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예인 발해, 그 이후 - 후발해에 대하여 (926~93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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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고기먹는스님 댓글 0건 조회 91회 작성일 24-04-30 1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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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발해 붕괴 직후 상황)


-https://www.fmkorea.com/6978958316




지난 편에는 발해 중앙정부가 붕괴된 직후의 상황을 언급해 보았습니다.

이번 편부터는 발해 중앙정부 붕괴 이후를 이야기하겠습니다.


이 글은 발해의 926년 멸망 이후 제일 먼저 수립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 후발해에 관한 글입니다.



참고로, 후발해에 대해서는 있다 없다부터 시작해서 많은 면이 갈리고 있으며, 많은 학자들이 논박을 하는 주제입니다.

여기에 쓰는 글은 제가 하는 주장에 대한 글이며, 제 주장이 아직 정설로 받아들여진 주장이 아니라는 것은 알아두셨으면 합니다.

저는 후발해가 존재했다. 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여기 쓰는 글은, 제 개인의 연구결과이며, 제 생각입니다.




위의 글에서, 우리는 발해군과 거란의 싸움이 926년 8월, 회발성이 함락됨으로서 우선 끝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그럼 후발해는 발해군이 모두 패하고, 거란이 물러난 이후에 수립되는 게 아니냐? 하는 의문을 가진 분들이 있었습니다. 얼핏 보면 그럴 것 같기도 하지만, 우리는 신오대사에서 이런 기사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신오대사』 6권 中


-7월 경신일에 발해의 사신 대소좌가 왔다.





이 신오대사 기사로 인해 추정을 해 보면, 발해 사신 대소좌는 적어도 4월~늦어도 5월초에는 발해땅에서 중국으로 향했을 것입니다. 제가 전에 쓴 이 글에는.....



2월 초부터 8월까지 발해군의 거란군과의 전투를 많이 이야기하고 있지만, 4월~5월 사이에는 그 중에서 딱히 별다른 일이 별로 없던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시기에 중국에 사신을 보낸 이유를 생각해보자면, 우선 그 이전인 2월~3월까지 거란군은 발해군과 치열하게 곳곳에서 싸웁니다.




그리고 제 예측이지만, 4월~9월 사이의 어느 기간에는 발해왕제가 부여성을 포위공격하였으나 실패하고 철수합니다. 하지만 저는 발해왕제가 대인선이 끌려가자마자 이 소식을 입수하고, 빠르게 발해군을 지휘하였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2월에 홀한성에 있는 야율아보기를 조회한 다음, 3월에 곧바로 각 부의 발해군이 모여서 일사불란하게 거란군과 교전을 하고, 이후 곳곳에서, 특히 장령-압록부 중심으로 발해군의 반격이 일어나며, 이후 4월에서 9월 사이에 발해왕제가 이끈 대병력으로 추정되는 발해군이 부여성을 공격하여 양동전선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사령관이 없이는 할 수 없는 연계성 행동이며, 저는 그 사령관을 발해왕제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왕제가 대인선이 끌려가자마자 소식을 전해듣고 각 부의 발해군을 규합한 다음, 자신이 이끄는 주력은 부여부를 공격하여 홀한성에 주둔한 거란군의 퇴로를 끊고, 발해 지방군은 홀한성을 공격하여 거란군을 쌈싸먹는 것이 그 목표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실제로 거란군은 즉시 야율안단의 휘하에 강군들을 보내어 발해 지방군을 공격합니다.)





발해 지방군이 야율안단의 공격에 먼저 무너져 버린 탓에, 발해왕제 역시 양동작전이 실패하고 후방의 공격을 염려하여 재빠르게 철수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 과정에서 부여성에 있던 거란군들이(당시 이들의 지휘관은 황태자 야율돌욕이었습니다.) 발해왕제가 직접 지휘하는 발해군을 추격하여 전공을 세웠다, 피해를 내었다는 기록이 아예 없는 것을 보면, 발해왕제는 질서정연하게 대병력을 이끌고 퇴각한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렇다면 발해왕제가 자신을 왕으로 선언/내지 즉위한 것은 언제일지 생각해보면, 발해왕제가 부여성을 치기 직전, 각 부들이 모여서 일제히 거란에게 반기를 든 3월 초의 직전. 즉 2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쓴 위에 있는 발해 멸망전 (하) 글의 파트를 보면, 2월 초에 발해의 부들이 거란에게 입조를 하지만, 이후 그 발길이 뚝 하고 끊겨 버립니다. 그리고 거란은 텅 빈 홀한성에서 무려 1달 가량이나 정복자 놀이를 하면서 허송세월을 보냅니다.



