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예인 발해 멸망전 고찰 (2) - 925년 이전의 발해 정치상황[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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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고기먹는스님 댓글 0건 조회 101회 작성일 24-03-21 1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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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파트는 2번째, 925년 이전의 발해의 정치상황을 알아보는 파트입니다.


반란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데, 왜 뜬금없이 925년 이전의 발해 정치상황을 이야기하느냐. 라고 하면,

정황 추측상 925년에 반란이 진짜 일어났다고 하면, 그 반란으로 추측되는 사건의 여파로 고려로 망명한 이들이

전부 대위해-대인선시기 발해 정권의 대척점에 서 있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과거 선왕이 왕위에 오를 당시인 818년부터

계속되어온 대야발계와, 이후 왕위를 재탈취 한것으로 본 대조영계(혹은 대위해계)의 대립이 계속 이어져 내려왔고,



하필 그 대립이 925년에 거란을 상대하는 시급한 상황에 터졌고, 이 반란이 발해의 멸망원인 중 제일 직접적이고 제일

지분이 크기 때문에 이전 정치상황을 짚고 넘어가야 할 필요성이 존재합니다. 따라서 925년 이전의 발해의 정치상황을

언급하고 넘어가는 시간을 이 편에서 가지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추측하고 있는 설로 풀어놓은 이야기이기 때문에 제 추측이나 설이 틀렸을 경우에는 그냥 뇌피셜, 혹은

개인주장이 되는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이게 절대진리인 양 맹신해서는 안된다는 점도 미리 언급하겠습니다.




제가 예전에 쓴 글에도 여러번 언급되는 바지만, 발해의 약 230년 역사는 유독 정쟁과 분쟁, 불안함이 많이 느껴집니다.

초기인 고왕 무왕, 그리고 문왕의 초중반까지는 그 양상이 나타나지 않지만, 문왕의 후반부터 발해 정치상황은 매우 불안정해지고, 문왕의 다음 왕들인 폐왕, 성왕, 강왕, 정왕, 희왕, 간왕, 선왕, 대이진, 대건황, 대현석, 대위해, 대인선 중 정상적으로 재위를 마쳤다고 현재 확정을 줄 수 있는 왕은 강왕과 선왕, 대건황, 대위해 뿐입니다. 폐왕, 성왕, 정왕, 희왕, 간왕, 대이진, 대건황, 대인선은 전부 살해당하거나(폐왕), 살해당한 듯 한 의혹이 있거나(성왕, 정왕, 희왕, 간왕,대이진), 폐위당한 의혹이 존재하거나(간왕, 대현석), 마지막 왕(대인선)입니다.



비교적 안정적이고 조용했던 발해 전기에 비해 발해 중기부터 발해의 정치상황이 매우 혼란스러워졌다는 것에는 반드시 그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 이유를 818년에 발해의 고왕의 직계핏줄이 단절되고 방계인 대야발계가 왕위를 이은 것을 그 이유의 시초라고 생각합니다.




818년에 대조영 직계의 마지막 왕인 간왕(817~818)이 사망하면서 왕계는 대조영계가 아닌, 대조영의 동생인 대야발의 후손인 선왕 대인수(818~830)에게 넘어가게 됩니다. 하지만 이 계승은 처음부터 많은 의구심과 논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냐면, 대조영의 직계가 끊어졌을 뿐이지, 대조영의 방계가 전부 끊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대조영의 직계인 강왕 후손 중에서도, 대조영계 마지막 왕인 간왕의 두 형인 정왕과 희왕의 후손들이 전부 끊어졌다 치더라도, 우선 다음과 같은 대조영의 모든 후손이 끊어졌는지는 의문입니다.



1.강왕의 조카인 대능신의 후손


2.문왕의 형제들의 후손


3.무왕의 형제들의 후손




제가 전에도 언급을 한 번 했지만, 문왕의 형제들과 무왕의 형제들은 상당히 많습니다. 아무래도 고대국가의 왕족 특성상,

최대한 자녀를 많이 가지려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요나라 시대인 1029년에 대조영의 후손을 자처하는

대연림이 흥요국을 세워 반란을 일으킨 사건이 있기 때문에, 대조영의 후손이 끊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확실히 입증이 되었으며, 저 많은 모든 왕족들의 후예들이 일격에 몰살당한 것이 아닌 이상 이들의 후손이 남지 않을 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정황상 대위해와 대인선 역시 대조영 방계 출신이라는 설도 있는만큼, 이 818년 당시에 대조영 방계가 끊어졌을 가능성은 0에 수렴한다고 저는 판단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바로 문제가 나온 겁니다.


