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예인 발해 11대왕 대이진의 찬탈당했을 가능성에 대하여.[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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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푸히헤헤햏ㅎ 댓글 0건 조회 47회 작성일 24-03-17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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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짚어 볼 주제는, 발해의 제 11대왕이었던 대이진(大彛震)에 대한 내용입니다.

대이진은 발해의 제 11대 왕으로서 바로 전 왕인 10대 선왕(818~830)의 손자이기도 하고,

830년에서 857년까지 꽤 길게 재위하였습니다. 대이진의 시대는 발해 역사상, 강왕(794~809) 이후 혼란에

빠져 있던 발해가 선왕 즉위 이후 다시 안정되고, 대외로 팽창하고 국력을 상당히 길러서 해동성국

칭호를 듣게 되는 그 시대입니다. 사서에 직접적으로 적혀 있지는 않지만, 발해의 최전성기를 할아버지와 함께 만들어

냈으며, 유지했으며, 영토를 넓히고 치적을 꽤 만든 왕으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추측'되고 있는 이유는 대이진의 행적에 관한 직접적인 사료가 드물어서입니다.)



우선 대이진에 관한 기록들을 보겠습니다.



『구당서』 발해말갈전 中


-대인수가 죽자 권지국무 대이진을 은청광록대부 검교비서감 도독 발해국왕으로 삼았다.


-6년(832년) 발해가 왕자 대명준 등을 보내왔다.


-7년(833년) 정월에 발해가 동중서우평장사 고보영을 보내 책명에 사례했다. 이어서 학생 세명을 딸려보내

수도에서 학문을 배우게 해 달라고 청했다. 앞서 파견된 학생 3명은 귀국을 청하므로 허락했다. 2월에 왕자 대선성

등 6명이 내조했다.


-개성 연간(833~840) 이후에도 중단없이 조공을 했다.




『구당서』 본기 中


-문종 태화 5년(831년) 정월 기축일 권지발해국무(권지국무) 대이진을 검교비서감 홀한주도독 발해국왕으로 삼았다.


-6년(832년) 12월 무진일에 내양 왕종우가 발해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발해가 좌우신책군과 좌우 3군, 120사를

두었다고 하면서 그림을 그려 바쳤다.


-7년(833년) 기묘일에 인덕전에서 발해 사절을 접대했다.


-무종 회창 6년(846년) 봄 정월 기미일에 발해 등 나라에서 입조하자 인덕전에서 접대했다. 기축일에 발해왕자

대지악이 입조하였다.





『신당서』 발해전 中


-태화 4년(830)에 대인수가 죽으니 시호를 선왕이라 했다. 아들 대신덕이 일찍 죽어 손자 대이진이 왕위에 올라

연호를 함화라고 고쳤다. 이듬해에 조서를 내려 작위를 계승하게 하였다.


-문종의 시대가 끝나기까지 12차례 내조하였으며, 회창 연간에는 4차례 왔다.




『책부원구』 965권 中


-문종 태화 5년(831) 정월 권지발해국무 대이진을 은청광록대부 간교비서감(검교비서감의 오타로 보임.) 겸 홀한주도독으로 삼고 발해국왕으로 봉했다.


위와 동일, 967권 中


-태화 5년에 대인수가 죽고 권지국무 대이진을 국왕으로 삼았다.


위와 동일, 972권 中


-6년(832년) 3월 발해왕자 대명준이 내조했다.


-7년 정월 발해왕이 동중서우평장사 고상영을 보내 책명을 사례했다.


-개성 원년(836) 12월에 발해가 사신을 보내 조공했다.


-4년 12월 무진일, 발해왕자 대연광이 조공했다.


-무종 회창 6년(846)에 발해 사신이 선정전에서 조공하였다.


위와 동일, 976권 中


-6년(832년) 2월 병진일에 인덕전에 입조한 발해왕자 대명준 등 6명에게 연회를 차등있게 베풀었다.


-7년 2월 기묘일 인덕전에서 발해왕자 대광성 등 6명에게 연회를 차등있게 베출었다.


-개성 2년(837) 정월 계사일에 황제가 인덕전에 행차하여 새해를 축하하는 발해왕자 대명준 등 19명에게

연회를 차등있게 베풀었다.


-개성 3년(838년) 2월 신묘일에 황제가 인덕전에 행차하여 입조한 발해사신에게 무명과 비단, 은그릇을 하사했다.


-무종 회창 6년(846) 정월에 발해 사신이 선정전에서 조하하니 인덕전에서 대했다. 내정자에서 음식을 하사하고

예대로 금채,기명을 차등있게 주었다.