거란군은 홀한성을 점령하고 발해 각 군현들에게 자신이 발해를 멸망시켰음을 알리고 자신에게 충성하면 받아주겠다. 라고 선언한 것 같지만, 2월 초에 온 3개의 부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오지 않았습니다. 야율아보기는 김이 샌 것 같지만 ,어쨌든 자신을 직접 찾아온 이들을 후대하고 위로하여 돌려 보냅니다. 그런데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고, 그 3개의 부인 안변,막힐,정리부는 야율아보기의 위로를 직접 받고 돌아간 다음 3월 2일에 대거란전의 선봉에 서는 황당한 일이 벌어집니다.



저는 그렇기에 이 공백이 있는 2월 초~2월 말 사이 거란이 홀한성에 행차하고 동단국을 세우고 즐겁게 논공행상을 하고 있는 사이, 발해왕제가 각 부들에 재빠르게 소식을 전하고 자신이 형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음을 천명하고, 함께 싸워 거란을 물리치자고 외치면서 깃발을 들어 올렸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정통성이 있는 제일 가까운 왕족임과 동시에 군경력이 있는 것으로 강력하게 추정되는 그에게, 점령당하지 않은 발해의 부와 세력들은 모두 협조하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왕제는 스스로를 왕으로 선언하고 발해군을 다시 긁어 모았으며, 홀한성에서 동단국을 세우고 논공행상을 하면서 히히덕거리고 있던 야율아보기와 거란군은 깜짝 놀라 바로 행동에 나선 것이라고 하면 이야기가 얼추 들어맞습니다.





그래서 발해왕제는 거란군과 맞서 싸움을 천명하고 부여성을 공격하여 거란의 퇴로를 끊으려고 시도한 것일 겁니다. 동시에 대병력을 일으켜 거란을 상대하면서도 자신이 발해의 적법한 왕이 되었음을 중국에 알리는 사신으로 대소좌를 보낸 것이며, 중국에서 직접 알아낸 정보와, 대소좌를 통해서 알아낸 정보가 뒤섞이는 바람에, 부여성을 포위공격한 주체가 발해왕제가 되기도 했다가, 제일 최근의 정보인 송사에서는 발해왕이 직접 부여성을 쳤다가 퇴각했다. 라는 식으로 쓰여있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부여를 공격한 '왕제'라고 알려졌던 사람이 왕이 되었으므로, 정보가 갱신되어 그가 왕이었다는 것을 뒤에 알게 됨에 따라서 말입니다.)




그리고 5월부터 대원수 야율요골을 비롯한 거란 주력군이 다시 발해의 압록부, 장령부를 공격하러 나선 데는, 아마도 발해왕제가 스스로 왕이 된 것을 전해듣고 기껏 발해 중앙정부를 붕괴시켜 놓았는데, 모든 일이 도루묵이 될 것을 염려함과, 그리고 발해의 남은 지역들이 연합하여 홀한성을 포위하면 홀한성,용천부에 머무르고 있는 거란군 본군과 야율아보기 본인 역시 안전을 보장할 수 없기 때문임으로 추측이 됩니다.



