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예인 과테말라 내전에 대해 Araboja[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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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쿠로 댓글 0건 조회 13회 작성일 24-04-16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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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략히 썼기에

약간의 누락이나 오류가 발생 할 수 있다*


*학살을 포함한 내용이 있어 잔혹스러울 수 있다*



1. 과테말라의 역사

1.jpg 과테말라 내전에 대해 Araboja

간단하게 과테말라의 역사를 알아보자

1871년, 자유주의자들은 오랫동안 자리 잡던 보수당을 전복시킬

'조국을 위한 계획'을 세우게 되고 이 계획은 성공하게 된다


그 후, 대통령으로 선출된후스토 루피노 바리오스커피 생산을 확대했으며

이를 위해서는많은 토지와 노동자가 필요했다


그래서 바리오스는 1877년일용노동자 규정을 제정하여

원주민 노동자들이 크리오와 이민자로 구성된 지주들을 위해

저임금으로 일하도록 강요했다

2.jpg 과테말라 내전에 대해 Araboja
한편, 미국은먼로 독트린을 빌미로 유럽 식민세력을 몰아내고 있었다

라틴아메리카를 구해주고 싶어서가 아닌자기의 세력권을 만들기위해서였고

다른 국가와 달리과테말라는 미국에 순응적이라 군사를 쓸 일이 없었다


너무나도 잘 따라주고 있는 과테말라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미국에 순응하면서미국 기업의 조세를 면제해주었고 그 중에는

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UFC)가 있었다

3.jpg 과테말라 내전에 대해 Araboja

1920년대 점점 사회 구조가 형성 되어가고 있었는데

과테말라를 방문한칼 빌헬름 루드비그 왕자가 뚜렷한 3가지 계급으로 구분된다고 했다


가장 높이 있는 지위는크리오로 라틴아메리카를 정복한콩키스타도르의 후손이다

수는 제일 적지만 국가의엘리트 계급으로정치적, 지적 영역을 독점하고

농경지 대부분을 소유했다


그 다음으로라디노원주민, 흑인, 크리오의 혼혈인 이들은

수공업자, 점원, 상인, 하급 공무원으로 일했다


그 밑이 가장 낮은 지위인인디오였다

수는 확연히 많았지만거의 공교육조차 받지 못했고

농업노동자로 구성되어있었다

4.jpg 과테말라 내전에 대해 Araboja

1931년,호르헤 유비코가 미국의 지원을 받아 집권했다

부유한 귀족이자확고한 반공주의자였던 그는 농민과의 분쟁에서

항상 UFC의 편을 들어줬으며 대공황의 여파로 농민 제도가 흔들리자

빚을 지면 상대방의 노예가 되는부채 노예 제도강제 노동으로 노동자를 쉽게 구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우비코는 자신을또 다른 나폴레옹이라고 생각했으며

화려하게 옷을 입고 황제의 동상과 그림으로 자신을 둘러싸고

우체국, 학교, 교향악단 같은 수많은정치 및 사회기관을 군사화했고 감시했다

5.jpg 과테말라 내전에 대해 Araboja

인디언의 혐오, 강제 노동, 감시받으며 살아야 하는 사회...

여러 가지 불만이 겹치고 겹쳐1944년 과테말라 혁명이 터지게 된다


결국, 우비코는 사임했으며 건국 이후최초의 민주적 선거가 실시되었다

(모두가 투표가 가능했던 건 아니었고문맹이 아닌 남성에게만 주었다)