대조영 직계가 끊어졌으면, 제일 가까운 대조영 방계가 이어야지, 왜 뜬금없이 걸걸중상 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대야발의

후손이 왕을 잇냐는 것입니다. 사서에는 나오지 않지만, 이로 인한 대조영계의 반발은 당연히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서, 많은 대조영계를 제치고 선왕이 왕이 될 수 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저는 선왕 대인수가 간왕의 사망당시 권지국무 직책을 가지고 있던 것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권지국무는 '지국무' 혹은 '발해국무' 라고도 하며 발해사에서 왕이 사망한 이후 다음 왕이 앉기 전까지 국정을 맡은 직책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발해사 중반 이후에 나오는 단어로서, 강왕의 아들들 중 둘째인 희왕 대에서 발해사에 처음 나오는 직책입니다. 그리고 이후 왕이 되는 선왕 대인수가 권지국무 직책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후 대이진, 대건황대 까지 나옵니다.(그 이후로도 존재했을 가능성은 충분하지만 현재 사서에서 나오는 바는 없습니다.)


여담이지만, 발해사에서 권지국무 직책을 가졌던 사람들은 대이진을 제외하면 희왕, 선왕, 대건황 모두가 거의 예외 없게 전원이 찬탈자이거나 반역자일 가능성을 하나같이 가지고 있습니다.


선왕이 시퍼렇게 눈뜨고 있는 대조영계들을 누르고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당연히 비 정상적인 왕위계승이고,

원래라면 선왕은 절대 왕이 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전왕인 간왕과 선왕의 촌수와 대조영계의 인원들은 여기서 확인 가능합니다.



발해게보.jpg 발해 멸망전 고찰 (2) - 925년 이전의 발해 정치상황

참고로 이 계보도는 그냥 발해 왕계가 이렇구나. 정도로만 보시기 바랍니다. 이 계보도는 매우 틀린것이 많습니다.




그리고 간왕과 선왕은 그냥 촌수도 아니고, 무려 9촌사이입니다. 간왕의 아버지 강왕과 선왕이 무려

친척의 최대 한도선인 8촌입니다. 이건 왕위를 계승할 수 있는 촌수가 전혀 아니고, 거의 남남이나 다름없는 사이입니다.


그런데, 그냥 남남이고 방계왕족이었던 대인수는 어떻게 왕위에 오를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되었는가?

라는 의문 역시 생기게 됩니다. 당연히 왕을 넘볼 수 있고, 왕위를 가져오기 위해서는 상당한 힘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 힘은 상당히 강력한 권력 뿐 아니라, '그 권력이 오래 지속되어야' 가능합니다. 힘을 얻었다고 바로 왕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힘을 얻고, 그 힘을 오래 유지하면서 자신의 정당성과 자신의 명분을 합리화 시켜야 왕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야 신하들도 국민들도 납득하거나 반항을 적게 할테니까요. 자신의 힘만 믿고 반란을 일으켜 왕이 되었다가 1년만에 주살당한 폐왕 대원의의 예를 보면 이 밑작업(?)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습니다. 이성계 역시 위화도 회군을 한 다음 바로 왕을 하지는 못했습니다. 4년의 시간을 들여서 권력을 안정화 시키고 자신이 조정을 장악한 다음 왕이 되었고, 조선의 세조 역시 문종이 죽자마자 바로 난을 일으킨 것이 아닙니다. 이처럼 권력을 잡아도, 그것을 잡고 유지하면서 자신의 명분을 최소한이라도 세워야 왕이 되기 수월합니다.




저는 따라서 대인수 역시 하루아침에 갑툭튀하여 왕이 된 인물이 절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대인수 역시 여러 세월에 걸쳐 자신의 권력을 쌓아올린 인물로 보이며, 저는 저번 글인 폐왕 대원의의 정변을 다루는 글에서 썼듯이,


선왕 대인수가 폐왕 대원의를 죽이고 그 세력을 소탕한 강왕의 부하 혹은 동료가 아닐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현재 강왕대의 내부사정과 강왕의 내치를 알 수 있는 기록이 하나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만일 선왕 대인수가 권력을

얻고 중앙의 눈도장을 찍기에 적합한 제일 근접한 사건은, 바로 폐왕 대원의의 반란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 시기는 794~795년으로, 선왕이 왕이 되는 818년에서 대략 25년정도 차이가 납니다. 그리고 25년이라는 세월은,

선왕이 강왕의 부하 출신으로 강왕 밑에서 신뢰를 받으면서 힘을 키워 갔다는 말으로 스토리를 이어가도, 혹은 강왕의

친구이자 동료로서 강왕의 정변을 돕고 권력을 얻었다고 둘러대도 개연성이 전부 존재 가능합니다.