하지만 이들의 공격은 의외로 지지부진했는지, 6월이 되서야 성과가 조금씩 나오고, 발해군에게 눈에 보이는 유의미한 타격을 주고 영토를 추가점령한 것은 8월이 되서야 보입니다. 하지만 8월 이후로 발해와 거란의 전쟁은 더이상 보이지 않습니다. 거란군 역시 7월에 야율아보기가 병사했으며, 뒤이어 곧바로 벌어진 거란 황가의 제위 쟁탈전으로 인해 황태자였던 야율돌욕이 완전히 배제되어 버리고, 대원수 야율요골이 형을 제쳐버리고 황제가 됨으로서 야율돌욕이 졸지에 위험인물이 되어버린지라, 거란 본국의 상황 역시 불안정해졌기 때문에 8월에 회발성을 함락시키고도 거란군은 발해에게 더 이상 공세를 퍼붓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거란 주력군과 많은 인원들이 언제까지나 발해땅에만 있을수도 없고 말입니다.




따라서 거란이 이 기간동안 차지한 발해의 영역은, 잘 쳐줘도 홀한성을 위시한 용천부 일대, 그리고 부여부,장령부 일대, 요동이 전부였습니다. 그리고, 926년 8월의 전투를 마지막으로, 발해는 비록 수도와 위의 지역들을 빼앗겼지만, 확실하게 독립해 버린 것으로 입증이 된 흑수말갈과 철리말갈을 제외한 대부분의 영토는 건사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가 아는 발해부흥운동의 내용과 좀 차이가 나게 됩니다. 우리는 발해 멸망 이후 후발해를 거쳐 비실비실한 정안국이 자리잡고, 오사국으로 이어지는 내용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생각외로 발해에서 후발해로 넘어갈 시기에 이탈했다고 입증된 영토는 많지 않습니다. 만약 진짜로 후발해 세력이 미약하고 엉망진창이었으면, 이왕 공격한 것, 8월의 공격 이후에도 거란이 계속하여 발해를 휘몰아쳐서 없애버렸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후 거란은 발해를 건드리지 않았으며, 발해 역시 빼앗긴 영토수복을 위해 거란을 공격하는 일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정안국 시기에 보이는 여진/철리말갈의 공격 역시 딱히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물론 거란이 집안단속을 해야 할 필요가 있었으며, 중국 문제에도 신경을 써야 하기 때문에, 만만치 않은 발해잔존세력인 후발해를 우선 신경쓰지 못하고 빗장을 걸어둔 느낌은 강하게 납니다.



이후로도 후발해는 중국에 여러 차례 사신을 보내면서 구 발해국과 자신들이 다르지 않은 똑같은 발해라는 것을 보여주었으며, 중국 사서에도 역시 다른 명칭으로 이들을 부르지 않고, '발해'라고 계속 불러 주고 있습니다.




『책부원구』 972권 中


-(926년)7월에 발해사신 대소좌 등 6명이 조공하였다.


-명종 천성 4년(929) 5월에 발해가 고정사를 사신으로 보내 입조하여 방물을 바쳤다.




『책부원구』 中


-장흥 원년(930) 정월에 청주에서 보고하기를, 사람을 시켜 발해 왕헌 일행을 압송하여 본국으로 돌려 보내던 중 흑수에게 (그들을) 빼앗겼습니다.




『책부원구』 976권 中


=명종 천성 4년(929) 7월 을유일에 전에 입조하였던 발해국 사신 고정사를 태자세마로 삼았다.


※오대회요 30권에는, 성문각을 조산대부 우신무군장사 주사우록사 시대리평사로, 함께 간 사신 고보의를

조산랑 우효위장사로 삼고 금자를 하사한 기록이 있습니다.


-장흥 2년(931) 12월에 발해사신 문성각이 내조하여 조공했다.


-장흥 3년(932) 정월에 발해가 사신을 보내 조공했다. 선물을 차등있게 하사했다.




『송사』 491권 외국전 中 발해국 항목


-장흥, 청태 연간(930~935)을 지나면서 사신을 보내왔다.