이 기간부터 1954년 6월까지10년의 봄이라고 불린다

6.jpg 과테말라 내전에 대해 Araboja

1944년 선거가 열렸고 압도적인 표 차이로(득표를 85%)후한 호세 아레발로가 당선됐다

아레발로는최저임금법,교육 자금 확대,보통선거(문맹 여성은 제외), 노동 개혁을 포함한

여러사회 개혁을 시행했다


그러나 아레발로의 개혁은 중산층에게만 돌아갔을 뿐

인구 대다수를 구성하는농업노동자에게는 거의 도움이 되지 않았다

게다가 그의 온건 개혁마저 받아들일 생각이 없던 미국 정부, UFC, 대지주들은

아레발로 정부를 공산주의 정권이라고 보았고 그가 재임하던 동안최소 25건의

쿠데타가 일어나 군인들도 그렇게 좋게 보지는 않았다

7.png 과테말라 내전에 대해 Araboja

1950년

우여곡절 한 아레발로 정권이 지나 그다음은하코보 아르벤스가 물려받았다

아르벤스는 아레발로의 개혁을보다 진보적으로 만들었다


1952년 6월 17일

그는900호 법령을 통과시켜 272헥타르 이상의 모든 비 경작지, 91~271헥타르 사이의

부동산 중 비 경작지가 1/3 이상의 것들을 유상몰수 하는 식으로 농지개혁을 추진했다

농지개혁은 빠르게 진행되어 1954년 6월까지 인구의 1/6에 달하는

50만 명이 57만 헥타르에 달하는 토지를 분배받았다

8.png 과테말라 내전에 대해 Araboja

아르벤츠는 900호 법령으로 과테말라를 봉건주의에서 자본주의로 탈바꿈하려는 계획이었다

이 정책의 수혜자들은 스페인의 침공 이후토착민 집단이 주를 이뤘고 토지경작을 늘려

농업 생산량을 높이는 것 말고도 많은과테말라인들이 존엄성을 갖추게 되는 역할도 하였다


하지만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은 자기들의 권력 기반인 토지를 해체하려는 그의 개혁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UFC도 법령 900호를 따라22만 헥타르에 달하는 소유지의 85% 비 경작지를 내놓아야 됐었다

9.jpg 과테말라 내전에 대해 Araboja

멀쩡하게 토지를 가지고 있던 사람들까지 몰수하니 UFC를 포함한 대지주들은

과테말라 정부를 공산주의로 해석해 미국 정부에 일러바치기도 했다


미국 정부도UFC의 입장에 동조하였고 CIA의아르벤스 축출 계획을 승인하고

1954년 6월 CIA의 지원을 받아정부는 붕괴하고 10년의 봄은 끝난다

(1954년 과테말라 쿠데타)

10.jpg 과테말라 내전에 대해 Araboja

그 후 과테말라 육군 대령인카를로스 카스티요 아르마스가 지도자가 된다

카스티요 아르마스는 10년간 진행된 사회, 경제 개혁을 중단시키고노조와 좌파 정당을 금지했으며

토지를 UFC와 지주에게 반환했다


하지만 그 이후로도 계속 쿠데타가 일어났으며

카스티요 아르마스도 대통령도1957년 7월 26일 암살당한다



2. 시작된 내전

11.png 과테말라 내전에 대해 Araboja

1960년 11월 13일

좌익 장교들이이디고라스 푸옌테스정권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다

봉기를 일으킨 이유는푸옌테스 정권의 부패와 무능력그리고 자신을 지지하는

장교들에만 특혜를 주는 것에 불만을 가졌고 무엇보다 피그만 침공을 위한

미국의 훈련기지 설치를 군대와 상의도 하지 않고독단적으로 허용하였고

게다가 미국으로부터받은 보상을 군대와 나누지 않은 것이 결정적 이유였다

12.png 과테말라 내전에 대해 Araboja

반란을 일으키자 정부는 폭격으로 기지를 파괴했고

반군은 과테말라 동부로 후퇴했고 반군은 봉기가 일어난 날을 기념하여

MR-13을 결성하였다


그 후 1962년 2월 6일

본격적인게릴라전을 시작했고과테말라 노동당(PGT),4월 12일 운동,에드가르 이비라 게릴라전선(FGEI)

접촉하여 연합조직인FAR을 결성했다 MR-13, PGT, FGEI는 각자 전선을 만들어

활동했는데MR-13이사발사카파,FGEI는 시에라데라스미나스,PGT는 도시게릴라로 활동했다

13.png 과테말라 내전에 대해 Araboja

반군이 연합을 만들고 있던 중평범한 학생들도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푸옌테스는 1961년 12월 총선에서부정선거로 승리한 탓에