그리고 대인수가 즉위할 당시, 아들 대신덕이 먼저 죽었다는 것이 구당서에 나오고, 그 손자인 대이진과 대건황은 818년

당시 당연히 생존해 있던 것도 모자라 성인이었던 것이 대이진의 아들들의 나이추정으로 드러납니다. 그리고 12년을 재위하고 죽었으니, 대인수는 즉위할 당시 상당히 나이가 많았으며, 당시로 치면 할아버지, 노인 소리를 듣기 충분했던 나이가 아닐까 합니다. 그 상태에서 12년을 재위하고 죽었으니 상당히 장수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대인수는 즉위당시, (방계 중의 방계지만) 대씨왕족이라는 타이틀, 그리고 강왕의 정변에 협조하여 왕계를 올바르게

돌려놓은 최대 공신, 그리고 강왕대에 강왕의 통치를 도와 활약한 노회한 권신이자 경력 많은 능신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818년 당시, 대조영의 직계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큰 힘을 가지고 있고 자신의 인지도와 명망이 있었기 때문에 비어버린 왕위를 하이재킹 한 것이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이 외에도 간왕비 순목왕후가 829년에 평안하게 죽었기 때문에, 간왕이 적어도 살해당했을 가능성은 매우 낮아졌기에,

간왕이 급사했을 때 고명대신이었던 선왕이 왕위에 오를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이 됩니다.


왜 대조영 방계가 잇지 못했냐. 라고 생각을 해 본다면, 대조영방계는 대조영 방계라고 확증이 난 폐왕 대원의가 사고를 거나하게

친 전적이 있기 때문에, 국민과 귀족의 지지도 받지 못했을 뿐더러, 여기에 당해서 친족을 거의다 잃은 강왕이 대조영 방계를

재위 내내 견제하거나 정치적으로 힘을 완전히 거세시켜 버렸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서 대조영 방계는 강왕의 재위 내내

권력과는 거리가 먼, 세력 없는 이들이 되어 있었기에, 강왕의 동료 혹은 부하였던 대인수에게 권력이 몰려 있었을 것은 자명한

이치이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대인수는 강왕의 아들 셋이 다 죽은 이후 믿지 못할 대조영 방계에게 왕위가 돌아가느니,

나라에서 수십년동안 치적을 쌓고 인지도가 높은 유능한 대신인 대인수가 왕으로 오르는 것이 낫다는 여론과 자신의 권력으로 인해

왕이 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어쨌든 대인수는 이후 왕이 되었으며, 초반에 당나라에 사신을 많이 보내고, 자신의 기반을 단단하게 하는 내치를 하는 양상을 보이다가 원정으로 발해의 영토를 크게 넓히고, 한편으로는 신라와도 충돌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후 발해의 왕계는 선왕 대인수와 그 손자 대이진-대건황-대현석으로 4대째 이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사건이 본격적으로 터지고 심화된 것은 882년입니다.




우선, 혹시나 882년 정변설을 보고 오지 않으신 분은, 밑에 있는 링크에서 보신 다음 이 글을 보셨으면 합니다.

제가 쓴 학설들과 연구글은 882년 정변설이 맞다고 가정하고 쓰는 글이기 때문입니다.






882년 정변으로 인해 약 60여년동안 발해의 왕계를 잇고 있던 대야발계가 끝장나고, 대위해계가

발해의 왕위를 차지합니다.(그 이전 대조영계 통치시절의 제도와 대위해계의 제도가 같기 때문에 혹자들은

대위해계도 대조영계로 부르고, 대위해-대인선을 대조영계로 분류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우선 확정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선은 대위해계로 명명합니다.)