926년의 기록 다음에 나오는 기록은 929년인데요, 우선 거란과의 전쟁이 끝나고 일단락된 이후, 발해 측에서도 나라를 정비하고 정돈하는 데에 약 3년 정도를 쓴 것이 보입니다. 929년에도 멀쩡하게 사신을 보내었습니다. 그런데 930년에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발해에서 보낸 사신이 발해로 돌아가는데, 귀국길에 흑수(여진)의 급습을 받아 약탈을 당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는 흑수말갈, 즉 여진의 세력이 발해가 중국으로 사신을 보내는 루트인 압록강 루트까지 내려올 수 있었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에 이 3년동안에 분명히 후발해의 세력 축소라던지, 여진,말갈세력과의 알력, 싸움이 있었을 것임을 예측할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고려사에 계속하여 927,928,929년에 발해 유민들이 넘어오는 것을 보면, 나라를 재정비하는 와중에 놓친 인구와 숙청된 인구가 더 있으리라고 예측하는 시선 또한 존재합니다.



하지만 이후로도 사신은 정상적으로 왔다갔다 하여서, 931,932년에도 발해의 사신은 중국에 드나들었으며, 중국측에서도 답례를 하는 등 나쁘지 않은 모습을 보였습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발해의 멸망 이후에도 후발해 정권이 들어섬으로서 몇년간 어느정도 안정화에 노력하고, 거란의 침공을 막아냄으로서 안착에 성공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대로 계속 지켜내고, 힘을 회복하면, 마치 훗날 일시적이지만 원수를 갚고 권토중래에 성공한 남송처럼 발해 역시 나쁘지 않은 전망을 보이고 있는 듯 합니다. 마침 거란은 동단왕 야율돌욕이 중국으로 달아나고, 이후 중국과의 잦은 전쟁으로 인해 요 태종도 고생하고, 끝내 그 사망에도 영향이 간 만큼 정신이 없었기 때문에 발해는 비록 축소되었지만 주변환경 덕분에 유지는 되고 있던 것으로 보이며, 권토중래의 가능성 역시 어느정도 생각할 수 있게 되지 않았나 합니다.



하지만 그 권토중래는 없었으며, 이후 발해사는 이상한 방향으로 틀어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932년까지 사신을 멀쩡히 보내고 잘 살고 있던 후발해에 정변이나 반란으로 예측되는 변고가 터진 것이 예측되기 때문입니다.




『고려사』 1권 中


-태조 17년(934) 7월에 발해국 세자 대광현이 수만명을 거느리고 와서 투항하였다. 왕계라고 성명을 하사하고 왕가의 호적에 붙였다. 또한 특별히 원보라는 벼슬을 제수하고 백주를 지키게 하여 그 조상의 제사를 받들게 했다. 그의 신료들에게도 작위를 하사하고, 군사들에게 전답과 집을 차등있게 하사했다. 12월 발해 진림 등 160명이 와서 귀부했다. 21년(938) 이 해에 발해인 임승이 3천여호를 데리고 와서 투항했다.




무슨 일이 터졌는지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934년 7월에 발해의 세자라고 칭하는 대광현이 수만에 달하는 자신의 세력과 신료, 군사를 거느리고 고려로 투항해 온 것입니다. 동년 12월에는 대인선 시기에 중국에 사신으로 간 적이 있는 것으로 나오는 대진림이 160명을 데리고 와서 귀부하고, 약간 시간이 흐른 다음이지만, 938년에는 임승이 무려 3천호를 데리고 고려에 투항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그리고 뜬금없이 935년부터는 지금까지 언급된 적이 없던 열씨가 사신으로 나오며, 이후 970년에 후발해의 후계국인 정안국의 왕이 '열만화'인 것을 보면 이 때 정변이나 반란이 일어나서 왕위가 열씨에게 넘어가고, 대씨 세력은 이로 인해 완전히 몰락하거나 쫓겨난 것으로 파악됩니다. 왜냐하면 이 934년에 딱히 거란이 발해를 친 정황도 드러나지 않으며, 발해 방향으로 군사를 보낸 정황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딱 이 시기에 요태종은 중국을 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 시기에 세자인 대광현이 나라를 탈출하여 고려로 도망해온 이유는, 외침, 거란이나 여진의 침입이 아니라 반란이나 정변이 그 원인이라고 100퍼센트 확신합니다.




『책부원구』中


-폐제 청태 2년(935) 11월에 발해가 열주의를 사신으로 보내 입조해서 방물을 바쳤다.

