면 중앙군에 지방군들이 합류하여 맞서는, 정확히 말하면 '각개격파' 당하기 매우 쉬운 군 모집 형태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이는 자라산 전설에서도 왕의 중앙군이 싸우는데 지방군이 늦게 도착했다는 언급과, 발해멸망전 당시 발해의 지방군은 소식을 듣지 못하고 각자 영토를 지키다가 홀한성이 함락되고 대인선이 끌려가고 난 뒤에야 산발같이 몰려들어 거란군의 손에 의해 각개격파 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문제는, 발해가 멸망하는 그 순간까지 결국 고쳐지지 않습니다.


이 전설에 나오는 발해군 역시 겨우 2만이라는 것, 하지만 산에 포위된지 3일이 지났어도 , 악조건 속에서도 10만을 상대로 싸우면서 전멸하지 않고 열심히 싸우고 있는 것을 주목하고, 이들이 싸우고 있는 장소와 룡남, 룡녀의 고향이 용천부에서 멀지 않다는 것을 보아하면, 전설이 사실일 시에 이 2만명은 발해정부의 중앙군, 즉 천문군이나 좌우신책군이 포함된 정예병력일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고 봅니다.



결국 4일째 되는 날, 룡녀는 마음먹고 서울인 상경룡천부로 찾아가 자원입대를 요청하였습니다. 그런데 금군의 교위는 그녀가 여자임을 알고 하찮게 여기면서 쫓아 내 버렸습니다. 룡녀는 하는 수 없이 방법을 다르게 잡았습니다.


이튿날 아침이었습니다. 이 날은 수도에 모인 발해군이 마지막으로 전선으로 떠다는 날이었습니다. 발해의 왕은 친히 룡천부의 대돌에서 내려와 군사들을 바래다 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홀연히 교련당 서쪽으로부터 붉은 갑옷에 백마를 타고 바람처럼 달려오는 자가 있어 깜짝 놀랐습니다. 그 장수는 바로 발해의 왕 앞에 와서 말에서 뛰어내려 땅에 엎드리고 왕에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대왕께옵서는 소녀를 군사로 받아주옵소서!"


하고 그녀는 간청하였습니다. 그녀는 바로 룡녀였습니다. 발해왕이 굽어보니 일개 소녀라지만 인물이 매우 절색이고 목소리 또한 은방울이라. 너무 측은하고 안타까운지라


"네 일개 계집애로서 무슨 재간으로 전쟁에 나간다는 말이더냐."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룡녀는


"자고로 나라의 흥망성쇠는 필부도 책임이 있다 했거늘, 수백년 자랑 높던 발해땅이 거란군에게 당장 먹히게 된 오늘, 여자라고 어찌 보고만 있겠습니까? 바라옵건데 소녀의 하찮은 재주지만 한번 보아 주십시오!"


라고 아뢰더니, 대왕이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어깨에서 활을 빗겨들고 재빨리 하늘에 떠 있는 기러기떼를 향해 화살 두방을 날렸습니다. 그러자 바로 기러기 두마리가 땅에 떨어졌습니다. 그 광경을 본 대왕과 군사들은 일제히 감탄을 금하지 못했습니다. 룡녀의 실력을 본 대왕은,


"너의 활재간이 비상하거든, 국보인 [신궁]을 하사하고 너를 선봉대장으로 임명하겠다. 어서 백운산에 갇힌 아군의 포위를 풀고 돌아오라. 그러하면 너를 왕후로 맞아 은혜를 갚겠다."


이에 룡녀는 백번 사례하고 신궁을 받고 말에 올라 떠났습니다. 발해왕은 아쉬운 심정을 금할 수 없어 그녀가 포함된 발해군을 오랫동안 전송하였습니다.



-룡남이 포위된지 4일이나 지나서 도성으로 올라간 룡녀가 금방 용천부에 도착한 것을 보면, 룡녀와 룡남은 상술했듯이 용천부에 상당히 가까운 위치에 살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용천부 자체에 살고 있었거나, 현덕부에 살았을 가능성도 높지만, 현재 발해 각 부들의 영역이 어찌 되어 있었는지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답할 길이 없습니다.