그리고 대위해계는 지금까지 대야발계가 정당성-중대성을 중심으로 권력을 유지하고 3성6부제로 나라를 통치한 것에 비해,

아예 3성 6부제의 기본을 무시하고 선조성과 문적원이라는 극히 제한적인 정부조직을 주력으로 나라를 통치하기 시작합니다.(이 선조성과 문적원 세력이 대위해의 측근으로서 나라를 뒤집어 버리는 데 공을 세웠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는 고려와 조선에서도 있던 일로, 고려의 도병마사와 조선의 비변사와 매우 비슷한 양상을 보입니다. 물론 고려의 도병마사와 조선의 비변사는 긴급히 만들었던 임시 군사기구가 커져서 나라의 국정을 결정하는 기관이 되었지만, 발해의 선조성-문적원은 아예 3성6부제로 운영되던 나라체제를 정변으로 갈아 엎어버리고 3성중 하나인 선조성과 그 일개 아래기관인 문적원이 나라의 대표 기관이 되었다는 차이가 존재합니다.


이 882년 정변으로 인해, 3성 중 정당성과 중대성을 권력의 기반으로 삼고 기존에 발해를 통치하던 왕족이었던 대야발계 대씨 왕족들은 완전히 몰락해 버리고, 허수아비 신세가 되거나 숙청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 이유는, 882년 이후의 발해는

그 이전에 보이던 정당성,중대성의 관료,관직들과 사건이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이들은 명맥은 유지한 채 선조성과 문적원이 시키는 대로 눈치보며 사는 신세가 되었다고 파악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들 역시 나랏일을 맡은 관료이기도 하고, 과거 연개소문이 했던 대로 자신의 반대파라는 이유로 모든 조정대신들을 다 죽여버리거나 숙청해버리면 나랏일을 당장 맡을 사람이 없고, 그것은 나라의 국력에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정당성계 세력이 발해 막판인 925년에 다시 등장했다는 것을 보면 모든 정당성-중대성계 세력이 숙청된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정변이 일어났어도 발해가 이후 딱히 눈에 띄게 쇠퇴하는 것이 보이지 않는 이상, 이 882년 정변으로 인해 숙청된 구세력(대야발계 대씨왕족)들은 생각보다는 많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882년 정변 이후, 3성6부제 통치를 하던 발해의 정치상황이 선조성-문적원의 독재체제로 바뀌고, 이후 멸망할때까지

발해사에서 나오는 인물들의 양상은 크게 뒤바뀝니다. 그 이전에는 다양한 성씨를 가진 인물들이 등장했던 발해사였지만, 이후로는 나오는 인물의 수가 매우 줄어들고, 나왔던 사람이 또 반복해서 나오는 양상이 매우 심해집니다. 게다가 그 이전인

대야발계 왕조에서 많이 보이지 않던 대씨 왕족들이 다시 대거 기록에 등장합니다. 정변 이후 소수의 인물들만 기록에 나오고, 나머지 인물들은 죄다 대씨왕족인 이 상황은, 국정을 해결하던 나라의 체제가 붕괴해 버리고 국왕과 그 근친 왕족들, 그 외 측근세력들로만 이루어진 정치세력이 나라의 국정을 독점하고 있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이는 당연히 정상적인 정치체제가 아니며, 비정상적인 파시즘 국가나 독재 국가에서나 보이는 체제입니다. 현대 북한이나 미얀마 같은 나라에서 하고 있는 정치체제가 딱 이런 모양입니다.


이후로 이전 왕족이던 대야발계 대씨들은 완전히 중앙정계에서 아웃되어 버리고, 대신 대위해계 대씨로 추정되는(혹은 대조영 방계)대씨들이 정권의 중앙에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이들은 발해가 멸방하는 926년까지 줄기차게 사서에 등장하며, 이들을 제외한 나머지 정당성계 구왕족 대씨들을 비롯한, 정당성-중대성의 구세력들은 882년 이후로 925년까지 사서에 전혀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발해는 대위해 이후부터는 다시 굳건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886년에 있었던 보로국-흑수국이 신라에 화친을 청하는 사건에서, 보로/흑수국이 신라국과 교류하고자 하니 받아주지 말라는 의도를 보여줌으로서 신라를 위협/경고하며 자신들이 건재하다는 것을 드러냈으며,(이 사건을 다루는 글이 밑에 링크한 886년 사건입니다.)895년에는 모종의 사건으로 인해 당나라 측에서 발해왕 대위해에게 감사를 표시하며 무언가의 작위를 준 내용이 『당회요』에 나오며, 이어서 897년에는 여러분도 매우 잘 아는 쟁장사건이 발생합니다. 제가 과거에 쓴 글인 쟁장사건 글에서 나옵니다.(이 역시 밑에 링크에 있으니 필요하시면 보시기 바랍니다.)