※오대회요 30권에는 열주도라고 이름이 바뀌어 나오고, 이 사람의 직책이 남해부도독이라고 나옵니다.

그리고 청태 3년(936) 2월에 열주도를 검교공부상서 정당성공부경 오제현시광록경으로 삼았다는 기사가 추가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934년 당시에 발해의 세자라고 칭한다는 것은, 구 발해국이 아니라 후발해의 세자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926년에 중앙정부가 붕괴된 이후, 934년에서야 고려에 귀부했다면, 항쟁까지 끝난 이 상황에서 8년간 대체 이 인물이 어디서 뭐 하고 있었는가를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 대광현이 후발해에 합류한 인물이며, 후발해의 왕의 세자였다면 모든 것이 납득이 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발해사에서 추측해 본 나이를 보면, 대광현이 발해왕제의 손자일 가능성은 매우 적습니다. 이미 907년에 발해 왕자인 대소순이 사신으로 당에 갔는데, 이것을 보고 추측해 보면, 대인선은 적어도 860년대 중반 이후에서 870년대에는 태어났을 것입니다. 그 동생 역시 나이차를 생각하면 870년대생에서 늦어도 880년대 생일 것입니다. 그리고 대광현이 신료와 군사들을 거느리고 왔다는 것을 보면, 어린애는 절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으므로, 대인선의 동생이라고 확실하게 입증이 된 발해왕제의 후손이라 치고, 대광현의 당시 나이까지 고려하면 대광현은 발해왕제의 아들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생각하며, 대광현은 대인선의 세자, 즉 부왕이 아니고, 발해왕제의 세자라고 하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또한 후발해라는 국호는 후대에서 구분을 위해붙인 국호이기에, 당연히 당시에도 후발해는 발해라고 불리웠을 것이며, 대광현 역시 자신을 (후)발해 세자라고 소개했을 것입니다.



또한, 대광현이 달아는 나되, 수만명의 인구와 신료, 군사들까지 이끌고 고려로 무사히 온 것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보통 반란이나 정변이 일어나면, 반란이 성공했을 시에 수도에 있던 근왕파는 모두 잡히거나 죽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대광현은 수만이나 되는 인구를 데리고 왔습니다. 그 중에는 신료와 군사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이는 대광현이 반대세력과 맞서 싸우다가, 혹은 대치하다가 승산이 없게 되자,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자신의 세력과, 따르는 자들과 함께 역도들에게 항복하느니 고려로 항복을 하러 갔으며, 상대편들이 대광현의 세력을 추격하여 완전히 없애버리지 못했다는 데서, 치열한 대립이나 싸움이 있었으며, 대광현 세력이 적들에 비해 힘이 달리고 적었지만 적 입장에서도 한번에 쓸어버릴 수 있는 정도는 아니었다는 것 역시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대광현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 과연 그 이전에 왕이었던 것으로 알려진 발해왕제는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한 사료는 전혀 존재하지 않아서 이 부분에서 할 말이 매우 적다는 것은 아쉽습니다. 발해왕제가 살해되거나 포로로 잡히고 열씨가 집권했는지, 발해왕제가 자연사나 병사를 하고 그 다음에 대광현에게 왕위가 돌아갔어야 하는데 반란이 터진 것인지는 현재 전혀 알 수 없습니다.



확실한 것은, 발해왕제에서 대광현으로 승계가 되었어야 하는데 그것을 열씨가 끊어버리고 자신들이 왕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신으로 간 열주도는 남해부도독이라고 소개가 되어 있기 때문에, 후발해의 형성에, 거란과의 전쟁 중 화를 피한 남해부 쪽의 도움과 남해부의 합류가 매우 컸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따라서 이들은 후발해에 합류한 이후,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며, 권신의 기능을 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후로 이들의 힘이 강해지면서 이들이 먼저 반란을 일으켰을 수도 있고, 이들의 세력을 누르거나 없애려 했던 대씨왕족 세력이 역공을 받은 것일수도 있습니다. 확실히 알 수 없다는 것이 아쉬울 뿐입니다.