그리고 모집된 발해군이 전선으로 떠나는 날, 왕이 직접 그들을 배웅했다고 합니다. 이를 보아, 굳이 배웅 필요가 없는데도 자신의 마음을 담아서 배웅한 것을 보면, 지금의 발해는 과거 외침이 없었을 시절에는 지배층과 왕족들이 백성들을 괴롭혔던 것과 달리, 외침이 있을지언정 이제 지배층이 백성들을 괴롭히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데서, 이 전설의 시기를 최하 왕계가 아예 바뀐 대위해~대인선기로 추측할 수도 있습니다. 더군다나 발해왕은 다른 전설에 나오는 못된 발해왕과 다르게 소녀인 룡녀가 여인의 몸에도 불구하고 전쟁터에 나간다는 것을 측은하고 안타깝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더 주목할 것은, 룡녀가 활을 쏘아 기러기를 맞힘으로서 자신의 실력을 증명하였다는 것입니다. 한민족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활. 그리고 감탄한 발해왕이 그녀에게 국보인 '신궁'을 하사한 것은, 발해의 전신인 고구려의 시조가 고주몽이었다는 것과 관련이 되어 있을 가능성도 존재합니다. 과거 645년 고당전쟁 시기에 요동성 안에 주몽의 활이 신성시되어 걸려 있었다는데, 그 이후 어떻게 그 활을 구해서 발해에서 대대로 국보로 간직하고 있었을 가능성은 둘째치고 주몽의 활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 자체는 사실이기 때문에 매우 흥미로운 부분입니다.



이튿날 저녁. 룡녀가 포함된 발해 주력군 수만명이 곧바도 백운산으로 올라가자, 산 위에서 항거하고 있던 룡남이 포함된 발해군 역시 함성을 지르며 산 아래로 내려왔습니다. 이때, 야율 보길의 부장이 삼지창을 휘두르며 룡녀의 앞을 막아 나섰습니다. 하지만 룡녀가 신궁에 화살을 먹여 적장의 머리를 쏘자 면상에 바로 화살을 맞은 놈은, 뒤로 고꾸라지고 말았습니다. 그 광경을 목격한 뒤, 놈들은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줄행랑을 놓았습니다.


그런 즈음, 홀연 징소리가 크게 울리며, 거란 원수 야율 보길이가 산 양편으로부터 복병을 몰아 발해군을 막아섰습니다. 수천대의 화살이 비오듯 날아오자, 룡남은 보검을 들고 화살을 막았지만, 그가 탄 말이 화살을 맞고 쓰러졌습니다.


말에서 떨어진 룡남은 사방에서 달려드는 적들을 용맹하게 찍어넘겼지만, 지칠 대로 지친 그와 그 동료들로서는 엄청난 수의 거란군을 당해내기 힘들었습니다. 갑자기 삼지창이 여러대 동시에 날아드는 바람에, 룡남은 윽! 소리와 함께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졌습니다. 이에 마침 룡녀가 포위를 헤치고 달려가 그를 끌어안았습니다. 하지만 룡남의 상처는 깊었던지라, 룡남은 두눈을 감지 못하고 부릅뜬 채 숨을 거두었습니다.


비분에 찬 룡녀는 이를 갈며 일어섰습니다. 신궁에 화살을 먹인 룡녀는 야율 보길의 낯짝을 향해 깍지를 떼었습니다. 놈은 목구멍에 화살을 맞고 말에서 굴러떨어져 죽었습니다. 우두머리가 죽는 것을 보자 거란군들은 상당수가 궤멸되고. 생존자들은 몽골땅으로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전투는 발해군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승전고가 높이 울리고 발해 군사들이 서울로 위풍당당하게 들어갈제, 룡남의 시신을 품에 안은 룡녀는 천천히 백운산 마루로 올라갔습니다. 밑에서는 경박호의 푸른 파도가 설레이고 있었습니다.


"원통하다. 쌍둥이 남매로 태어나 인생고락을 같이하자 했더니, 어찌하여 오빠는 먼저 세상을 하직하였는가?...