위와 동일, 999권 中


-여기서는 구당서 발해말갈전에 나온 3명의 학생을 당에 보낸 일이 상세히 나옵니다.





『당회요』 36권 中


-개성 2년(837) 3월에 발해국 하정사 왕자 대준명과 아울러 입조한 학생이 모두 16명이었다. 청주관찰사에게

칙서를 내려 발해에서 요청한 학습생도 가운데 6명만 장안에 올려보내고 나머지 10명은 돌려보내도록 하였다.



『자치통감』 244권 中


-발해 선왕 대인수가 죽었다. 아들 대신덕이 일찍 죽었으므로 손자 대이진이 왕위에 올라 연호를 함화로 고쳤다.



『문헌통고』 326권 발해 中에도 동일한 내용 등장.



『입당구법순례행기』 2권 中


-신라국이 예전에 발해국과 싸웠을 때에 이날에 승리를 얻었다. 그리하여 명절로 삼아 노래하고 즐겁게 춤을 추어 대대로 끊어지지 않고 영원히 이어져 그치지 않는다.





대이진은 즉위 이후 할아버지의 정책을 그대로 따르고, 할아버지가 하던 정복사업을 통해

요동과 해북제부의 말갈들을 복속시킨 다음, 삼국사기와 유취국사, 책부원구의 글귀대로 신라와도 전쟁을

하여 한방 먹였을 가능성도 있으며, 노태돈 교수님의 견해에 따르면, 이 때 신라와의 전쟁을 위해, 신라를

견제하기 위해 발해에 복속한 말갈 세력을 남해부에 이주시켜 놓음으로서 이후 한국사에 생기는 동북지역

여진족 문제를 야기하게 만들기도 하였습니다.(이 말갈의 남해부 이주는 선왕때부터 대이진 때까지 이루어진

것으로 추측됩니다.)



대이진은 문왕과 그 뒤를 이어 발해를 강력하게 만든 강왕, 그리고 잠시간의 혼란기 이후 발해를 다시

강화시키고 동북아의 강국으로 만들어 놓은 할아버지 선왕의 노선을 그대로 따라서 발해의 최전성기를 유지한 왕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사료가 정말로 부족하지만, 주변국들의 단편적인 사료와 기록을 따라 조합하면,즉위 이후 요동을 완전히 편입시키고,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해북제부를 완전히 제압하여 전 말갈을 발해의 손아귀에 확고하세 넣고,

해동성국을 만들어 냈으며, 발해의 지방제도 및 군사제도를 완전히 정착시켜 문왕 이후 발해를 다시한번 재정립시키고,


한편으로는 일본에도 사신을 많이 보내어

일본과도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찌 보면 할아버지인 선왕보다 더 발해 최전성기를

이끈 왕에 걸맞는 인물이라 볼 수 있습니다. 자료가 거의 없지만, 단편적으로 존재하는 자료들만 모아도 그것이

타당하다는 것은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대이진의 빛나는 시대는 이상하게 끝나 버립니다.




대이진은 857년까지 27년간 재위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왕이 이상합니다.

분명 위에 보여드린 사료에 나오는 대이진의 아들들만 5명이 넘는데, 뜬금없이 동생인 대건황이 왕이 되어 있는 겁니다.



이게 무엇을 뜻하는가 하면,



대이진의 치세는 정상적으로 끝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으며, 대이진 본인 역시 시해당하거나 찬탈당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입니다. 하필이면 다음 왕인 동생 대건황이 대이진의 아들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왕에 올랐다는 것이 더욱더 그러한 의심에 불을 지피고 있습니다.



위에 사신으로 간 대이진의 아들들을 생각해보면,


사신으로 갔다는 것은 적어도 미성년자가 아닌, 성인 이상의 왕자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 왕자들은 832년부터

해외에 사신으로 파견 나가기 시작합니다. 그렇다는 것은, 재위기간 극초반인 832년에 대이진의 아들이 이미 성인이었다는 뜻이 됩니다. 그럼 그 아비인 대이진 역시 나이가 그만큼 위로 올라갑니다. 게다가 제가 쓴 위의 글로 추론해보면,



대이진은 적어도 790년대생으로 보입니다. 그러면 대이진의 아들들 역시 20대가 넘었을 가능성이 많고, 대이진의 졸년은 857년입니다. 저 많은 아들들 역시 모두 성인이었을 테고, 저 많은 아들들이 모두 요절하거나 모두 우연의 기막힌 일치로 아들이 단 한명도 없었을까요.