명칭에 대한 의문이 하나 있다면, 이들은 935,936년까지는 '발해'로 불리웠는데요, 이미 이들이 세운 나라가 정안국이라는 것이 밝혀진 이상, 이들을 발해로 부른 이유는, 이들이 발해에서 쭈욱 이어져 왔으며, 발해의 국민들이 세운 나라이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후 발해계 유민이나 발해계 세력이 사료에 적힐 때에도 이미 발해는 사라지고 정안국, 오사국이 있던 시절에도 '발해'와 '발해인'이라는 말은 계속 쓰입니다.



그리고 어떠한 연유로 정권교체가 되었는 지 알 수 없는 것은 둘째치고, 이 열씨의 정변은 발해에도 상당한 타격을 주었으며, 후발해에서 정안국으로 넘어올 때 상당한 인구손실과 국력손실이 있었으리라는 것을, 그리고 발해 잔존세력 자체에도 상당한 손실이 갔다는 것을 몇 가지 예측할 수 있습니다.




그 첫번째는 후발해 시절에 비해서 사서에 나온 점을 살펴보면, 정안국 시절의 국력이 한참 약하다는 것이 느껴지는 점,


그리고 두 번째로 정안국 시절부터는 발해후계국들이 주변의 세력, 특히 철리말갈이나 여진에게 시달리는 것이 많이 나온다는 것, 그리고 호시탐탐 기회를 보던 거란이 드디어 침공해서 박살을 내놓는다는 점에서 그것이 느껴지며,


세 번째로 전조인 발해의 왕가이며 정통성과 명분을 가진 대씨를 멋대로 몰아내 버림으로 이들을 반대하거나 타국으로 가버린 인구와 영토도 분명 존재할 것입니다.




실제로 대광현이 항복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대진림 역시 고려로 건너오며, 아직 집안정리가 덜 끝났을 것으로 예측되는 938년에는 임승이 무려 3천호를 데리고 고려로 건너옵니다. 사서에 쓰인 것만 이정도이니 사서에 쓰이지 않은 것, 미처 파악하지 못한 것을 다 합하면 생각외로 많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 열씨의 정변은 안그래도 뭉쳐도 힘든 판국에 스스로 자해나 다름없는 일을 벌여 버린 것이나 다름없으며, 당연히 인구와 영토의 감소로 인해 발해 후계세력의 약체화를 불러왔으며, 이후 발해 후계세력이 명맥만 유지하게 되거나, 주변국에 시달리게 되어버리고, 결국은 여기저기서 처참하게 괴롭힘을 받다가 존재감 없이 몰락해 버리는 시발점이 되지 않았을까 합니다.


이후 발해의 유민은 979년에야 대규모로 유출되기 때문에 정안국으로 교체된 이후 열씨 왕조는 어찌어찌 나라의 남은 부분을 잘 추스른 것으로 보이지만, 이미 그것으로만은 국력 하락은 막을 수 없고, 정안국의 파멸 역시 정안국의 시작부터 예측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한마디로, 후발해 시절에는 과거 발해 시절과 비교해서 크게 떨어지지 않는 국력을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정안국 시절부터는 알아서 국력을 다 까먹어 버렸기 때문에 여진도, 철리말갈도, 쳐들어오지 않던 거란도 쳐들어오는 빌미가 제공되는게 아닐까 합니다.



또한, 의미심장한 것이 하나 더 있다면, 열씨의 뒤를 이어서 정안국의 왕위를 탈취한 오씨의 존재입니다. 이 오씨는 발해 말기 대위해-대인선 통치시절에 이들의 측근, 친위세력을 맡았으며, 이 때부터 인지도와 명망을 쌓아온 세력 있는 성씨로 보입니다. 대씨가 열씨에게 빼앗기고, 그 열씨가 대씨의 친위세력이었던 오씨에게 빼앗긴다는 데에서 무언가의 연관이나 혹은 상관성이 예측되기는 하지만, 확실히 밝혀진 바가 없기 때문에 지금으로서는 추측만 난무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은 아쉽습니다.




이 다음 글은 정안국에 대한 글로 이어집니다.


의견이나 질문점은 댓글로 함께하겠습니다.







