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예인 발해 멸망전 고찰 (7) - 최후의 순간 中[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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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쿠로 댓글 0건 조회 43회 작성일 24-03-29 22:00

본문


이 글은,


https://www.fmkorea.com/6865875091


이 글과 함께 보시면 이해하는 것이 조금 더 쉬울 것입니다.


또한 이 글은, 발해 멸망 당시에 일어난 상황을, 제가 주장하는 설로 설명한 것입니다.

아직 완벽한 학계의 검증이 되지 않은, 정설이 되지 않은 제가 주장하는 설입니다. 그 점을 염두하고

보시기 바랍니다.





지난 글까지의 내용을 보면, 926년의 거란의 홀한성 직공으로 인해 발해는 수도권에 가용병력이 없는 상황에

이르르게 되었으며, 결국 수도인 홀한성을 포위한 거란군을 이겨낼 도리도 없고, 병력도 부족해서 결국 항복을 선택하게 됩니다. 926년 1월 14일 신미일이었습니다. 698년에 고구려의 구장 대조영이 유민들과 함께 당을 탈출하여 고구려의 고토에 세운 이후 200년 넘는 세월동안 동북아의 강국이자 해동성국이라 불리운 발해는 이로서 너무나도 허망하게 망해 버렸습니다.

승자인 야율아보기는 우선 자신을 낮추고, 항쟁을 포기하고 항복하러 나온 대인선과 그 일행을 관대히 용서하고 석방했습니다.




『요사』 2권 태조본기 하편 中


-병인일에 척은 야율안단과 전 북부재상 소아고지 등에게 1만 기병을 거느리고 선봉에 서도록 명하였는데, 대인선의 노상병을 만나 격파시켰다. 황태자, 대원수 야율요골, 남부재상 야율소, 북원이리근 사날적, 남원이리근 야율질리가 이날 밤 홀한성을 포위하였다. 기사일에 대인선이 항복을 청하였다. 경오일에 홀한성 남쪽에 군사를 주둔시켰다. 신미일에 대인선이 흰 옷을 입고 새끼로 양을 끌며 요속 3백여명을 거느리고 성을 나와 항복하였다. 황제(주상)가 예우를 하여 석방하였다.



대인선이 홀한성이 완전히 포위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바로 항복을 하지 않고 갑론을박을 하다가

결국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서 포기하고,성을 나와 항복을 하기까지는 무려 5일이나 걸립니다.(병인일~신미일)

홀한성이 포위된 병인일에서 대인선이 항복의 뜻을 밝힌 기사일까지 3일, 그리고 기사일에서 대인선이 성을 나와 항복한

신미일까지 2일입니다. 따라서거란군은 발해의 수도인 홀한성을 완전히 포위하고 나서도 공격을 하지 않고 5일동안이나 성 앞에 대기하고 있던 것입니다.그리고전편에 나왔던 배구의 대사에서 알 수 있는 정황, 즉 거란에게 완전히 수도가 포위된 상태에서 항복을 하느냐 싸우느냐 의견이 갈린 것이 이 3일간에 있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을 해 보고, 이 뒤에 일어나는 발해 군현들의 거란과의 전투를 놓고 생각을 해 보자면,

당시 홀한성 안에 병력이 얼마나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노상에게 준 3만이 금군이라는

것은 거의 확실한 상황인데, 노상도 분명히 문자 그대로 1명도 빠짐없이 모든 병력을 데리고 갔을 리가 없습니다.


최소의 경비병력이나 어느정도 치안이 유지될 수 있는 병력은 두고 갔을 것입니다. 그래서 대인선도 신하들도 각 부들의 지원군을 기다리면서 싸워야 하나, 더 크게 패망하기 전에 항복해야 하느냐를 두고 대립을 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따라서 발해는 최후의 순간까지 항전이냐 항복이냐를 두고 매우 심한 갈등이 벌어졌으며, 배구의 930년 대화를 참조해 보면 결국 항복파의 의견이 받아들여져서 항복을 하게 되었다는 추론이 가능합니다.