새 국회의원 임기가 시작되는 1962년 3월 1일 과테말라시티의 학생단체가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시위를 일으켰다


시위는 과테말라 전역으로 확대되었고민중도 같이 파업하면서 학생의 운동을 지지해줬다

3월 19일푸옌테스는 계엄령을 선포했고 민중 시위를"사실은 공산주의가 선동한 것이다!"라고

몰아가면서무자비하게 진압했다


시위는 약22명의 사망자를 포함해300~500명의 사상자,1,000명이 붙잡히면서 진된다

14.png 과테말라 내전에 대해 Araboja

퇴위는 안 당했지만 이때의 일로 푸옌테스를 지지하는 사람을 대거 잃게 되고

좌파들은 적어도 여러 사회개혁을 시도하려 했던아레발로를 그리워하며 단일화하였다


하지만 군부와 극우는공산주의자라는 소리만 들어도 발작을 일으키던 상황이었는데

공산주의로 보이는 아레발로가 다시 집권한다?

이것만큼은 막기 위해 3월 30일엔리케 페랄타 아주르디아가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했다

15.jpg 과테말라 내전에 대해 Araboja
아주르디아가 쿠데타를 한 이유가 푸옌테스의 정치가 맘에 안 들어서 같은 이유가 아닌

공산주의자로 보이는 아레발로가 정권을 되찾는 걸 막기 위해,

공산주의자가 과테말라에 있는걸 막기 위해권력을 잡았기에 멀쩡한 정책을 펼칠 생각이 없었다


아주르디아는과테말라에 공산주의가 침투했다고 말하면서1963년 대선을 취소하고

헌법을 정지하며,의회를 해산하기까지 했으며,국가원수로서 정부의 모든 기능을 인수하였다


1964년부터 본격적으로 반란을 진압하기 시작했으며 9월~10월에는

팔콘 작전을 벌여 사카파 지역의반군을 제압하기 시작했고 이 과정에서

정부군은 미국으로부터 대게릴라전 교관과 고문을 지원받았다

11월에는 도시게릴라 상대로림피에사 작전을 벌여PGT 핵심요인을 억류, 고문하고 살해했다




3. 심해져가는 진압

16.jpg 과테말라 내전에 대해 Araboja

진압 과정에서 반군뿐만 아니라민중이나 의심되기만 해도 같이 벌을 받았다

1966년 이후 2년 만에 최소 19개의 형벌부대가 창설되었고 연좌제로

가족, 친구까지 탄압당했다


1966년 3월 3~5일

G-2(군사 정보국)과 사법경찰은 PGT의 주요 활동가인빅토르 마누엘 구티에레즈를 포함한

노조 지도자 28명을 체포했고 그들은 모조리 실종되었다

이 실종의 진상을 밝히려는대학생연합(AEU)가 진상을 밝히려고 하자

정부는 부대를 보내 다수의AEU의 회원이 암살됐다

(참고로언론 검열 안 한다고 했다)