쟁장사건의 내용을 요약해서 얘기하자면, 사서에 써 있듯이, '발해가 자신들의 강함을 믿고 오만하여

신라와 당에게 대놓고 국제 무례를 배짱으로 저지른 사건'이라 생각하면 됩니다. 실제로 사서에서 대놓고 발해가 자신들의

힘을 믿고 저지른 짓이라고 나옵니다.


또한, 당나라 측에서도 국가의 자리 서열은 힘이 강하고 약하고가 아니다. 힘이 강하다는 이유로 자리를 바꿀 수 없다.(너희가 지금 신라보다 강하다고 해서 정해진 자리를 바꿀 수는 없다.) 라는 이유로 발해의 요구를 거부합니다. 그리고 신라는 당 앞에서 투덜투덜 대고 발해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았지만, 결국 직접적으로 발해에게 항의는 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906년의 등제서열 사건에서는 일개 재상이 당나라에 가서 당나라의 시험인 빈공과의 서열에 불만을 품고 언급하는, 아주 황당한 외교적 결례가 일어납니다. 이 두차레의 외교 결례는 한편으로는 당나라와 신라가 한없이 쇠퇴하거나 멸망 직전인 상황에서, 발해 혼자만 국력이 강력한 상태였으며, 대놓고 도발 및 결례를 저질러도 아무 대처 못 할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900년대 초반까지 잘 나가던 발해였지만, 상황이 이제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900년대부터 점점 심화된 거란과의 갈등은 발해에게 다시 위협으로 떠올랐으며, 과거 무왕~문왕 시기까지만 해도 사이가 양호했던 거란은 야율아보기의 깃발 아래 강력하게 통합되어 중국과 발해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결국 900년대 어느 시점을 기준으로 발해와 거란은 대립 및 전쟁에 돌입하게 되고, 발해 역시 쉽게 밀리지는 않았지만,

강력한 상대인 거란을 맞서 싸우게 된 영향이 큰지, 이후 발해의 패악질은 더이상 사서에 등장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발해는 거란과 대등하게 20년 이상을 싸워왔지만, 910년대의 어느 시점에 발해가 거란에게 요동을 빼앗김으로서

(이마저도 요동의 일부를 빼앗겼다, 혹은 전부를 빼앗겼다 라는 분석이 따로 있지만, 저는 이 시점에 요동 전부를 빼앗겼다고

보는 입장은 아닙니다.)요동의 상당부분과 압록강 하구가 거란의 손에 들어가게 되면서 발해에게는 좋지 않은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해는 920년대까지 거란에 잘 대응했으며, 딱히 발해가 크게 밀리거나 대패하는 듯 한 징조도 전혀 보이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거란이 앗은 요동 지역에 백성들을 옮기고 방어사를 설치하는 등, 거란이 이 지역을 확고하게 경영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내고, 발해를 공격하겠다는 의지를 계속 보이자, 발해는 921년부터 집안을 단속하고 그동안 말을 듣지 않고 협조하지 않던 말갈세력들을 다시 통합시기고 거란에 대한 전쟁 준비를 착실히 해 나갑니다.




그리고 924년, 발해가 거란을 선제공격하여 요주를 함락시키고 그 자사를 죽이고, 거란이 사민시킨 백성들을 끌고 가버리자 거란과 발해의 전면전이 다시 일어나게 됩니다. 거란은 제가 저번 글에서 썼듯이 924년에 2차례 걸쳐 발해를 공격하였으나,아무 소득 없이 패하고 돌아가고 맙니다.


발해는 거란에게 제대로 한 방 먹이는 데 성공했으며, 거란은 요동의 주도 역할을 하던 요주를 발해에게 털리고, 그 보복을 하기 위해 2차례나 야율아보기가 직접 발해를 침공하였으나 모두 실패하고 맙니다. 이 일시적으로 요동의 상당부분을 발해가 되찾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여기까지면 좋았을 텐데, 925년부터는 제가 전 편에 썼던 것처럼 거란의 파상공세에 의해 요동이 뚫리고, 뚫린 요동을 통해 야율요골이 이끄는 거란 주력군이 발해의 압록부를 휩쓸고 2개 주인 신주와 환주를 파괴하고, 서경 신안성까지 거란에

넘어가는 대사건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이 상황에서 이웃나라인 고려가 발해의 상황을 보고, 발해가 망할 것을 직감했다는 이야기는 전 편에서 했습니다.