그리고 나서 3일 뒤인 갑술일(1월 17일), 야율아보기는 발해 군현들을 달래기 위한 조서를 보내어 발해의 군현들을 거란으로

그대로 통합하려는 시도를 했습니다. 발해의 중앙정부를 붕괴시키는데는 성공했지만, 중앙정부를 제외한 발해의 지방들은

아직도 건재하였기 때문에, 좋은 게 좋은 거라고, 회유를 하려는 심산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틀 뒤인 병자일(19일), 근시 강말달 등 13명을 홀한성에 입성시켜 병기를 수색하게 했는데(한마디로 병기 관리 및 압수) 이들이 발해의 나졸들에게 살해되는 일이 벌어집니다.



위와 동일.


-병자일에 근시 강말달 등 13명을 입성시켜 병기를 수색하게 했는데, (발해의)나졸들에게 살해되었다.




그리고 바로 다음날인 정축일, 대인선이 항복을 번복하고 성을 걸어 잠그고 거란에 다시 항쟁을 시작하자 바로 공성전이 벌어진 것으로 예견되며, 이 공성전은 정축일 하루 안에 끝난 것으로 보입니다.(아래 첨부사료)


여기서 발해가 항복을 해놓고 3일만에 번복을 하고 다시 성문을 걸어 잠궜다는 것은, 홀한성이 포위당한 이루 3일간이나 논쟁을 하고 난 뒤 결국 항복한 것과도 연관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뒤집어서 말하자면, 포위를 당했는데 '항전을 하자.'라는 의견이 나왔다는 것은, 성 안에 병력이 그래도 어느 정도는 있다는 뜻이 됩니다. 게다가 대인선은 노상을 출전시키면서 분명히 발해 지방군을 소환하는 칙령을 내렸을 겁니다. 하지만 이미 홀한성은 적의 대군에게 완전히 포위된 상황이라, 언제 올 지 모르는 병력들을 기다리는 것도 분명 힘들었을 것입니다.그래서 3일이나 갑론을박이 이어지고, 항복을 한 다음에도 주전파들이 다시 대인선과 연계하여 성문을 닫아걸고 항전을 했다는 결론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생깁니다. 대인선은 과연, 왜 번복을 하고 거란과 다시 싸우려고 한 것일까. 그것입니다.

이 의문에 대해 제가 사료와 분석을 통해 추측해 본 내용이 있습니다. 그것을 이야기하려면 우선 아래의 내용 설명이

먼저 필요하니, 아래의 내용을 먼저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대인선이 거란에 한 항복을 다시 번복하자 바로 다음날 벌어진 홀한성 공방전에서는 거란군이 공성전을 했다는 기사가 분명하게 나오며, 이 공성전 도중의 이야기들이 나옵니다.


『요사』 종실전(야율배 항목) 中


-대인선이 곤궁하게 되어 항복을 청했다. 그러나 재차 반란을 일으키자 태조가 이를 격파하고 나서 그 나라 이름을 동단이라 고친 뒤 그 성을 천복이라 하고 야율배를 인황왕으로 삼아 그 곳을 다스리게 했다.(후략)


『요사』 강묵기전 中


-뒤에 대인선이 반역하므로 여러 장수들에게 공격을 명했다. 강묵기는 동쪽 문을 분담하여 날쌔고 용맹한 자들에게 성을 먼저 오르게 했다.


위와 동일, 야율사날적전 中


-이튿날 이른 아침에 야율사날적이 사졸들을 격려해서 북을 치며 함성을 울리면서 성의 낮은 지역으로 오르게 했다.

적들은 겁에 질려 떨면서 감히 막지 못하여 드디어 그(성을) 격파하였다.


위와 동일, 한연휘전 中


-대인선이 항복하겠다 하고서 얼마 안되어 다시 반기를 들었다. 제장들과 함께 그 성을 격파했다.


위와 동일, 돌여불전 中


-태조가 동쪽으로 대인선을 쳤는데 그가 항복했다가 다시 반란하였다. 그를 공격하는데 돌여불이 먼저 성을 올랐고,

발해는 평정되었다.


위와 동일, 야율안도전 中


-발해의 홀한성을 정벌공략할 때 포로로 잡거나 참한 자가 매우 많았다.





저는 여기서, 죽은 거란인들이 하필이면 무기를 수색하고 압수하러 온 이들이라는 데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어차피 항복한 이상, 거란인들에 대한 적개심과 굴욕감은 어차피 퍼져 있을 것입니다. 이 때 단순히 적개감과 분개감 때문에 거란인들을 죽인 것이라면 이들이 목적을 이루러 가는 길에 바로 죽여버려도 개연성이 충분합니다.