그리고 하필이면 대건황이 841년 당시 중대성의 전권을 쥐고 있던 권신이었다는 것 역시 걸립니다.

위 글에서 대건황의 작위를 보면, 이런저런 작위들이 소시지처럼 덕지덕지 붙어 있는데요, 그걸로 인해 권신이라는

것을 암시 가능하고, 거기다가 기록된 왕자들의 수가 한둘이 아닌데 동생이 왕위를 잇는 것 역시 합당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대건황의 다음 왕인 대현석의 치세에는 정황상 정변이 터짐으로서 왕계를 빼앗긴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이걸 모두 종합해보면 대이진은 적어도 제 명에 죽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혹은 죽지 않더라도

폐위당하거나 감금당해서 말년이 비참했을 가능성 역시 상당히 높습니다. 현재 대이진의 말년이 배드엔딩이라는

것은 학자들도 거의들 동의하고 있습니다. 다만 그 방법이 무엇이느냐. 그게 관건일 뿐입니다.

그리고 대이진의 시대에 발해가 전쟁을 많이 벌인 것도 있지만, 요사의 지리지에 정황상 의심이 가는 구절이 하나

있습니다.




『요사』 지리지 中


-12대 왕(???) 대이진에 이르러 마음대로 연호를 고치고, 궁궐을 세우며 5경 15부 62주를 두었으니 요동의 번성한 나라가 되었다.





요사 지리지의 정확도가 메롱이긴 하지만, 이 짧은 사료 구절은, 상당히 의미심장한 추론을 가능하게 해 줍니다.



1.대이진은 분명 11대 왕인데 왜 12대왕으로 표기되어 있는가?


2.분명히 대이진의 연호는 함화인데, 그것을 마음대로 고쳤다. 즉 대이진의 연호는 함화 하나 뿐이 아니라, 함화

이후에 무언가 하나 더, 역사상에 전해지지 않는 연호가 존재했다.


3.궁궐을 세운다는 것은 국력의 과시이고 자신감이기도 하지만, 백성에게는 어마어마한 고통과 부담이 된다.


4.발해가 대이진의 시기에 요동을 완전히 통제하고 있었다는 것이 입증된다.




그리고, 여기서 주목해야 할 상황은 2번과 3번입니다.

대이진의 시기의 끝은 정황상 좋지 않게 끝났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그런데 이 때,

마음대로 연호를 고치고, 궁궐을 세웠다는 사료가 존재한다는 것은, 발해가 안정기에 접어 들고 전성기를

누리게 되자 대이진이 방심하고 방탕해져서 자신의 치적 세우기에 몰두하였을 가능성을 보입니다.

역사를 살펴봐도 나라가 잘 나갈때 방심하고 사치와 향락, 방탕에 몰두하다가 나쁜 결말 맞이한 군주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연호를 제멋대로 고친다는 것도 자신의 권위를 과시하거나 국가의 권위를 대외적으로 과시하는

자만에 속하기 때문에 역사에서는 좋지 않게 바라보고 있습니다.


하다못해 발해의 정립을 한 문왕의 연호 수정도 역사서에서 좋지 않게 바라보고, 특히 궁예의 경우에는

무태-성책-수덕만세-정개 이렇게 3번이나 수정했는데, 이 역시 비판적으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이건 둘째치고 진짜 문제는 궁을 세웠다는 것입니다.


궁을 세우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대공사입니다.잘 나가던 왕도 쓸데없이 궁을 세우는 공사 때문에 민심을 잃고 몰락하거나, 막판에 큰 오점을 남기거나, 욕을 바가지로 들어먹는 경우가 많습니다. 당장 멀리 갈 것도 없이 지금의 한국과 가까운 시기인 조선 말기에 대원군이 행한 경복궁 복구는 정확한 명분이 있었는데도 욕을 들어먹고 결국 대원군의 실각에 한 몫 했으며, 광해군의 실각

이유 중 하나로 꼽히는 것 역시 궁을 쓸데없이 세워서 백성들을 힘들게 한 것이 들어갈 정도였습니다.


고대 이집트의 피라미드 사업 역시 이집트가 멀쩡할 에는 잘 돌아갔지만, 이집트의 힘이 빠진 이후에도

계속되어 고대 이집트의 몰락 원인 중 하나로 꼽히기도 합니다.