발해멸망전 관련


발해멸망전 고찰 1편. 멸망의 전조

-https://www.fmkorea.com/6837781243


발해멸망전 고찰 2편. 925년 이전의 발해 정치상황

-https://www.fmkorea.com/6840383814


발해멸망전 고찰 3편. 공백의 5년(913~918)

-https://www.fmkorea.com/6841829328


발해멸망전 고찰 4편. 918~924년까지 발해는 과연 무엇을 했을까?(상편)

-https://www.fmkorea.com/6844051571


발해멸망전 고찰 4편 (하편)

-https://www.fmkorea.com/6844149065


발해멸망전 고찰 5편

-https://www.fmkorea.com/6846820595


발해멸망전 고찰 6편 - 925년 반란설 상

-https://www.fmkorea.com/6849396028


발해멸망정 고찰 6편 - 925년 반란설 하

-https://www.fmkorea.com/6850618504


발해멸망전 고찰 7편 - 마지막 순간(상)

-https://www.fmkorea.com/6862001225


발해멸망전 고찰 7편 - 마지막 순간(중)

https://www.fmkorea.com/6866011369


발해멸망전 고찰 7편 - (하)

-https://www.fmkorea.com/6867818441


발해 멸망전 고찰 8편 - 상

-https://www.fmkorea.com/6885806282


발해 멸망전 고찰 8편 - 하

-https://www.fmkorea.com/6965885593


발해 멸망 이후 대씨들이 거의 보이지 않는 이유 - 상

-https://www.fmkorea.com/6969129451


발해 멸망 이후 대씨들이 거의 보이지 않는 이유 - 하

-https://www.fmkorea.com/6969901818


발해 멸망의 의문점 고찰 상

-https://www.fmkorea.com/6865875091


발해 멸망의 의문점 고찰 하

-https://www.fmkorea.com/6879404408




발해, 그 이후(발해잔존세력사)



시작 및 예고

-https://www.fmkorea.com/6978216242


발해 정부 붕괴 직후 상황

-https://www.fmkorea.com/6978958316




발해멸망전을 제외한 다른 글들



5경 15부 62주에 대한 오류 가능성 검토

-https://www.fmkorea.com/6797762364


발해 국호는 발해가 맞습니다

-https://www.fmkorea.com/6801049872


무왕과 대문예의 형제싸움으로 인한 나비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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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사 최대의 미스터리, 882년 정변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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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6년 사건'의 진실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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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장사건'은 왜 일어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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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재서열사건'은 왜 일어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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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과 설화로 살펴본, 발해 문왕 시기의 어두운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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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 멸망의 시발점, 폐왕 대원의의 정변 (1)

-https://www.fmkorea.com/index.php?mid=mystery&category=15037454&document_srl=6817289827


대원의 정변 2편

-https://www.fmkorea.com/index.php?document_srl=6817562512&s_comment_srl=6817568874#comment_6817568874


문왕과 강왕의 관계에 대한 미스터리

-https://www.fmkorea.com/6817851720


폐왕이 문왕의 가족을 몰살시켰을 가능성에 대해.

-https://www.fmkorea.com/6817911871


대원의 정변 3편

-https://www.fmkorea.com/6819337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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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의 정변 5편

-https://www.fmkorea.com/6821034193


발해의 군제

-https://www.fmkorea.com/6822795205


발해 선왕(상편)

-https://www.fmkorea.com/6824049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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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이진의 찬탈 가능성에 대한 글

-https://www.fmkorea.com/6826837680


선왕과 대건황의 공통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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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박호와 모란강 전설로 본 대건황-대현석 시기의 불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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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이 발해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12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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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에서는 과연 어떤 것이 났을까?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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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에서는 어떤 것들이 났을까? 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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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에서는 어떤 것들이 났을까?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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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땅이 추워서 농사가 안된다는 주장에 대한 반박

-https://www.fmkorea.com/6914123453


사료로 알아보는 발해의 고구려 계승의식

발해사신 수난기

대위해의 재위년도 오류 가능성

발해 인구를 소수로 잡는 의견에 대한 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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