그런데 굳이 이들이 들어오자마자, 혹은 이들이 성 내부 깊숙히 들어왔을 때에 죽여버린 것이 아니라, 무기고를 수색할 때 죽였다. 라는 것은, 뒤집어 말해보면, 무기고를 수색했기 때문에 죽여버렸다는 추론 역시 가능합니다. 그럼 왜 무기고를 수색하고 무기 압수를 준비하는 거란인들을 죽여버린 걸까? 라는 의문이 자연스레 따라옵니다. 만약 진짜로 우발적인 범행이었으면 우발적 범행을 저지른 자들만 죽이고 사죄하거나, 그들만 붙잡아서 야율아보기에게 보내면 될 일입니다. 그런데 그런 제스처 없이 대인선이 내놓은 다음 순서는 바로 항쟁이었습니다.



제가 추정하고 있는 바는 이러합니다.


대인선의 1차 항복 자체는 거짓 항복이었으며, 대인선이 항복하기 이전에, 부여부를 거란군이 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이후, 노상에게 3만 군대를 주어 지원을 보낼 당시에 소집한 발해군들이 곧 발해 왕성인 홀한성으로 몰려오고 있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에, 단순히 시간을 벌기 위해 포위 이후 3일이나 끈 다음에 항복을 하고, 항복결정을 한 후에도 이틀 뒤에 항복을 하는 등 시간을 진짜 최대한 끕니다.


그리고 이 추측이 맞다면 대인선은 최대한 항복한 이후 시간을 어떤 방식을 동원해서라도 끌었을 것이며, 그게 관련되었는지 모르겠지만 항복을 받아들인 신미일(1월 14일) 다음에 야율아보기는 또다시 갑술일(1월 17일)까지 3일씩이나 걸려서 발해 군현에 내리는 조서를 작성하여 보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이틀 뒤인 병자일(1월 19일)에 강말달을 비롯한 13인이 홀한성 내에서 병기를 수색하다 살해되었고, 다음날인 20일 정축일에 대인선은 성문을 걸어잠그고 거란군에 다시 대항하기 시작합니다.



생각을 좀 해보면, 대인선이 애시당초 거란에게 다시 반기를 들 생각이었으면 바로 반기를 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현재 홀한성 내에 남은 발해군은 홀한성의 경비는 가능하지만 대규모 농성은 힘든 병력, 즉 5천에서 1만 사이정도 되지 않을까 하고 개인적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농성을 하기에 애매한 병력이고 승패를 장담할 수 없어서, 처음부터 농성을 선택하여 며칠만에 다 초토화 되어버리느니, 지원군이 오기까지 최대한 시간을 끌고 또 끌어낸 다음에 승산이 있을 때 성문을 닫고 항전하는 것이 맨 처음에 계획한 베스트 스토리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거란이 강말달을 시켜서 무기를 수색하고 압수할 분위기가 되어 버렸습니다. 모두가 아시다시피, 무기가 없이는 시간을 끄는 데 성공할지라도 아무것도 못하고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심하면 원군이 오더라도 농성전도 못 치르고 몽땅 죽어버릴 가능성도 큽니다. 따라서 대인선은 차라리 그때 가서 개죽음을 당하느니, 무기수색대를 죽여버리고, 이들이 발해군에 의해 죽은 것이 거란측에 전해질 때에 성문을 닫아버리고 농성을 선택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한마디로 대인선의 애초의 계획은 최대한 시간을 끌고 끌면서 지방군을 기다리는 것이었는데, 예상보다 빨리 거란군이 무기압수를 실시하자, 무기를 빼앗기면 나중에 발해 지방군이 올 때 대항하지도 못 하고 인질이 되어버리거나 죽임을 당할 테니, 차라리 지금 성문을 걸어 잠그고 항쟁을 해 버리자. 로 결론이 난 것이 아닐까 합니다.


실제로 항복을 선언한 12일 기사일에서 다음 재항쟁인 정축일까지는 8일이 걸립니다. 항쟁을 할 것이면 진작 했을 시간이며, 그 이전에 포위에서 항복까지 걸린 병인일에서 신미일까지의 5일 역시 성이 압도적인 적 병력에게 완전히 포위되어 있을 상황에서 항복을 한 것인것 치고는 오래 걸린 시간입니다. 따라서 저는 이렇게 시간을 끈 이유를, 포위되기 이전에 소집령을 내린 발해 지방군을 기다리기 위해 최대한 시간을 끌었으며, 지원군이 오기 전에 거란이 무기를 압수하려 하자 개죽음을 당하느니 그냥 한판 붙고 죽자. 라는 마음 때문에 수색대를 죽이고 성문을 다시 닫아건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합니다. 한마디로 반은 자포자기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수비하기는 애매하지만 성에 어느정도 병력이 남아있었으니 그 결정을 했을테고,

그 입증을 제가 위에 올린 요사 구절들이 해 준다고 생각합니다.