발해가 그 당시 아무리 해동성국으로 칭송받고 강한 국력을 유지하긴 했어도, 이러한 궁궐 짓기가 나라에

부담된 것은 당연했을 겁니다. 그리고 궁궐을 짓는 왕들은 이상하게 꼭 궁궐만 짓는것이 아니라 다른 행각, 향락들도 벌이기 때문에 저것들 외에 언급되지 않은 백성들의 부담 역시 있었을 것으로 예상되며, 현재까지 남아있는발해의 전설 가운데서 발해 정부에 우호적인 전설이 별로 없고 대다수가 발해 정부가 민초들을 수탈하고 괴롭힌 것으로 점철되어 있는 것으로 보면, 대이진의 시대에도 이러한 일이 일어났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마냥 배제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살펴보면, 연호를 바꾼것과 궁을 세운 것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일어났을 가능성이

큽니다. 현재 일본에 보관되어 있는 발해첩 중에, 대이진 시기에 보낸 것으로 확인되는 중대성-태정관 첩서 중

함화 연호가 확인되는 것은 『속일본후기』 19권에 나오는 함화 19년(849)이 끝입니다.


그렇다면, 함화 연호가 바뀌지 않은 것은 대이진의 치세 27년 중 19년까지 확인되는 바이며,

남은 8년 내에 대이진의 연호가 바뀌고 궁궐을 지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리고 또 하나 보면, 뜬금없이 함화 19년의 중대성첩 내용을 읽어보면, 그동안 양국에서 정했던 12년의

기한을 두고 정식 사신을 파견하자는 양국의 약속을 어기고 (속일본후기 19권 中) 사신을 좀 더 자주 보내자고

외교상으로 거만함이 느껴지는 첩을 보냅니다. 그리고 일본 측에서는 불쾌감을 대놓고 드러내면서 거부합니다.



(참고로 이 내용은 훗날 정권이 뒤집어진 이후 대위해 시절에도 나옵니다.)



연호를 바꾸고, 궁을 짓고, 배짱외교를 하고. 이걸 생각해보면, 대이진 후기에 대이진은 강해진 나라와

자신의 치적을 보고 스스로 오만해지거나 사치와 향락에 빠졌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궁을 짓는다는 것은

당연 백성을 괴롭히는 일. 당장 제가 전에 올린 발해 전설들에도 무리한 축성, 무리한 공사로 인해 고통받는

백성들의 모습이 전설에 나옵니다.


그리고 857년에 대이진의 수많은 아들들을 제치고 동생인 대건황이 왕에올랐다는 것은, 이 무리한 행동들이 결국 백성들에게 불만을 품게 했고, 마침 권신이었던 대건황이이 백성들의 성난 마음과 당시 상황을 잘 이용하여 자신의 야심을 드러내서 정권을 뒤집어버렸을 수도 있습니다.대건황이 형인 대이진과 반대되는 행동을 했다는 것은, 대건황이 즉위하자마자 일본 태정관에서 발해에 보낸

태정관첩에 나옵니다. 그리고 대건황은 전왕인 대이진이 우겼던 사신 파견 기한 줄이기를 여기서 보낸 첩으로

깔끔하게 없던 일로 만들어 버려서 일본측의 칭송과 립서비스를 받고 있습니다.



『중대성이 일본 태정관에 보낸 첩문, 일본삼대실록 2권 中』


-해를 걸러 일본에 건너가는 까닭은 하늘이 변하고 법도가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옛 관례를 지킬 것을 생각하고

12년이 한 바퀴를 돌았으니 옛 전적에 보이는 친밀한 관계를 펼치며, 지난날의 법도에 보이는 우호를 따르겠습니다.

(후략)




『대건황에게 보낸 일본 청화천황의 친서, 일본삼대실록 3권 中』


-생각해보면, 왕께서는 문무를 모두 갖추고 충성과 효도가 충심에서 우러나옵니다. 나라를 다스리는 아름다운 자리를 이어받고, 옛 우호를 돈독하게 하는데에 마음을 기울여 오랫동안 노력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중략) 이에 깊은 정성을 돌아보니, 어찌 생각이 더하지 않겠습니까?




이것만 보면 대이진 시기에 왔다갔다 한 국서와 다르게 매우 분위기가 좋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대이진 시대의 첩의 예를 하나 들어보면 분위기가 장난 아닙니다.