오빠를 저승에 보내고 내가 왕후가 된들, 무슨 보람이 있는가?!"


룡녀는 길게 탄식하고 나서, 룡남을 끌어안은 채 검푸른 호수에 몸을 날렸습니다. 그 광경을 본 병사들이 백운산마루에 올라가 밑을 내다보니, 호면에서 물거품이 일며 커다란 바위 두개가 물 속에서 솟아 오르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본 사람들은 나라를 지켜 싸운 쌍둥이가 서로 갈라지기 아쉬워 돌로 변한 채 함께 서 있다고 하였습니다.




-백운산은 현재 어딘지 영 감이 잡히지 않지만, 룡남이 이미 포위된 지 4일이 지난 시점에 룡녀가 상경용천부로 향하였고, 거기서 하룻밤을 보낸 다음에 발해왕을 뵙고, 그다음에 발해군과 함께 지원에 나섰으므로, 대충 룡남이 포위된지는 어림잡아 1주일이 넘었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하지만 이때도 백운산의 발해군은 전멸하지 않고 끈질기게 항전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직까지 끈질기게 살아 있던 적장 야율 보길이는 결국 룡녀의 화살을 맞고 죽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하나더 주목할 것이 있는데,


패퇴한 거란군이 거란이 아닌, '몽골 방향으로 달아났다'는 겁니다. 왜 거란군이 몽골로 달아나는가?? 하고 의아해 할 분들이 있지만, 야율아보기 당시 몽골의 일부인 오고부(烏古部)는 919년, 태조 야율아보기 신책 4년에 이미 거란에게 복속되어 있던 상태였습니다. 따라서 당시 몽골의 일부는 거란의 땅이었기 문에, 패퇴한 거란군이 몽골로 달아나는 것 자체가 이상한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919년에 몽골 오고부가 거란에 복속하였기 때문에, 이 룡문전설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룡문전설의 배경이 된 전투는 정황상 919년~925년 사이에 일어났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924년에 발해가 집안단속을 하고 거란을 먼저 선빵때린 요양전투가 있었기 때문에, 그 이전 혹은 직후에 거란군이 발해를 침공하여 치열하게 싸운 전투가 있지 않을까 합니다. 있다면 바로 그 전투가 지금 이 룡문전설에서 언급하는 전투일 가능성도 존재합니다. 그리고 이 정체모를 전투가 진짜 일어났었다면, 일어났던 시기에 대한 의견은 다음과 같이 나뉩니다.




1.920~921년 사이


2.925년




1번의 920~921년은 거란이 몽골 일부를 통합하고, 921년에 발해가 무슨 이유에서인지(아마도 918년에 거란에 사신을 보낸 이후, 거란과의 전쟁은 결코 피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힘을 모으기 이전에 주변 불온세력들부터 정리한 것일수도 있습니다.) 흑수말갈 세력을 선공하여 정리하는 듯한 기사가 고려사와 요사에 보입니다. 따라서 이 시기에 거란의 침공이 한번 이상 있었고, 918년의 사신파견 이후 거란이 발해에게 적대적인 것이 인증되고, 이 시기에 발해를 한번 더 공격하자, 발해 역시 921년에 국력을 모으기 위해, 뒤통수를 간지럽히는 흑수말갈을 선공하여 세력을 흩어 놓았다. 라는 추론도 가능합니다. 정황상 몽골의 복속 이후에 시간이 맞는 의견이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시간이 맞는 것 이외에는 전혀 알 수 없는 주장입니다. 하지만 태조 야율아보기가 발해를 상당히 눈엣가시로, 그리고 원수로 여겼다는 점에서 가능성이 없는 선택지는 아닙니다.




2번의 925년설은 그 당시의 정황을 생각해보면 상당히 앞뒤가 맞아떨어지는 설입니다.




발해지도.jpg 역사에서 잊혀진 거란과 발해의 대회전인가? - '룡문 전설'
(이 지도도 완벽하게 맞는게 아니니 대충 발해 부 영역이 이거랑 비슷했구나. 하는 생각으로 보세요.)