위의 요사 종실전의 야율배 항목을 보면, 대인선이 마치 궁지에 몰려 항복을 했다가 모면한 다음에 다시 반란을 일으킨 뉘앙스로

서술되어 있습니다. 강묵기전, 사날적전, 한연휘전, 돌여불전을 보면 발해군이 아예 적은 수는 아니어서 공성전이 꽤 치열하게 전개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결정적으로 야율안도전에 나온대로 홀한성 공략전 때 포로로 잡거나 참한 자가 매우 많다는 것을 보면 성 안에 적어도 어느정도 수비가 가능한 병력이 있었다는 입증이 됩니다.


다시 한번 종합해 보면, 대인선의 애초 계획은 최대한 시간을 끌고 항복한 이후에도 최후의 최후 순간까지 갖은 수를 쓰며

시간을 끌어서 지방군이 오는 것을 기다렸지만, 그 전에 거란이 무기를 압수하려 하는 바람에 계획이 틀어져서 에라 모르겠다 식으로 성을 닫고 항쟁을 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노상이 허망하게 깨져버린 이상, 거짓 항복을 하면서까지 시간을 끈 대인선의 판단 자체는 틀리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홀한성 함락 이후에 얼마 되지 않아서 발해 3개의 부 병력(막힐, 정리, 안변)이 모였으며, 이들은 2월 1일~2일 사이에 야율아보기를알현한 것으로 사료에 나옵니다. 3개의 부가 모인 병력들은 수도로 도우러 달려오다가, 수도함락의 소식을 듣고 서로 모여서

의논을 했을 것입니다. 그 다음에 이들은 왕이 인질로 잡혀있기도 하고, 수도를 거란군이 완전히 장악했기 때문에 논의를 한

다음, 우선 수도의 상황을 살펴보자는 생각으로 야율아보기를 알현했을 것입니다.


이들이 달려온 다음 수도함락을 알고논의를 한 데까지 시간이 필요할테니, 적어도 대인선의 소집령에 의해 달려온 최초의 발해군은 1월 말이면 홀한성에 도착했을 것입니다. 대인선의 항쟁이 끝장난 것이 1월 20일이었기 때문에, 저는 여기서 거란군이 며칠이라도 성 수색을 늦게 했다면,


대인선의 의도대로 거란은 완전히 속아넘어가고, 곳곳에서 수도로 모여드는 발해군에 호응하여 대인선도 홀한성 문을 걸어 잠궈

버렸을 것이므로 저는 정말 아쉽게 대인선의 의도가 빗나갔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성을 함락시킨 다음 야율아보기가 성 안으로 행차하자 대인선은 그의 말 앞에서 죄를 청하였고, 야율아보기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조서를 내려 대인선과 그 친족을 압송해 나오고 제사를 지낸 후 다시 군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야율아보기와 거란군은 홀한성에 그대로 주둔하였으며, 대인선 역시 포로로 사로잡힌 몸이었지만 아직 홀한성에 남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목표를 달성했지만 아직 거란으로 회군은 하지 않았습니다.


이게 무슨 상황이냐면, 거란은 우선 홀한성을 점령하고 대인선과 발해 왕족들을 잡는데는 성공했지만, 발해의 지방군들이 합세하여 홀한성으로 몰려오면 곤란한 상황에 처할 수도 있는 상황인 것입니다.


그리고 반대로 발해의 각 지방군과 자사, 절도사들도 이제서야 어처구니없이 국경이 뚫리고 수도가 함락당하고 국왕이 적의 손아귀에 잡힌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물론 거란군과 야율아보기 역시 발해군이 각지에서 몰려오면 포위당할 수도 있지만, 발해군들 역시 자신들의 국왕이 적국의 손아귀에 잡혀있는 상황이 되어, 함부로 홀한성으로 진격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린 것이 아닐까 합니다. 상당히 황당하고 당황스러운 소식을 들은 이들은 적국인 거란에 항복하기는 거부감이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선 소식을 전달받은 각 부들이 우선 홀한성의 거란에게 내조하면서 수도의 상황을 알아보러 온 것이 2월 2일 경인일의 기사가 아닐까 합니다. 저는 이 때 달려온 발해의 절도사, 자사들은 모두 대인선의 총동원령에 의해서 각 부 병력을 이끌고 수도로 달려온

이들이라 생각합니다.