『대이진에게 보내는 인명천황의 답서, 속일본후기 19권 中』


-방문하는 기한을 12년으로 정한 것은 선황의 명확한 제도이고 나라의 법으로 이미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담당관리가 왕문구 등이 법규를 위반한 것을 문책하고 경계에서 돌아갈 것을 청한 것입니다. (중략)


이는 이전의 법도에 따른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은혜는 이제 다시 기대할 일이 아닙니다. 왕은 마땅히 옛 법규를 잃지 말 것이며, 밝은 덕을 항상 드러나게 하십시오. 오직 믿고 따르는 마음을 보존하면 누가 마음에서 나오는 예의가 부족하다 하겠습니까?(후략)




대놓고 대이진을 까고 대이진이 양국간의 법규를 위반한 것을 무려 국서에서 애둘러서 비꼬고 있습니다. 한술 더 떠서 일본에 우격다짐으로 들어간 발해사신은 일본 관리에게 잡혀서 문책당하고 반품당했습니다. 한마디로대이진의 거만하고 무례한 요구에 일본측이 매우 분노했다는 것을 돌려서 말한 것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 이전까지,아무리 트러블이 발생했어도 이렇게 대놓고 비꼰 국서는 없었습니다. 후대에 대현석~대위해 시절에 발해가 또 먼저 결례를 저질렀어도 이정도 급의 답은 나온 적이 없습니다.




이것들을 이어보면, 대건황은 대이진 시절부터 권신으로 행동하고 있었고, 형인 대이진이 사치와 향락을 일삼고 일본에도 무례를 일삼고, 제멋대로 연호를 고치고 궁궐을 세우고 백성을 쥐어짜자, 민심은 바닥을 치게 되었고. 이에대건황이 딴 마음을 품고 반란이나 정변을 일으켜 형을 몰아내거나 시해하고 자신이 왕에 오르게 되었을 가능성도 충분합니다. 저는 지금까지 댄 추론과 근거로 인해 상당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라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이게 사실일 경우, 왕자가 저렇게 많은데도 대이진 다음에 동생인 대건황이 왕위를 잇는 것이 정확하게 설명됩니다.

대건황은 더 자료가 없어서 어떻게 통치를 했는지는 조금도 알 수 없지만, 일본측이 보낸 첩서로 인해 추리해 보자면,

형의 실책과 형의 방만을 수습하고 자신의 통치를 굳건하게 하는 데 전력을 다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당연히 왕위를 찬탈당했을 가능성이 높은 대이진의 후손들은 전멸당하거나, 좋게 봐도 귀양을 가거나 야인으로

지낼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그리고 여담이지만, 발해전설 중 하나인 '경박호와 모란강 전설'에서, 대현석과 이름이 비슷한

왕족인 대안석이 주인공인 것을 보면 대안석은 정말로 대건황 즉위시에 쫓겨난 대이진의 핏줄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결국, 요약해 보자면,



정황상 대이진은 처음은 좋게 시작했으며, 할아버지인 선왕의 치적을 이워서 발해를 해동성국에 올리고

발해 최전성기를 가져다 준 왕이었지만, 말년에는 오만하고 사치하게 되어 국민들을 괴롭히고 막장정치를 하다가

결국 권신인 동생 대건황에게 시해당하거나 찬탈을 당한, 용두사미 격의 군주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얼마 없는 사료와 전설을 보았을 때 그리 생각이 듭니다. 물론 말년의 실책 문에 20년 이상 되는 치적을 무효화 시키거나

폄하해서는 안 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이진의 행동들과, 대건황에게 빌미를 준 것은 커버칠 수가 없습니다.

물론 제가 항상 쓰는 추측글처럼 이 글도 절대 진리가 아니며 사료와 전설을 토대로 제가 쓴 추론글입니다.

여느때나 말했듯이 이 글을 흥미와 설 중 하나로 보는 것을 저는 추천하며, 맹신하지 않는 것을 추천합니다.




글 전체 요약


1.대이진은 할아버지 선왕의 뒤를 이어 발해의 제도와 군제를 정비하고 최전성기에 올려놨다.


2.하지만 발해의 국력이 강해지고 정점에 오르자 대이진은 연호를 제멋대로 고치고 궁을 지으며, 외교 마찰을

스스로 일으키는 등 사치와 향락, 오만에 빠졌다.


3.결국 발해는 흔들리기 시작했고 이 와중에 대이진의 동생이자 발해의 권신이었던 대건황은 백성들의

성난 마음을 이용하여 대이진을 실각시키거나 시해하고 왕위를 찬탈했을 가능성이 있다.


4.대이진의 아들들이 많은데 대건황이 왕위를 잇는 것과, 일본과의 중대성-태정관 국서가 그것을 어느정도

뒷받침해주고 있다.


5.종합하면 대이진은 발해를 해동성국에 올려놓은 명군주였으나, 말년에 벌인 사치향락과 오만으로 인해

스스로를 깎아먹었으며, 결국 대건황에게 제거되거나 찬탈당했을 가능성이 강력하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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