제가 쓴 발해멸망전의 5편을 보시면, 924년의 요양을 둘러싼 전투는 두번 다 발해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이에 엄청난 충격을 받은 거란은,925년이 되자마자 대원수 야율요골(훗날의 요태종)의 지휘하에, 복구된지 얼마 안된 요양을 쓸어버리고, 진만묘지명에 따라 보면 방어선 부분에 해당하지 않는(발해의 대 거란방어선은 막힐-부여-장령-요양으로 추정됩니다. 하지만 그 요양이 910년대에 거란에게 먹혀버린 이후, 대 거란방어선이 바로 그 뒤에 있는 서경압록부 지역으로는 구멍이 뻥 뚫린 상황이었습니다.) 압록부를 맹공하였습니다.


요동 지역은이미 상당수가 거란의 손에 넘어갔고, 원래 방어선이었던 요양이 사라진 뒤, 그 바로 뒤에는 무방비 상태의

서경압록부가 있습니다. 그리고 압록부에서 조금만 올라가면 현덕부, 용천부가 있습니다.

(하지만 압록부와 용천부가 붙어있었다고 주장하는 그림도 많습니다.)



그리고 925년 연간, 진만이 야율요골을 따라 종군한 거란군은, 발해의 압록부를 휩쓸고 신주와 환주, 두개의 주를

함락시킨 것으로 나옵니다. 국내성에 가까운 위치인 서경 상고성은 발해의 심장부인 용천부와도 상당히 가깝습니다.

룡남이 싸웠던 백운산이 룡녀의 집과 가깝고, 그리고 이곳에서 발해의 수도까지 하루이틀밖에 걸리지 않았다는 것은,

(그리고 위에 보면, 바로 룡녀가 출전을 허락받은 다음날 저녁 발해의 지원군이 백운산에서 저항하던 발해군과 합류했다는 것은, 백운산은 수도인 용천부와 상당히 가까운 곳이라는 뜻이 됩니다.)


이 전투가 진짜 존재했다면, 발해의 내륙까지 거란군이 쳐들어온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발해 역사상 이런 일이 대놓고 있던 적 중 알려진 사례는 아직 925년의 전투와 926년의 멸망전 뿐이라고 하면 이 전투의 시기는 925년 연간 중에

발해와 거란 사이에 일어난 전투로 보일 가능성도 존재합니다.


하지만 이 가설에도 약점이 하나 존재하는데, 정황상 야율아보기로 보이는 적장 야율 우얼. 즉 야율아보기는 925년의 전투에 전혀 참여하지 않고, 아들인 야율요골을 보내서 발해를 쳤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이전부터 야율아보기가 발해와의 전쟁에 많이 참여해서 발해인들의 뇌리에 그만큼 깊숙하게 남아 있었다고 얘기한다면 또 납득이 안되는 것도 아닙니다.)


따라서 현재는 1번, 2번 어느것도 정답이라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추론만 가능할 뿐입니다.

이 전설이 발해의 수도가 있던 용천부의 흑룡강성 지역에서 대대로 전해져 내려왔다는 것은, 왜곡이나 조작이 좀 가해졌을 가능성은 있지만, 발해와 거란의 전투가 그 당시에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전설들 하면 그거 뭐 신빙성이 있어? 라고 무시하기 보다는, 가설이나 정황상 상황을 따져서 어느 정도 역사 고증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요즘들어 계속 들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용문전설은,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고 그 기록을 잃어버린 발해말 발해와 거란의 영혼을 건 전쟁, 전투 중 하나를 모티브로 하여 이야기한 전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무언가 허술한 것 같은데 무언가 조작하기는 힘든 디테일이 전설 곳곳에 남아 있기

때문에 진짜 일어났던 거란과 발해의 전투를 이야기한 것일 가능성도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계속 나오는 발해 말기의 거란과의 싸움을 담은 전설들과, 현재 남아있는 사료들을 접목시키면,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어느정도 거란과 발해의 전쟁, 전투, 대립의 양상도 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듭니다.