『요사』 2권 태조본기 中


-2월 경인일(2월 2일)에 안변부, 막힐부, 남해부, 정리부 등 부 및 여러 도의 절도자사들이 내조했으므로 위로해 보냈고, 노획한 기물, 폐백 따위는 장사들에게 하사했다.




그리고 임진일(2월 4일)에 제사를 지내고 사면령을 내리고 발해를 평정한 것을 당나라(후당)에 알렸다는 기사가 나옵니다. 그 다음 갑오일(2월 6일)에 다시 홀한성에 행차하고 논공행상을 하고, 정벌을 도운 주변국과 속국들에게 포상을 하고 치하를 합니다. 병오일(2월 18일)에는 발해를 동단으로 고치고 야율배를 인황왕으로 봉했으며, 야율질랄을 좌대상, 발해 노상을 우대상으로 하고 발해사도 대소현을 좌차상, 야율우지를 우차상으로 하고 사면령을 또 내립니다. 그리고 다음날 정미일(2월 19일)에는 고려,예맥,철려,말갈의 공물을 받습니다.



그런데, 2월 2일에 내조한 발해의 몇몇 부 외에는 아예 발해의 지방들의 소식이 뚝 끊겨버립니다.




저는 이것을, 야율아보기가 있는 홀한성을 발해 각 부의 절도사와 자사들이 알현하는 척 하면서 염탐을 했으며,

이들은 다시 해볼만하다고 느꼈기 때문에 입조를 끊고 홀한성의 거란군을 공격하는 것으로 의견을 모았다고 생각됩니다.



실제로 3월부터 이들은 거란군에 맞서서 싸우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홀한성에 앉아서 발해를 평정했다고 기뻐하고 있던

야율아보기는 제대로 뒤통수를 맞게 됩니다.




※내용이 너무 긴 관계로, 다음 편인 하편까지 나누어 올리겠습니다.




발해멸망전 고찰 1편. 멸망의 전조

-https://www.fmkorea.com/6837781243


발해멸망전 고찰 2편. 925년 이전의 발해 정치상황

-https://www.fmkorea.com/6840383814


발해멸망전 고찰 3편. 공백의 5년(913~918)

-https://www.fmkorea.com/6841829328


발해멸망전 고찰 4편. 918~924년까지 발해는 과연 무엇을 했을까?(상편)

-https://www.fmkorea.com/6844051571


발해멸망전 고찰 4편 (하편)

-https://www.fmkorea.com/6844149065


발해멸망전 고찰 5편

-https://www.fmkorea.com/6846820595


발해멸망전 고찰 6편 - 925년 반란설 상

-https://www.fmkorea.com/6849396028


발해멸망정 고찰 6편 - 925년 반란설 하

-https://www.fmkorea.com/6850618504


발해멸망전 고찰 7편 - 마지막 순간(상)

-https://www.fmkorea.com/6862001225


발해 멸망의 의문점 고찰 상

-https://www.fmkorea.com/6865875091




발해멸망전을 제외한 다른 글들



5경 15부 62주에 대한 오류 가능성 검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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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 국호는 발해가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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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사 최대의 미스터리, 882년 정변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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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6년 사건'의 진실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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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재서열사건'은 왜 일어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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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의 정변 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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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왕과 강왕의 관계에 대한 미스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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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왕이 문왕의 가족을 몰살시켰을 가능성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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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의 정변 3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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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의 정변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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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의 정변 5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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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의 군제

-https://www.fmkorea.com/6822795205


발해 선왕(상편)

-https://www.fmkorea.com/6824049857


발해 선왕(하편)

-https://www.fmkorea.com/6824625532


대이진의 찬탈 가능성에 대한 글

-https://www.fmkorea.com/6826837680


선왕과 대건황의 공통점

-https://www.fmkorea.com/6832473378


경박호와 모란강 전설로 본 대건황-대현석 시기의 불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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