17.jpg 과테말라 내전에 대해 Araboja

이러한 전술은 1966년에 급격히 증가했는데 이 시기에

훌리오 세사르 멘데스 몬테네그로가 집권해서이다


그는 민간인이었기에 군부의 지지를 받기 위해

어떤 수를 써서라도 반군을 제압할 권리를 부여했다

18.jpg 과테말라 내전에 대해 Araboja

도시든 시골이든좌익 또는 그 동조자로 의심되는 자

재빠르게실종되거나 암살되었다


1966년 10월

정부군은과테말라 작전을 개시하여 사카파, 이사발 군사지구에

5,000명의 병력을 투입하여 진압 작전에 나섰다

당연히 여기서도 의심되기만 하면 살해가 되었고 1966년 10월부터 1968년 3월까지

약 3,000~8,000명의 농민이 살해당했다

19.jpg 과테말라 내전에 대해 Araboja

1970년대

정부군은 폭력은 더 심해졌다

계엄령을 선포하고 난 뒤 1968년 6월 24일 경보령으로 낮아졌지만

1970년 7월 즉위한카를로스 마누엘 아라나 오소리오는 11월 13일

다시계엄령을 선포하고오후 9시부터 오전 5시까지 통금령을내렸다


국제엠네스티와 단체에 따르면1970~1971년 사이 7,000명이 넘는

민간인이 살해되었거나 실종되었고1972~1973년에도 8,000명이 똑같은 운명을 맞이했다


정리하자면 내전이 일어난1966년부터 1973년까지살해되거나 실종된 민간인은

약 42,000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4. 꺽이지 않는 반군

20.jpg 과테말라 내전에 대해 Araboja

반군의 거의 없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과테말라 내전의 근본적인 이유,토지 소유와 개혁이 무산됨이 해결되지 않았음으로

여전히내전은 계속되어갔다


1973년 석유 파동1976년 과테말라 지진으로 상황은 더 안 좋아졌다

석유 파동은 급격한 물가 폭등과 석유 품귀현상을 만들어냈으며

과테말라 지진은약 23,000명에 달하는 사망자와 77,000명의 부상자,258,000채의 가옥이 파괴되었고

120만 명의 이재민이 생기게 된다

21.jpg 과테말라 내전에 대해 Araboja

이런 상황 속에서 정부는 계속 공산주의자 찾기를 가정한 학살을 하거나

계속대통령을 부정선거로 당선하는 등과테말라 시민의 분노를 유발했다


그 결과 1970년대에는반군과 연합한 사회운동이 엄청 활발하게 일어났다

많고 많은 운동 중 하나가농민단결위원회(CUC)이다

과테말라 최초로 원주민이 주도하는 노동자 조직인 CUC는

노동자와 원주민 농민의 사이 연대를 추구했으며 잘나갈 때는 15만명의 조직원을 거늘렸다

(1980년대에는 파업으로 최저임금을 1.12달러에서 3.20달러로 인상했다)

22.jpg 과테말라 내전에 대해 Araboja

1974년 부정선거로 대통령이 된셸 유지니오 라우헤루드 가르시아처음에는 폭력을 쓰지 않았다

하지만 1975년 6월 이후로EGP(남은 FAR의 사람들이 새로 만든 집단)에 의해 지주가

계속 죽자라우헤루드도 학살을 하기 시작했다


1975년 6월부터 1975년 12월까지 이슈칸 지역에서만60명의 주요 지도자를 살해하거나 실종시켰고

1976~1978년까지163명의 지도자와 촌장을 살해했다

게다가 EGP를 지지하는 집단이카톨릭 교회로 판단했고 카톨릭 전도사들도 납치하거나 살해했다

이 외에도 설명하기에 길고,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학살이 일어났다


이러한 학살 소식을 들은 미국은

1977년 지미 카터 행정부는인권유린을 이유

과테말라를 비롯해 라틴아메리카의 군사원조를 줄였다

23.jpg 과테말라 내전에 대해 Araboja

여기에 장기전 방식을 도입해반군은 완전히 변화했다

얼마 되지도 않았던 300~500명으로 추산되던 반군이 수치가 4,000~12,000으로 증가했고

마야 원주민도최소 25만 명에서 50만 명이 적극적으로 반군을 도와줬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 근처의 나라에서니카라과 혁명에 고무되어

더더욱 공세를 벌이고 있었으니....







그러나 그 누구도 모르고 있었을거다

그 뒤의 대통령들이 얼마나 사악한지....



5. 과테말라 제노사이드

24.jpg 과테말라 내전에 대해 Araboja

1978년 수립된페르난도 로메오 루카스 가르시아정권은

반군 진압 과정에서무자비한 학살을 벌였다


CUC가스페인 대사관을 점령하여 내전을 세상에 알리려고 했으나

루카스 가르시아는 그냥대사관을 불태우는 방식으로 대처했고

스페인 외교관 8명을 포함해 36명이 사망했다

(이 사건에 당연히스페인은 분노했으며 과테말라와 단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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