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예인 후삼국 통일 전쟁) 유금필의 등장과 조물성 전투.gif[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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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쿠로 댓글 0건 조회 157회 작성일 24-03-04 21:08본문
삼한을 일통한 천년왕국의 위신은 바스라져 가고
썩어가는 고목의 빈 속을 차지하기 위한 50년,
삼한을 새로이 차지하기 위한 군웅들의 쟁패.
후삼국 통일 전쟁
나주에서의 공방전 이후
916년, 견훤의 신라 대야성 공격은 또 막혔고
918년, 왕건이 쿠데타를 일으켜 궁예를 몰아냄.
그 반발로 운주와 웅주 등은 후백제에 귀부했으며
궁예의 후원자이던 명주의 김순식은 독립함.
또한 후백제는 고려에 선물들을 보내는 한편,
고려로부터 떨어져 나온 땅들을 파밍하고
청주의 친궁예파와 연계하며 고려를 괴롭힘
920년 정월, 고려와 신라가 동맹을 맺었고
동년 견훤은 20여년 간 공략하던 대야성을 드디어 빼앗음.
이로 인해 원신라 지역이 노출됐고 견훤은 대야성 공략 직후
소율희 영역이던 현 김해 일대까지 그대로 진격함
근데 신라가 고려에 요청한 원군이 출동하자 철군함.
이후 고려와 후백제는 몇년 간 큰 충돌 없이
호족들 귀부시키기 퀘스트에 집중해서
경북 일대에서 양국의 세력권이 가까워졌고
견훤이 경북을 침공할 때 고려가 겐세이 놓을 수 있는
죽령 인근의 조물성을 924년 7월 공격함.
견훤은 대야성주 견수미강과 문소성주 견양검에게 명함.
견수미강의 대야성 병력이 주력이었으며
견양검군이 여기에 합류하여 함께 조물성으로 진군함.
이에 고려 왕건은 곧바로 애선과 명지성주 왕충을
조물성으로 파병해 조물성을 지키고자 함.
둘 다 경기도 출신 장수였음. 각각 하남과 포천.
이 전투는 고려 측 최고 지휘관 애선이 전사할 정도로
후백제군이 몰아붙였지만 조물성의 강력한 저항에
결국 성은 함락하지 못하고 군대를 물림.
이 전투 직후, 신라는 경애왕이 즉위했고
견훤과의 사신 왕래 과정에서 견훤을 아버지라 부름.
후술할 왕건처럼 걍 상보라 불렀던 걸로 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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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듬해 10월, 견훤이 직접 중장기병으로 이뤄진
지 친위부대 갑사 3천을 필두로 군대를 끌고 조물성으로 감
이에 왕건도 직접 군대를 이끌고 조물성으로 향하며
군대를 3군 형태로 황보제공의 상군,
왕충의 중군, 박수경과 은녕의 하군으로 나눔.
왕건은 직접 조물성으로 향하며 양동작전으로
유금필을 정서대장군에 임명하여 충청 전선으로 보냄.
당시 유금필은 923년 고려 북방에서 유목민들 제압 후
그들로 편성한 사병부대 제번경기를 육성 중이었는데
이로써 상승장군 유금필이 본격적으로
후백제와의 쟁패에 그 위용을 드러내게 됨
왕건군과 견훤군이 조물성에서 맞붙었고
이능필, 배신예, 배최언 등 인근 호족들도
고려군을 도와 후백제군과 싸웠지만
견훤의 개도른 싸움 실력으로 인해
황보제공의 상군, 왕충의 중군은 모두 패하고
박수경과 은녕의 하군만 겨우 승리하면서 패색이 짙어짐
이렇게 조물성에서 양 군이 맞붙을 당시
유금필은 후백제의 충청 전선을 아작내고 있었음.
유금필은 먼저 일모산성을 공격하여
성주 길환을 죽이며 승리했지만 성을 함락하진 못했고
곧장 임존성으로 달려가 성주 형적을 죽이고 성도 빼앗음.
당시 후백제의 북방 방어선은 일모산성-매곡성-삼년산성으로
한 성이 공격받으면
나머지 두 성에서 원군을 보내주는 시스템임
그리고 후백제군이 경북 방면으로 출병할 때의
출발지가 삼년산성이었기에
왕건은 유금필로 하여금 충청도의 후백제군이
조물성으로 원군을 보내지 못하도록 발목을 묶은거임.
유금필은 전투 중 왕건이 견훤한테 탈곡되는 중이란 걸 듣고
미친 속도로 200km를 가로질러 조물성에 당도함.
이렇게 후백제의 충청 전선을 쓸어버린 유금필이 도착하자
후백제군은 승리했지만 크게 동요했고
고려군은 대패당했기에 묘하게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짐
따라서 고려 측의 제안으로 양측은 전투를 멈추고 화친을 맺음.
이때 왕건은 아예 견훤과 직접 만나 논의하려 했는데
유금필이 반대해서 무산됨.
화친의 결과는 다음과 같았음.
1. 고려·후백제 상호 불가침 조약
2. 왕건 사촌동생 왕신과 견훤 외조카 진호를 인질로 교환
3. 왕건은 견훤을 존경의 의미로 상보라 부를 것.
4. 삽혈 (동물 피를 함께 마시거나 입술에 바르는 의식)
고려와 후백제가 화친을 맺자
경애왕이 견훤은 이랬다저랬다 하는 입벌구라서
화친 맺으면 안된다고 왕건한테 얘기했는데
상술했듯이 상보라고 부르면서 서로 좋은 소리 했는데도
견훤이 계속 원신라 지역 침공하니까 이런 소리 하는듯
왕건도 경애왕 말에 동의함. 근데 별 수 있나.. 전투를 발렸는걸.
그래서 걍 말만 저래 하고 화친은 파기 안함.
이렇게 고려와 상호 불가침 조약을 맺은 견훤은
곧장 12월, 강주를 공격해 20여 성을 점령함.
이때 다음 편에 나올 강주의 대호족 왕봉규와도 전투를 벌임
그런데 양국의 화친은 오래가지 못했고
고려에 보낸 인질 진호가 사망하자 이를 명분으로
이듬해 4월 견훤이 불가침 조약 파기하며 웅진으로 진격함.
불과 수개월 전 견훤의 싸움 실력을 경험한 왕건은
웅진의 여러 성주들에게
전투를 자제하고 성문 닫고 존버하라 명령했는데
경애왕은 왕건에게 견훤을 욕하면서
니네도 적극적으로 군사활동 해라 촉구했고
견훤에게 잔뜩 쫄아있는 왕건은
내가 쫀게 아니라 타이밍 재는 중이라고 변명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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