그리고 야율요골의 침입이 우선 한시름 돌린 925년 중순이 제가 제시하는 이 반란의 시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선 야율요골이 925년에 발해에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상 발해를 치지 않은 이유는 사료가 없어도 명확합니다. 첫번째로 야율요골의 거란군은 원정군이었기 때문에, 발해땅 깊숙히 들어온 이상 보급로가 끊어지거나 길어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위험을 항상 염두하고 있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두번째로 야율요골이 여기까지 많은 전과를 올린 것은 사실이나, 만에 하나 전쟁을 더 이어나가서 행여나 발해군에게 대패하거나 궤멸당하는 일이라도 생기면 지금까지 거둔 전공이 모두 도로아미타불이 되기 문도 있었을 겁니다.


세번째로, 발해는 거란에 그리 뒤지지 않는 크고 강한 나라이므로, 이런 나라의 허를 한번 잘 찔러서 엄청난 전공을 세웠지만, 발해의 내부와 수도권은 당연히 방비가 잘 되어 있을테고, 발해군이 서서히 모여들고 있었을 테니 이곳을 뚫는 것은 당연히 어려워지므로, 이쯤 하고 돌아가는 것이 나았을 겁니다.


또한, 최근에는 야율요골의 거란군이 925년 겨울에서 봄 사이에 발해 심장부로 진격을 하다가 발해 주력군의 공격을 받고 대회전 끝에 패퇴하여 후퇴했다는 설도 제기되고 있습니다.



이를 보아 925년의 야율요골의 침공은 거란 황제인 야율아보기가 직접 친정한 것도 아니며, 발해 자체의 멸망을 목적으로 쳐들어온 것이 아니라 924년에 있던 패배들을 설욕하고 되갚아 주기 위해 쳐들어왔다는 것이 매우 유력합니다. 따라서 야율요골은 당초 목표보다 훨씬 큰 전과를 거두었지만 압록부에서 더이상의 공격을 멈춘 것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혹은 발해 주력군에게 패하여 그대로 후퇴했을 가능성도 점쳐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925년에 일어났다고 추측되는 이 반란은, 야율요골이 더이상의 진격을 멈추게 할 정도로 방비가 되어있던

발해 내부상황을 완전히 스스로 박살내 버리는 참혹한 결과를 낳고, 뒷날 926년의 야율아보기의 발해정벌 당시 발해가

능동적인 대응을 할 수 없게 만들어버려 결국 발해가 거란에게 허무하게 멸망해버리는 결과를 나비효과처럼 가져오게 됩니다.



우선 야율요골이 우선 진군을 멈추고 후퇴한 시점의 발해의 상황을 추측해 보자면,


어찌어찌 야율요골의 침입은 조용해졌으나, 기존 방어선을 아예 무시해 버리고 요동을 거쳐서 내륙의 압록부를 제대로

부숴버린 그 기민한 작전에 발해는 손쓰기도 힘들게 당해버렸으며, 개국 이래로 최대의 위기를 맞이했으며, 5경 중 하나인 서경이 함락당하고 압록부의 2개주가 넘어갔다는 것이 엄청난 패닉을 몰고왔을 것입니다.



이에 발해 사회와 발해인들은 엄청난 위협과 불안감을 느꼈을 것이며 발해 자체가 술렁거리고 불안감에 휩싸여 있었을 것입니다. 이는 강력한 독재친위통치를 하고 있던 대인선에게 크나큰 변수이자 실패였으며, 발해가 당한 대패와 현 왕실에 대한 불안감, 불만은 점점 국민들에게 퍼지고 있었을 테며, 나라가 크나큰 위기에 처해 있는 이때는 882년 이후 지금까지 조용히 숨죽이고 공기가 되어 있던 대야발계 구왕족들에게 절호의 찬스였을 것입니다. 882년 이후 대위해계에게 정변을 당해 힘에서 눌려 권력에서 완전히 배제되어 있던 이들에게, 나라의 위기는 곧 자신들을 견제하던 시선이 줄어든 것을 의미했으며,

정권에 대한 불만과 위험감이 경각에 달한 이 때를 이들은 정권을 뒤집을 시기라고 판단했을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역사에는 이러한 경우가 생각보다 많습니다. 나라가 위기에 처하거나 사회가 불안감에 떨고 있을 , 현 정권의 무능과 현 정부의 실책을 꼬집으며 나와서 국민들의 지지를 얻고 정부를 뒤엎고 자신이 통치자가 되거나 실권을 잡는 케이스 말입니다.