그래서 요즘 들어 계속 전설을 파 보고 전설을 가지고 연구 및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최근에는 룡문전설도 있고, 925년 상반기에 발해의 압록부를 반이나 초토화시키고 압록부의 주도인 서경 신안성을 함락시키기까지

하여 엄청난 성공을 거둔 야율요골이 왜 925년 중반기에 발해에서 갑자기 철수해버리는지에 대한 의문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현재 이 이유는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925년 봄~여름 사이에 야율요골이 이끄는 거란군이 대규모의 발해군 주력군과 만나서 회전 끝에 패배하여

점령지와 압록부를 모두 뱉고 거란으로 철수한게 아닌가? 하는 추측,설도 돌고 있습니다. 실제로 연변대 측에서는 이에 대해 어느 정도

연구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앞으로 무언가 정황을 알 수 있는 사료가 발굴된다면, 이 룡문전설에서 있었던 전투 역시 진짜로 있었던 거란과 발해 사이의

전투로 예측해 볼 수 있을 가능성도 존재할지 모른다. 라고 생각은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생각은 어떠신가요?





발해멸망전 고찰 1편. 멸망의 전조

-https://www.fmkorea.com/6837781243


발해멸망전 고찰 2편. 925년 이전의 발해 정치상황

-https://www.fmkorea.com/6840383814


발해멸망전 고찰 3편. 공백의 5년(913~918)

-https://www.fmkorea.com/6841829328


발해멸망전 고찰 4편. 918~924년까지 발해는 과연 무엇을 했을까?(상편)

-https://www.fmkorea.com/6844051571


발해멸망전 고찰 4편 (하편)

-https://www.fmkorea.com/6844149065


발해멸망전 고찰 5편

-https://www.fmkorea.com/6846820595


발해멸망전 고찰 6편 - 925년 반란설 상

-https://www.fmkorea.com/6849396028


발해멸망전 고찰 6편 - 925년 반란설 하편

-https://www.fmkorea.com/6850618504



발해멸망전을 제외한 다른 글들



5경 15부 62주에 대한 오류 가능성 검토

-https://www.fmkorea.com/6797762364


발해 국호는 발해가 맞습니다

-https://www.fmkorea.com/6801049872


무왕과 대문예의 형제싸움으로 인한 나비효과

-https://www.fmkorea.com/6804185836


발해사 최대의 미스터리, 882년 정변설

-https://www.fmkorea.com/6807940225


'886년 사건'의 진실에 대하여

-https://www.fmkorea.com/6809313438


'쟁장사건'은 왜 일어났을까

-https://www.fmkorea.com/6810052709


'등재서열사건'은 왜 일어났을까

-https://www.fmkorea.com/6812375697


전설과 설화로 살펴본, 발해 문왕 시기의 어두운 면

-https://www.fmkorea.com/6814511926


발해 멸망의 시발점, 폐왕 대원의의 정변 (1)

-https://www.fmkorea.com/index.php?mid=mystery&category=15037454&document_srl=6817289827


대원의 정변 2편

-https://www.fmkorea.com/index.php?document_srl=6817562512&s_comment_srl=6817568874#comment_6817568874


문왕과 강왕의 관계에 대한 미스터리

-https://www.fmkorea.com/6817851720


폐왕이 문왕의 가족을 몰살시켰을 가능성에 대해.

-https://www.fmkorea.com/6817911871


대원의 정변 3편

-https://www.fmkorea.com/6819337509


대원의 정변 4편

-https://www.fmkorea.com/6820973328


대원의 정변 5편

-https://www.fmkorea.com/6821034193


발해의 군제

-https://www.fmkorea.com/6822795205


발해 선왕(상편)

-https://www.fmkorea.com/6824049857


발해 선왕(하편)

-https://www.fmkorea.com/6824625532


대이진의 찬탈 가능성에 대한 글

-https://www.fmkorea.com/6826837680


선왕과 대건황의 공통점

-https://www.fmkorea.com/6832473378


경박호와 모란강 전설로 본 대건황-대현석 시기의 불안

-https://www.fmkorea.com/6833752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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