당장 많은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 파시즘의 수괴들인 히틀러와 무솔리니도 이러한 방식으로 정권을 획득하였으며, 일본의 도조 히데키 내각 역시 나라가 혼란에 처하고 불안감에 떨고 있을 일어나서 정권을 잡았으며, 스페인의 프랑코 역시 비슷한 케이스입니다. 동로마 제국의 황제 포카스 역시 이런식으로 전임자인 마우리키우스를 죽이고 자신이 황제가 되었으며, 그 후임자인 헤라클리우스 역시 포카스가 나라를 개판으로 만들고 말아먹자 그 불안감과 지지율 하락을 틈타 반란을 일으켜 자신이 황제가 되는 데에 성공합니다.



아마 925년에 반란을 일으켰으리라 추측하는 세력들도 이것을 노렸을 수도 있습니다. 이들의 반란이 확실하다면, 언제 어떻게 반란을 시도했을 지는 모르겠지만, 이들은 현재 나라의 상황이 급박하고 불안하게 돌아가는 것을 노려서 반란을 일으켰다는 것은 거의 사실로 보이며, 이들의 반란은 안그래도 거란에게 상당한 피해를 입어 위급상황이 된 발해에게 회복 불가능한 치명타를 날렸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그것이 바로 전편에 언급한, 요사 야율우지전에 나온 '이심'의 의미입니다.



저는 현재 발해의 멸망에는 여러가지 이유와 의견들이 존재하지만, 이 925년 반란설이 사실일 경우에는

이 사건만으로 발해가 멸망하지는 않았지만, 대신직접적으로 발해의 숨통을 끊는 데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사건은

이 반란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이 반란은 발해에게 치명적인 악영향을 미쳤고, 거란과 대등하게 20여년을 싸워온 강국 발해를 허망하게 멸망하게

한 제일 직접적인 원인입니다.




그 반란의 내용, 그로 인한 자세한 설명은 다음 편에 함께 하도록 해 보겠습니다.







지금까지 쓴 글


5경 15부 62주에 대한 오류 가능성 검토

-https://www.fmkorea.com/6797762364


발해 국호는 발해가 맞습니다

-https://www.fmkorea.com/6801049872


무왕과 대문예의 형제싸움으로 인한 나비효과

-https://www.fmkorea.com/6804185836


발해사 최대의 미스터리, 882년 정변설

-https://www.fmkorea.com/6807940225


'886년 사건'의 진실에 대하여

-https://www.fmkorea.com/6809313438


'쟁장사건'은 왜 일어났을까

-https://www.fmkorea.com/6810052709


'등재서열사건'은 왜 일어났을까

-https://www.fmkorea.com/6812375697


전설과 설화로 살펴본, 발해 문왕 시기의 어두운 면

-https://www.fmkorea.com/6814511926


발해 멸망의 시발점, 폐왕 대원의의 정변 (1)

-https://www.fmkorea.com/index.php?mid=mystery&category=15037454&document_srl=6817289827


대원의 정변 2편

-https://www.fmkorea.com/index.php?document_srl=6817562512&s_comment_srl=6817568874#comment_6817568874


문왕과 강왕의 관계에 대한 미스터리

-https://www.fmkorea.com/6817851720


폐왕이 문왕의 가족을 몰살시켰을 가능성에 대해.

-https://www.fmkorea.com/6817911871


대원의 정변 3편

-https://www.fmkorea.com/6819337509


대원의 정변 4편

-https://www.fmkorea.com/6820973328


대원의 정변 5편

-https://www.fmkorea.com/6821034193


발해의 군제

-https://www.fmkorea.com/6822795205


발해 선왕(상편)

-https://www.fmkorea.com/6824049857


발해 선왕(하편)

-https://www.fmkorea.com/6824625532


대이진의 찬탈 가능성에 대한 글

-https://www.fmkorea.com/6826837680


선왕과 대건황의 공통점

-https://www.fmkorea.com/6832473378


경박호와 모란강 전설로 본 대건황-대현석 시기의 불안

-https://www.fmkorea.com/6833752945



발해멸망전 고찰 1

-https://www.fmkorea.com/6837781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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